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류/제14장
슬픈 곡예사(曲藝師)
[편집]초봉이가 가만가만 마루로 나서는데, 부엌에서 식모가 대문간으로 나가더니 조금 후에 도로 들어오는 그 뒤를 따라 처억 들어서는 건 평생 가도 잊혀지지 않을 곱사 장형보다.
따라 들어서는 형보를 돌려다보고 식모가 무어라고 시비조로 말은 하는 것이나 퍽 익숙한 눈치고, 또 형보 역시 낯설잖은 태도로, 아니 뭐 괜찮으니 염려 말라고 하고 하는 게 이상히 보자면 볼 수는 있는 것이지만, 초봉이는 그런 걸 여새겨볼 정신이 없었다. 그는 선뜻 형보가 눈에 보이자 (실상은) 보기 전부터 놀라 가지고 있었다.
피는 한꺼번에 얼굴로 치달아 두 관자놀이가 터질 듯 우끈거리고 몸은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식모가 앞으로 와서, 아 저이가 아씨를 뵙겠다구 하길래 밖에서 기다리라니깐 안 듣구서 저럭허구 따라들어온대유, 하는 성화도 쿵쿵 가슴 뛰는 소리에 삼켜지는 듯 똑똑히 알아듣지 못했다.
이윽고 초봉이는 강잉해서 정신을 수습하여, 내가 왜 저 사람을 이대도록 무서워할까 보냐고 숨을 깊이 들이쉬고 고개를 꼿꼿이 쳐들었다. 그래도 종시 가슴은 들먹거리고 몸이 떨리는 건 어찌할 수가 없었다.
언제 보아도 홀아비 꼴이 드러나게 꾀죄죄 때가 묻은 주제다. 홀조군하니 풀이 죽은 당목 두루마기에, 두루마기 밑으로 처져 내린 옹구바지는 더 시꺼멓다. 군산서 볼 때보다 는 것은 그리 낡지 않은 손가방 한 개다.
이 꼬락서니에 고개를 되들고 조롱을 하듯 비죽이 웃으면서 곱사등을 흔들흔들 그는 서슴잖고 대뜰로 올라선다.
"실례합니다. 에, 그새 다아 안녕하십니까?"
"어째서 외간 남자가 남의 집 내정을 함부루 들어오구 있어요!"
초봉이는 눈을 아니꼽게 가라뜨고 형보를 내려다보다가, 떨리는 음성으로 준절히 나무란다.
"네에, 잠깐 좀 뵐 일이 있어서요……."
형보는 네까짓 게 암만 그래 보아라 하는 듯이, 어느새 마룻전에 가서 척하니 걸터앉는다.
"……그새 어 참, 다아 평안하시구, 또오 궁금한 건 그 어린것인데, 잘 놀기나 하나요?"
이 사람을 다뿍 깔보고 덤비는 형보의 괘씸스런 태도에 초봉이는 성이 나기보다 어처구니없었겠지만, 그러나 어린것이라는 소리에 놀라 겨우 가라앉던 정신이 도로 황망해졌고, 그러느라고 다른 경황은 통히 나지 않았다.
"잘 놀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으루 그래요? 일없으니 어서 가요!"
침착한 것과 초조한 것의 승부는 빠안한 거라 싸움의 첫합에 초봉이는 우선 지고 넘어가던 것이다.
"어 참, 그리구 박제호 씨 그분두 좀 뵐 텐데, 일곱시까지면 들어오신다구요?"
이 소리에 초봉이도 더 놀랐거니와, 부엌문으로 끼웃이 내다보고 섰던 식모는 질겁을 해서 자라 모가지같이 고개를 오므라뜨린다.
식모는 그새 두 달 장간이나 가끔 대문 앞에 와서 어물거리는 형보한테 번번이 돈장씩 얻어먹는 맛에 주인집 내정 이야기를 속속들이 알려 바쳤었다. 형보의 계책을 알고 그런 건 아니나 아무튼 끄나풀 노릇을 한 셈이었었다. 그랬는데, 오늘은 아주 어엿이 이리 오너라 하고 찾더니, 바깥 주인의 동정을 물어 보고는 처억 안에까지 들어와서 맹랑한 수작을 붙이고 하던 끝에 제게서 들은 말을 내놓고 하는 게 아무래도 그 동안 저지른 소행이 뒤집혀지는 것 같아, 그래 겁이 나던 것이다.
