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3권/4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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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호인·백 영민[편집]

1[편집]

과연 허 운옥은 지사 허 상진의 유자였다. 세상이 진정으로 귀찮아 삶에의 미련을 철저하게 끊어 버렸던 허 운옥이가 다시금 삶에의 길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재판장은 저으기 노기를 띤 어조로 꿰엑하고, 소리를 치고 나서

「너는 이 장소를 어디로 아느냐? 신성한 법정이다! 이처럼 신성한 법정에선 죄인의 몸으로서 진실을 증언하는 증인을 기소한다는 법이 있느냐?」

「저는 아직 죄인이 아니 올시다. 제 신분은 아직 유죄와 무죄의 분기점에서 있는 피고일 따름입니다.」

「무엇이?」

재판장은 소리를 치고 나서 옆에 앉은 담당 검사에게 얼굴을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고이츠모·레이노·고도꾸·호오데이·도오소오워·얏데오루!(이년두 예에 의하여 법정투쟁(法廷鬪爭)을 하고 있는 거요.) ──」

목소리는 낮았으나 운옥은 그때 재판장이 입에 담은 법정 투쟁이라는 한마디가 걸핏 새로이 귀에 들어왔다.

운옥도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법정 투쟁이라는 말을 한 두번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이 무엇인지 잘은 몰랐지만 아버지는 그때 박 렬 사건(朴烈事件)에 관한 법정 투쟁의 이야기를 친구들과 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

「음, 그렇다면 너는 왜 지금까지 검사의 기소문을 전적으로 승인하였나?」

「그것은 제 일개인의 그 어떤 사정으로 말미암아 죽기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정이라는 것을 말해 보라.」

「그것은 본 심리 진행에 있어서 별반 관계가 없으니까 말하지 않겠읍니다.」

「그러면 너는 검사국에서의 진술을 부인하겠다는것은가?」

「부인합니다. 그리고 변호인의 증언 대로 장 욱 일당과의 합작 관계를 전적으로 본 심리에서는 부인합니다.」

「음, 좋아. 그럼 다음 ──」

재판장은 여기서 피고가 지금까지의 검사국에서의 진술을 번복하여 왔기 때문에 더 이상 상세한 것은 다음 공판으로 밀기로 하고 대충대충 줄거리만 따갔다.

「너는 박 준길을 살해할 목적으로 그의 뒤를 따라 갔느냐?」

「아니 올시다. 박 준길을 만난 것은 전혀 우연입니다.」

「좀더 자세히 그때의 모양을 말해 보아라.」

거기서 운옥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하였다. 그러나 운옥은 어디까지나 영민을 동생이라고 하였고 자기가 권총을 소지하고 있는 것을 영민은 몰랐다고 하였다.

「그러면 너는 이번에도 전번의 진술을 번복하고 박 준길을 할 수 없이 쏘았다고 하느냐?」

「그렇읍니다.」

「재판장, 피고의 이익을 위하여 한 마디 변호하겠읍니다.」

하고 그때 영민은 일어 섰다.

「음.」

「피고가 지금까지 허위의 진술을 농하여 법관 여러분께 번거러움을 끼치게 된 것을 본 변호인은 송구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보아하니 피고는 지금 진실로 돌아 가서 일단 포기하였던 생애의 애착을 느끼고 사실을 사실대로 진술함으로서 죄에 응당한 벌을 받고저 하오니, 재판장께서는 피고의 태도를 가상타 하여 너그러이 생각하시고 진실에서부터 울어 나오는 피고의 진술을 솔직하게 들어 주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2[편집]

「── 피고 허 운옥, 아직 이성의 세계를 모르는 신성한 처녀의 몸으로서 야수와도 같이 달려드는 박 준길의 무서운 야욕의 독아(毒牙)로부터 생명 이상의 생명인 자기의 정조를 수호(守護)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도는 아버지의 유물인 한 자루의 권총 이외에 또 무엇이 있었겠읍니까? 하물며 인기척 없는 심산유곡이라면 또한 모르거니와 자기의 아내를 눈 앞에 두고 이 만행을 감행하려는 인면수심(人面獸心)의 파렴치한! 그 순간 피고는 죽음을 결심함으로 적게는 처녀의 생명이요, 긍지인 정조를 수호하기 위하여, 크게는 사회의 질서와 도덕과 백성의 순풍양속(醇風良俗)의 보존을 위하여 피고는 마침내 감연히 무기를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로 피고는 선친의 묘전에 꿇어 앉아 자결을 할려고 하였읍니다만 그때는 이미 탄환은 없었읍니다. 하는 수 없이 피고는 빈 권총을 묘전에 묻어 놓고 그 곳을 떠났읍니다. 지금 재판장 앞에 놓여 있는 그 흙묻은 권총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읍니다. 피고의 이와 같은 불가피에서 취해진 행동이야 말로 형법 제 三十六[삼십육] 조에 해당하는 정당방위(正當防衛)로서 이것은 六[육]년 전, 태극령 고개에서 박 준길의 눈을 찌를 때에도 마찬가지 였읍니다.

