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3권/4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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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을 부여안고[편집]

1[편집]

찻간에서 전보로 방 하나를 예약해 놓은 나미에였다.

식사를 하면서 영민은

「야마모도 선생이 전사를 하셨답니다.」

「전사? ──」

들었던 칵테일 잔에 물결이 인다. 그러나 술은 쏟아지지는 않았다. 그런 정도의 나미에였다.

「회양 전투에서 나는 부상을 당하고 선생은 마침내……」

그러나 그때는 이미 빨간 화판(花辦) 사이로 칵테일이 흘러 들어 가고 있었다.

「내 이야기, 무엇이라고 해요?」

「행복을 진심으로 빌고 계셨답니다.」

「우소!(거짓 말) ──」

거짓 말이었다. 그러나 영민이가 배앝은 그 무심중 흘러 나온 한 마디가 스파이 나미에의 인간성의 조그만 한 모퉁이를 자극한 것만은 사실인듯 싶었다. 그것은 다음의 한 마디를 나미에는 입에 담았기 때문이다.

「닝겐떼, 요와이, 모노, 라시이네!(사람이란 약한 물건인 것 같애!) ── 」

나미에가 인간성을 생각한다. 그것은 영민에게 있어서 나쁘지 않은 분위기를 형성해 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장 욱의 소식은 알고 있어요?」

「장 욱?……」

그러다가

「아, 하하……그건 미스터·꼬마가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내 요?」

「부하가 수령의 소식을 몰라 볼 수가 있을까?」

「그건 전혀 오해요!」

「오해래두 괜찮어! 나는 미스터·꼬마를 감옥에 넣어 버리느냐 어쩌느냐에 대해서는 아직 결정을 짓지 않고 있는 것이니까 ──」

「나미에 상, 자리를 좀 조용한 데, 바꿉시다!」

영민은 먼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미에는 몇 잔 칵테일에 약간 붉어진 얼굴로 영민의 표정을 빤히 쳐다보며

「조용한데란 내 침실 밖에 없을 텐데 ──」

나미에는 빙그레 웃으며

「그래두 괜찮을까?」

「괜찮습니다! 나미에 상만 관대하다면……」

나미에도 몸을 일으키며

「돈 것이 아닐까…… 두번씩이나 나에게 잠자리를 비어 주던 미스터·백 이 오늘밤은 약간 돌았어!」

식당을 나서면서 나미에는 보이녀석 가운데 아는 얼굴을 하나 골라 잡고

「내 방에 칵테일과 위스키를 가져다 놔요.」

하였다.

침대와 비단 이불과 파란 「쉐에드」를 쓴 「스탠드」와 주홍색 의가(衣架)와 호화로운 「쎄ㅅ트」와 ── 그런것 들이 일제히 애교를 부리며 나미에 와 영민을 맞이하는 선정적(煽情的)인 침실이다.

이윽고 술이 왔다.

「들어요.」

영민의 잔엔 위스키가 쏟아 졌고 나미에의 잔엔 칵텔이 흘렀다.

「나미에 상!」

영민은 힘차게 나미에를 불렀다.

「이상한 일이야! 미스터·백이 어째서 오늘밤 이처럼 갑자기 이 시들어 빠진 나미에게 정열을 가질 수 있는지 모를 일이야? ──」

「나는 나미에 상에게 한 가지 특별한 청이 있읍니다!」

「아이, 화려해! 기분이 진정 화려해 져요! 이제 보니까, 미스터·백이 정말로 날 마중 나온것 같애.」

「진심으로 나는 나미에 상의 상처가 가벼웠던 것을 기뻐 합니다.」

「이게 무슨 소릴까?」

「운옥은……허 운옥은 절대 장 욱의 공범이 아닙니다!」

「운옥이?…… 어디서 들은상 싶은 이름이기도 하지만…… 하여튼 이야기가 백 八十(팔십)도야! 암만 해두 그대는 약간 도셨나 봐요!」

「먼저 나는 나의 모든 과거를 숨김 없이 나미에 상에게 이야기 하겠읍니다. 그리고 나서 나는 허 운옥의 범죄 사실에 관하여 나미에 상의 참된 심판을 기다리겠읍니다! 그 도리 밖에 나에게는 남지 않았읍니다! 나는 어렸을 때……」

거기서 영민은 온갖 진실과 열성을 가지고 자기의 과거를 쭉 이야기 하기 시작하였다.