초봉이는 형보가 제호를 만나겠다고까지 말하는 것은 분명 송희를 제 자식이라고 뺏어 가자는 배짱이거니 해서 그래 겁이 났다.
아무런들 송희야 뺏길까마는, 우선 제호는 여태 모르고 있는 낡은 비밀 하나가 드러날 테니 걱정이다. 거기 연달아 제호도, 그러면 제 아비가 나선 맥이니 차라리 내주고 말자고 할 것이요, 그러잔즉 두 사내가 우축좌축 하는 틈에 끼여 송희를 안 뺏기려고 혼자서 바워 내기가 좀쳇일이 아닐 것이다.
초봉이는 어쩔 줄을 몰라 쩔쩔맬 것 같았다. 형보는 보니, 바로 태평으로 앉아 뻐끔뻐끔 담배를 피우고 있다.
"왜 가라는데 안 가구서 이래요?…… 괜히 좋잖은 일 보기 전에 냉큼 나가요…… 내 원 별, 참……."
마음이 초조한만큼 초봉이는 말을 하는 데도 음성에 그러한 기운이 완구히 드러난다.
"가기가 그리 급한 게 아니니, 위선 우리 이야기나 좀 해봅시다그려?"
형보는 마룻전에 걸트린 채 한 다리를 접쳐 올려놓고, 초봉이한테로 처억 돌아앉는다.
초봉이는 문득, 내가 어쩌니 오늘날 와서까지 이 위인한테 이런 해거를 당하는고 하는 생각이 들면서 더럭 분이 치달아 올랐다. 그리고 분이 나는 깐으로는 당장 왜장을 쳐서 동네 사람이라도 청해 오고, 순사라도 데려다가 혼을 내주기라도 하고 싶었다. 꼭 그랬으면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러자면 그야말로 동네가 시끄러울 뿐 아니라 막되어 먹은 이 위인의 행티에 그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올지 모르는 걸 섣불리 건드렸다가 지나간 사단이나 뒤집히고 보면 나만 망신을 하고 말겠으니, 생각하면 그도 못 할 일이고 분해도 참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이 위인을 어서 그저 쫓아 보내는 게 상책인데, 그러자면 제가 할 말이 있다고 하니 아무려나 말을 시키고 나서 어떻게든지 하는 게 좋을 성불렀다. 이것이 약점과 약한 마음을 지닌 탓이요, 그래서 그게 형보의 생판 억지와 떼에 옭혀 드는 시초인 줄이야 초봉이 자신은 알지도 못한다.
"이 애 초봉아?"
별안간 형보는 지금까지 공대하던 말투는 딱 걷어치우곤 활짝 까놓고서 수작을 붙이고 덤빈다. 다만 식모는 꺼리는지 말소리만은 나직나직…….
초봉이는 형보의 무례하고 안하무인한 태도에 속이 불끈했으나, 이왕 제 이야기를 들어 보자던 참이라서 분을 꿀꺽 삼켜 버린다.
"에헴……."
형보는 목을 한번 가다듬고 담뱃재를 툭툭 털고 하더니,
"……이야길 간단하게 하려 들면 아주 간단하다, 응? 무엇인고 하니…… 저 자식은 내 자식이구…… 똑똑히 들어라……."
발꿈치로 조지듯이 말끝을 한번 누르고는 바짝 고개를 되들어, 넌지시 기둥에 가 기대 섰는 초봉이를 올려다본다. 그러면서 콧구멍을 벌씸벌씸, 입을 삐쭉 하는 게,
'자아, 어떠냐?'
하는 꼴이다.
초봉이는 속으로,
'역시 그런 수작이로구나!'
하고 다시금 가슴이 울렁거렸으나, 그런 내색은 애써 감추고서 꼿꼿이 형보를 마주 내려다보다가,
"별 미친 녀석을 다 보겠네!"
