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3권/5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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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심판[편집]

1[편집]

트르만 대통령이 포스탐 회의 석상에서 공표한 원자 폭탄의 무서운 위력은 마침내 八〔팔〕월 六〔육〕일 광도(廣島) 상공에서 폭발하였다. 뒤이어 九구 일에는 장기 〔 〕 (長崎)를 폭격하였다. 무서운 고열과 섬광 속에서 양 도시는 순식간에 붕괴되고 수많은 생명은 이슬처럼 사라졌다. 장기가 폭격을 받은 九〔구〕일 오전 한 시를 기하여 소련군은 마침내 대일전에 참가하여 동부 만주와 서부 만주의 국경을 돌파하고 일로 남쪽을 향하여 물밀듯이 쳐들어 왔고 소수의 비행기가 북만과 북한을 폭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날,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관동군 사령부의 소재지인 신경의 거리에는 가정집물을 실은 우마차가 열을 지어 시외로 빠져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관동군이 건재한 이상 사령부의 소재지인 신경이 위험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태는 급작히 나빠져 갔다. 사령부 정면 현관 위에 걸렸던 어문장(御紋章)은 하룻밤 사이에 자취를 감추었다. 사령부는 만주국 정부의 수뇌부와 함께 十〔십〕일 밤 재빨리 통화(通化) 근방의 산악지대로 후퇴하여 버렸다. 군인이나 군속의 부녀자들을 실은 피난민 열차는 十〔십〕일 밤부터 남으로 남으로 밀려 내려가기 시작하였고 차를 얻어 타지 못한 시민들은 남부여대로 남쪽을 향하여 흘러내려 오기 시작하였다.

관동군은 최후까지 침묵을 지킬셈인가?…… 불안과 공포 속에서 재만 일본인은 무적 관동군의 행동을 주시하였으나 끝까지 관동군은 일어 설 줄을 모르는 채 침묵을 지켰다.

항전이냐, 항복이냐? ── 장기가 폭격을 받는 九〔구〕일 밤, 동경 궁중 지하실에서는 포스탐 선언에 의한 항복을 수락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눈물의 어전회의(御前會議)가 열리었다.

어전회의는 이튿날 오전 네 시까지 계속되었다. 항전파의 두목 아남 육상은 일본 본토에서 미군을 요격할 것을 눈물로 주장하였으나 다수결로서 화평파의 주장이 관철되어 천황도

「신속히 전쟁을 끝마치게 하라!」

고 말하였다. 제二〔이〕차의 어전회의가 十四〔십사〕일 오전 十〔십〕시부터 열리어 간신히 천황제(天皇制)를 유지함으로서 포스탐 선언에 의한 무조건 항복을 결정하고 세번째의 원자 폭탄의 세례부터 벗어 났다. 그날 저녁 무렵 마침내 무조건 항복을 세계에 고하는 천황의 조서(詔書)가 「마이크」앞에서 녹음되고 아남은 그날 밤 관저에서 할복 자살을 하였다.

이리하여 역사적 운명의 날 八〔팔〕월 十五〔십오〕일은 닥쳐왔다. 二十 〔이십〕세기 동화의 주인공이요 항복을 모르는 천조대신의 신손(神孫)은 이날 정오를 기하여 자기 가신이 아니고 하나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녹음 방송을 통하여 전 세계에 피력함으로서 무조건 항복을 승인하였던 것이니, 실로 삼삽육 三十六〔 〕년 동안에 걸쳐 三〔삼〕천리 강토를 가혹히도 얽어매어 놓아던 일제의 쇠사슬은 마침내 끊어져 나가고 말았다.

「우리에게 자유를 다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다오!」

二十六〔이십육년〕 전 기미년 三〔삼〕월 一〔일〕 三〔삼〕천만 배달 민족이 글자 그대로의 한 덩어리가 되어 일제의 총뿌리 앞에서 울부짖고 쓰러지던 그날의 민족혼(民族魂)은 다시금 찾아 왔다. 암흑에서 광명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자유를 찾아 三〔삼〕천만은 다시금 소생하였다.