「북경서 예까지 옛말을 들으러 내가 왔었던가?……」

2[편집]

나미에는 영민의 절반은 열에 뜬 이야기를 쭉 듣고 나서

「옛말치고는 상당히 흥미로워요.」

하였다. 그리고는 칵테일과 위스키를 번갈아 가면서 마셨다. 나미에는 점점 더 술에 취했고 영민은 점점 더 이야기에 취했다.

운옥은 절대로 나미에 「 상을 살해하고저 한 것이 아닙니다! 나미에 상으로 하여금 권총을 발사하지 못하도록, 다만 그것 만을 생각하면서 쏜 것입니다. 나미에 상! 한 사람의 불우한 여성을 구하여 주시오!」

영민은 머리를 깊이깊이 숙였다.

「나미에 상의 참된 증언 한 마디로서 그 여인은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감정을 억제하시고 목숨 하나, 사람 하나를 건져 주시요. 그것이 동시에 이 실로 보잘 것 없는 인간이오나, 이 백 영민의 한 목숨을 건지는 결과도 되는 것입니다. 그 여인을 이 불행으로부터, 이 역경으로부터 구출해 내지 못하는 날, 나는 다소나마 바랄 수 있던 온갖 행복에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그 여인과 똑 같은 불행을 짊어 질 수 밖에 없읍니다. 그 여인에 대한 사형 선고는 동시에 나 자신에 대한 사형 선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미에 상!」

영민은 덥썩 나미에의 손을 잡았다. 나미에는 그 순간 자기 손을 잡은 영민의 뜨거운 손을 살그머니 밀어 버리며

「하, 하, 하, 핫……」

하고, 코켓팃쉬한 웃음을 연발하였다.

「민나·쟉카리·시데·이루와! 민나·지 분노·꼬도·박카시·강가에 데· 이루노·네! (다들 깔족없어! 다들 제 생각만 해요!)……흥!」

나미에는 몸을 일으켜 침대로 가서 털석 걸터 앉으며

「나미에를 무슨 쇠부치로 만든 기계인 줄 알구…… 나미에를 무슨 거룩한 신(神)인 줄 알구……」

라이타를 끼내 담배를 붙여 물고

「후우 ──」

길게 한번 내뿜어 보며

「나는 아마도 미스터·백의 잠 자리와 연애를 하는 팔자를 가진것 같애!

두번째의 이 모욕을 나는 달갑게 받으며 돌아 가거니와 세번째의 기회를 참을성 있게 기다릴 수 있는 나미에는 이처럼도 자존심이 없었던가?…… 오호라, 나미에여. 오호라, 나미에여!」

그것은 지나간 날의 나미에의 애욕의 자태였다.

「그러나 세번째의 기회를 그다지도 안타갑게 기다리지도 않는 나미에였지만 오늘밤 이 자리에서 그대는 그러한 심경에서 내 손을 잡았더라! 오호라 나미에여! 오호라, 나미에여!」

급행열차의 화통인 양, 나미에의 입으로부터 연달아 뿜어지는 담배 연기 속에서 싱겁다 그대 「 , 가거라! 소녀 시절의 감상이 하룻밤 여사(旅舍)의 로맨스를 꿈 꾸어도 보았으나 싱겁다, 가거라! 나에게는 조국과 바꾸었을지도 모르는 사랑이 있다!」

그러면서 나미에는 한 손은 팔짱을 끼고 한 손으로는 담배를 뿜으며 마치 무대 위의 배우와도 같이 「오오, 내 사랑, 쨩위! 내 총알이 님의 가슴을 뚫음으로서 내 조국이 살고 님의 총알이 내 심장을 뚫음으로서 내 사랑이 사는 것이요! ── 아아, 내 사랑 쨩위! 님은 어디로 갔오?……」

몽롱한 눈동자가 진정한 꿈을 꾸며

「내 조국이 사느냐, 내 사랑이 사느냐? 싱겁다, 가거라! 그대의 성실이 하세가와·나미에에게 무슨 소용이 있다더냐 말이다?…… 내 사랑과도 바꾸지 못한 내 조국이어늘 그대의 성실을 위하여 내 조국을 버리라는 말이냐?…… 핫, 핫, 핫, 핫……싱거운 사람아!」

3[편집]