하고 외면을 해버린다.
"흥 암만 그래두 소용없느니라. 그리구 또, 들어 보아라…… 자식이 내 자식일 뿐 아니라, 너는 내 계집이야, 내 계집…… 그러니 너는 자식 데리구 나를 따라와야 한다, 나를 따라와야 해……."
초봉이는 차라리 실소를 할 뻔했다. 자식이 형보 제 자식이라는 데는 초봉이도 아니라고 우겨 댈 거리가 없다면 없을 수도 있지만,
'너는 내 계집이다.'
하는 데는 기가 막히는데,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자식 데리고,
'나를 따라와야 해…….'
하니 생떼가 아니라면, 미친놈의 수작이라고밖에는 더 달리 보이지가 않았다.
"그래, 할 말이라는 게 겨우 그거더냐?"
초봉이는 시쁘듬하게 형보를 내려다본다.
"그렇다. 그러니깐, 어서 기저귀 뭉뚱그려서 들쳐 업구 날 따라나서거라."
"괜히 허튼 수작 하지 말구 냉큼 나가. 저엉 그렇게 추근거리다가는 순사 불러 댈 테니…… 무슨 권한으루다가 남의 집 내정에 들어와설랑은 되잖은 소릴 지껄이는 게냐? 법 무서운 줄두 모르구서……."
"법? 흐흐 법?"
형보는 저야 기가 막히다고 상을 흐트린다.
"……법? 그거 좋지! 그럼 그렇게 허까? 내라두 가서 순사라두 우선 불러오라느냐? 순사 세워 놓구 담판하게?"
"무척 순사가 네 편역 들어줄 줄 알았더냐?"
"이 애 초봉아! 아니껍다! 내가 순사가 무서울 배면 이러구서 네게 오질 않는다. 불러올 테거던 불러오느라, 가택침입죄루다 이십구 일 구류밖에 더 살라더냐? 그보다 더한 몇 해 징역두 상관없다. 종신 징역이나 사형은 아닐 테니깐, 징역 살구서 뇌여 나오는 날이면, 응? 알겠니?"
형보는 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뽀도독 소리가 역력히 들리게 이를 간다.
"……약차하면 순사 보는 데서, 저 어린것을 칵 찔러 죽이구, 아주 시언하게 그래 버리구서 잽혀가구 말 테다. 순사 불러 댈 테거든 불러 대라, 불러 대!"
초봉이는 고만 푸르르 몸을 떤다. 그가 순사를 불러 댄다고 한 것은 정말 순사를 불러 댈래서 한 말이 아니라 엄포를 하느라고 그런 것인데, 형보는 그쯤 서둘러 대면서 덜미를 치고 나서니, 정말로 순사를 불러와야 하게 일은 절박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막상 순사를 불러 대고 보면 저런 환장한 놈인 걸, 지레 덤태가 날 것이고, 그러니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마음이 다급하기만 했다.
당초에 형보는 초봉이를 넘보고서 하는 수작이요 염량은 말짱하여 제가 먼저 겁을 먹고 있는 터이니, 만일 초봉이가 속으로야 무섭고 겁이 나고 하더라도 그런 내색은 보이지를 말고서, 이놈 고얀놈이라고 엄포는 못 한다 할 값에 말 한마디 눈짓 한번이라도, 이 녀석아 네 소리는 미친 소리만도 안 여긴다는 태연한 태도만이라도 보이기만 했더라면 이 싸움에 그리 문문히 넘어 박히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 것을 침착을 잃고 압기가 되어 가지고는 생판 부르대는 억지떼와 맞서서 승강이를 하니 아무러면 형보의 억지를 이겨 낼 리 만무한 것, 필경은 되잡칠 수밖에는 없던 것이다.
"네는 혹시, 혹시 말이다……."
한참이나 있다가 형보는 훨씬 목소리를 눅여 가지고 조곤조곤 타이르듯,
"……저것 어린것이 고태수 자식이라구 요량을 대나 부다마는 그건 잘못 알았다. 고태수루 말하면 에, 몇 해를 두구 화류계 계집이며, 염집 계집을 줄창 상관했어두 자식이라구는 배본 적이 없더니라. 아니, 그런 걸 너허구 한 열흘 살었다구 자식이 생겼을 상부르냐? 응?"
