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류/제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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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만한 자의 성명은……[편집]

초봉이가 이리(裡里)에서 호남선 본선을 대전(大田)으로 갈아타느라고 일단 차를 내려 분잡한 플랫폼의 여러 승객들 틈에 호젓이 섞여 섰을 때다.

"아니, 이건 초봉이가!"

별안간 등뒤에서 허겁스럽게 떠들면서 불쑥 고개를 들이대는 건 말대가리같이 기다란 박제호의 얼굴이다.

"아저씨!"

초봉이는 반가워서 절로 소리가 높았다. 남의 이목이 아니더면 덤쑥 부여잡고 싶게 이 뜻하지 못한 곳에서 제호를 미리 만난 것이 기뻤다. 제호도 무척 반가워한다. 그러나 반가워서 싱글싱글 웃으면서도, 기다란 얼굴은 표정이 단순치 않다. 그는 초봉이의 그 동안 사단을 갖추 알고 있던 것이다. 초봉이도 제호의 낯꽃이 심상찮은 것이 아마도 군산까지 왔다가 소문을 들었나 보다 싶어, 이내 고개가 절로 수그러지고 만다.

"그래 어딜 가느라구?"

제호는 초봉이의 행색을 다시금 짯짯이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묻는다.

"거저 이렇게 나왔어요."

초봉이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서서 발끝으로 땅을 비빈다.

"거저?…… 아따 것도 할 만하지. 휘얼훨 바람두 쐬구 하는 게 좋구말구, 제기할 것…… 그래 잘했어…… 기왕 나선 길에 나하구 서울이나 구경두 할 겸 같이 가까?"

제호는 옆에서 사람들이야 듣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요란하게 떠들어 댄다.

"그러잖어두 지금 저두……."

"서울루 간다?"

"네에."

"거 잘했어! 아무렴, 그래야 하구말구……."

초봉이는 기왕 말이 났던 끝이니, 또 아무 때 말을 해도 하기는 해야 할 것이니, 시방 그러지 않아도 아저씨를 바라고 서울로 가는 길이라고 이야기를 이 자리에서 미리 할까말까 망설이는 참인데 제호가 먼저 제 이야기를 부옇게 늘어놓는다.

저번에 서울로 올라간 뒤에 제약회사는 뜻대로 준비가 되어 가지고 며칠 아니면 영업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이며, 그래서 잠깐 일이 너끔한 기회에 볼일로 고향인 서천(舒川)까지 왔었다는 것이며, 다시 어제 아침에 군산으로 건너와서 볼일을 보고 지금 서울로 가는 길인데 군산항 정거장에서 차를 탔기 때문에 같은 차를 타고 오면서도 서로 몰랐다고, 이렇게 이야기가 싱겁거나 말거나 구수하니 지껄이고 있는데 마침 차가 들이닿았다. 둘이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차에 올랐다.

차는 비좁았다. 찻간마다 죄다 지나면서 보아도 두 사람을 나란히 앉혀 줄 자리는 없다.

제호는 한 손에 보스톤을, 또 한 손에 과실 바구니를 갈라 들고 끼웃끼웃 앞서 가면서 연신 두덜거린다.

"이런, 제기할 것. 철도국 친구들은 냉겨먹을 줄만 알지 서비슨 할 줄 모른담?…… 아, 이 이런 놈의, 자리가 있어야지!…… 차장은 어디 갔누? 찻삯을 깎아 달라던지 해야지, 응?…… 제기할 것."

아무리 제기를 해도 빈자리는 종시 없다. 할 수 없이 되는 대로 이등칸으로 들어섰다.

"자, 여기 아무 데나 앉게나. 이런 때나 이등차 좀 타보지. 초봉이나 내나 돈 아까워서 언제 이등차 타겠나? 제기할 것."

제호는 보스톤과 과일 바구니를 시렁에 얹고, 양복 저고리와 모자를 훌러덩훌러덩 벗어 젖힌다.

"제기할 것. 자아 차푤라컨 이리 달라구. 이따가 돈 더 주구서 이등차표하구 바꿔야지…… 어때? 이등은 자리가 성글구 또 깨끗해서 좋지? 다아 돈만 있으면 이런 법야!"

초봉이는 삼등칸이 좁으니까 이등칸에 앉는 줄만 알았더니 그래도 차장이 와서 말썽을 하든지 하면 창피할까 싶어 편안한 이등차가 편안치도 않았는데, 돈을 더 주고 이등차표와 바꾼다고 하니, 지닌 시재가 염려되고 속이 뜨악했다. 그러나 할 수 없이 핸드백에서 십 원짜리를 꺼내서 차표를 얹어 내놓는 것을, 제호는 손을 내저으면서,

"허어! 내가 초봉이한테 차 이등 한턱 못 쓸 사람인가?…… 자아 돈일라컨 도루 집어넣구, 차표만."

허겁을 떨고 차표만 뺏어 간다.

정거장의 성가신 혼잡과 훤화를 털어 버리고 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창으로는 시원한 바람이 아낌없이 몰려든다. 창 밖은 한창 살이 지려는 여름이 한빛으로 초록이다. 논에는 벌써 완구해진 모포기가 어디고 가조롱하다. 잔디풀 우거지는 산모퉁이의 언덕 소로에서, 머리에 보따리를 인 촌노파가 우두커니 차가 달리는 것을 보고 섰는 것도 초봉이에게는 기특한 풍경이다.

초봉이는 이렇게 묻디리고 뛰쳐나와서, 찻간에 몸을 싣고 첫여름의 싱싱한 풍경을 구경하면서 훨훨 달리는 것 이것 하나만 해도 그 불쾌한 군산바닥에 처박혀 속을 썩이느니보다 훨씬 나은 성싶어, 마음은 이윽고 거뜬해 갔다.

"나는 참……."

제호는 차표를 바꾸느라고 차장을 찾아갔다가 돌아오더니, 선반의 과실 바구니를 내려 가지고 앉으면서 이야기를 꺼낸다.

"……고, 배라먹을 여편넬 즈이 집으로 쫓아 버렸지, 헤헤헤, 제기할 것."

"네에? 아니 왜?"

초봉이는 놀라 묻기는 하면서도, 제호의 좋아하는 속이 그러려니 짐작이 가지고, 겸하여 초봉이 저한테도 아무튼지 일이 천만다행스러웠다.

"그깐놈의 여편넬 그것 쫓아 버리기나 하지 무엇에 쓰누?…… 에잇 그놈의……."

윤희를 쫓아 보냈다는 것은, 그러나 말투요, 실상인즉 일년 작정을 하고 별거를 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것은 오랜 계획이었었다.

윤희는 제 자신의 히스테리라든지, 또 부인병에서 생기는 전신의 쇠약이라든지 그것을 잘 알고, 겸하여 그러한 신경과 건강을 가지고 그대로 부부생활을 계속하는 것이 우선 저를 위하여서도 좋지 못한 것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요전번에 서울로 이사를 해가는 기회에 별거를 하기로 진작부터 제호와 의논이 있어 왔었다. 그런 때문에 제호가 초봉이를 서울로 데리고 가려는 것을 한사코 막았던 것이다. 초봉이뿐 아니라 도대체 제호라는 위인의 행실머리가 미덥지 못했지만, 초봉이 일만이라도 제 뜻대로 한 것을 적이 마음놓고, 청진동에다가 살림만 차린 뒤에 이내 친정인 신천으로 내려갈 수가 있었다.

떠나기 전에 그는 제호를 잡아 앉히고 가로되 오입을 하지 말 일, 물론 첩을 얻어 들이지 말 일, 가로되 술을 먹고 다니지 말 일, 가로되 한 달에 세 번씩 편지를 할 일, 그리고 그 밖에 별별 옴두꺼비 같은 것을 다 다짐을 받았다.

제호는 그저 머리를 조아리면서, 네에 네 대답을 했다. 한 일년 그렇게 별거를 하는 동안에 히스테리가 가라앉아 사람이 되면 요행이요, 그렇지 않으면 눈치를 보아 어름어름하다가 이혼이라도 할 배짱이기 때문에 그저 마마손님 배송하듯 우선 배송만 시키려 들었던 것이다.

