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3권/5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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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의 바다로[편집]

1[편집]

전쟁은 마침내 종국에 직면하여 인심은 흉흉할 대로 흉흉해졌다. 동경을 회진(灰燼)의 폐허로 변하게 한 B二十九〔이십구〕의 대거 폭격이 멀지 않아 서울 백만 시민의 머리 위에 무자비한 세례를 퍼부을 처참한 광경을 상상하며 시민들은 불안과 공포의 하루하루를 맞이 하였다. 황금정 二〔이〕 정목에서부터 종로 二〔이〕정목까지의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가옥을 철거하여 소위 소개지(.開地)가 설정되었고 가구를 실어내는 소갯짐이 이거리 저 골목에서 매일처럼 꼬리를 물고 시골로 혹은 교외로 빠져 나갔다.

그러한 어수선한 판에 금동이가 홍역 끝에 폐염이 되었다. 바람 주의는 더할 나위 없게 했건만 어떻게 된 셈인지 꽃은 활짝 내솟기지를 못하고 속으로 숨어들어 四十〔사십〕도의 고열을 오르락 내리락 하였다. 약재가 귀한 때라 대학병원에 입원을 시키고 「트리아논」을 연거퍼 놓았으나 기력은 자꾸만 줄어들고 숨결이 가빠만 졌다.

오 창윤은 소갯짐과 함께 안성 고향으로 따라 갔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월여 전부터 오 창윤은 가족을 시골로 내려 보내 두고자 하였으나 유경이가 말을 듣지 않아 오늘 내일하면서 그대로 눌러 있었다. 살기 위해서 피난한다는 것이 유경의 심경에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것은 八〔팔〕월 초순 어떤 날 저녁 무렵이었다.

「힘들 것 같습니다.」

의사는 금동이의 가슴에서 청진기를 거두어 넣으면서 유경의 얼굴을 표정 없이 바라보았다.

「어린애 아버지는 안 계시는가요?……오늘 밤을 넘기기가 어렵겠다데요.」

그러면서 병실을 나가는 의사의 앞에 유경은 오뚝 막아 서면서 선생님 「 ! 금동이를…… 우리 금동이를 좀 살려 주세요! 선생님!」

유경은 중년 의사의 옷깃을 잡을듯이 바싹 다가서며 절박한 표정으로 애원을 하였다.

「보기에 무척 딱합니다. 그러나 이 이상 더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읍니다. 김 박사(준혁)의 의뢰도 있고 해서 손은 쓸대로 다 썼읍는다만……」

이윽고 의사는 나가 버렸다. 어머니는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운다.

「금동아! 할머니다! 할머니를 글쎄 네가 몰라 본다는 말이 웬 말이냐? 금동아!」

산소통을 입에 대고 금동이는 할딱할딱 하며서 할머니와 어머니를 쳐다 보기는 하지만, 그 하얗게 상해버린 조그만 얼굴에는 이렇다할 아무런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오늘 아침 유경이가 영민을 전화로 부를려고 하였을 때 어머니는 한사코 반대하였다.

「그만 둬라 앓는 사람에게는 의사면 되지, 그이가 오면 별 수 있다드냐?

공연히 왔다 갔다 하면서 이 이상 더 불행을 걸머질 셈이냐?」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그것이 자기의 불행을 확대시키는 계기가 될는지 몰라도 금동이는 어디까지나 영민의 정열의 결정체가 아니냐!

유경은 의사의 뒤를 따라 나가 간호부들의 휴계소로 뛰어 들어가서 손 변호사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영민은 얼마전 아버지의 병문안 차로 탑골동으로 가고 없었다. 이삼일 후에야 돌아 온다는 것이었다. 유경은 넋을 잃고 다시 병실로 돌아 왔다.