마음에 갈피가 있을 수 없고 생각에 거리가 있을 수 없다.

「오오, 조국이여! 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리까? ──」

한 마음, 한 몸이 되어 거룩한 내 조국의 씩씩한 일꾼이 되고저 눈물을 흘리며 三〔삼〕천만 모두가 다 하나처럼 마음 속으로 고요히 맹세를 드리던 감격의 날 八〔팔〕월 十五〔십오〕일이었다.

2[편집]

조국이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이 탑골동에서는 十六〔십육〕일 아침에야 알았다. 그러나 주재소와 면소가 끄떡도 하지 않고 그냥 버티고 있는지라, 동민들은 한낱 허황한 꿈 이야기만 같았다.

「빠가야로오! 빠가야로오!」

또 다시 병석에 누워버린 백 초시는 외마디 밖에 모르는 이 왜말을 한참 동안 외치고 있다가

「야아, 영민아, 이리구 있을 때가 아니다. 빨리 서울로 올라가 봐라. 왜놈들이 정말로 항복을 했다면 운옥은…… 운옥은 살아 나올 것이다…… 운옥은 사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운옥은 삽니다! 운옥은 삽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손목을 꽉 부여잡고 감격과 희망의 눈물을 좌악좌악 흘렸다.

「하하하…… 삼룡이가…… 삼룡이 새끼가…… 하하하핫……」

백 초시는 들어 누운채 눈물을 흘리면서 사랑방이 떠나갈 것 같은, 실로 통쾌한 웃음 소리를 연거퍼 냈다.

「야아, 어서 올라가 보아라! 아버지 병환이야 뭐 갑자기 어떻게 될라구?」

어머니도 아들의 등을 떠밀듯이 재촉을 하였다.

그날 오후, 영민은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고 주재소 앞까지 와 보니 사람들이 이구석 저구석에서 수근거리는 품이 뉴 ─ 스는 점점 더 정확성을 띠워가고 있었다 어떤 중년 . 신사 하나가 주재소 앞에서 버스에 올랐을 때 뉴 ─스는 결정적인 것이 판명되었다. 그 신사는 어제 정오에 평양서 라디오 방송을 들었노라고 확언하였다.

진정으로 그것은 꿈과 같은 일이었다. 영민의 눈앞에 가로막혔던 태산준령이 한 가운데서 짝 갈라져 나가면서 광명과 희망에 찬 아득한 수평선이 홀연히 전개되는 순간이 왔다.

평양서 영민은 밤차를 탔다. 기차는 배가 터져 나갈 것처럼 사람을 싣고 있었다. 지붕 위에 탄 사람도 있었다. 서울로! 서울로! 사람들은 물밀듯이 서울로 밀려 올라갔다.

「운옥이가 산다! 운옥이가 살아 나오는 것이다!」

무한대의 풍선처럼 영민의 심장은 자꾸만 부풀어 올라갔다.

이튿날, 영민은 경성역에 내렸다. 그러니까 그것은 十七〔십칠〕일 아침, 전국의 옥문(獄門)이 열리며 민족을 위하여 피 흘리던 크고 적은 조국의 주줏돌들이 일제히 해방되는 슬기로운 날이었다.

집집마다 태극기가 휘날리고 가두에 사람의 물결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조국을 찾고 자유를 얻은 백만 서울 시민의 울부짖는 만세 소리가 거리를 뒤 흔들고 있었다.

그즈음 서대문 형무소 앞에는 수많은 가족들이 깃발을 흔들면서 그리운 아버지를, 그리운 아들을, 형을, 동생을, 누나를 맞이 하고져 옥문이 열리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들을 제지하는 경관들의 총검을 무릅쓰고 굳게 잠긴 옥문 앞으로 밀려 들어 갔다.

「빨리 문을 열어라!」

군중 맨 앞장을 선 청년 하나가 주먹으로 육중한 문을 두드리면서 고함을 쳤다.

