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3권/48장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증언[편집]

1[편집]

나미에의 화려하던 얼굴이 하룻밤 사이에 종이장처럼 창백해 졌다. 어젯밤 영민을 돌려 보내고 나서부터 이 순간까지 전전불매, 일순의 잠도 못하고 양심의 소리와 싸우고 있었다.

「내 사랑과도 바꾸지 못한 내 조국을 일개 백 영민의 성실을 위하여 배반하여도 좋을 것인가?」

관동군 헌병대에서 나미에를 쏜 허 운옥을 강 시후 노인과 함께 장 욱의 일당으로 취급하였을 때, 나미에는 구태여 그것을 부인할 필요도, 그리고 그것을 부인할 감정은 없었다. 아니, 단지 감정으로서만 본다면 나미에는 운옥을 죽이고 싶었다. 자기를 쏘는 계집, 자기 손에서 장 욱을 빼앗어 간 계집! 사랑을 위하여, 조국을 위하여 간첩 나미에는 허 운옥을 죽여 버려도 시원치 않았다.

그러한 나미에였던 것이 어젯밤, 영민이라는 한 사나이 가진, 성실에의 최대한 의 자태를 보는 순간, 나미에의 마음은 드디어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나미에가 지닌 인간성의 순수한 일부분이 나미에의 불순을 책하기 시작하였다. 진실과 복수와, 인간애와 조국애와 ── 나미에는 이 둘 가운데 하나를 택하여야 하였다.

그러나 나미에는 종시 그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못한채 하룻밤을 밝혔고 공판 시간을 맞이하였으나 나미에의 마음은 여전히 안정을 얻지 못하고 번민을 계속하면서 출두를 하였다. 그렇다. 나미에는 아직도 그 하나를 택하지 못한채 법정에 들어 선 것이다.

나미에는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변호사 석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셈인고?…… 거기에 분명히 앉아있어야 할 백 영민이가 보이지 않는다.

피고가 모든 것을 수긍하기 때문에 심리는 거침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피고가 장 욱을 만나 서로 알게 된 것은 어디서냐?」

「서울입니다.」

「서울 어디서 알게 됐나?」

「…………」

「왜 대답을 못하느냐?」

「대답을 안 하겠읍니다.」

「어째서 안 하느냐?」

「제가 제 죄를 전적으로 승인하는 이상 그런 사소한 일까지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음, 그럼 그 다음, 피고는 소화 十九(십구)년 二(이)월 하순, 북경으로 가서 장 욱을 만나 가지고 그들과 행동을 같이 하였는가?」

「네.」

여기서 재판장은 기소문에 기재되어 있는 장 욱 일당의 선전 모략, 파괴 등의 사실을 쭉 말한 후에

「피고가 용궁의 매담 방 월령을 찾아 간 것은 장 욱과 미리 작당하여 지배인 문 정우씨를 암살할 계획에서 그랬던가?」

「하여튼 그 기소문에 씌여 있는 대로이오니 그것을 보시고 좋도록 심리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안돼. 여기는 공판정이니, 내가 묻는 말에 대하여 그러면 그렇다고,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다고 공중 앞에서 응부의 대답을 하여 줘야만 하는 것이야!」

재판장이 아주 기분을 상해 가지고 꿰엑 소리를 쳤을 때, 문이 휙하고 열리면서 바람처럼 쑥 방안에 들어 선 것은 머리를 온통 흰 붕대로 동여맨 관선 변호사 백 영민의 핏기를 잃은 해말쑥한 얼굴이었다.

2[편집]

영민이가 부청 앞 어떤 조그만 외과병원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재판소에서는 공판이 시작되었을 때였다. 그는 어젯밤 통행중인 순사에게 발견되어 이 병원으로 운반되어 온 것이었다. 영민은 정신이 번쩍 들어 의사의 만류도 듣지 않고 손 변호사를 전화로 불렀던 것이다.

손 학규 변호사가 영민의 뒤를 따라 들어 왔다. 일동의 시선이 다름질을 하듯이 휙 영민의 얼굴 위로 일제히 쏠려져 갔다. 법의를 입고 법모를 쓰고 있었다. 그 조그만 법모 밑으로 하얗게 나타나 보이는 붕대에는 벌거우리한 선혈이 한두 곳 약간 내베어 있었다.

「아?」

유경은 놀랐다. 백 초시도 김 준혁도 신 성호도 그리고 나미에도 모두 영민의 그 예측하지 못하였던 부상에 놀랐다.