속내평이 그렇게 되었던 것인데, 그러나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그가 초봉이한테다가 짐짓 어떠한 색다른 암시를 주기 위하여 복선(伏線)을 늘이느라고 그러한 말을 내는 것이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초봉이도 윤희를 잘 알고, 알 뿐 아니라 적지 않게 성화를 먹이던 기억을 가진 그 초봉이인지라, 초봉이를 만나자 문득 생각이 나서 (종차에는 그놈이 어떤 역할을 하게 될 값에 적어도 시초만은) 한 개의 뉴스를 전하는 그런 탄탄한 마음으로 우연히 나온 것이다.

초봉이도 그러니까 역시 별다른 새김질을 하지 않고 한낱 뉴스를 듣는 정도로 들었을 뿐이다.

그것은 그렇다고, 그러면 시방 제호가 이렇게 만난 초봉이한테 그전과 같이 담담한 마음만 가질 수가 있느냐 하면, 결단코 그렇지는 않다. 커녕 그의 배짱은 시방 자꾸만 시커매 간다.

군산서 초봉이를 데리고 있을 때는, 초봉이가 한고향 친구의 자녀요, 그래서 저한테도 자식뻘밖에 안 되는 어린애라는 것이며, 아내 윤희의 지레 내떠는 강짜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혼 처녀에게 대한 중년 남자다운 조심성으로 해서 그의 욕망은 행동으로 번져나지를 못했던 것이나, 지금 당해서는 아무것도 그런 것은 거리껴하지 않아도 좋을 형편이다.

그는 이번에 군산까지 내려왔다가 자자히 떠도는 소문을 듣고, 초봉이의 겪어 온 그 동안의 사단을 잘 알았었다.

안되었다고 생각도 하고, 그래서 초봉이를 우정 찾아보고 일변 위로도 해주려니와, 또 마음을 가라앉혀 주는 요량으로 같이 데리고 서울로 가고도 싶었었다.

그러나 막상 찾아가자 한즉 아직도 경황들도 없을 텐데, 또 정주사를 만나고 보면 자연 우는 소리에 짓짜는 꼴을 보아야 하겠어서 그런 성가신 발걸음이 아예 내키지를 않았다. 그래서 찾아보기를 단념하고, 차라리 모른 체했다가 서울로 올라가서 편지로든지 불러 올리려니 했었다.

그랬던 참이라, 초봉이를 뜻밖에 중로에서 만나고 보니 마치 무엇이 씌워 대는 노릇이기나 한 것처럼 희한하고 반가웠었다.

희한하고 반가움이 밖에서 들어오는데, 속에서는 초봉이가 인제는 '헌 계집'이니라 하니 안팎이 마침맞게 얼려붙은 셈인 것이다.

'이미 헌 계집.'

'그리고 임자 없는 계집.'

이러고 보니, 미혼 처녀에 대한 중년 남자다운 조심성과 압박으로부터 단박 해방이 될 것은 물론이다.

시집 잘못 갔다가 홧김에 서울로 바람잡일 나선 계집, 그러니 장차 어느 놈의 밥이 될지 모르는 계집, 그러니까 아무라도 먼저 재치 있게 주워 갖는 놈이 임자다. 옛날로 말하면 공문서(空文書)짜리 땅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게 눈도 코도 못 보던 초면엣계집이라도 모를 테거늘, 일찍이 가슴을 설레게 해주었고 두고두고 잊히지 않고 연연턴 초봉이고 보니 인절미에 조청까지 찍은 맛이다. 좋다. 또 윤희가 없어졌으니 더 좋다. 윤희를 이혼을 하든지, 못하면 작은마누라도 좋다. 저도 인제는 헌 계집, 나도 헌 사내.

제호의 검은 배짱이 각각으로 이렇게 터가 잡혀 가는 걸 모르는 이편 초봉이는, 그러나 안심하고 다행스러워하기는 일반이다.

윤희가 없으니 제호의 덕을 마음놓고 볼 수가 있을 테요, 그래 제호네 회사에서 제호 밑에서 있노라면 공부를 쌓아 가지고 한때에 희망했던 대로 약제사 시험을 치를 수가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앞으로 완전히 독립한 생활을 할 수가 있고…….

차는 줄기차게 달려만 간다. 바깥은 여전히 살쪄 가는 들이 아니면 짙게 푸르러 오는 언덕이다.

맑은 햇볕이 차창으로 쬐어 들어, 좌석의 고운 남빛 우단을 더욱 해맑게 드러낸다.

몇 되지 않는 손님들은 제각기 남을 상관 않고 한가로이 앉아 신문을 읽거나 담배를 피운다.

"자아, 이것 좀 먹으라구……."

제호는 사과 하나를 꺼내고서 과실 바구니를 통째로 내맡긴다.

"……어서 아무거던지 꺼내 먹어요. 자, 칼두 여기 있구."

제호는 조끼 주머니를 뒤져서 칼을 꺼내 초봉이를 주고는, 저는 손바닥으로 쓱쓱 문대는 둥 마는 둥,

"난 머……."

하더니 그대로 덤쑥 베어 문다.

"지가 벳겨 드리께 인 주세요!"

초봉이는, 제호의 털털한 짓이 저 보기에야 유쾌했지만 다른 자리의 점잖은 손님들이 볼까 봐서 민망했다.

"괜찮어, 괜찮어……."

제호는 볼퉁이를 불룩불룩하면서 연신 손을 내젓는다.

"……이놈 사과는 껍질째 먹어야 좋다면서?…… 초봉이두 어서 먹어요…… 이 사과가, 이놈을 날마다 식후에 한 개씩만 먹으면 머 의사가 소용이 없다구? 허허, 정말 그리다간 우리 약장사놈들두 밥 굶어 죽게? 허허허허, 제기할 것."

초봉이는 이 유쾌한 사람에게 끌리어 절로 웃음이 나와진다. 보름 만에 웃는 웃음이다.

제호는 초봉이의 웃는 입 가장자리와 턱을 보고, 새침하던 얼굴이 딴판이요, 미상불 이쁘기는 이쁘다고 속으로 새삼스럽게 탄복을 하여 마지않는다.

"그런데, 서울은 무엇 하러 가나?"

제호는 소곳한 초봉이의 이마를 의미 있이 건너다보면서 묻는다. 초봉이는 사과 벗기던 손을 멈추고 잠깐 고개를 들었으나 어쩐지,

'실상은 아저씨를 찾아가는 길이랍니다.'

하는 말은 주저해지고,

"거저 구경삼아서……."

"구경? 허어!"

제호는 다시 한참이나 초봉이를 건너다보더니, 혼자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그런 게 아니라, 아따 저어 무엇이냐, 나두 초봉이 사정을 다아 알았어, 알았는데……."

초봉이는 제호가 다 안다는 눈치는 알기는 했었지만, 막상 그의 입에서 이야기가 나오는 데는 얼굴이 화틋 달고, 다시금 고개가 깊이 수그러지지 않을 수가 없다.

"하아! 이 사람, 내한테까지야 무어 그렇게 무렴해할 게 있나!…… 허긴 몰랐을 텐데 우연히 어느 친구가 그런 이야길 하더군그래…… 신문에두 나긴 했더라는데 나는 못 보았지만…… 그리나저리나 간에 원, 그런 횡액이 있더람!…… 그거 원 참!…… 횡액이야 횡액. 큰 횡액이야!…… 글쎄 듣기에 어떻게 맘이 안됐는지! 제기할 것, 그런 놈의 일이 원!"

제호는 말을 잠깐 멈추고 초봉이의 하얀 가르마를 한참이나 건너다보다가,

"……그렇지만, 응? 이거 봐요 초봉이, 초봉이?"

하면서 찔벅거릴 듯이 재우쳐 부른다.

"네?"

초봉이는 고개를 숙인 채 벌써 다 벗긴 사과를 먹지도 못하고 만지작거리기만 한다.