「이 놈들아! 빨리 문을 열고 내 조국을 다오! 내 겨레를 다오! 그리고… 동지를 다오! 허 운옥을 다오!」

그것은 대통령 장 일수였다. 그 순간

「으와아 ── 으와아 ──」

하는 아우성이 군중의 입으로부터 튀어 나왔다. 옥문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만세!」

옥문 밖 군중의 만세성에 호응하여 쑥대처럼 자란 머리와 콩나물처럼 허멀쑥한 얼굴들이 물밀듯이 몰려 나오며 손들을 번쩍 쳐들고 우렁차게

「만세!」

를 불렀다.

「앗, 운옥씨!」

장 일수는 외치며 지금 막 문을 나서는 허 운옥을 향하여 사람들 틈을 뚫고 쏜살같이 달렸다.

「아, 장 선생님!」

「운옥씨!」

장 일수는 운옥의 손을 덥썩 잡았다.

「장 선생님!」

운옥은 두 손으로 장 일수의 손을 꽉 부여잡고 고개를 숙이었다.

「장 선생님 정말루…… 정말루 만나 뵙고 싶었읍니다!」

「감사합니다, 운옥씨! 나 같은 사람을 잊지 않아 주셨다는 것이 정녕 꿈 같습니다!」

장 일수는 그저 고맙고 황송하다. 운옥은 눈물을 흘리며

「제가, 이런 몸이 되지 않았던들 저는……저는 아마 벌써 장 선생님을 뵈려……」

「고맙습니다. 운옥씨! 조국의 일꾼이 됩시다. 암담하던 운옥씨의 과거는 일제와 함께 가 버렸읍니다! 새 나라의 새 일꾼으로 운옥씨는 다시금 소생하였읍니다!」

「저도……저도 잘 알고 있어요.」

3[편집]

「운옥은 살았다! 운옥은 살았다!」

물결치는 깃발 , 우렁찬 함성! 전차를 얻어 타지 못한 영민은 경성역에서 광교 다릿목까지 단숨에 달려왔다.

「아, 백군이 아니요?」

다릿목에서 사무실로 뛰어 들어가고 있는 영민을 손 변호사가 불렀다. 손 변호사는 소학교에 다니는 아들의 손목을 잡고 흥분한 군중 속의 한 사람이 되어 깃발을 흔들고 있었다.

「아, 손 선생님!」

영민은 팔소매로 얼굴의 땀을 씻으며 손 변호사의 손을 두 손으로 꽉 움켜 잡았다.

「언제 오셨소?」

「지금 막 차에서 내렸습니다. ── 그런데 손 선생님, 정치범들은 어떻게 되었읍니까? 아직 석방이 안 됐는가요?」

백군 기뻐하시요 「 , ! 오늘 안으로 무조건 석방이 되게 됐읍니다.」

「오오!」

영민의 감동은 실로 컸다. 영민은 자기의 가슴이 터져 나가지 않고 그대로 견뎌 배겨 주는 것을 신기롭게 여겼다.

「그런데 백군, 아현동 오 창윤씨 댁으로 빨리 가 보시오. 대단히 긴급한 용건 같은데, 어제도 여러 차례 전화가 왔읍니다. 돌아오는 길로 곧 좀 보내 달라구요.」

「아, 그렇습니까!」

영민은 그 순간, 운옥이의 석방에서 느끼는 기쁨과는 성질을 달리하는 또 하나의 절실한 행복감을 전신으로 향락하면서

「잘 알겠읍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유경씨와 저와의 결혼문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합니다. 운옥이의 출옥은 저와 유경씨와의 사이를 현실적으로 가까이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이니까요.」

영민은 마치 소년처럼 소박한 의견을 존경하는 이 선배에 대해서 추호도 숨김없이 피력하였다.