「잠깐 ──」

하고, 재판장은 피고를 향하여

「너는 六[육]년 전, 태극령에서 박 준길의 눈을 찌른 것도 할 수 없이 취한 행동이냐?」

「그렇습니다.」

재판장은 다시 영민을 향하여

「피고의 법죄가 순전히 정당방위에서 행하여 졌다는데 대한 증거를 변호인은 제시할수가 있는가?」

「있읍니다!」

「무엇인가?」

「피해자 박 준길의 아내인 윤 영실이가 그 광경을 목격하였읍니다!」

「증인 윤 영실은 출두하였나?」

「지금 증인석에 앉아 있는 저 여인이 바로 피해자의 아내 윤 영실이 올시다.」

「윤영실, 일어 서.」

옆에 앉은 통역관이 불렀다. 윤 영실은 조용히 일어 섰다.

「증인은 피해자 박 준길의 아내인가?」

「네.」

재판장은 증인 신문 조서를 들여다 보며

「증인은 검사국에서 피고 허 운옥이가 좁은 논두렁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박 준길이가 나타나자 마자 권총으로 쏘았다고 진술하였는데, 틀림 없는가?」

「…………」

「틀림 없는가?」

윤 영실은 오랫 동안 대답이 없다가 고개를 번쩍 들면서

「그렇지 않읍니다!」

하고, 재판장의 물음에 대하여 부인하였다.

「그렇지 않다? 좀더 자세히 그때의 모양을 말해 보아라.」

「부끄러워서 도저히 제 입으로는 말할 수가 없읍니다. 저는 진실한 크리스챤입니다. 제입은 도저히 그 더러운 말을 입에 담을 용기가 없읍니다! 모두가 다 변호인의 말씀대로이니 이상 더 묻지 마시기 바랍니다!」

윤 영실은 두 손으로 자기의 얼굴을 탁 가리워 버렸다.

영민은 실로 예기치 못하였던 감격으로 말미암아 오주주하니 몸이 떨리었다. 다소의 희망을 품었던 하세가와·나미에의 증언이 백 영민의 기력을 송두리채 빼앗어 버린 것과는 정반대의 현상이었다.

어느 틈에 들어 와 있었는지, 방청석 맨 뒷줄 한편 구석에서 얼굴을 비쭉 내밀고 있던 박 삼룡의 곰보딱지 낯짝이 그만 울음상을 짓다가 다음 순간, 무서운 노기를 품은채 휙 없어지고 말았다.

그때 재판장은 다시 영민을 향하여

「변호인은 피고가 그 어떤 절망 끝에 유서를 남겨 놓고 집을 나갔다고 하였는데, 그 절망의 이유를 변호인은 애정 관계라고 말한 것이 사실인가?」

「사실입니다. 피고 허 운옥이가 백 영민이라는 청년을 끝끝내 동생이라고 주장하는 데는 오늘의 이사건과는 하등 관련성이 없는 별개의 이유에서 입니다. 피고는 백 영민이라는 청년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귀여운 동생으로서 대하지 않으면 아니 될 그 어떤 복잡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는 자기의 신분을 양녀로서 주장하였읍니다. 그러나……」

「좀 더 상세하게 말해 보라.」

「아까도 잠깐 언급한 거와 같이 백 영민은 피고 허 운옥의 순정을 배반하고 그 어떤 딴 여인을 사모하였읍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바로 그때 탑골동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피고로 하여금 절망의 념을 품게한 중요한 원인이 올시다.」

「그 여인이 누구인가?」

「그것은 말할 수가 없읍니다. 그 여인의 명예와 그 여인의 집안의 체면을 훼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때였다. 방청석에서 낯 익은 목소리 하나가 외치며 튀어 나왔다.

「그것은 바로 여기 있는 오 유경이라는 사람이 올시다!」

방청인의 얼굴이 모두들 휘익 하고 뒤를 돌아다 보았다. 백 초시도 본다.

윤 영실도 본다. 김 준혁과 신 성호도 본다. 손 변호사도 본다. 하세가와나미에도 바라 본다. 그러나 제일로 정성을 들여 바라본 것은 변호사 석의 백 영민과 피고 허 운옥의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