나미에는 그때 갑자가 엄숙한 어조로

「……도대체 그대는 누구를 위하는 거야? 피고가 그처럼 죽기를 원한다면 하는 수 없지 뭐야? 그 아주 똑똑한 아가씨 ── 그대의 따귀를 보기 좋게 갈기던 그 똑똑한 아가씨의 행복을 빌면서 죽겠다는데 왜 허겁을 해서 덤비는 거야? 뭐, 유경아?……아주 똑똑하구, 아주 어여쁘구…… 그래 고년 때문에 나를 빈 잠 재워 놓구선 이제 와서 또 뭐 운옥이?…… 이건 뭐 양손에 떡인가? 다리를 건너 가는 게 욕심이야? 잘못하면 둘다 놓치는 법이야. 연애는 진검승부(眞劍勝負)라는 걸 알아야해. 양반이 어째 그리 호리터분 할까? 그 흐리터분한 그대의 감정을 위하여 이 나미에의 조국애를 죽여 달라는 말이야?」

「나미에 상!」

영민은 침대에 걸터앉은 나미에 앞으로 걸어 가서 「공판일은 내일로 박두 하였읍니다. 나미에 상의 조국을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나미에 상이 보고 들은 대로 진실을 말해 달라는 것입니다. 진실을 위한 나미에 상의 한 마디의 참된 증언은 인간성의 아름다운 자태로서 인류 영원의 역사를 수놓을 것입니다. 국가는 쓰러지고 민족은 멸망하여도 인류는 영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그 인류애의 긍지를 위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위하여 불우한 한 사람의 여인을 구제하여 주시요!」

흥 이야기가 너무 「 , 크구료! 인류애니, 인간성이니…… 그대에게는 몇 푼어치의 인류애가 있고 인간성이 있다는 거야? 날더러 조국애를 버리고 인류애를 택하라고 부르짖고 있는 그대에게는 대체 무엇이 있다는 말이야? 오유경에게 대한 한낱 조그만 연정(戀情)도 버리지 못하는 위인이 날더러 조국을 버리고 인류를 사랑함으로써 허 운옥을 구해다고? 그대가 오 유경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허 운옥에 대한 인간성을 택했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지지만, 이건 뭐야? 자기는 양손에 떡을 쥐고도 날더러는 인간성을 골라 잡아라……」

이야기는 마침내 올 때까지 왔다. 현실은 영민이로 하여금 관념의 유희를 이 이상 더 허용하지는 않았다. 현실은 마침내 영민에게 행동이 있기를 강요해 온 것이다.

이 행동에의 요청은 이미 영민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람에 의해서 행하여 졌던 것이다. 백 초시 내외가 그러 하였고 오 창윤 내외가 그러 하였고 또한 유경이가 그러하였다. 그것이 이 자리에서 다시금 나미에의 입으로부터 최후적으로 요청되어 온 것이다.

여기서 마침내 영민의 고민은 최후의 일선까지 다 달았다.

「인생은 관념의 축적(蓄積)이 아니오. 인생은 관념의 행동화라는 걸 알아 두어요!」

뇌리를 쑤셔 내고 심장을 뚫으는 나미에의 날카로운 한 마디가 드디어 영민이로 하여금 행동이 있기를 최후적으로 선언하였다.

영민은 비틀비틀 쓰러지려는 몸을 간신히 들창 문지두리에 의지하면서 눈을 감았다. 숨결이 자꾸만 거세어 지고 이마에 구슬 땀이 맺히기 시작하였다.

그러기를 얼마 동안 계속하다가 영민은 마침내 조용히 눈을 떴을 때

「그대가 한 사람의 위선자가 되기는 싫어 한다면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을 골라 봐요!」

「나미에 상! 나는 절대로 위선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행동이 있어야겠읍니다. 나는, 유경이를……유경이를 버려도 좋읍니다!」

영민의 입술은 마침내 그 한 마디를 감연히 토해버렸다. 그 순간, 나미에 의 입으로부터 극히 히스테리칼한 웃음 소리가 돌연 터져 나왔다.

「핫, 핫, 핫, 핫……핫, 핫, 핫 핫……그대의 그 한 마디를 그 새침 뜨기에 들려 줬음 얼마나 유쾌할까! 핫, 핫, 핫, 핫……」

「들려 주어도 좋읍니다! 나는 유경이 앞에서 그 한 마디를 분명히 들려줄 수가 있읍니다!」

「핫, 핫, 핫, 핫……」

나미에의 웃음 소리가 그 어떤 유쾌한 승리감을 실은채 자꾸만 흘러나왔다.

「나미에 상! 운옥을 위하여…… 운옥을 위하여 진정한 증언을…… 사실대로의 증언을 하여 주시요!」

영민은 그러면서 나미에의 발 밑에 꿇어앉아 머리를 숙였다.