"응, 다른 게 아니라 말이지…… 그렇다구 애여 낙심을랑 하지 말아요. 낙심하면 정말루 그건 못쓰지…… 무어 어때? 한번 실수루, 아니 실수가 아니라 횡액으루 그런 일을 좀 당했기루서니 어떤가?…… 아무렇지두 않어. 아직 청춘인데…… 그런 건 하룻밤 꿈이거니 해버리면 그만이야. 다아 아무렇지두 않어. 일없어. 그럴 게 아냐? 응? 초봉이."

"네에."

초봉이는 가만히, 그러나 마지못해서가 아니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대답을 한다.

그는 제호가 곡진한 태도로 곰살갑게 구는 품이 마치 아픈 자리를 만져 주되 아프지가 않고 시원하여, 어떻게도 고마운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따라서 그는 (하기야 전에도 그렇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낙명이 된 몸으로 맨손을 쥐고서 넓은 사바(娑婆)로 뛰어나온 막막한 이 경우를 당하여, 인생과 생활에는 든든한 권위가 섰고, 일변으로 활달하여 인정이 있는 이 중년 남자 제호라는 사람이 타악 미덥고 안심되는 품이란, 길을 잃은 아기가 일갓집 아저씨를 섬뻑 만난 것과 같아 인제는 창피나 부끄러운 생각은 다 가시고 만다.

제호 역시 이미 심중에 초봉이를 가지고 만만히 다룰 수가 있다는 뱃심이 들어차서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러므로 어떤 기회를 당하게 되면 주저 않고 행동을 일으킬 위인이기는 하나, 그러나 시방 이 자리에서 초봉이를 여러 가지로, 더욱이 장래의 희망을 가지라고 위로를 하고 격려를 하고 하는 것은 결코 잔망스럽게 달콤한 먹이를 먹이자는 것이 아니요, 단순히 어른다운 애정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 그래…… 무슨 일이 있어? 머……."

제호는 담배를 피워 물면서 다시,

"……그리구 서울루 가는 거 잘 생각했어. 그리지 않아두 내가 올라가서 편지를 하려던 참인데!…… 아무튼 잘했어…… 내가 아무리 힘이 없기루서니 초봉이 하나 잘 돌봐 주지 못하리. 아무 염려두 말아요. 맘 터억 놓아요, 응?"

초봉이는 그렇다면, 이편에서 이야기를 낼 것도 없이 아예 잘되었다 싶어 더욱 안심이 되었다.

이야기에 팔려서, 차창 밖으로 변하는 첫여름의 살쪄 가는 들과 산을 한동안 눈여겨보지 않는 사이에 차는 황등(黃登), 함열(咸悅), 강경(江景)을 어느결에 다 지나쳤다.

논산은 학교에 다닐 때 부여로 수학여행을 가느라고 와본 곳이다. 정거장 모습이며, 역엣사람들이 어쩌면 낯이 익은 것 같다. 아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팥거리〔豆溪〕를 지나서 굴 하나를 빠져나왔을 때에 제호는 초봉이의 무릎에 놓인 조그마한 손을 무심코 내려다보다가 손가락에 반지 자국만 남았지, 뽑고 없는 것을 보았다.

"허어! 반지두 다아 뽑아 버렸군?…… 아무렴 그래야 하구말구. 그래, 그 께렴직한 과거는 칼루다가 비어 버리듯이 잊어야 해요. 그리구서 심기일전(心機一轉), 응? 허허, 제기할 것."

제호는 초봉이가 집안의 전당거리라도 되라고 그저 무심코 반지를 뽑아 놓고 온 속사정이야 알 턱이 없다.

그러나 초봉이는 막상 그 말을 듣고 보니 도리어 너무 급작스럽게 결혼반지 같은 것을 뽑아 버린 것이 남의 눈에라도 박절하게 보인 것 같아서 화틋 얼굴이 달았다.

차가 대전역에 당도하자, 초봉이를 앞세우고 플랫폼으로 내려서던 제호는 명승고적을 안내하는 간판에서 유성온천(儒城溫泉)이라는 제목이 선뜻 눈에 띄었다.

'유성온천?…… 온천?'

제호는 내숭스럽게 싱긋 웃으면서, 간판을 보던 눈으로 초봉이의 뒷맵시를 훑는다. 비로소 그는 제 야심을 의식적으로 행동에 옮겨 볼 생각이 나던 것이다.

오지 않으면, 아무렇게라도 오래잖아 만들기라도 할 박제호지만, 우연히 그에의 찬스는 빨리 왔고 겸하여 좋았을 따름이다.

"초봉이, 온정 더러 해봤나?"

쇠뿔은 단김에 뽑으라 했으니 인제는 시간문제라 하겠지만, 시방부터는 옳게 남의 계집을 꾀는 수작이거니 생각하면 일찍이 여염집 계집한테는 못 해보던 짓이라 노상 뒤가 돌려다뵈지 않지도 않았다.

초봉이는 마침 가드 밑을 지나면서 전에 서울로 수학여행을 갈 제 이것을 보고 진기하게 여기던 그때 일이 생각이 나서 한눈을 파느라고 제호가 재우쳐 물을 때서야 겨우 알아들었다.

"온정이요? 온천?"

초봉이는 되묻고서 고개를 가로 흔든다.

"……못 가봤어요."

"그럼 마침 좋군. 바루 이 근처에 유성온천이라구 있는데, 한번 가볼 만한 데야…… 그래 그래, 구경두 못 했다니 첨으로 온정두 해볼 겸, 또 가서 조용히 앉아서 이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초봉이 일두 상의하구, 좋잖어?"

"그렇지만……."

"그렇지만, 무어?"

제호는 이건 좀 창피한 고패로다고 어름어름하는데, 이어 초봉이가,

"아저씨 바쁘실 텐데……."

하는 게, 저도 벌써 알아차리고는 슬며시 드러누우면서도 그저 숫보기답게 부끄럼을 타느라고 괜한 겸사나 한마디 해보는 눈치인 것 같았다. 뭐, 그만하면 다 팔아도 내 땅이다.

"온! 나는 또 무슨 소리라구! 허허 허허, 그런 걱정을라컨 하지두 말아요…… 그럼 그렇게 하기루 하구서, 점심두 아주 거기 가서 먹을까?"

"네에."

"시장하잖어?"

"괜찮어요."

"그럼 됐어. 자아 빨리 나가자구. 자동차를 잡아타야지."

초봉이는 남자와 단둘이서 호젓하게 온천에를 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턱이 없다. 온천도 역시 거리의 목간탕처럼 남탕이 있고 여탕이 있고 해서, 단지 목간을 하기 위한 목간이라고밖에는 온천이라는 것을 그 이상 달리 생각할 내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생전 처음으로 가보는 온천 목간도 하려니와, 또 제호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그것도 상의하자고 하니 겸사겸사 반갑기만 했을 뿐이다.

그러나 제호는 초봉이의 그러한 단순한 마음이야 몰랐고, 너무 쉽사리 제 뜻에 응하는 것이 도리어 헤먹고 싱거운 맛도 없지 않았다.

바로 유성온천으로 떠나는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둘이는 다른 두어 사람 승객과 같이 버스를 잡아타고 흔들린 지 삼십 분 만에 신온천의 B라고 하는 여관에 당도했다.

초봉이는 버스를 타고 오면서,

'바로 근처라더니 이렇게 먼 덴가?'

'언제 목간을 하고, 언제 점심을 먹고, 도로 와서 차를 타려구 이러는고?'

이쯤 궁금히 생각도 했으나, 그대로 잠자코 있었다.

버스가 포치에 닿기가 무섭게 앞뒤로 하녀들이 달려들어 문을 열고 손에 든 것을 채어 가고 하면서,

"이랏샤이마세(어서 오십시오)!"

소리를 지르고, 현관으로 들어서니까는 여남은이나 같은 하녀들이 나풋나풋 엎드리면서 한꺼번에, 이랏샤이마세를 외친다.

서슬에 초봉이는 정신이 얼떨떨했다.

