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3권/5장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인생의 부도 수표[편집]

1[편집]

이튿날부터 다른 초년병들에 끼어 훈련이 시작되었다. 아침 여섯 시에 기침, 점호, 훈련, 아침 식사, 훈련, 점심 식사, 훈련, 저녁 식사, 점호, 저녁 아홉 시에 소등(消燈), 취침 ... 이것이 그들 초년병의 일과였다.

회양성이 견고하면 견고할 수록 탈주에 대한 욕망은 불길처럼 일어 났다.

영민과 칠성은 모든 기회를 포착하여 병영 내외와 회양성 벽 내외의 지리적 조건과 감시의 상태를 조사하여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얻은 지식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병사를 둘러 싸고 있는 흙담은 두 길 남짓( )까 어떻게서든지 넘으려면 넘을 수가 있었다. 영문 바로 안에는 위병소가 있어서 드나드는 병정을 감시하고 있었으며 영문에는 항시 보초병이 총검을 끼고 교대로 서 있었다.

병영이 성내 동북쪽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에 영문을 나서서 十[십]분 내지 十五[십오] 분만 걸리면 동서남북 네개 있는 성문 중의 북문에 다달을 것이다.

정문에는 각각 일본병 보초 두 명, 그리고 경관과 보안대원(保安隊員) 수명이 보조(補助) 보초로 서서 정문을 드나드는 통행인을 조사 감독하였다.

이 보안대라는 것은 일본군의 지령으로 그 지방 중국인으로서 조직된 치안 유지대이다. 경관도 물론 중국인이다. 보안대와 경관이 협력하여 지방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다.

성문은 아침 아홉 시에 열리고 저녁 다섯 시에 닫쳤다. 밤이 되면 성문은 닫치고 보초는 성문 위에 솟은 망루로 올라가서 밤을 새워 지켰다.

성벽의 높이는 여섯 길이 넘었다. 성벽 밖은 깍은듯이 가파로우나 성벽 안쪽에는 흙을 점차로 쌓아 올리고 나무 같은 것을 심어 놓았기 때문에 올라가기는 문제가 없었다. 성벽의 두께는 제일 두터운 밑동이 三十五[삼십오] 메타 가량 되고 제일 좁은 성벽 위가 칠팔 메타는 넉넉하였다. 일본병이 곧잘 말을 타고 성벽 위를 지나 다녔다.

성벽 위에는 一[일]메타의 간격을 두고 二[이]메타 가량의 높이를 가진 사각형 돌담이 우뚝우뚝 서 있다. 이것이 멀리서 보면 톱니같이 보이는 것이다.

성벽 밖은 갈대같은 풀이 무성한 「크리 ─ 크」가 삥 둘러 싸고 그것을 건너 서면 보리밭이다.

회양서 신황하까지가 四十[사십]리, 신황하를 건너서 중국군의 첨병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주가구까지가 三十[삼십]리 ... 그러니까 폭 七十[칠십]리 가량의 지역이 무정부 상태로 가로 놓여 있는 계산이 된다.

이상이 영민과 칠성이가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얻은 종합적 지식이었다.

영민과 칠성이가 서로 만나려면 복도나 변소나 주방이나 빨래터같은 데서 우연히 만나는 형식을 취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조선 학도병들이 너무 자주 만나는 것은 결코 좋은 인상을 그들에게 주지는 않았다. 더구나 탈출이라는 중대 계획을 흉중에 품고 있는 두 사람의 행동이 수상하여서는 절대로 아니 되었나.

그러나 영민과 가나즈는 같은 반이기 때문에 이야기 할 시간이 늘 있었다.

어떤날 저녁이었다. 저녁을 먹고 소등이 있기까지의 얼마 동안을 영정 한 모퉁이에서 산책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이야기 하고 있었다. 청산학원 영문과 재학중인 가나즈는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칼모친을 먹었다고요?」

영민은 놀라 물었다.

「네,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것 보다는 그 편이 훨신 나니까요. 그러나 가족들에게 발견되어 곧 응급치료를 받았기 때문에 포기했던 생명을 다시금 줏은 셈이지요.」

「그렇게까지 생각을 했다면 왜 도망할 생각을 안 했읍니까?」

「도망해 볼 생각도 골똘히 해 보았지요. 그러나 체력과 의지력에 다 자신이 없어서 그 괴로운 피신 생활을 능히 해 나가질 못할 것 같아요. 그러다가 붙들리는 날에는 제손으로 죽을 수 없는 무서운 처지에 부닥칠 것 같아서요. 내 생명은 언제든지 내것이니까 나 이외의 그 어떤 압박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포기를 강요당할 수는 없으니까요. 내 감정에 조금이라도 친일적인 요소가 있었다면 모르지만요. 그래서 그만, 에라 모르겠다, 사는 날까지 살아 보자는 생각으로 지원을 했지요.」

그러나 우리는 지금 「 제일선에 와 있읍니다. 언제 어느 때 출격 명령이 내릴지 알 수 없지요. 그렇게 되면 형도 어쩔 수 없이 총을 들고 나갈 수밖에 없게 되지 않아요?」

「아마 그렇게 되겠지요. 그러나 나는 쏘구 싶지 않은 총을 쏘지도 않을 것이요, 맞고 싶지 않은 총알에 맞지도 않을 것입니다.」

「………」

그 한 마디가 영민의 신경을 날카롭게 긁어 주었다.

