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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극장/3권/4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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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판정

[편집]

달은 밝아서 공판일은 마침내 왔다. 이날 날씨는 청명하였으나 바람이 좀 있었다.

유경은 일찌감치 조반을 먹는둥 마는둥 외출을 할려고 옷을 갈아 입고 있는데

「너 정말 거기 갈테냐?」

어젯밤부터 계속해 오던 어머니의 푸르럭거리는 안색이 유경의 시야에 뛰어 들었다. 그러나 유경은 그저 잠자코 옷을 갈아 입는다.

「네가 그만큼 망신을 하고도 또 그런데 가서 얼굴을 내놓을 생각이 난다는 말이냐? 이때까진 그지 너 하는대로 내버려 두었지만 집안 망신 그만큼 시키고 좀 집에 들업데 있거라. 시집두 안 간 것이 애를 낳아 가지구 돌아 다니면서 부모 얼굴에 그만큼 똥칠을 했으면 됐지, 또 무엇이 부족해서 그런 델 들썩거리면서 댕겨?…… 영민이구 운옥이구, 그런 생각은 인젠 싹 다 잊어 버리구 너두 너 살 길이나 좀 찾아 봐라!」

「내버려 두소, 내버려 둬요. 그 애가 당신 말 들을 애두 아니겠구…… 하여튼 일인즉 난처하게 됐다! 으음 ──」

오 창윤은 입맛을 다시면서 사랑으로 나가 버렸다. 그처럼 호탕하던 오 창윤도 이렇듯 일이 되고 보니 언제까지나 호기만 빼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유경은 한 마디 대꾸도 업이 입술만 꼭 깨물고 있었다. 이전처럼 톡 내 쏠 만한 기력도 유경에게는 인젠 없어진 것 같기도 하였다. 자기의 그 죽고 싶도록 괴로운 마음을 한구절 탄탄한 시적(詩的)인 경지에 까지 억지로 끌고 가서

「금동아, 인제는 영영 아빠와 함께는 살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단다. 네가 진정 아빠 곁에서 살고 싶거든 금순 아주머니가 행복한 삶을 누리도록 엄마와 함께 열심히 하늘에 빌자!」

던, 오 유경의 이 막다른 심경 속에는 또한 자칫 잘못하면 전부를 택하지 못한 유경으로서는 생존에의 의욕을 무자비하게 포기함으로서 무(無)의 세계 속으로 뛰여 들어 갈런지도 모를 위험성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었다.

「아아, 이 너무나 커다란 벨트·슈멜츠 속에서 오 유경의 생명체(生命體)는 마침내 질식하고 말 것인가?……」

집을 나서 아현동 마루턱을 내려 오면서 유경은 괴롭게 중얼거렸다.

멀리 눈 아래 즐비한, 크고 작고, 호화롭고, 초라한 서울 장안의 지붕의 연속을 내려다 보는 순간, 유경은 가지각색의 온갖 불여의(不如意)로 말미암은 벨트·슈멜츠(世界苦) 속에서 신음하는 二十(이십)억의 인류의 자태를 거기서 본것 같았다.

「인류여, 그대는 좀 더 욱심한 고달픔을 가져도 좋다! 그대가 그대의 고달픔을 좀 더 진지하게 고달퍼 함으로서 이상과 현실의 상극에서 오는 불여의를 제거하고 온갖 세계 고를 우주(宇宙)로부터 추방하자!」

한낱 갸륵한 체념(諦念)에서 얻은 오 유경의 시적 심경이 오늘 날 이러한 심각한 발전의 단계를 밟음으로서 비약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인간 오 유경의 생명체 속에 영롱(玲瓏), 구슬과 같은 예지(慧智)와 이상 추궁에의 무한대의 정열이 깃들어 있는 것이며 그것이 또한 고갈할 줄 모르는 샘물과도 같이 항상 싱싱하게 솟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인류여! 그대는 이 오 유경이와 함께 웃을 때나 울 때나 진지하게 웃고 진지하게 울어보자!」

……… 조그만 주먹으로 허공을 쳤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 진다. 따라서 발걸음도 가벼워 진다.

공판정은 방청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거운 공기가 장내를 덮어 누르고 있었다.

이윽고 시간이 되어 높은 단상 뒷문으로부터 검은 법의에다 법모를 쓴 세 사람의 판사와 검사, 서기, 통역관들이 주위에 일진(一陣)의 바람을 일으키면서 기세 좋게들 걸어 나와 주루루 의자에 걸터앉았다. 무겁게 침체하였던 장내가 갑자기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방청석에는 우선 머리가 허연 백 초시의 초조한 얼굴이 유경의 눈에 띠였다. 김 준혁의 얼굴도 있었다. 신 성호의 얼굴도 있었다. 유경은 모르지만 증인으로서 불려 온 윤영실이도 있었다. 유경은 사람을 헤치고 백 초시 옆으로 다가 가서 가만히 머리를 숙였다.

「음, 너두 왔구나!」

백 초시가 상경하여 오 창윤을 찾아 갔을 때 유경을 만나 보고는 오늘이 처음이다.

「그런데 영민이가 보이지 않는데……」

백 초시의 초조는 무엇 보다도 거기 있었다. 유경이가 보니 과연 변호사석은 그대로 덩그러니 비어 있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글쎄, 모를 일이다. 손 변호사의 말을 들으면 어제 저녁에 누구를 만나려 갔었다구 하던데 오늘 아침까지 종시 돌아 오지 않는다.」

유경은 갑자기 걱정이 되어 준혁의 옆으로 가서 물어 보았으나 준혁도 그것을 지금 걱정하고 있는 참이다.