손 학규 변호사는 자꾸만 쓰러지는 영민의 몸을 부축하여 가지고 변호사석으로 데리고 갔다. 영민은 재판장 뜻하지 「 않은 부상으로 말미암아 늦었으니 용서하시요.」

그러면서 털석 의자에 걸터 앉았다.

「요로시이(좋소) ──」

재판장은 머리를 끄덕거리면서 한 사람 건너서 앉은 담당 검사와 무엇인가를 한참동안 수군거리고 있을 때, 운옥은 수그렸던 고개를 들고 그 낯 익은 목소리가 들려 오는 변호사 석을 후딱 바라보았다.

「아? ──」

가느다란 놀람의 외침이 운옥의 입으로부터 흘러 나왔다. 두 사람의 시선이 무섭게 부딪치는 순간, 운옥의 고개는 다시금 힘없이 뚝 꺾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 마치 소리가 나듯이 뚝 꺾어져 버린 운옥의 흰 목덜미를 영민은 무서운 얼굴을 하고 충혈된 눈으로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금 심리는 계속 되었다. 재판장은 그날 밤의 광경을 기솟장에 의하여 쭉 이야기하고 나서

「그러니까 문 정우를 쏜 것은 강 시후였고 강 시후를 쏜 것은 헌병 야구 찌였고 야마구찌를 쏜 것이 장 욱이었고 방 월령을 쏜 것이 피고였다는 말이지? 틀림 없는가?」

「없읍니다.」

「재판장, 잠깐만 ──」

하고, 그때 영민은 벌떡 몸을 일으키었다.

「좋소.」

재판장은 변호의 기회를 영민에게 주었다.

「지금 재판장께서 읽으신 검사의 기소문에 의하면 피고 허 운옥이가 장욱 일당과 작당을 하여 방월령 및 지배인 문 정우씨를 살해하고서 용궁을 방문하였다고 하였으나 그것은 전혀 사실과 부합되지 않읍니다. 실은 그때 피고 허 운옥이가 용궁을 방문한 데는 딴 이유가 있었읍니다.」

「어떠한 이유인고?」

「피고는 어렸을 적부터 한 사람의 청년를 장래의 배필로서 생각하고 있었읍니다. 학도병을 지원하여 남지 전선으로 출정한 그 청년의 안부가 염려되어 그의 행방을 알아 볼 셈으로 이전에 한 두번 안면이 있던 장 욱을 만나러 용궁을 방문하였던 것이 급기야 그러한 참극에 봉착하게 된 유일한 동기입니다.」

「그러나 피고는 기소문을 전적으로 승인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 어떤 미묘하고 착잡한 심리 상태에 놓여 있는 피고가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자기의 삶을 전적으로 포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재판장께서 법의 참된 정신을 준수하시어 피고의 이 가식된 진술을 번복시킴이 없이 피고 허 운옥의 진술을 그대로 시인 함으로서 심리를 계속 하신다면 실로 죄 이상의 죄를 피고에게 뒤집어 씌움으로서 대일본 제국의 신성한 법의 정신을 망각하게 되는 중대 결과를 맺을 것이오니, 현명한 재판장께서는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시여 진실에 입각하여 사건을 처리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그러한 시실을 변호인은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가?」

「본 변호인의 회양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고 탁성 야전병원에 입원해 있을 무렵, 피고 허 운옥은 본 변호인을 야전 병원으로 찾아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였읍니다.」

「그러면 피고가 장래의 배필로 생각하고 있던 그 청년이 바로 이 자리에 있는 변호인인가?」

「그렇습니다. 재판장!」

이때 방청석에서 웅성웅성 소리가 났다.

「에헴!」

재판장은 그 뒤숭숭한 잡음을 기침 소리로서 제지하며

「피고와 변호인이 그러한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이상, 본관은 변호인의 증언을 신뢰하기가 힘 들어. 좀더 확적한 신빙할 만한 증거는 없는가?」

「있읍니다, 재판장!」

「말해 보라.」

「캬바레 ─ 용궁의 매담이요, 피해자의 한 사람인 유일한 목격자 방 월령 즉 하세가와·나미에 상이 이 자리에 출두하였읍니다!」

3[편집]

그 소리에 나미에는 정신이 펄떡 들었다. 영민이가 어째서 저처럼 부상의 몸이 되었는지 그것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어쨋던 성실에의 순교자(殉敎者)와도 같은 백 영민의 자태를 눈 앞에 보는 순간 하세가와·나미에의 마음은 무섭게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자기는 비록 성실에의 순교자는 되지 못할 망정 성실에의 반려자(伴侶者)는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온갖 사사로운 감정을 포기하고 성실에의 반려자가 되자!