"……"
"그리구 또오, 너루 말하면 나허구는 어떻게 돼서 그랬던지 간에 하룻밤 상관이 있었을 뿐더러, 에, 고태수가 생전에 내게다가 너를 맡겼더란 말이다, 응?…… 아 여보게 형보, 내가 죽은 뒤엘라컨 우리 초봉일 거두어 줄 겸해서 아주 자네 마누랄 삼아 주게, 이런 말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더란다? 증인이 멀쩡하게 살어 있다!"
초봉이는, 속없는 태수 그 위인이 족히 그런 소리도 지껄이기는 했으리라고 생각하면서,
"내가 머, 느이 집 종의 새끼더냐? 느이끼리 맘대루 주구받구 하게?"
"아니 그래, 네가 정녕 내 말을 못 듣겠단 말이냐?"
"어째서 내가 네 말을 들어?"
"정말이냐?"
"그래서?"
"그렇거들랑, 자식을 위선 이리 내놔라."
"나를 목을 쓸어 봐라 "
"자식두 못 내놓겠단 말이지?"
"도둑놈! 날부랑당 같은 놈!"
"정말 못 내놓겠느냐?"
"아니면?"
"알았다. 너두 자식 소중한 줄은 아나 부구나?"
초봉이는 대답을 않고 안방 문지방으로 물러선다. 무심결에 제 몸으로 송희를 가려 주고 있던 것이다.
"……네가 자식이 중할 양이면, 나는 더하다. 아무리 내가 이런 병신이기루서니 머, 속 창자까지 없을 줄 알았드냐? 흥!…… 너두 생각을 해봐라? 어느 시러베 개아들놈이, 그래 눈 멀뚜웅멀뚱 뜨구서 제 자식을 의붓애비한테 뺏기구 가만 있을 놈이 어디 있다드냐? 응?…… 괜히 어림도 없다, 흥!…… 자아 보아라!"
형보는 잠깐 말을 멈추더니 조끼 호주머니를 부스럭부스럭하다가 짤막한 나무동갈 하나를 뒤져 내어 손에다 쥔다. 동글납작하고 한쪽으로 금이 간 하얀 나무동갈, 그건 첫눈에 아이쿠치(단도)임을 알 수가 있었다. 초봉이는 그것이 칼인 줄도 알았고 그래서 무섭기도 했으나, 실상 알기 때문에 짐짓 모른 체하느라고 고개를 돌린다.
"……너, 이거 알지?"
형보는 한 손으로 손가락을 놀려 칼집을 슬며시 반쯤 뽑아 가지고 쳐들어 보인다.
"오냐, 죽일 테거든 죽여라! 죽여두……."
"죽이라? 왜 너를 죽일 줄 알구?…… 가만있거라……."
형보는 칼집을 맞추어 도로 조끼 호주머니에 집어넣으면서,
"……너는 종차 문제구, 네가 보는 네 눈앞에서 저걸, 자식을 말이다, 마구 칵 찔러 죽일 테란 말이다. 자식을……."
초봉이는 형보가 금시로 칼을 뽑아 들고 달려드는 것을 막기나 하려는 듯이 두 팔을 벌려 문지방을 가로막는다. 노상 위협만이 아니고, 칼까지 품고 왔을 제는 참말 송희를 죽이려고 덤빌 줄 알았던 것이다.
인제는 기가 죽어서 무어라고 마주 악다구니를 할 기운도 안 나고, 몸은 사시나무 떨리듯 떨린다. 눈은 실성할 듯 휑하니 벌어진다.
형보는 초봉이의 사색 질린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신이 나는지 더욱 독살스럽게,
"……흥! 남의 의붓애비한테 뺏기구 말 테면 그까짓 것 죽여 버리기나 하구 말지, 그냥 두구 볼 낸 줄 알았드냐? 어림없어…… 날 마다구 하는 네 심통머리가 얄미워서라두 네 눈구멍으루 보는 데서, 너두 재랄복통이 나서 자진해 죽으라구, 요걸 요렇게 훑으려 쥐구는 거저 칵……."