「어찌 된 일일까요?」

「글세? ──」

그러는데 정정(廷丁)에게

「피고를 입정 시켜라!」

하는 재판장의 굵다란 음성이 떨어졌다. 정정이 밖으로 나가자 곧 뒤를 이어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간수 한 사람이 퍼런 죄수복에다 삿갓을 쓰고 수갑을 찬 피고 허 운옥이를 끌고 안으로 들어 왔다.

방청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조용들 하시요!」

재판장의 제지의 소리에 방청석은 다시금 조용해졌다.

「삿갓도 벗고, 수갑도 끌르고……」

간수는 운옥의 머리에서 삿갓을 벗기고 손을 끌러 주었다. 운옥은 푹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죄수복이 짧아서 발목이 드러나 보이는 것이 제일로 백초시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너무 하다!」

라는 생각이 백 초시에게 들었다. 백 초시가 그처럼도 존경하던 지사 허 상 진이의 유자를 이처럼도 학대 할 수야 있느냐, 하는 생각이 절실히 들었다.

아니 그보다도 아직 한 사람의 사나이를 모르는 고결한 처녀의 몸을 이처럼 도 천하게 취급해서야 되느냐, 하는 생각도 절실하였다.

백 초시는 저절로 눈물이 나와 자꾸 팔소매만 적시었다.

그러는 백 초시 옆에서 유경은 살그머니 자기의 손수건을 백 초시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때 재판장은 텅 비어 있는 변호사 석을 내려다보면서

「뎅고시와·츠이떼·나깟다까네? (변호사는 대지 않었나?) ──」

하며 서기를 돌아다 보았다.

「관선 변호사가 있읍니다.」

「어찌 된 일인고?」

「글쎄 올시다.」

그때 담당 검사가 그대로 「 진행 시키시요. 다음 제二(이)회 공판도 있을텐데……」

재판장은 검사의 말을 머리로 수긍하며

「그러면 이제부터 공판을 개시하겠읍니다.」

재판장은 한 번 사방을 휘이 들러보고 나서 하인 통역관을 통하여 먼저 피고의 성명, 연령, 본적, 주소, 직업 등을 묻고 나서

「공판 심리에 들어 가겠읍니다.」

하고, 선언을 하였다.

뒤이어 검사가 일어 나서

「공판 청구서(기솟장) 기재와 같이 피고의 범죄 사실에 관하여 심리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검사는 앉았다.

재판장은 곧 뒤를 이어

「담당 검사의 공판 청구서에 의하면 피고는 소화 八(팔)년 가을, 아버지가 죽을 때 세 알의 실탄이 들어 있는 권총 한 자루를 물려 받았지?」

「네.」

「그 권총을 무엇에 쓰라고 물려 주었나?」

「…………」

「네가 자라서 조선 독립 운동에 쓰라고 그 권총을 물려 주었지?」

「……네.」

「그해 가을 피고는 백 봉학의 양딸로 들어 갔나?」

「네.」

「피고의 양부 백 봉학은 민며느리로 들어 왔다고 하는데 무엇 때문에 거짓 진술을 하는가?」

「거짓 말이 아닙니다.」

「장래는 백 봉학이의 아들 백 영민과 결혼을 할 생각으로 들어 간 것이 아니냐?」

「아니 올시다.」

그때 재판장은 여전히 텅 비인 변호사 석을 힐끗 바라보고 나서

「증인 백 봉학은 출두하였나?」

하고 방청석 한편 옆인 증인석을 바라보았다.

「예.」

백 초시는 일어 섰다.

증인은 피고 「 허 운옥을 양딸로 다려 왔나. 민며느리로 다려 왔나?」

하고 묻는 통역의 말에

「민며느리로 다려 왔소이다.」

「영민의 색씨로 다려 온 것이냐?」

「그렇소이다. 그 애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나는 모르겠소이다.」

재판장은 운옥을 향하여

「피고의 시아버지가 그것을 분명히 증명하는데 너는 왜 그것을 부인하느냐?」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백 영민은 제 동생이 올시다.」

「음, 그러면 다음, 피고는 소화 十四(십사)년 三(삼)월 중순 평안 남도 대동군(大同郡) 남곤면(南串面) 탑골동 예배당 야학 졸업식 날 밤, 불온사상을 마음속에 품고 군중을 선동하기 위하여 조선 독립가를 불렀다지?」

「네.」

「돌아 오는 길에 태극령이라는 고개 위에서 박 준길이라는 청년을 만난 일이 있는가?」

「네.」

「박 준길은 피고의 장래를 위하여 그러한 불온 사상을 버리고 대일본 제국에 충성을 다하라고, 간곡한 설유를 하였다는데, 틀림이 없는가?」

「없읍니다.」

「그러한 독실한 애국 청년을 피고가 도리어 못 마땅하게 여기고 그를 장두 칼로 찔렀지?」

「네.」

「죽일려고 찔렀는가?」

「네.」

그때 증인석으로 부터 백 초시의 계사니 같은 목소리가 터저 나왔다.

「아니 올시다! 그런 것이 아니 올시다!…… 야아, 운옥아 네가 왜 그런 말을……」

「조용해!」

재판장의 목소리가 꿰엑 하고 꾸짖어 왔다.

「아니 올시다!」

백 초시는 힘없이 다시 털석 주저앉았다.

그때 문이 열리며 하세가와·나미에의 유달리 창백한 얼굴이 법정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