「증인 하라세가와·나미에!」

재판장은 마침내 나미에를 불렀다.

「하이(네) ──」

나미에는 증인석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걸음을 멈추면서 불현듯 나미에는 변호인 석을 바라보았다. 붕대로 머리를 감싼 백 영민의 애원하는 얼굴이 거기 있었다.

「증인은 그날 밤, 피고 허 운옥이가 불령선인 장 욱과의 사전 연락이 있어서 용궁을 찾아 왔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최후의 순간이 왔다. 진실을 위하여 허위를 버리자! 소설이나 영화에도 그러한 아름다운 장면이 있지 않느냐!

나미에는 후딱 머리를 돌려 단상에 주루루 앉은 법관들의 얼굴을 휘이 둘러 보았다.

「증인은 피고와 장 욱이의 공범 관계를 부인하는가?」

순간 나미에는 무겁고 엄숙한 공기 속에서 주루루 둘러 앉은 법관들의 배경을 이루는 마즌편 흰 담벼락 위에서 소설이나 영화에서가 아닌, 현실 속에서 두 다리를 버티고 서 있는 조국 대일본 제국의 얼굴을 분명히 보았다.

「부인하지 않읍니다!」

「피고와 장 욱은 증인과 문 정우씨를 살해하고저 사전 연락을 취해 가지고 온 것인가?」

「그렇습니다! 그 증거로서 피고는 트렁크에 권총을 넣어 가지고 왔읍니다!」

내 사랑과도 바꾸지 못한 내 조국은 마침내 살았다! 온갖 진실한 것과 온갖 아름다운 것을 무자비하게 버릴 수 있음으로서 비로소 시련(試鍊)의 문을 돌파한 여간첩 하세가와·나미에가 아니었던가! 이것이 현실이다! 좋건 싫건 낳아 주고 나를 길러 주고 나의 이익을 도모하여 준 나의 조국 대일본 제국이 아닌가!

그 순간, 벌떡 몸을 일으켰던 백 영민은 다시금 쓰러지듯이 펄썩 의자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운옥은 후딱 고개를 돌려 증인석에 선 나미에의 얼굴을 무서운 눈초리로 쏘아 보았다. 두 여인의 매서운 눈동자가 불똥을 튀기면서 서로 부딪치며 얽히는 순간, 운옥은 실로 창백하게 녹쓸어 버렸던 자기의 혈관 속에서 옭 ─ 하고 조수처럼 밀려드는 민족애의 용솟음 치는 소리를 들었고 조국애의 우렁찬 함성(喊聲)을 분명히 들었다.

「재판장!」

하고 운옥은 홱 얼굴을 돌리려 힘찬 목소리로 불렀다.

일시 동요를 일으키려던 장내의 공기는 재판장을 부르는 피고의 그 힘찬 한 마디로 말미암아 죽은듯이 고요해 지고 말았다.

「피고는 무슨, 말할 것이 있는가?」

「있읍니다!」

「말할 것이 있거든 말을 해라.」

「증인 하세가와·나미에는 허위의 증언을 하고 있읍니다!」

「응?……」

재판장 이하 거기에 참석하였던 모든 법관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뜻인지, 좀더 분명히 말을 못 하겠나?」

그 말에 허 운옥은 얼굴을 정면으로 들고 한번 깊이 심호흡을 하였다.

「분명히 말하겠읍니다! 증인 하세가와·나미에는 자기의 입장이 피고의 입장보다 개인적으로나 또한 민족적으로나 우세하다는 것을 기화로 삼고 진실을 허위로서 바꾸어 놓았을 뿐 아니라, 일개 국민으로서 공적(公的)인 임무를 저바리고 한낱 사사로운 감정과 편벽된 조국애로서 약소 민족의 한 사람인 피고의 입장을 불리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거룩하신 분의 분부로서 제정된 대일본 제국의 입법(立法)의 정신을 유린한 법죄인으로서 피고는 위증자(僞證者) 하세가와·나미에를 법관 여러분께 기소합니다!」

그 순간 백 영민의 얼굴이 번쩍 들였다. 오오, 환희에 빛나는 그의 얼굴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