그날 밤 열한 시에 금동이의 조그만 영혼은 마치 밤이 찾아들 듯이 조용히 찾아 들고 말았다. 싸들하게 식어버린 금동이의 시체를 안은채 유경은 하룻밤을 꼬빡 실신한 사람처럼 멍하니 창 밖의 어두움과 오뚝 마주 앉아 있었다.

「모든 것은 갔다! 그이도, 금동이도 갔다!」

가슴 한복판에 커다란 구멍이 뺑하니 뚫어진 것같은 허무의 세계다. 참된 삶과 진실한 애정을 위하여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받쳐온 이 어여쁘고도 총명한 행복의 탐구자(探氷者) 오 유경은 마침내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의 파도에 한 몸을 싣고 일로 허무의 바다로, 허무의 바다로 흘러 들어 가고 있었다.

무(無)는 유(有)에 통한다. 그것은 이 어여쁜 행복의 탐구자에게 있어서 하나의 귀여운 인생의 오솔 길임을 생리적으로 또 철학적으로 의미하고 있었다.

2[편집]

금동이를 잃어버린 이 드넓은 저택 안은 쓸쓸하기 짝이 없었다. 더구나 중요한 가구는 시골로 죄다 소개를 시켰기 때문에 그처럼 호화롭던 집안이건만 마치 무슨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유령의 집처럼 음침하고 허전하였다.

오 창윤 내외는 어서어서 시골로 내려 가자고 유경이더러 졸랐으나 유경이의 마음은 좀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어머니, 아버지 모시구 먼저 내려 가세요. 전 옥순이 하고 좀더 여기 있다가 천천히 내려가겠어요.」

「그래두 어디 그렇냐? 너를 혼자두고 갈 바에야 소개는 가서 뭘해?…… 공연히 쓸데없는 고집을랑 말구 어서 하루 바삐 내려가자. 괘니 우물쭈물 하다가 큰 일 저지를라.」

오 창윤의 은근한 권유의 말이다.

「그뿐이냐. 살림살이는 죄다 옮겨 놓았는데 불편해서 하룬들 살겠니?」

그러는 어머니에게 유경은 발끈 화를 내며

「글쎄 누가 어머니더러 불편한 살림 하라는 거야요? 제가 하겠다는 밖에요!」

「말마다 너는 왜 자꾸만 역정이냐? 어미가 너한테 못한 것이 있더냐?」

「누가 못 했다는 거야요?」

「그럼 대체 뭐 때문에 역정이냐? 금동이 일두 있구, 넌들 마음이 편하겠니만…… 그래 시골루 소개 가자는 것이 네게는 그처럼도 못 마땅한 말이드냐?

어디 말이 있그들랑 좀 해봐라!」

오 창윤도 그렇고 부인도 그렇고 유경이의 문제에는 인제 정말로 질색이다.

「누가 말이 있다는 거야요? 어머니가 옆에서 공연히 사람을 들볶구니까 그러는 거 아냐요?」

「누가 너를 들볶는다는 말이냐? 서울이 위험해서 시골루 피난하자는 것이 너를 들볶는거냐?」

「글쎄 저는 어머니처럼 죽는게 무섭지 않으니까, 사람을 못 살게 구는 거요, 글쎄?……」

「무엇이 어떻다구?… 죽는게 무섭지 않다구?…」

어머니는 와들와들 몸을 떨면서요 방정맞은 것이 「 ! 그래 네 년은 고런 말만 살살 골라서 어미의 마음만 태워 주구…… 죽는게 무섭지 않다?…… 이 년아 내가 이날 이때꺼정 누구를 바라구 살아 왔니? 하늘 아래 땅 위에, 너 한몸 잘 자라서 아들 부럽지 않게 길러 볼려구 살아 왔다! 부모의 마음을 네가 손톱만치라도 알아준다면 그런 방정맞은 소리를 그래 내 앞에서 감히 해?…… 어디 한번 더 해봐라!

너 하나만 마음을 돌리면 집안이 모두 행복해지구 평안해진다. 평안해 져!