목간집이라면서 대체 이게 웬 영문인지를 모르겠다. 군산 있을 때에 목간이라고 가면 수염난 놈팡이가 포장 뒤에 앉아 벙어리 삼신인지 눈만 힐끔하고 돈이나 받을 줄 알지, 오느냐 가느냐 수인사 한마디 하는 법 없는 그런 데만이 목간탕인 줄 알았었는데, 자 이건 도무지 휘황하고도 혼란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어깨가 절로 오므라들려고 한다.

집은 어쩌면 이리도 으리으리하며, 색시들은 어쩌면 이렇게 많이 나오며, 어쩌면 이다지도 소중히 모셔 들이는지, 아마 이런 집에서는 목간삯을, 칠 전은 어림도 없고 일 원이나 그렇게 내야 할 것 같다.

초봉이는 사실로 이런 호강이라고는 꿈에도 받아 본 적이 없는지라, 차마 겁이 나고 황송스러 못 한다.

그러나저러나 남탕이니 여탕이니 써붙인 데는 어디며, 수건도 없고 비누도 없으니 비누는 이 전짜리를 한 개 산다지만, 빌려 주는 수건이 있는지 모르겠어서 종시 두리번거리고 섰는데, 제호는 성큼 마루로 올라가더니,

"어서 올라오잖구?"

하면서 히쭉 웃는다.

초봉이는 그제야 구두를 벗고 마루로 올라서니까, 한 여자가 냉큼 가죽 슬리퍼를 집어다가 꿇어앉으면서 바로 발부리 앞에 놓아 준다.

초봉이는 제발 이러지 말아 주었으면 하여 딱해 못 견딘다.

제호는 보니, 짐을 들고 앞선 여자의 뒤를 따라 이층 층계로 올라가고 있다. 초봉이는 이런 집에서는 목간도 이층에다가 만들어 놓았나 보다고 더욱 신기했으나, 자꾸만 이렇게 둔전거리다가는 촌뜨기 처접을 타지 싶어 얼핏 제호를 따라 올라갔다.

이층으로 올라가서 양탄자를 깐 복도를 한참 가노라니깐 앞서 가던 하녀가 한 방 앞에 쪼그리고 앉더니 문을 열어 주는데, 널따란 다다미방이다. 초봉이는 팔조를 모르니, 그냥 넓은 줄만 알 뿐이다.

하녀가 뒤로 따라 들어와서는 비단 방석을 두 개 마주 놓아 주고, 시원하라고 앞 유리창들을 열어 놓고 한다.

"예가 어디래요?"

초봉이는 목간통이 보이지 않고, 이렇게 방으로 모셔 들이는 게 궁금할 밖에…….

"어딘? 온정이지."

"목간은?"

"목간? 아무렴, 인제 해야지…… 가만있자, 옷이나 좀 갈아입어야 목간을 하지."

"옷을?"

"하하하, 첨으로 와서 모르는군?…… 온정에선 빌려 주는 유카다가 있으니깐, 그걸 갈아입어야 편한 법이어든."

그것도 미상불 그럴듯하기는 그럴듯했다. 마침 하녀 둘이 하나는 찻쟁반을, 하나는 유카다를 받쳐 들고 들어온다. 들고 날 때면 으레 쪼그리고 앉는 것이 민망해서 볼 수가 없다.

하녀가 차를 따르는 동안 제호는 양복을 훌러덩훌러덩 벗어 던지면서 유카다를 갈아입는다.

초봉이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얼른 외면을 하고 말았으나 내심에는, 제호라는 사람이 그렇진 않던 사람인데 어쩌면 이다지도 무례할까 보냐고 대단히 불쾌했다.

하녀가 유카다를 펴들고서 초봉이더러도 어서 갈아입으라고 속없이 연방 눈웃음을 친다.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다.

제호가 유카다를 다 갈아입고 돌아서다가, 초봉이의 곤경을 보고는 꺼얼껄 웃으면서 하녀더러 설명을 한다.

우리 아낙은 온천이 처음이기도 하려니와, 또 조선 가정에서는 아낙이 남편 앞에서 남이 보는데 함부로 옷을 벗거나 하지 않는 법이라고, 그러니 그대로 놓아 두라고…….

'우리 아낙이라니?'

초봉이는 단박 면박이라도 주고 싶게 제호가 괘씸했다. 그의 눈살은 졸연찮게 꼿꼿해서 제호를 거듭떠본다. 그러나 제호는 초봉이의 그러한 눈치는 거니를 챘어도, 어째 그러는지 속내는 알 수가 없었다.

아까 대전역에선 그만큼 선선히 내 뜻에 응하던 사람이 인제 와서는 이다지 비쌜 게 무엇이란 말인고?

옳아, 그런 게 아니고 저게 부끄럼을 타는 모양인 게로군. 그러면 그렇지 원…….

"허허 제기할 것. 그렇게 부끄러울 게 무에 있더람?…… 그래두 너무 그렇게 서먹서먹하질랑 말아요!…… 여기 여자들이 보는데, 마치 남의 집 여자를 꼬여 가지구 온 것처럼 수상하게 여길라구…… 그러잖어?"

말이 그럴듯하여, 초봉이는 마음이 약간 풀렸다. 역시 꾀고, 꾐을 받아서 온 것으로 보인다면야 차라리 아닐지언정 겉으로라도 내외간인 체하는 것이 그보다는 덜 창피할 테라서…….

"자아, 그런데 어떡헐꼬? 응?…… 목간을 먼점 할까? 시장한데 무어 요기를 먼점 할까?"

"글쎄요……."

초봉이는 시장하기는 하나, 이러자거니 저러자거니 제 의견을 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면 아주 기분 좋게 목간을 하구 나와서 먹드라구? 좀 시장하더래두, 기왕 참던 길이니."

제호는 기다리고 섰는 하녀더러 탕에 들어갔다가 나올 동안에 화식(和食)을 준비하든지 그게 안 되겠으면 돔부리나 그런 것이라도 먹게 해달라고, 그리고 우리 아낙은 집에서도 나하고 같이 목간을 하는 법이 없으니 따로 독탕에 안내해 주라고 주절주절 이른 뒤에, 하녀가 받쳐 주는 타월을 어깨에다 걸치고 나가 버린다.

초봉이는 기다리고 섰는 하녀가 제일에 민망해서 할 수 없이 유카다를 갈아입는다. 새수빠진 하녀가 연신 아씨 아씨 해가면서 생 근사를 피우는데 딱 질색을 하겠다.

탕에는 독탕이라 혼자다. 유황내가 나고 호젓한 게 마음에 헤적헤적했지만, 그래도 조용하고 정갈한 것이 좋기는 좋았다.

물탕 바닥의 푸른 타일에 비쳐, 깊은 연못의 물인 듯 새파란 물이 가장자리로 남실남실 넘쳐흐르는 것이 아까울 만큼 흐뭇해 보인다.

물은 너무 뜨거운 것 같았으나 참고 그대로 들어가서 다리를 뻗고 비스듬히 잠겨 있노라니까, 여러 날 동안의 피로가 새 채비로 몸에서 풍기고,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어 다 씻겨 나가는 성싶어 여간만 개운한 게 아니다.

맑은 물 속으로 하얀 제 몸뚱이가 들여다보인다.

대체 이다지도 곱고 깨끗한 몸뚱이가 그만 더럽혀지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니냐.

그러나마 그게 한 가지도 아니요, 두 가지씩…… 남이 부끄러운 체면의 수치가 하나, 제 마음에 부끄러운 비밀한 수치가 하나.

이 두 가지의 형적 없는 때가 이렇듯이 곱고 정갈해 보이는 내 몸뚱이에 적이 돋은 듯 눌어붙어 한평생을 가도 벗어지지 않다니.

이리 생각하면 마구 껍질이 한벌 벗도록 부욱북 문질러 씻어라도 내보고 싶어진다. 그래 부리나케 물탕 밖으로 나와서 몸을 문지른다. 그러나 미끈미끈하기만 하고 시원치가 않아서, 여기저기 둘러보아야 비누 같은 것은 놓아 둔 게 없다. 이만큼 차려 놓고 수건까지 주면서 비누는 주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그 뒤에 어느 말끝엔가 제호더러 그런 이야기를 했다가, 유황 온천에서도 비누를 쓰느냐고 조롱을 받은 것은 후일담이고.

