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3권/5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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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흘러가는 청춘」[편집]

1[편집]

칠 월 하순 어떤 七〔 〕 날 밤이었다. 요즈음 춘심은 요정에도 잘 안나가고 늘 이불을 쓰고 들어 누워만 있었다. 술도 바르고 손님도 바르고 물자가 극도로 궁핍한 때라 요정에 나갔댔자 신통한 수입도 없었다.

오늘 밤도 그래서 춘심이가 아랫목에서 화투장으로 재수를 떼고 있는데 신성호가 책상 앞에서 그대로 번뜻 나가 누우며

「기생 오빠처럼 꽁무니에 손을 찌르고 밥을 얻어 믹겠어?…… 미친 자식!」

자기 자신을 비웃어 보는 것이다.

「춘심아!」

「아이 또 시작이다.」

「글쎄 대답 좀 해봐. ── 춘심아!」

「가만 좀 있어요! 남 지금 재수가 막 떨어지는데……」

「사흘에 한 번씩 싸움을 해야 밥맛이 나는데…… 오늘도 한번 해 볼까?」

「밤낮 해봐야 그거지, 뭐야? 헤어지긴 싫구, 돈은 없구…… 그래서 쌈이지, 뭐야?」

「너 정말 나하구 헤어지기 싫으냐?」

「헤어져두 별로 신통한 것이 없으니까, 그저 붙어 있는 거지 뭐야?」

「얘애, 너무 뽐내지 말아 얘! 네가 나한테 홀딱 반한 것만은 사실이지?」

「아이구, 맙수사! 낮짝이나 밴들밴들 하며 제일인가?」

춘심은 불현듯 최 달근의 말을 생각한다.

「내가 인제 돈만 벌게 되면 그만이지?」

「하늘에서 돈 비가 오기를 기다리지?」

「돈, 돈, 돈…… 돈, 돈, 돈…… 춘심아!」

「아, 글쎄 좀 잠자쿠 있어요!」

「너 배 저을 줄 아니?」

「배는 또 왜 갑자기……」

「나는 배 저을 줄을 몰라서 그런다. 네가 배만 젓는다면 내일이라도 우리 연평 바다로 돈 실러 가볼까?」

「아이구, 하나님이 뭘 자시구 살구, 귀신은 뭘 먹구 똥을 싸노?」

「그저 나 같은 걸 먹구 살겠지. ── 춘심아, 쌈 좀해 보자꾸나! 화를 좀 내렴!」

「기가 먹혀서……」

「노는 것이 귀엽지?」

「맙수사!」

성호는 그때 목청을 돋우어 영탄하듯이

「아아, 흘러가는 청춘이여! 썩어져 가는 청춘이여! 불개미 같이도 악착한 이 거칠은 사바에서 요만한 순정이나마 나에게 보여준 기생 박 춘심이의 뜻이 눈물겨웁도록 그윽도 하구나! 춘심이여, 신 성호여! 그대들은 지금 청춘의 홍역(紅疫)인 일종의 열병(熱病)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이 홍역만 무사히 치르고 나면 춘심이도 신 성호도 한낱 하늘과 땅을 부끄럼없이 쳐다보고 굽어 볼 수 있는 사람 구실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아, 병아리 소설가 신 성호 선생은 그래도 춘심이에 대한 애정의 반역을 해보지 못하였거늘, 기생 박 춘심이의 생리에 거머리처럼 붙어 돌아 다니는 애욕의 헌팅(狩獵〔수렵〕) 을 일평생 눈감아 줄 수 있는 그러한 아량도, 그러한 저속(底俗)도 나는 불행히 갖지를 못했구나! 오호라. 돈이여! 오호라, 돈이여!」

춘심은 후딱 화투장에서 얼굴을 들며

「최 달근이 말이야?」

「기생 오빠가 그만한 눈치도 못 채서야 밥을 얻어 먹나?」

「그러나 잘 안 될걸! 저편에선 상당히 열을 내는 모양이지만, 그저 한번 줏어 먹어 본 것이지. 뭐야?」

했다. 그리고는

「당신이 정말 고만한 것 꺼정 자꾸만 캐들라치면 역시 당신과는 요릿집 복도나 변소 같은 데서 살짝살짝 만나 보는게 젤루 격에 맞아요!」

했다.