금동이만 하더래두 제 팔자에 제가 죽은 것이지, 누구의 정성이 모자라서 죽었다드냐? 아비없는 것이 또 살아 있으면 무얼해?……」

「그만 두오, 그만 둬요!」

오 창윤은 그리고 딸을 향하여

「유경아, 마음을 너무 좁게 가지지 말고 너그러이 가지도록 노력을 해라.

운옥이가 사형을 받는 한 백군은 모르긴 몰라도 너와 결혼을 했댓자 내가 보기에는 행복한 결혼은 되지 못할 것 같다. 그러구 운옥이의 사형 집행이 이미 시간 문제로 되어 있어 인생만사를 너그러이 생각하고 마음의 치(舵 〔타〕)를 조금만 돌려 봐라. 궁하면 통한다 했으니 너의 살 길도 거기서 찾아질 것이다. 그리고 시골도 구태여 갈 필요는 없으니 얼마동안 여기서 견데 보자. 네 마음이 돌아설 때가 오면 그때 가기로 해도 무방하니까.」

3[편집]

감격의 날, 八〔팔〕월 一五〔일오〕일 이른 아침 그러니까 그것은 여섯 시 전후의 일이었다.

「꼬꼬닥 꼬꼬닥 ──」

뒷뜰에서 닭 우는 소리가 소란스럽게 났다. 부엌에서 식모의 손을 돕던 옥순이가 냉큼 일어서면서

「또 이놈의 개가……?」

정지 뒷문을 탁 열었다. 어제 저녁 무렵 대륙무역 사장의 부인이 딸 영주와 함께 금동을 잃어버린 유경을 위하여 갖고 온 닭 두 마리였다. 사교성이 많은 영주에게 있어서 유경은 여학교 동창일 뿐 아니라, 약혼자 김 준혁의 은인의 딸이기도 하였다.

개는 보이지 않는데 닭울음 소리만이 소란하다. 장작을 쌓아올린 허청간에 다리를 매어놓은 닭이었다.

「아, 달걀을 낳네요!」

옥순은 뛰어가서 가마니 위에 댕그라니 낳아놓은 달걀 하나를 신기스럽게 손에 줏었다.

「아이, 따스해요!」

「어쩌면!」

식모도 신기스럽다.

「아가씨, 갖다 드릴까요? ──」

그러는데 부인이 정지로 나오며

「아이유, 신통두 해라!」

「식기 전에 아가씨 갖다 드려요. 네?」

「그래라. 그 애는 생달걀을 젤루 좋아 한단다.」

옥순은 좋아라고 이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유경은 보통 여덟 시 지나서야 자리를 떴다. 더구나 어젯밤 유경이가

「내일은 늦잠을 잘테니 깨우지 말어.」

하던 당부를 옥순은 지금 깜빡 잊어먹고 서잿 문을 열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문은 안으로부터 잠겨져 있었다. 문을 잠그고 자는 법이 유경에게는 여태껏 없었다.

「아가씨, 달걀 잡수세요, 달걀……」

그러나 방 안에는 아무런 대답도 없다. 그때야 비로소 옥순이는 늦잠을 자겠다던 아가씨의 말이 문득 생각키웠다. 그러나 조금씩 조금씩 달걀이 식어가는 것을 옥순은 못내 안타까워하며

「아가씨, 문 열어 주세요! 달걀 식기 전에 잡수세요!」

그래도 대답이 없다. 집안 식구들 가운데서도 제일 잠귀가 밝은 아가씨가 아니었던가. 옥순은 머리를 기울이었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그때는 모르고 지났지만 어젯 밤 늦게 아가씨가 제 손으로 목욕 물을 데우던 광경이 불쑥 머리에 떠 올랐다.