「거듭 경사스런 일이요. ── 아, 어제 참 군에게 편지 한 통이 와 있읍니다. 발신인의 주소 성명은 없고……설합에 넣어 두었지요.」

「그렇습니까.」

그 길로 아현동을 찾아 갈려든 영민의 발길이, 주소, 성명이 없다는 대목이 마음에 걸려 사무실을 향하여 뛰어들어 갔다. 텅 비인 사무실이다. 영민은 설합을 열고 봉투 하나를 분주스레 끄집어 냈다.

「아, 유경의 글씨가 아닌가!」

그렇다. 그것은 분명 유경의 필적이었다. 그리고 실로 오랫동안 봐 본 적이 없는 유경의 낯익은 필적이었다.

「행복이 온다! 멀어졌던 행복이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와 오는 것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영민은 봉서를 뜯었다.

방안에 불이 없고 창 밖에 달이 없다. 우주는 무한한 적막 속에서 탄식을 계속하고 인간은 끝없는 고적 가운데서 신음을 마지 않노라. 우주와 마음 속에 속속들이 깃들여 있는건 오로지 공허와 허무와 절망과 암흑의 노래 뿐이 아닌가.

육체는 하루 하루 시들어 가고 마음은 각일각으로 식어만 간다. 이 몸이 삶을 끊는 순간 태양은 빛갈을 잃고 지구는 냉각한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은 생을 멈추고 천체(天體)는 움직임을 정지한다. 오 유경은 곧 우주 그 자체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님은 갔다 영원히 가고 .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오 유경의 온갖 노력은 한낱 물거품으로 돌아 가고 말았다. 금동이도 갔다. 한줌 황토가 되어 사랑하는 금동이도 갔다. 그러고도 이대로 살아 갈 그 무엇이 유경에게는 있을 수 없다.

영민씨! 유경의 전부를 의미하고 있던 영민씨는 또한 유경에게 있어서는 우주 그 자체와도 같은 영민씨였어요. 우주를 잃고 유경은 살 수 없어요.

빛갈 잃은 태양과 냉각해 버린 지구와 목숨없는 만상과 움직일줄 모르는 천체와……

손수 물을 끓여 목욕 재개하고, 머리 빗고 분 바르고 눈썹 짓고 연지 찍고, 흰 옷 단장으로 깨끗이 몸을 거두운 후에 창 밑에 고요히 누워 유경은 약을 먹어요. 오랜 시일을 두고 삶의 괴로움과 죽음의 기쁨을 저울질해 본유경은 치사량 보다도 훨씬 더 많은 분량을 먹어요. 같이 가자던 유경이었 으나 한 걸음 먼저 가요.

먼저 가지만 유경의 심경으로는 한 자리 한 시각에 꼭 같이 가는 걸로만 생각키워져요. 제가 갔다면 영민씨도 저와 꼭 같은 심경으로 와 주실 것을 유경은 추호도 의심하지 않아요.

영민씨가 상경하시어 이 글을 보시게 되는 때는 이미 저는 저 세상 사람일꺼야요. 그러나 여기서 한 마디 유경은 이 이상 더 노력할 수 없어서 한 걸음 먼저 가지만 저보다 인생을 노력할 수 있는 영민씨는 좀더 삶의 길을 노력해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이 생각키워요. 그러면 유경은 한 걸음 먼저……

八〔팔〕월 十四〔십사〕일 밤 열 시 유경 올림

4[편집]

눈 앞이 핑 돌았다. 후둘거리던 다리가 마침내 영민의 몸둥이를 지탱하지 못하고 의자 위에 쓰러뜨리고 말았다. 영민은 정신을 잃고 푹 테이블 위에 엎드려 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 몽롱한 의식 세계의 만세 소리가 멀리서 들린다.

점점 가까이 들린다. 영민은 후딱 머리를 들었다. 독수리처럼 움켜 쥔 유경의 유서가 홰액 눈에 뛰어 들어왔다.

「아, 유경이! ──」

빈사의 짐승과도 같은 괴상스런 고함 소리를 터뜨리면서 영민은 벌떡 몸을 일으키자 돌팔매 하듯이 사무실을 뛰쳐 나갔다.