「그렇구 말굽쇼! 아 ─ 멘!」

그러는데 대문 소리가 찌꿍 나면서

「신 선생, 계십니까?」

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시요?」

신 성호가 문을 탁 열었더니, 다짜고짜 성호의 방을 향하여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는 사나이가 하나 있었다.

「오오, 자네는 대통…… 대통……?」

하는데

「신식 양반이 권련을 피워야지, 대통은 왜 찾는거야?」

그러면서 선뜻 방 안으로 들어선 것은 뜻하지 않는 장 일수가 아닌가!

성호는 순간 놀라는 얼굴이다.

「언제 왔나?」

「쉬이! 대문 좀 나가 잠그구 오게.」

성호는 얼른 뛰어나가 대문을 잠갔다.

「어떻게 이처럼 갑자기 왔나?」

「나야 갑자기 댕기지, 언제 기별하구 댕길 팔자가 되나?」

장 일수는 방안을 한번 휘이 둘러 보고 나서 춘심을 아래 위로 흝어 보면서

「흥, 불을 붙였다가는 물을 끼얹고, 물을 끼얹어 놓구는 또 불을 때러 왔소?」

「호호호호…… 왜 오늘 밤엔 챠푸린 수염 안 붙이구 오셨어요?」

「제수님, 그만했으면 기억력이 상당합니다.」

「아이구, 누구 때문에 뒷문으로 빠져 나갔소? ─ 한턱 허세요.」

「하지! 자아 ──」

장 일수는 펄썩 주저앉으며 포켓트 . 위스키 두 병을 꺼냈다.

「오늘 어떤 데를 갔더니 주머니에 집어 넣어 주기에 갖구 왔지. ── 김치 없나?」

「가만 계셔요.」

춘심이가 나가서 김치와 두부찌개를 갖고 들어왔다.

「자아, 제수님부터 한 잔!」

「호호, 대탁이구료!」

「그래 자네 걸작은 어떻게 됐나?」

「걸작은 걸작이라두, 조건부야.」

「조건부라?」

「일본이 망해야 된대요. 망해야……」

춘심이가 대신 설명을 하였다.

「그래? ──」

장 일수는 책상 위에 한 자 가량의 높이를 가지고 쌓이여 있는 「흘러 가는 청춘」의 원고를 한 번 들썩해 보고 나서

「염려 말게. 돼 가네!」

하였다.

「정말? ──」

신 성호는 눈이 번쩍 띠였다.

「모르나? ──」

「무엇을?……」

허어 역시 국내에는 「 ,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소경과 귀머거리만 살고 있군.」

「세상이 어떻게 돼 가는지, 좀 알으켜 주게. 정말 답답하네.」

「그렇게들 모르고 있나?」

「대강은 짐작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는 건지?……」

「며칠 전에 백림 교외 포스담에서 연합국 원수들이 회의를 열었어. 트르만, 처 ─ 칠, 스탈린, ── 전후에 있어서 일본을 어떻게 요리를 하느냐, 하는 문제에 관해서……」

「어떻게 되는가?」

「간단히 말하면 발이 잘리운 문어 쪽이 될테지.」

「조선은? ──」

「이 사람아, 조선이 뭐냐? 조국의 국호도 몰라 본다는 말인가? 대한 민국 임시 정부가 지금 중경에서 김 구 선생을 주석으로 하고 귀국의 날을 기다리고 있는 거야.」

「오오, 대한 민국!」

한 줄기 전율이 신 성호의 육체 속을 흘러갔다. 三六〔삼육〕년 동안 공공연하게는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하던 이 국호, 온갖 서적으로부터 자취를 감추어 버렸던 이 국호, 오직 뜻있는 늙은이들의 한낱 구비(口碑)로서 밖에는 더 들어 보지 못하던 이 국호가 다시금 청천백일하에 살아나는 것이다.