어젯밤 열 시경, 아가씨는 편지를 부치러 나간다고 하면서 잠깐 외출을 하고 돌아와서는 제손으로 목간 물을 데우기 시작하였다. 옥순은

「아가씨, 밤 늦게 목간 물은 왜 갑자기 끓이세요?」

하고 물었더니 아가씨는 쓸쓸한 웃음을 입가에 지으며

「목욕 좀 할려구…… 밤 늦게 목간을 함 안 돼?」

「아이, 아가씨두! 올라 가세요, 제가 데워 드리께요.」

「그만 두구 어서 들어가 자. 일생에 한 번쯤은 제 손으로 목욕 물을 끓여 보는 것두 좋아. 그리고 나 내일 늦잠 좀 잘테니 깨우지 말아요.」

기특하기도 하고 수상하기도 해서 마님께 그런 말을 전하려 했으나 마님은 벌써 자리에 들어 잠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옥순이도 그대로 자고 말았던 것이다.

옥순이가 내려 와서 그런 말을 전했을 때 부인은 그 어떤 불길한 예감을 전신에 느끼면서 다짜고짜 이층으로 달려 올라갔다.

「유경이 자니?」

부인은 문을 두드려 보았으나 인기척은 조금도 없다.

「옥순아, 빨리 내려 가서 열쇠 주머니를 가져 오너라! 그러구 선생님을 깨워라!」

4[편집]

옥순이가 갖고 올라 온 열쇠 주머니에서 열쇠 하나를 꺼내 부인이 문을 열고 있을 즈음에 오 창윤이가 기겁을 하여 뛰어 올라왔다.

「여보, 왜 그러우? ──」

그러나 부인은 대답할 여유도 없이 문부터 먼저 열어 재켰다.

어둠 컴컴한 방안이다. 동편 들창밑 침대 위에 유경은 누워 있었다. 부인은 뛰어 가자 커 ─ 텐을 거두었다. 방안의 어둠을 헤치고 빛갈이 먼저 유경의 얼굴 위로 뛰어 들어왔다. 그 순간,

「앗, 유, 유경아!」

부인은 소스라치게 고함을 쳤다.

유경은 지긋이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혹심한 고통으로 말미암아 얼굴 모습은 이그러져 있었다. 그렇다고 잠이 깨인 것도 아니다. 깊은 혼수 속에서 코를 골며 입에는 거품이 물려 있었다.

눈꼬리가 올라 가고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유경아! 이게 무슨 짓이야! ──」

오 창윤은 달려들어 딸의 몸을 무섭게 흔들어 보았다. 그러나 대답은 없다.

「얘야, 유경아!…… 얘아, 유경아!……」

부인은 새파랗게 얼굴이 질려 허벙지벙 이불을 들쳤다.

「여보! 빨리 의사를…… 준혁을……」

부인 말에 오 창윤은 부리나케 뛰어 내려가자 응접실 전화통에 매달리는 몸이 되었다.

「유경아! 이게…… 이게 웬 말이냐? 유경아!」

부인은 유경의 몸과 얼굴을 흔들어 대며 광란의 울음을 퍼부었다.

유경은 머리를 곱게 빗고 있었다. 이즈음 통 지분(脂粉)을 모르고 지내던 유경이건만 오늘 아침의 유경의 얼굴에는 약간 짙어 보이는 사화장(死化粧)이 있었다. 몸에는 흰 모시 치마 적삼에다 하얀 옥양목 버선을 신고 있었다.

숨결은 점점 더 가빠만 가고 입술의 경련은 차츰차츰 줄어들었다. 부인은 공둥공둥 뛰며 유경의 얼굴에서 안경을 벗기고 딸의 볼에다 자기 볼을 자꾸만 부비었다. 불덩이 같은 고열이 유경의 몸에서 불붙고 있었다.