2[편집]

영민은 동지를 또 한 사람 얻은 것 같아서 마음이 무척 든든하였다. 가 나즈는 확실히 탈주를 마음 깊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탈주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탈주라고요?」

가나즈는 의외라는 듯이 창백한 얼굴을 들어 반문하였다.

「네, 탈주를 하지 않는 이상 어떻게 총알을 피할 수가 있을까요?」

「어떻게 탈주를 합니까? 겹겹이 싸인 이 높은 담장과 성벽을 어떻게 넘어 나간다는 말이요? 도망을 하다가 저자들에게 발견되는 순간, 나의 뒷통수에는 구멍이 뚫어지겠지요. 나는 그것이 싫습니다. 나의 생명은 언제든지 나 자신이 처리해야만 만족해요.」

「그러면 역시 형은 자결을……?」

「그 도리 밖에 더 무어가 있읍니까?」

두 사람은 아무 말없이 낙엽진 수양버들 나무 밑을 걸었다. 회색빛 황혼이 드넓은 영정에 숨어들기 시작하였다. 四[사]월 초순, 말은 봄이건만 저녁 바람이 무척 차다. 어디서 날아 왔는지 가마귀 세 마리가 수양버들 위에서 까옥까옥 불길한 울음 소리를 냈다.

「한 가지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있어요.」

「뭔데요?」

「출격 명령이 내리기 전에 이 무의미한 전쟁이 끝나 주었으면 하는, 한 개의 기적을 바라고 있을 뿐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덧없는, 너무나 희미한 한줄기 희망이 아닌가.

「김형!」

하고 영민은 그 어떤 형용할 수 없는 슬픔에 사로잡히며 가나즈의 손을 꽉 부여잡았다.

「김형은 너무나 약합니다. 좀더 굳세어 집시다.」

「어떡허면 굳세어 집니까? 그것을 나에게 좀 설명하여 주시요.」

「가만히 앉아서 기적을 바라는 시간에 우리는 노력을 합시다. 그리고 그 노력의 댓가를 하늘에 청구합시다. 하늘이 무심하여 우리의 뒷통수에 총구멍이 뚫려도 하는 수 없는 일이지요. 가만 앉어서 기적을 바라는 것보다 아무런 노력도 없이 자기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것보다는 가치 있는 행동이니까요. 김형의 생각은 너무나 서정적(敍情的)이며 너무나 문학적입니다. 행동의 가치를 좀더 높게 평가합시다. 十九[십구]세기적인 서정의 세계에서 배회할 것이 아니라, 나는 문학을 모르는 사람입니다만 현대의 이 착찹무쌍한 폭풍 속에서 그의 「레에존·데에틀」을 주장할 수 있는 문학이란 반드시 행동의 문학이야만 될 줄로 믿습니다. 문학인(文學人)은 약하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지나간 날의 이야기지요. 현대의 문학인은 그 질식할 것 같은 사념(思念)의 세계에서 탈출하여 자기의 사념을 곧 행동화할 수 있는 문학인의 문학이라야만 진실로 사람의 심금을 울릴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자기는 행동을 망각한 상아탑(象牙塔) 깊숙히 들여 박혀서 단지 한 개의 재주(藝) 로서만의 문학을 일삼아도 좋다고 허용되던 시대는 이미 지나 갔읍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대에 있어서의 가치 있는 문학이란 그 문학을 작자 자신이 행동화 할 수 있는 문학이라야만 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한 문학이라면 그것은 마치 부도수표(不渡手票)만 발행하는 신용 없는 상인에서 더 지나지 못하지요. 그러기 때문에 문학자는 곧 행동인이라야 할 것이며 진리를 위하여, 정의를 위하여 문학하던 그 펜을 내던지고 그 환경이 그것을 요청한다면 진리를 위하여, 그 정의를 위하여 칼을 들고 있는 사람의 문학이라야만 비로소 독자의 신임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입으로만 아무리 떠들었댔자 현대의 독자는 이미 지나간 날의 그들처럼 어수룩하지 않기 때문에 좀처럼 속아 넘어 가지를 않습니다. 김형,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아 듣겠읍니까?」

「알아 듣겠읍니다.」

가나즈는 솔직히 대답하였다.

「김형, 용기를 냅시다. 자기를 죽임으로서 하고 싶지 않은 행동을 피하는 것은 누구나가 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까? 김형의 그 훌륭한 생각을 행동화 합시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고도 견뎌 배길 수 있는 방도를 강구합시다.」

「그 방도를 가르쳐 주시요.」

영민의 이야기가 너무나 진실하고 너무나 이론적이기 까닭에 가나즈의 그 지나친 결백성이 마침내 누그러지고 말았다.

백형의 그 열렬한 이야기를 「 듣고 이 순간에 있어서의 나는 나의 지금까지 품고 있던 생각이 너무나 고루하고 너무나 고색창연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뉘우쳐 집니다. 좀더 나의 유약(柔弱)을 편달하여 나로 하여금 행동의 세계로 인도해 주시요.」

「인도하는 것이 아니요. 이제부터 김형은 나와 더불어 같이 행동하면 됩니다.」

「하겠읍니다! 무엇을 하면 좋습니까?」

「두 길 반이나 되는 이 병영의 담장을 어떡허면 무사히 넘어 나갈 수가 있는가를 연구하여 주시요.」

「하겠읍니다.」

「그리고 여섯 길이 넘는 저 까마득한 성벽을 어떡허면 넘을 수가 있는가를 연구하여 주시요.」

「하겠읍니다.」

「골똘히 연구하여 주시요.」

「골똘히 연구하겠읍니다.」

이번에는 가나즈가 영민의 손을 꽉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