「지난 六〔육〕월 하순 일본은 광전(曠田弘毅〔광전홍의〕)을 통하여 소련 주 일 대사 마리크에게 전쟁 조정(調停)을 의뢰하였다는 소식이 있다네.」

3[편집]

「그리고 또 한 가지 ── 포스탐 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트르만은 실로 무서운 사실을 발표하였다는 거야. 원자폭탄의 제一〔일〕회 시험 성적을 공포하였다. 이 공포로 말미암아 소련의 대일 참전의 날이 더욱 더 가까와질 것이다. 일본의 패망은 눈앞에 있다! 콘사이스 한 턱하게! 군의 걸작이 마침내 햇볕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하, 하, 하, 핫…」

「하, 하, 하, 핫……」

실로 유쾌한 웃음 소리가 두 젊은이의 폐부를 뚫을듯이 울려 나왔다.

「그런데 학병으로 끌려나간 꼬마 한테선 가끔 소식이 오나?」

「아, 꼬마 ──」

신 성호는 갑자기 안색을 가다듬으며

「자네, 소식 모르나?」

「소식?……」

「허 운옥? ──」

「허 운옥 ──」

장 일수의 눈이 뜨거운 정열을 품고 번쩍 빛났다.

「허 운옥이가 사형 선고를 받았다네!」

「사형 선고? ──」

장 일수는 펄떡 뛰었다. 들었던 술병에서 위스키가 철철철철 쏟아졌다.

「콘사이스, 대체 어떻게 된 노릇이냐? 좀더 자세히 이야기해 주게…… 운옥씨는 분명히 꼬마를 따라 중지 전선의 회양으로 갔었는데……」

신 성호는 거기서 영민과 운옥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얼마 전에 사형선고를 받기까지의 경위를 쭈욱 말하였을 때, 장 일수는 그 너무도 뜻하지 않은 사실에 치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인천 부두에서 다시금 목숨을 건지고 났을 때, 나와 김 준혁 박사의 간곡한 만류로 말미암아 일단 포기하였던 삶에의 애착을 느끼게쯤 되어 있었다네. 더구나 김 준혁씨의 독실한 설유가 효과를 보아 자기의 뼈를 대륙에 묻을 결심을 하고 조국을 위하여, 그리고 자네를 도와서……」

신 성호는 김 준혁에게서 들은 말을 그대로 장 일수에게 전하였다.

「정말인가?…… 운옥씨가 정말로 나를…… 나를……」

「내가 아무리 실없는 인간이라도 이런 경우에는 농담은 안 해.」

「오오! ──」

장 일수는 어쩔 줄을 모른다. 좁다란 방안을 삥삥 돌아 가면서

「기적이다! 하나의 기적이다! 운옥씨가…… 운옥씨가……」

두 팔을 번쩍 들고 천정을 우러러도 보고 팔짱을 끼고 눈을 지긋이 감아도 보고 그러다가는 또 미친듯이 삥삥 돌아 갔다.

「구해야 된다! 허 운옥을 구해야만 된다!」

열병환자처럼 장 일수는 외치는 것이었다.

「허 운옥을…… 허 운옥을 사형대로부터 끌어 내려야 한다! 어떻게?……

방도가 없다! 방도가 없다! 아아, 유에링! 그대는 나에게 대한 사랑의 복수를 여기서 하였는가?」

「대통령, 자네는 그 나미에라는 여자를 진정으로 사랑했는가?」

「처음에는 진정이 아니였지만 나종에는 진정에 가까왔어. 그러나 거기에는 항상 하나의 위험이 따라 댕겼어. 자칫하면 조국을 팔아서까지 사랑을 살는지 모른다. 그러한 위험! 알겠나?」

「알 것 같으이!」

「그러나 내가 운옥씨에게 대한 사모의 념에는 그러한 위험이 없다. 나는 그대들과 같은 애정 제일주의가 아니니까 조국을 팔는지도 모르는 그러한 위험한 연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거야. 그러한 위험을 느끼지 않아도 좋은 하나의 동지로서의 사랑 ── 그것이 나에게는 제일로 적당한 애정의 세계야.」

「그런 의미에 있어서 운옥씨는 이상적인가?……」

「그러나 그이는 이미 철장 속의 몸이 되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