탕에서 나와서, 방을 잊어버리고 어릿어릿하는데 지나가던 하녀가 쪼르르 데려다 준다. 제호는 기다란 얼굴이, 심지어 대머리 벗어진 데까지 불크레하니 익어 가지고 조그마한 밥상 앞에 앉아 기다리고 있다. 초봉이의 밥상도 따로 갖다 놓았다. 조선식으로 맞상을 안 한 것이 다행스러웠다.

"어때? 기분이 아주 좋지?"

제호는 부채질을 하면서 무엇이 그리 기쁜지 연신 싱글벙글 좋아한다.

"……자아 밥 먹더라구. 퍽 시장했을 거야! 그새 여러 날 걱정으루 지내느라구 무얼 변변히 먹지두 못했을 텐데."

밥상 앞에 가 무릎을 뉘고 앉으니까, 하녀가 간드러지게 공기에다 밥을 퍼올린다. 초봉이는 두 손으로 덤쑥 받는다.

"어여 먹어요. 많이 배불르게 먹어요. 인전 아무 걱정두 할라 말구서 잘 먹구 맘두 편안히 가지구 그래요. 마침 목간을 했으니깐 그걸루 과거는 말끔 씻어 바린 요량을 하구 말이지, 허허 제기할 것……."

초봉이는 그렇기는커녕 비누가 없어서 때도 못 씻은걸 하고 속으로 웃었다.

"……자아 어서 먹어요…… 원 저렇게 이쁜 사람이, 원 그런 악착스런 일을 당하구 그리다니, 에이 가엾어!…… 가엾어 볼 수가 없단 말야, 허허허허, 제기할 것……."

초봉이는 이건 바로 어린애를 어르듯 한다고 서글퍼서 우습지도 않았다.

"……자, 난 반주를 한잔……."

제호는 하녀한테 유리 곱뿌를 들이댄다.

"……연애라껀 유쾌한 물건이니깐, 술을 한잔 먹으면 더 유쾌하다구? 허허 제기할 것."

초봉이는 겨우 가라앉던 심정이 또다시 더럭 상해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면서, 대체 저 사람이 어찌 이리 실없는고 하고 제호의 얼굴을 똑바로 거듭떠본다.

그러나 제호는 아무렇지도 않게 헤벌씸 웃으면서 하녀가 부어 주는 맥주를 버큼째 쭈욱 들이켠다.

"어허 시언하다!…… 어때? 한잔 해보까?"

제호는 지저분하게 거품이 묻은 입술을 손바닥으로 닦으면서 초봉이에게 곱뿌를 건네 준다.

초봉이는 패앵팽한 눈살로 제호를 거듭떠보다가 외면을 한다.

"싫여?…… 어허허허."

초봉이가 보기에는 하릴없이 미친놈같이 제호는 꺼얼껄 웃어 대면서 하녀한테 곱뿌를 들이민다.

초봉이는 밥 먹던 젓갈을 내던지고 일어설 만큼 부아가 더럭 치달았다.

대관절 연애를 한다니 어따 대고 하는 말이며, 또 술을 먹으라고 하니 이건 약간 무례 따위가 아니라 사람을 망신을 주려 드는 게 아니냐?

아니, 인제 보니 저 위인이 딴 속이 있어 가지고 나를 이리로 꼬여온 것이 아닌가? 섬뻑 만나던 길로 여편네를 쫓았느니 이혼을 하느니 풍을 치던 것이며, 횡액이라고 동정해 주는 체 앞일은 제가 감당하마던 것이며, 다 배짱이 달라서 한 수작이 아닌가? 하녀더러 아낙이니 남편이니 한 것도, 그러니까 거짓말삼아 정말을 한 것이고.

이렇게 제호의 속을 차근차근 캐고 보니, 이건 큰일도 분수가 있지 기가 딱 막힌다.

'음충맞은 도둑놈!'

밉살머리스럽고, 또 도둑놈은 말고라서 역적놈이라도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일은 단단히 커두었다. 어느결에 이렇게 옭혀 들었는지, 정신이 번쩍 든다.

그러노라니, 깔고 앉은 방석에 바늘이 박힌 것 같아 어서어서 이 자리를 피해 달아나야겠다고 마음이 담뿍 단다. 그러나 그러는 하면서도 웬셈인지, 과단 있이 벌떡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대신 기운이 차악 까라지고 한숨이 터져 나온다.

온갖 여망을 거기다가 붙이고 찾아가던 그 사람인 것을 여기서 떼치고 혼자 나설 일을 뒤미처 생각하니 겁이 더럭 나고, 그것은 마치 어머니를 길에서 잃어버린 아기 적인 듯 천지가 아득하여 어쩔 바를 모를 것 같기만 하던 것이다. 이게 다 무슨 약비한 짓이냐고 애써 저더러 지천도 해보기는 했으나, 종시 제가 제 말을 들어 주지를 않는다.

그러나 실상인즉, 그는 제호를 떼쳐 버리기가 겁이 나기 전에, 저와 마주 떠억 퍼버리고 앉아 있는 제호라는 인물의 커다란 몸집에서 무겁게 퍼져 나오는 이상한 압기, 이 압기에 눌려 나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꼼짝 못 하고 저편이 잡아 끄는 대로 끌려 가고라야 말지 별수가 없느니라고 미리 단념부터 하고 있는 제 자신을 의식지 못할 뿐더러, 그 압기라는 건 제호라는 위인이 버엉떼엥하면서 남을 덮어 누르고 제 고집대로 하는 뱃심도 뱃심이겠지만, 그보다도 결국 그가 이편을 구해 줄 수 있는 능력의 우상인 데 지나지 않는 것을, 그만 것에 눌려 지레 자겁을 하도록 초봉이 제 자신이 본시 앙칼지지도 못했고, 겸하여 인생의 첫걸음을 실패한 것으로 부지중 자긍을 잃고 자포자기가 된 구석이 없지 못했던 때문인 줄을 그는 제 스스로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서 무단히 앉아, 속절없이 이 운명 앞에 꿇어 엎디는 제 자신의 만만한 신세를 힘없이 한탄이나 하는 것으로 겨우 저를 위로하자고 든다.

철든 이후로 무엇에고 나를 고집 못 하던 나!

고태수와 결혼한 것도 알고 보면 내 마음이 무른 탓이요, 장형보에게 욕을 본 것도 사람이 만만한 탓이 아니더냐. 그러한 보과로는 내 몸과 청춘을 잡친 것밖에는 무엇이 더 있느냐.

그리고서 시방 또다시 새로운 운명이 좌우되는 이 마당에 임해서도 다부진 소리 한마디를 못 하는 것은 무슨 일이냐.

이걸로써 저를 용서하는 대신, 답답한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탄식거리에는 족했었다. 미상불 그는 한숨을 몰아 내쉬면서 눈에는 눈물까지 어렸다.

그러나 근본을 따지고 보면, 시방 초봉의 한탄이란 그다지 근거가 있는 것이 되질 못한다. 그는 애당초에 제가 박제호의 뜻을 받아 그의 계집이 된다는 새로운 사실에 대해서 전연 비판을 가지지 않고 지나쳐 버렸다. 그랬기 때문에 그 사실―---초봉이 제가 박제호의 계집 노릇을 한다는 사실―---이 가한지 불가한지를 통히 모르고 있다. 하물며, 불가하면 무엇이 어쩌니 불가하다는 것이랄지, 따라서 제가 마음에 정녕 싫은 노릇을 하게 되는 것인지 그것도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하니, 좀 과하게 말을 하자면, 종일 통곡에 부지하마누라상사라는 우스꽝스런 초상이라고도 할 수가 있겠다.

그래서 아무려나 입맛이 날 리가 없고, 야리게 퍼준 밥 한 공기를 억지로 먹는 시늉을 하다가 상을 물렸다.