그 순간, 나미에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오던 그 날카로운 웃음 소리가 돌연 중간에서 끓어져 버렸다. 나미에의 시선이 후딱 자기 발 밑에 수그러져 있는 영민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오랫동안 나미에도 말이 없고 영민이도 말이 없다. 나미에의 표정 속에 차츰차츰 영민의 그것과 같은 고민의 모습이 일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나미에는

「미스터·백, 돌아 가세요. 공판정에서 다시 만나 봐요! 그러나 한 마디 말해 둘 것은 이 순간부터 나미에는 아니 여간첩 방 월령은 당신과 마찬가지의 고민의 하룻밤을 가지게 될 것이요!」

4[편집]

영민은 꿈길을 걷는 것 같았다. 입김은 확확 닳아 숨 가쁘게 쏟아져 나왔다. 술은 한 잔도 먹지 않았건만 먹은 사람처럼 다리가 후들거렸다. 영민은 막 호텔 정문을 나섰건만 자기가 지금 어디를 걷는지 정확히 기억에 남지를 못했다.

「유경이!」

영민은 유경을 찾았다. 운옥이가 영오의 몸이 되면서부터 영민은 유경을 잊어 버리고 지나는 시간이 차차 많아져 갔던 것이다.

「유경이」

영민은 가슴패기가 짜개져 온다. 마음이 쓰라리게 아파 온다. 영민의 사무소는 광교 다리목이건만 호텔을 나선 영민의 발길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유경이가 있는 서쪽 하늘 밑을 향하여 터벅터벅 힘 없이 걸어 가고 있었다.

머리는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져 범 둥지를 이루웠고 두 눈동자는 그 어떤 범죄인 인양 충혈이 되었고 축 늘어진 두 어깨 아래서 뼈대가 부러진 것처럼 두 팔이 덜렁덜렁 흔들리면서 매달려 있었다.

오다 가다 하나씩 선 가등 불이 영민의 몽롱한 시야에는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희미하고 멀다. 그렇다. 통행인의 그림자가 분명히 영민의 주위에서 움직이고 있었건만 영민의 허탈된 五(오)관은 정녕 일망무제의 사막 속에서 길 잃은 나그네와 같이 인기척을 감각하지 못하였다. 육체적으로나 영민은 완전히 사막 속에서 오로지 혼자 피투성이가 되어 뒹굴고 딩구는 빈사의 짐승과도 같았다.

「유경이!」

영민은 한참 가다가는 한번씩 유경이의 이름을 불러 본다. 숨길은 점점 더 가빠 오고 눈은 점점 더 몽롱해 갔다. 어두운 밤, 어두운 길이다. 후둘거리는 두 다리가 영민의 육체를 부청 앞 광장까지 가까스로 이끌고 갔다. 서편 하늘 밑 아현동 마루턱에 유경은 있다.

「유경이, 나는 오늘 밤 종시 유경을 배반하였소! 유경이, 용서 하시요!」

영민은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자꾸만 쳤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영민은 안타까워 죽을지도 몰랐다. 운옥을 생각할 때는 마음이 괴로웠지만 유경을 생각 할 때는 마음이 아팠다.

영민은 미친듯이 대한문 앞 컴컴한 광장을 뺑뺑 돌기 시작하였다. 뺑뺑 돌면서 영민은 가슴을 치고 머리를 쥐어 뜯었다.

「아아, 유경이! 나는 어떻거면 좋소?…… 운옥이! 나는 무엇을 하야만 좋소?……유경이여, 운옥이여! 나는 이 이상 더 무엇을 해야만 되는지 그것을 가르쳐 줘요! 아무리 노력하여도……아무리 애를 써도…… 나는 이 곤경 속에서 뚫고 나갈 기력이 이젠 없어 졌오! 유경을 마침내 나는 배반 하였소!

그러나 유경이, 나의 진심이 어찌 유경을 배반할 수 있으리요……」

영민은 미친 사람처럼 컴컴한 광장을 뺑뺑 돌아가다가 우뚝 발걸음을 멈추고 후딱 하늘을 우러러 두 손을 펼쳐 허공(虛空)을 안았다.

「죽고 싶다!」

영민은 광장 한 복판에 넙적 엎디어서 팔을 힘껏 벌리고 대지(大地)를 안았다.

「죽고 싶다!」

영민은 벌떡 몸을 일으키었다. 일으키자 마자 두 눈을 꽉 감고 달리기 시작하였다. 희미한 가등 밑에 덕수궁의 긴 돌담이 영민의 앞길에 길다라니 가로 놓여 있었다.

얼굴을 숙이고 눈을 딱 감고 미친듯이 달려 가던 영민의 다리가 돌담에 힘껏 부딪치는 순간, 영민의 몸뚱이는 그만 픽하고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