청춘극장/3권/4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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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세가와·나미에[편집]

1[편집]

허 운옥의 이러한 최악의 불행은 동시에 오 유경에게 있어서도 최악의 불행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것은 이미 유경으로서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으되 이처럼도 최악의 길을 허 운옥이가 걸어 갈 줄은 전연 뜻밖이었다. 운 옥이가 불행하면 불행할수록 그것을 정비례 하여 유경이와 영민의 사이는 자꾸만 멀어져 갈 수 밖에 없었다.

유경이가 단 한 가지 바라고 있던 소원 ── 운옥이가 비교적 행복한 삶을 살아 주기를 바라던 유경의 절실한 기원을 인제는 완전히 포기할 수 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 그것은 동시에 백 영민과의 결혼 생활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저번 눈 내리던 날 저녁 영민과 한 우산 속의 사람이 되어 보던 행복의 신비성(神秘性)을 유경으로서는 최후의 선물로서 고이고이 가슴속 깊이 모시는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을 단정하고 나니 유경은 도리어 불안정하던 마음에 자리가 잡히는 것 같았다. 마음의 고달픔이 비교적 덜어지는 것 같았다. 어깨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여태껏 보다도 좀더 살뜰히 금순 언니의 불행을 생각하고 눈물겨워하는 시간이 많아져 갔다. 그리고 금순 언니를 생각하는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영민에 대한 생각이 줄어져 갔다.

「단념한다는 것은 비교적 좋은 일이다.」

유경의 심경이 거기까지 왔다. 확실히 불행한 사람들이건만 그러나 그다지 불행하다는 얼굴을 짓지 않고 살아나가는 사람들의 심경을 유경은 새삼스럽게 배운것 같아서

「나두 다른 사람들처럼 차차 어른이 돼 가는지두 몰라.」

하였다.

「어른이 돼 간다는 것은 평범해 진다는 것이다.」

하였다.

「평범해 진다는 것이 그리 슬픈 것두 아닌상 싶어.」

하였다. 그렇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처럼 다 유경이와 같이 평범해 지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七十[칠십]평생이라는 긴 세월을 누리지 못하고 모두가 다 자멸(自滅) 했을는지도 모른다.

「이 지구 위에 구데기처럼 득실거리는 二十[이십]억의 인류가 오늘 날까지 단절 됨이 없이 먹고 죽고 살고 먹고 하면서 살아나갈 수 있는 것은 모두가 다 그 평범한 행복 속에서 자기 자신의 순수한 욕망을 단념한 때문이다.」

그렇게 유경은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유경으로서는 마음만 돌이키면 남보다 비교적 쉽사리 단념 할 수 있는 성품이기도 하였다.

「금동아. 인제는 영영 아빠와 함께는 살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네가 진정 아빠 곁에서 살고 싶거든 너를 받아 준 금순 아주머니가 저 캄캄한 감방에서 나와 행복한 삶을 누리도록 이제부터 열심히 엄마와 함께 하늘에 빌자! 그러함으로서 천체(天體)와 대지(大地)의 기적이 있기를 바라자!」

2[편집]

운옥씨는 생에 대한 「 애착을 한번 더 가져주시오. 자기 손으로 행복을 만들어 보도록 노력하여 주시요. 저번에 가졌던 그 삶에의 욕망을 다시 한번 가져 주시요. 만일 운옥씨가 이대로의 영어의 몸으로서 최후의 불행을 맞이 한다면 그것은 곧 저 진실한 인간인 백형에게 영원한 불행을 주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운옥씨는 그 점을 잘 생각하여 주셔야겠읍니다. 나와 같은 현실적인 인간은 곧잘 자기의 손으로 자기의 불행을 회피하는 방도를 강구하지만 백형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 불행을 걸머지고 그 불행 속으로 들어 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운옥씨가 조금이라도 백형을 위할 수 있다면 다시 한 번 재생에의 의욕을 품어 주시요! 그것은 동시에 유경씨를 불행으로부터 건지는 결과를 맺는 것입니다. 일단 운옥씨의 마음에 소생하였던 삶에의 길을 찾음으로서 자주적(自主的)인 행복에의 창조를 위하여……」

어떤 날 감방을 방문한 준혁은 그런 말을 열심히 되풀이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사건은 마침내 검사의 기솟장(起訴狀)과 함께 판사의 손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소위 합의사건(合意事件)으로서 세 사람의 판사의 합의의 결과 제一[일]회 공판을 五[오]월 하순에 열게 되었다.