아직까지도 맥주만 들이켜고 있던 제호가 생 성화를 하면서 더 먹으라고 야단야단한다.

초봉이는 말을 하고 싶지도 않은 것을 마지못해 많이 먹었노라고 대답을 해주고서, 방 머리께 유리창 밖에다가 베란다 본으로 꾸며 논 자리로 옮아 앉았다.

바깥 풍경은 들 가운데 양옥과 화식집들이 드문드문 놓이고 들에는 모를 심은 논과 보리를 베어 낸 밭이 있을 뿐, 퍽 단조했다.

그래도 시원한 등의자에 편안히 걸터앉아 보는 데 없이 벌판을 바라보면서, 막막한 생각에 잠겨들기 시작했다.

제호는 한 시간이나 걸리다시피 밥상머리에 주저앉아 시중 드는 하녀와 구수하니 지껄이면서 맥주를 다섯 병이나 집어 먹고, 밥도 여러 공기 먹는다. 그리고는 데리고 온 초봉이는 잊은 듯이 방석을 겹쳐 베고 버얼떡 드러누워, 이내 코를 골아 젖힌다. 시꺼먼 털이 숭얼숭얼한 정강이를 통째로 드러내 놓고 자빠져 자는 꼬락서니가 보기 싫어서, 초봉이는 커튼으로 몸을 가렸다.

그러나 미구에, 조속조속 달콤하니 오는 졸음에 저도 모르게 앞 탁자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잠이 들 때까지도 그는,

'보아서 마구 내뻗으면 고만이지…….'

이런, 저도 못 미더운 방안장담이나 해두는 걸로 임시의 위로를 삼았다.

느직이 여덟시가 지나서 저녁을 먹고 다시 탕에 들어갔다가 돌아와 보니, 하녀가 널따란 이부자리를 방 한가운데로 그들먹하게 펴놓고 베개 두 개를 나란히 물려 놓는다.

'필경 이렇게 되고 마는가!'

초봉이는 그대로 문치에 우두커니 지여 서서 눈을 내리감는다.

'대체 어째서 이렇게 되어지는 것인고?'

오늘 아침 군산서 아무 일도 없이―---그렇다, 아무 일도 없었다―---그런 아무 일도 없이 떠나온 내가, 이건 꿈에도 생각지 않고 졸가리도 닿지 않고 하릴없이 허방에 푹 빠진 푼수지, 이 밤에 저 박제호와 어엿이 한 이불 속에 들어가다니, 이 기막힌 사실을 무엇이 어떻다고 할 기신도 나지 않았다.

이부자리를 다 펴고 난 하녀는 알심을 부린답시고, 고단하실 텐데 어서 주무시라고 납죽거리면서 물러나간다.

베란다에 나앉아서 초봉이의 난감해하는 양을 보고 헤벌씸 혼자 웃던 제호가 이윽고,

"무얼 저러구 섰으까?"

하면서 고개를 까분다.

"……일러루 와서 이야기나 해보더라구?…… 응? 초봉이."

이야기란 소리에, 마지못해 초봉이는 제호의 맞은편으로 가서 고즈넉이 걸터앉는다.

"그런데에…… 집은 어떡헐꼬?"

제호는 담배를 한 대 피워 물더니 밑도 끝도 없이 불쑥 한다는 소리다.

"집? 요?"

초봉이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쳐든다.

"응, 집…… 우리 살림할 집, 허허허허 제기할 것."

초봉이는, 대체 누구하고 언제 그렇게 다 작정을 했길래 시방 이러느냐고, 짐짓이라도 면박을 줄 수 있는 제 자신이었으면 싶었다.

제호는 기다랗게 설명을 한다.

앞으로 윤희와 이혼을 하기는 하겠으나, 그게 용이한 일은 아니다. 저편이 그런 억척인만큼, 너와 내가 동거를 하는 줄을 알고 보면 심술이 나서라도 이혼에 응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윤희와 이혼이 되는 날까지는 일을 속새로 덮어두는 게 좋겠다. 너를 바로 청진동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지 못하는 것도 그런 곡절이기 때문이니 부디 어찌 생각 마라. 하면 네가 살림할 집은 우선 마땅한 놈으로 골라 세를 얻어 주마.

그렇게 따로 살림을 하고 있노라면, 첫째 뜬마음이 안정이 될 뿐만 아니라 홀몸으로 어디 가서 월급이나 한 이삼십 원 받고 지내는 것 같을 것이냐? 그런 생활보다는 우선 살림 범절만 해도 몇 곱절 낫게시리 뒤를 대주마.

그리고 그렇게 한동안 참고 지내면 윤희와의 문제가 깨끗하게 요정이 난 뒤에 너를 큰집으로 맞아들일 것은 물론이요, 만약 네가 소원이라면 결혼식이라도 하자꾸나.

그러니 다 그렇게 알고 나를 믿어라. 혹시 나를 의심할는지도 모르겠으나 설만들 내가 이 나이를 해가지고 집안간의 세교를 생각하든지, 또 과거에 너를 귀애했던 것으로든지 너를 한때의 노리갯감으로 주무르다가 내버릴 악심으로야 이럴 이치가 있겠느냐. 그러한 불량한 놈이 아니라는 것은 변명을 않더라도 네가 잘 알리라.

제호의 설명은 대개 이러했다. 한 시간 동안이나 안존히 앉아 수선도 떨지 않고 점잖게, 그리고 간곡히 이야기를 하던 것이다.

미상불 초봉이를 제 것 만들겠다는 일념에, 그의 하던 말은 적어도 이 당장에서는 다 진정임에 틀림이 없었다.

초봉이는 제호의 태도와 말이 진실하다고 믿기보다, 진실하겠지야고 믿어 두고 싶었다.

'기왕 이리 된 걸…….'

무슨 차마 못 할 노릇을 죽지 못해 억지로 당하는 것처럼이나 강잉하여 마음을 돌리던 것이다.

그는 제호의 이야기한 '생활의 설계'가 적잖이 만족했다. 욕심 같아서는 기왕이니 제 의향으로, 가령 친정집의 생활 같은 것도 어떻게 요량을 해달라고 말을 해서 다짐 같은 것이라도 받고 싶었으나, 마음뿐이지 처음부터 너무 야박하다는 생각에 입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마침내 제호는 입이 귀밑까지 째지면서, 신혼 축하를 한다고 하녀를 불러 올려 맥주를 청한다.

초봉이는 비로소 제가 제호의 '아낙'이 되는 것에 대한 제 기호(嗜好)를 생각해 본다. 그러나 막상 생각해 보아야 스스로 이상할 만큼 좋고 언짢고 간에 분간을 할 수도 없고, 또 가타부타 간의 시비도 가려지지 않고, 그저 덤덤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제호와 저를 번갈아 보면서 자꾸만,

'내가 저 아저씨의 아낙?'

'저 아저씨가 내 남편?'

해야, 아무래도 실없는 장난이나 거짓말 같아 우습기나 하지 조금도 실감은 나지 않았다. 고태수 적에도 이랬던가 곰곰 생각해 보나, 그러한 것을 마음에 헤아린 기억이 없다.

이튿날 낮 두시, 인제는 정말로 제호의 '우리 아낙'이 된 초봉이는 신혼여행을 미리서 온 셈이 된 유성온천을 떠나 대전으로 버스를 달린다. 달리면서 생각은 두루 깊어 어쩌면 한달지간에 이다지도 갖은 변화를 겪는고 하면, 그것이 모두 제 일이 아니고 남의 일을 잠시 맡아서 해주는 것만 같았다.

초봉이가 제호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서 여관에 묵은 지 나흘째 되는 날이다. 집을 드느라고 제호는 자작소롬한 살림 나부랑이를 자동차에 들이 쟁여 가지고 초봉이와 더불어 종로 복판을 동쪽으로 달리기는 오후쯤 해서고.

"저게 우리 회사야…… 위선 임시루 이층을 빌려 쓰는데, 널찍해서 쓸모가 있어요……."