「유경이는 죽었다!」

아우성치는 군중의 물결을 돌풍처럼 뚫고 영민은 무서운 기세로 달리기 시작하였다. 이리 퉁기고 저리 부닥치며 아현동을 향하여 쏜살같이 달렸다.

자꾸만 달렸다. 달리면서 영민은 창공을 향하여 목구멍이 찢어지도록

「유경잇!」

하고 고함을 쳤다. 그 고함 소리를 군중의 만세성을 누비면서 하늘 높이 흩어졌다. 해방의 감격은 하나도 없다. 머리 꼭대기 한 가운데다가 굵다란 못을 하나 박아놓은 것처럼 영민의 머리 속은 텅 비어 있었다. 그렇다. 영민의 의식 속에는 지금 나 자신의 존재도 없고 우주의 존재도 있을 수 없다.

오직 하나 실재성을 상실한 「오 유경」이라는 세 음향을 지닌 고유 명사(固有名詞) 하나가 있을 따름이 아닌가.

「유경잇 ──」

그 순간, 마침내 영민의 목구멍이 찢어져 한 모금의 피가 입술을 적시었다. 군중은 그를 하나의 광인으로 알고 모두들 재빠르게 길을 비꼈다.

「만세!」

「만세!」

출옥자를 실은 트럭이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은 깃발을 휘저으며 환호의 소리를 쳤다.

「유경잇 ──」

이번에는 목구멍에서 피가 튀어나왔다. 종로 네거리에서 광화문 쪽을 향하여 미친듯이 달리고 있었다. 달리다가 영민은 후딱 발걸음을 멈추었다. 걸음을 멈추고 이번에는 신음 하듯이 가만히 중얼거려 보았다.

「유경은 죽었다!」

그러면서 오랫동안, 오랫동안 영민은 땅바닥을 들여다 보고 서 있었다. 입으로부터 피가 한 방울 두 방울 구두 코 앞에 낙수물처럼 떨어져 내렸다.

「가엾은 유경이었다!」

인산인해를 이루는 한길 한 복판에 돌부처처럼 서서 영민은 머리를 수그리고 눈을 꽈악 감았다. 꽈악 감은 눈에서 비오듯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영민의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영민은 움직일 줄을 모르고 그대로 오랫동안 서 있었다.

이윽고 머리를 들고 눈을 떴을 때, 군중은 이 미치광이를 위하여 길을 열어 주었다.

영민은 다시금 질풍처럼 달리기 시작하였다.

「기적을……하늘이여, 기적을 주시요!」

아현동 고개를 뛰어 올라가면서 영민은 유경의 생명 위에 그 어떤 요행과 기적이 있기를 절실히 바랬다. 그렇다, 유경이가 정말로 죽었다면 손 변호사가 모르고 있을 리가 없을 것이 아닌가. 약은 먹었으나 무슨 요행의 손이, 무슨 기적의 손에 뻗쳐진 것이 틀림없다. 일루의 희망을 품고 영민은 정문을 들어 섰다. 집안이 고요하다. 너무도 고요하다. 드르렁 현관 문을 열었을 때, 마루를 훔치고 있던 옥순이가 냉큼 머리를 들다가

「아, 서방님!」

새빨간 눈이 통통 부어 있었다.

「아가씨는……아가씨는 어찌 됐느냐?……」

그러나 옥순이는 대답 대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우며

「아이구, 아가씨가……」

하고 격렬한 울음보를 터뜨려 놓았다.

「응?……」

영민은 가슴이 덜컹 내려 앉았다.

「아가씨는……아가씨는……돌아 가셨어요.……」

「?………」

「서방님……왜 좀……왜 좀더 빨리 못 오시구…」

옥순이는 그러면서 무섭게 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아가씨가……아가씨가 가엾어요……」

영민은 비틀비틀 쓰러지듯이 마루 끝에 펄썩 주저 앉았다.

그러는데 안으로부터 식모가 뛰쳐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