침대 머릿맡 소탁자 위에 물그릇과 함께 먹다 남은「칼모친」봉지가 놓여 있었고 유경이의 화장 도구와 조그만 손거울이 놓여있었다. 만년필 한 자루와 편전지와 봉투지 몇 장이 흩어져 있었다. 영민의 사무소인 관철동 손 변호사의 주소를 쓰다가 무엇이 마음에 맞지 않았는지 반동강이가 찢어져 나간 구겨진 봉투 한 장이 탁자 밑에 떨어져 있었다.

「준혁이가 곧 온답니다.」

오 창윤이가 허벙지벙 뛰어 올라왔다.

「야아, 유, 경, 아! 네가…… 네가……」

오 창윤은 통곡이 주먹같은 눈물과 함께 터져 나왔다.

벼갯 밑에서 유서 한 장이 나왔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대한 간단한 유서였다.

아버지, 어머니. 소녀는 종시 불효의 길을 걷읍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저 하나 때문에 살아 계시는 그 거룩하신 기원을 종시 저바리고 불효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는 소녀의 옹졸한 생각을 관용하여 주십시요. 아버지, 어머니의 간곡하신 말씀 그대로 과거의 온갖 인연을 깨끗이 청산하고 마음의 치를 돌려 봄으로서 비록 그것이 순수하지는 못할망정 행복 같은 것이나마 얻어 보려고 너그러워질려고도 무한히 애를 써 보았읍니다만 그러나 전부를 얻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전부를 버리는 길이 유경이다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길인 것 같읍니다. 유경은 유경이 외의 그 누구도 아니옴을 확실히 깨달았기에 유경은 다른 사람의 인생을 걸을 수는 없어서 제 길을 걷기로 하였읍니다.

아버지, 어버니! 유경이라는 극히 옹졸하고 어리석은 인간 하나가 처음부터 생을 받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하시고 지나치게 상심하시지 마옵시고 ( )이 수복을 누리시기 진정으로 바라오며 불초 소( )는 갑니다.

八〔팔〕월 十五〔십오〕일 오전 세시 불초 여식은 올림

「너무하다! 유경아 너무하다!」

오 창윤은 목을 놓아 울었다.

얼마 후 냇과의로 이름이 높은 서대문 네거리의 박의사와 함께 준혁이가 왔다. 두 사람은 오 창윤으로부터 간단한 보고를 듣고 나자 곧 응급치료에 착수하였다. 목구멍으로 고무관을 쓸어넣어 위에 퍼진 약을 씻어내는 한편

「링게르」주사와 강심제를 연거퍼 놓았다.

「어떻습니까, 구할 수가 있겠읍니까?」

준혁은 핏기잃은 안색으로 박 의사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었다. 그러나 박 의사는 좀처럼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 대답없는 몇 초 몇 분이 오 창윤 내의에게는 더할 나위없이 무서웠다.

「약을 너무 많이 먹었읍니다. 치사량(致死量) 이상의 분량을……」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박 의사는 극히 무거운 한 마디를 이윽고 입에 담았다.

「가망이 없읍니까?」

준혁은 다시금 물었다.

「가망이 없을 것 같습니다.」

박 의사는 그러고 침통한 얼굴을 또 다시 지었다.

「유서를 쓴 것이 오전 세 시니까, 약은 그 후에 먹은 셈이 되는데요.」

「그렇습니다. 약을 먹고 三〔삼〕, 四〔사〕시간 지나면 약 기운이 완전히 뇌세포(腦細胞)에 흡수되어 손 쓸 가망이 없지요.」

「지금이 여섯 시 五十〔오십〕 분, 세 시에 먹었다고 치면 네 시간 가까이 되는데요.」

「복용 후 세 시간은 확실히 경과했읍니다. 하여튼 곧 입원을 시켜 봅시다.

하는데까지 해보는 밖에 별 도리가 없겠읍니다.」

「선생님, 제발 사람 하나 살려 주시우! 이 어미가…… 이 어미가 몹슬 년이 돼서……」

부인은 박 의사의 손목을 잡고 자꾸만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