영민은 최후의 한 줄기 희망을 품고 공판일이 오기전에 「용궁」 사건에서의 유일한 증인인 하세가와·나미에를 어떻게 해서든지 찾아 볼 셈으로 서울을 떠나 북경으로 갔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나미에를 설복하여 그의 참다운 증언을 얻어야만 하였다. 북경 헌병대에서 이 사건을 운옥과 장 욱의 공범으로 취급하고 있지만 나미에만 아무런 사감없이 진정한 증언을 하여 준다면 운옥은 적어도 고지마·도라오 외 一[일]명의 헌병 살해죄만은 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최후의 희망도 끊어지고 말았다. 석 달 전에 남경, 상해, 해남도를 거쳐 싱가폴 등지로 여행을 떠난 나미에의 소식은 아직도 묘연해서 알 길이 없었다. 영민은 기력을 잃어버리고 서울로 돌아왔다.

이리하여 허 운옥의 제一[일]회 공판은 마침내 五[오]월 二十五[이십오]일에 열리었는데 바로 그 전 날이었다. 다른 조그만 상해사건의 변호를 위하여 재판소에 나갔던 손 변호사가 돌아오며 긴장한 어조로

「백군, 방 월령이 온다는 전보가 왔소.」

「네?」

영민은 벌떡 걸상에서 일어났다.

오늘 우연히 시노하라 「 판사를 만났는데 검사국에서 돌아온 방 월령의 전보를 그의 책상 위에서 보았소. 북경서 친 것인데 二十四[이십사]일 저녁 일곱 시 차로 도착한다고요.」

「二十四[이십사]일이면 오늘 저녁이 아닙니까?」

「그렇지요. 내일이 공판일인데 나미에가 검사국에 출두하기 전에 백군이 먼저 나미에를 붙잡아 보는 것이 어떻겠소?」

「그렇습니다!」

「정거장으로 나가서 군이 먼저 붙잡으시요.」

「잘 알았읍니다. 저로서는 최후의 희망입니다!」

그날 저녁 영민은 경성역 홈에서 특급 「히까리」가 들어 닿기를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다. 천사만려(千思萬慮), 영민의 흉중에는 실로 착잡한 사념이 오고가고 있었다.

「나미에는 야마모도 선생의 전사의 소식을 알고 있을 것인가?」

영민은 인사불성으로 정신을 잃고 있었지만 그후 가와노 분대장의 말을 들으면 야마모도 선생은 최후의 숨을 넘길 때 천황폐하 만세를 불렀다지 않는가! 귀신이 밥을 먹고 애를 낳고 하는 二十[이십]세기의 동화를 비웃던 그 입이 어쩌면 폐하의 만수(萬壽)를 빌면서 죽었을까?……실로 야마모도 선생의 일생이야 말로 바로 그 二十[이십]세기의 동화와도 같았다.

그런 것을 생각하니 영민은 차츰차츰 나미에가 무서워 졌다. 자기가 과연 나미에를 어느 정도로 설복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영민은 하나의 심대한 의구의 념을 품기 시작하였다. 야마모도 선생 까지가 그러했거늘 나미에 가 또한 그러하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따라서 운옥이가 나미에게 준 상처의 깊이가 점점 걱정이 되었다.

「제발 나미에의 상처가 가벼웠기를……」

영민은 골똘이 빌었다.

뚜우, 뚜우 ── 기적 소리와 함께 육중한 차체가 홈으로 들어 닿았다.