동관 파주개에서 북편으로 꺾여 올라갈 무렵에, 제호는 길 모퉁이의 이층 벽돌집을 손가락질한다.

"……또오, 저긴 활동사진집…… 우리 괭이 구경다니기 좋으라구, 헤헤."

제호는 유성온천서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부터 초봉이를 '우리 괭이'라고 불렀다.

동관 중간께서 자동차를 내려, 바른편 골목으로 들어서면 바로 뒷골목을 건너 마주 보이는 집이었었다.

송진 냄새가 나는 듯 말쑥한 새 집이, 문등까지 달리고 드높아서 겉으로 보기에는 산뜻한 게 마음에 앵겼다.

대문을 들어서면서 바른편 방이 행랑이요, 다시 유리창을 한 안대문을 들어서면 왼편이 부엌과 안방, 그리고 고패져서 삼간마루와 건넌방이다. 겉으로 보매 그럴듯한 것이 들어와서 보니 좁고 옹색하다. 마당이 앞집과 옆집의 뒷벽에 코를 부딪칠까 조심되게 좁았다. 그러한 마당에다가 장독대도 시늉은 해놓고, 수통도 있기는 있고, 또 좌가 동남으로 앉은 집이라, 겨울볕은 잘 들어도, 방금 닥쳐 오는 여름철은 서쪽이 막혀서 시원할 것 같았다.

그러나 보증금이 이백 원이요 월세가 삼십 원이라는 소리에, 초봉이는 깜짝 놀랐다.

행랑은 지저분할 테니 두지 말자고, 제호가 미리 말하던 대로 비어 있었다.

주인 내외가 들어오니까, 건넌방에서 배젊어도 빛이 검고 우툴우툴하게 생긴 여자가 공손히 마중을 한다.

식모도 이렇게 미리 구해 놓았고, 또 의복 장롱이야 찬장에 뒤주야 부엌의 살림 제구야 모두 차려 놓은 것을 보니, 초봉이는 태수와 결혼을 하던 날, 역시 이렇게 차려 놓은 집을 들던 일이 생각나서 일변 속이 언짢았다.

살림은 쌀나무와 심지어 빗자루 하나까지도 죄다 구비가 되었고, 무엇보다도 반가운 것은 재봉틀이다. 청진동 제호의 큰집에 있던 것을 내려온 듯한데, 초봉이는 윤희가 쓰던 것이거니 하고 보자니 치사스럽기도 하나 군산서 모친과 더불어 재봉틀도 없이 삯바느질에 허리가 아프던 일을 생각하면, 윤희한테 치사스러운 것쯤 아무렇지도 않았다.

결국 초봉이는 다 만족한 셈이다. 다만 화단을 만들 자리가 아무리 해도 없는 것이 섭섭했지만, 그것은 화분을 사다 놓기로 하면 때울 수가 있으리라 했다.

이튿날 아침 제호가 조반을 먹고 회사로 나간 뒤에 초봉이는 모친한테 편지를 썼다.

사연은, 무사히 왔고 또 요행히 오던 길로 몸 편하게 잘 있을 수 있게 되었으니 조금치도 염려 말라고, 그리고 떠나올 때 편지에 말한 대로 집 보증금 주었던 것이며, 시계, 반지, 양복장 등속을 말끔 팔아서 그렁저렁 지내노라면 종차 형편을 보아 좌우간 무슨 변통을 하겠노라고, 아주 간단히 썼다.

짐작건대 혼인 때 쓰고 남은 돈이 몇십 원 있을 테고, 또 제가 시킨 대로 주워 보태면 이백 원 돈은 될 테니, 서너 달 동안은 그렁저렁 지탱할 듯싶어 우선 그걸로 친정은 안심할 수 있었다. 종차는 제호한테 다 까놓고 이야기를 해서 살림을 조략히 해서라도 할 테니 매삭 이삼십 원 가량씩 따로 내려 보내 달라고 하든지, 그러잖으면 달리 무슨 도리를 구처해 달라고 청을 댈 요량이던 것이다.

그것뿐이 아니라, 기왕 계봉이와 형주도 군산서 지금 다니는 학교를 마치는 대로 서울로 데려올 테니, 그 애들의 교육도 제호더러 감당을 해달라고 할 작정까지도 해두기를 잊지 않았다.

편지를 쓰고 나서도 한동안 붓을 놓지 못하고 망설였다.

기왕 편지를 쓰는 길이니, 시방 제호와 만나 다 이렁저렁 되었다는 사연을 눈치만이라도 비칠까 하던 것이다.

마땅히 그러해야 도리는 당연할 것이었었다. 그러나, 그러고 보면 비록 부모 자식 간일망정 깊은 곡절은 모르고, 계집아이가 몸가짐을 그리 헤피 했을까 보냐고 아닌 속을 아실 것 같고 해서 그래 주저를 한 것인데, 역시 아직 이르다고, 마침내 먼저 쓴 대로 그냥 편지를 봉해 버렸다.

석양쯤 제호가 싱글벙글 털털거리고 들어오더니 빳빳한 십 원짜리로 오십 원을 착 내놓는다.

"자, 이게 우리 괭이 한 달 월급이다. 허허허허, 괭이 월급 주는 놈은 이 세상에 이 박제호 한 놈뿐일걸? 허허허, 제기할 것, 허허허허."

"이렇게 많이?"

초봉이는 반색을 하면서 웃는다.

아닌게아니라 이삼십 원 월급이나 받는 것보다 월등 낫다는 타산이야 종차 생각나겠지만, 우선 눈앞에 내논 한 달 용돈 오십 원이 푸짐하던 것이다.

"허허! 그게 그리 대단해서!"

제호는 초봉이의 볼때기를 가만히 꼬집어 주면서,

"……돈 오십 원이 그리 푸달지다구? 쓰기 나름이지…… 그걸랑 둬두구서 반찬거리며, 전등세, 수도세, 식모 월급, 그런 거나 주라구…… 집세는 내가 따루 줄 테구, 또 나무 양식두 따루 딜여 보낼 테니깐, 알겠지!…… 응, 그리구 참, 달리 무엇 살림 장만할 게 있다던지, 옷감 같은 걸 끊느라구 모갯돈이 들겠거들랑, 날더러 달라구 말을 하구."

초봉이는 따로 시방 약삭빠른 셈을 따져 보고 있다.

수돗세, 전등세, 식모 월급 다 치더라도 십 원이 채 못 될 것이고, 반찬거리라야 제호의 밥상을 어설프지 않게 하기로 하더라도 한 달에 이십 원이면 족할 것이고.

그런즉 오십 원에서 이십 원이나, 잘하면 이십오 원씩은 남을 것이니 그놈을 친정으로 내려보내 주리라. 종차야 제호더러라도 다 설파하게 될 값에, 우선 얼마 동안은 친정 권솔들을 먹여 살려라 어째라 하기도 실상 무엇하고 하니 아예 그렇게 하는 편이 옳겠다.

(그래서 미상불 그 다음달, 그러니까 칠월 보름에 가서 보니, 조략히 쓴 보람도 있겠지만 돈이 이십 원하고도 몇 원이 남았었다. 곧 친정으로 내려보냈을 것이로되, 그 동안 편지가 온 것을 보면 아직은 제가 시킨 대로 했기 때문에 그다지 옹색지 않은 눈치여서 그대로 꽁꽁 아껴 두었었다.)

두웅둥 떴던 초봉이의 마음은 차차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것도 처음은, 이 생활이 현실로 믿어지지가 않고, 아무래도 인제 내일 아니면 모레는 다시 무슨 풍파가 일어, 또다시 새로운 그 운명이 시키는 대로 낯선 생활을 맞이하게 되려니 싶기만 했었다.

그러는 동안에 열흘 보름 한 달 두 달, 이렇게 지내노라니까 비로소 마음이 훨씬 가라앉고 생활도 자리가 잡히던 것이다.

그는 서울로 와서 제호와 살게 되면서도, 역시 집과 일에다가 정을 붙였다.