3[편집]

「아, 하세가와 상!」

조그만 보스톤·백 하나를 땡그라니 들고 있었다. 짙은 회색 스프링·코오트에 다갈색 하이힐이 二[이]등 찻간 승강대에서 활기있게 홈으로 내려서자 물결치는 군중을 헤치고 층층대로 올라간다. 층층대를 거의 다 올라 갔을 때

「하세가와 상!」

영민은 또 한번 나미에를 불렀다. 그 소리에 불현듯 나미에는 뒤를 돌아보다가

「아라·마아! 학상·쟈·나이노? (어머나 영민씨가 아냐?)──」

반가움이 나미에의 표정 위에 크게 나왔다.

「하세가와 상, 오래간만입니다!」

나미에의 그러한 반가와 함이 영민은 무척 고맙다.

「정말 오랜만이야!」

나미에는 영민의 아래 위를 한번 훑어 보고 나서

「안따·도오도오·얏잣다네! (종시 해 치웠구료!)──」

「네?」

말문을 모르는 영민에게

「안따·이마고로·카 ─ 키·이로쟈·나깟다·꼬도? (지금 쯤 영민씨는 군대복을 입었어야 할께 아냐?)──」

「아,──」

영민은 약간 당황하며

「그걸 어떻게 알아요?」

「밖으로 나가요.」

개찰구를 향하여 걸어가며

「미스터·꼬마, 그만 하면 상당 해!」

「꼬마?──」

「용궁의 매담 하세가와·나미에는 일본의 스파이다 ── 흥!」

「아 ──」

영민은 현기증을 느끼며

「그걸, 그걸 종시 보았읍니까?」

「나두 소학교는 나왔으니까, 그만한 산수 문제쯤은 풀줄 알어!」

「………」

「하여튼 상당해! 애국(愛國)하는 것이 나 혼잔 줄만 알았더니, 깔끔들 하던데?」

판국은 처음부터 틀려 가고 있었다. 영민은 앞이 캄캄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힐끗 쳐다본 나미에의 화려한 얼굴에는 여전히 빙글빙글 웃음이 가느다랗게 떠 있었다. 그 웃음이 무섭기도 하였지만 미덥기도 하였다. 빙글빙글 도 아니고 방글방글도 아니다. 빙글 빙글……

「하여튼 무사히 도망해 나왔으니 잘 됐어! 그런 의미에서 오늘 내가 축하주를 한잔 살까?」

「오해하면 아니 됩니다. 나는 제대가 된 몸입니다.」

「제대?……다리가 부러졌나, 눈이 꾸어졌나?」

「당시에는 눈과 다리를 다 못 썼답니다.」

「어쨋던 잘 됐대두!」

개찰구를 나서서 택시를 부르며

「그래 누굴 마중 나왔어? 아무리 내가 우쭐해 봐두 미스터·꼬마가 나를 마중 나올 리는 없을 께구……누구야?── 레디(여자)? …… 젠틀·멘(남자)? ……」

「레디!」

「어여쁜 여자?」

「나미에 상처럼 어여쁜 숙녀!」

「처럼이야?……나미에 상이 아니구?──」

「그럴는지도 모르지요.」

「기분이 약간 화려한 걸? 나 있는 데루 가서 한잔 먹지!」

「어디요?」

「따라 옴 되잖어요?」

택시에 먼저 냉큼 올라 타며

「안 탈래?……진정 안 탈래면 그만 두셔두 무방하지만……」

영민은 묵묵히 차에 올랐다.

「오·케! 나미에가 아직 시들어 빠지진 않았나베?」

쿡하고, 나미에는 팔꿈치로 영민의 옆구리를 한번 찔렀다.

「조선·호텔로!」

「네잇!」

가로등이 갖 켜진 거리 ── 매연 속의 남대문이 우쭐우쭐 춤을 추며 정면으로 맞받아 달려오는 쾌적(快適)의 스피 ─ 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