조석으로 집안을 정하게 닦달하고, 세간을 보기 좋게 벌여 놓고, 화분을 사다가 화초를 가꾸고, 재봉틀을 놓고 앉아 바느질을 하고, 그래서 마당에 모래알 하나나 방 안의 전등 덮개 하나에까지도 초봉이의 손이 치이고 마음이 쓰이고 하지 않은 것이 없이 모두 알뜰살뜰했다.

제호는 초봉이가 그러는 것을 너무 청승맞아서 복이 붙지 않겠다고 농담삼아 말리곤 했지만, 초봉이한테는 그것이 낙이요, 그 밖에는 마음 붙일 것이 없었다.

아침에 제호가 회사로 나가고 나면 초봉이는 그렇게 심심치 않은 하루를 보내다가, 저녁때부터는 제호의 착실한 아낙 노릇을 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제호가 웃으면 같이 웃어 주고, 이야기를 하면 말동무가 되어 주고, 타고난 솜씨에다가 마음까지 써서 조석을 어설프지 않게 살뜰히 공궤하고, 제호가 미리서 말을 이르지 않아도 노상 즐기는 맥주 몇 병은 얼음에 채놓았다가 저녁 밥상머리에 내놀 줄도 알고…….

이렇게 어찌 보면 눈치빠른 애첩 같기도 하고, 정다운 아내나 착한 주부 같기도 했다.

그러나 실상은 그것이 무슨 제호한테 탐탁스레 정이 있어 그러는 게 아니고, 그런 것 역시 집 안을 깨끗이 치우고, 화초를 가꾸고, 장롱을 훤하게 닦달을 하고, 조각보를 새기고 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 없이 다만 제 재미를 위해서 하는 노릇일 따름이었었다.

이러구러 그는 한갓 승재가 가끔 생각나는 때말고는 이것이고 저것이고 간에 흥분도 없으려니와 불평도 없이, 일에다가 마음을 붙여서 그날그날 지내는, '로보트' 되다가 만 '사람' 노릇을 하기에 골몰하던 것이다.

제호더러는 군산서부터 아저씨라고 불렀고, 친아저씨같이 따랐고, 미더워했고, 그랬기 때문에 시방도 그를 아저씨로 여기고 미더워하고 흔연히 대답을 하고 하기는 해도, 그 이상 남녀간의 짙은 흥이라든가, 부부다운 정이며 의(誼) 같은 것은 우러나지도 않았고 우러날 건지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승재를 그리워하는 회포가 깊었다. 오랜 오랜 옛날에 무엇 소중한 것을 통째로 어디다가 잃어버리고, 그 대신 그득한 슬픔 하나를 얻어 가지고 온 것같이 마음이 허전하니 외롭고, 그럴 때면 그것이 바로 승재가 그리워지는 그 전 순간이곤 했다. 보면 그 다음 순간 영락없이 승재 생각이 나던 것이다.

이것이 초봉이한테는 단 한 가지의 윤기 있는 낙(樂)―---괴로운 낙이나, 즐겁게 괴로운 낙이었었다.

그리고 겨우 이것 한 가지로 해서, 그는 오십 넘은 독신의 가정부(家政婦)가 아니고, 아직 청춘이라는 구실(口實)이 되던 것이다.

이와 반대로 제호는 오후와 저녁이면 초봉이의 옆을 떠나지 않았다.

적이나 하면 삼방(三防), 석왕사(釋王寺) 같은 데로 초봉이를 데리고 피서라도 가고 싶었지만, 새로 시작한 회사일이 하루도 몸을 빼칠 수가 없다.

그 대신 거의 매일 밤, 초봉이를 데리고 본정으로든지 종로든지 산보도 나가고, 나갔다가 눈에 띄는 것이면 옷감이든지 집안 세간이든지 곧잘 사주곤 했다. 그는 초봉이의 마음을 사자고 여간만 정성을 들이는 게 아니었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살림을 시작한 지 바로 사흘째 되던 날인데, 초봉이가 부엌에 있다가 저녁상을 들고 들어서니까 제호는 밑도 끝도 없이,

"아니, 초봉이가 그런데, 그게 어떻게 된 셈이야?"

떼어 놓고 하는 소리라, 초봉이는 영문을 몰라 뚜렷뚜렷하다가, 혹시 형보의 사단이나 아닐까 하고 가슴이 더럭 내려앉았다.

"글쎄 내가 말야……."

제호는 그러나 숟갈을 들면서 심상히 설명을 하던 것이다.

"……윤희를 보내구 나서는, 이내 다른 여자와는 도무지 상관을 한 일이 없었는데, 허허 그거 참…… 아 글쎄 ×× 기운이 있단 말야!…… 허허 제기할 것, 늙은 놈이 이거 망신이지?…… 아무튼 그 사람 고 무엇이라는 친구가 초봉한테 골고루 못 할 일을 하구 죽었어!"

이렇게까지 말을 해도, 초봉이는 충분히 그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제호가 그래서 ××이라는 것에 대해 한바탕 기다랗게 강의를 하니까, 그제야 초봉이는 고개를 숙이고 들지 못했다.

태수와 처음 결혼을 하고 나서 며칠 지나니까, 확실히 시방 제호가 말한 대로 그런 증세가 나타났던 것을 기억할 수가 있었다.

"거 기왕 그리 된 걸 할 수 있나. 인전 치료나 잘 하두룩 해야지, 허허허허 제기할 것…… 뭐 괜찮아 일없어!"

제호는 속이야 어쨌든 겉으로는 이렇게 웃어 버리고는 오히려 말 낸 것을 후회하여 초봉이의 무렴을 꺼주느라고 애를 썼다.

이튿날부터 주사며 약이며 일습을 장만해다 놓고는 제법 익숙하게 주사도 놓아 주고, 저도 놓고, 내외가 앉아서 그다지 유쾌하다고는 할 수 없는 치료를 그러나 재미삼아 농도 삼아 계속을 했었다.

이렇게 범사에 제호는 초봉이를 다독거리고 어루만지고 하기를 잊지 않았다.

그는 한동안 아내 되는 윤희의 히스테리와 건강치 못한 것으로 해서 가정의 낙은 고사하고 어금니에서 신물이 났던 참인데, 일찍이 마음이 간절했던 초봉이를 얻어 이렇게 아늑한 가정을 이루고 보니 이래저래 초봉이가 귀엽고 소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기야 초봉이가 새침하니 저는 저대로 나돌고 속정을 주지 않아서 흥이 미흡하고 헤먹는 줄을 모르는 바도 아니요, 사실이지 언제까지고 이대로 알찐 맛이 없이 지내라면 그것은 마치 석고로 빚은 인형을 데리고 사는 것 같아 죽여도 그 짓을 오래 두고는 못 해낼 듯싶었다.

그러나 저도 사람이거든 인제 정이 쏠리는 날이 있겠지, 제 정을 앗자면 내가 더욱 정답게 굴어야지, 이렇게 뒤를 보자고 온갖 정성을 다 들였다. 혹시 초봉이가 새침하든지 하면 제 딴에는 버엉뗑하고 흥을 내준다는 게,

"우리 괭이가 기분이 좋잖은 게로군?…… 응?…… 아나 괭아, 조굿대가리 주께 이리 온."

하면서 손을 까불까불, 장난을 청한다.

그럴라치면 초봉이는,

"말대가리 말대가리."

하면서 눈을 흘기고, 영 심하면 정말 고양이같이 달려들어서는 제호의 까부는 손등이고 빈대머리진 이마빡이고 사정없이 박박 할퀴어 준다. 여느때는 들어 보지도 못한 쌍스런 욕을 내갈기기도 한다.

마음 심란하던 차에 탐탁하지도 않은 사람이 괜히 앉아서 지분덕거리는 게 더욱 싫어서 자연 소갈찌를 내떨곤 하던 것인데, 속을 모르는 제호는 제호대로 그럴 적마다 윤희의 히스테리의 초기 적을 생각하고, 초봉이도 그 시초를 잡는 거나 아닌가 싶어 혼자 속으로 입맛이 쓰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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