예까지 형보는 꼬박꼬박 제겨 가다가 문득 낭패한 기색으로 말을 뚝 그친다.
만약 말을 그렇게 했다가 초봉이가 무서워서 그랬던지 귀찮아서 그랬던지 아무튼 옜다 네 자식, 하고 선뜻 내주는 날이면 그런 낭패라고는 없을 판이다.
에미를 낚아 가자는 게 주장이요, 자식이야 실상인즉 어느 놈의 씨알머린지 모르는 것, 가령 또 내 자식이라 치더라도 꿈에도 생각잖는 것, 그러니 그걸 데려다가는 무얼 하느냔 말이다. 진소위 죽은 토끼 잡으려고 산토끼 쫓는 셈이지.
형보는 그래서 말이 잘못 나간 것을 깨닫고 당황하여 그놈을 둘러맞출 궁량을 부산나케 하고 있는데, 그러나 실상 초봉이한테는 도리어 그게 효과가 컸다.
형보의 눈 하나 깜짝 않고 딱 버티고 앉아서 따북따북 말을 뱉어놓다가 필경,
'……요렇게 훑으려 쥐고 칵…….'
찔러 죽인다는, 손짓 눈짓 몸짓을 다 겹친 마지막 대목에 가서는 그만 아이구머니 하고 외칠 뻔했다.
눈을 지그시 내리감는다. 그러나 감는 눈에는, 칼을 뽑아 쥐고 헤번덕거리는 형보와 피투성이가 되어서 바르르 떨고 엎어진 송희의 환영이 역력히 나타나 보인다. 푸르르 떨면서 눈을 번쩍 뜨고 무심결에 뒤를 돌려다본다. 의외던 것같이 송희는 고이 자고 있다. 호 하니 한숨이 나왔으나 안심은 순간이요, 마구 미칠 것 같다. 소리를 치자니 단박 칼을 뽑아 들고 덤빌 것이고, 송희를 들쳐업고 달아나자니 몇 걸음 못 가서 잡히고 말 것이다.
'어떡하나?'
대답은 안 나온다.
'저놈을 그저…….'
총이 있으면 두말 않고 탕 하니 쏘아 죽일 것 같다.
마침 보니 형보의 머리 위로 굵다란 도리가 건너갔다. 저놈이 뚝 부러져 내리면서 정통으로 그저 저 대가리를 후려갈겼으면 캑 소리도 못 하고 직사할 것 같다. 속으로 제발 좀 그래 줍시사고 축수를 한다. 어쩌면 방금 우지끈 딱 하고 내려앉는 성싶으면서도 치어다보아야 그냥 정정하니 얹혀 있다.
"그러구저러구 간에 말이다……."
이윽고 형보는 둘러댈 말을 장만해 가지고 새 채비로 나선다.
"……설사 네가 순순히 자식을 내준대두 나는 네가 보는 데서 죽여버릴 수밖에 없다. 죽여 버리는 수밖에 없을 것이…… 아 글쎄 이, 홀애비놈이 아직두 젖두 안 떨어져서 빼액빽 보채구 하는 걸 데려다가 어떻게 길른단 말이냐?…… 길를 수도 없거니와 액색해서 나 같은 성미 팔팔한 놈은 그런 꼴 눈으로 볼 수두 없구…… 그러니 눈 새까만 게 불쌍은 해두 죽여 버리는 수밖에 더 있느냐?…… 그럴 게 아니냔 말이다, 이치가…… 생각을 해봐? 이치가 그럴 게 아닌가…… 머, 옛놈은 어린 자식 있는 사내를 계집년이 버리구 달아나니깐, 자식을 자반을 만들어서 짊어지구 그년을 찾으러 다녔다더라만, 다아 그게 애비 된 놈의 마음을 생각해 보면 근경이 그럴 만도 하니라."
형보는 담배를 갈아 피우는 체하고 말을 잠깐 멈춘다.
초봉이는 형보의 하는 소리가 귀로 들어오지도 않는 듯이 외면을 하고 서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는 차라리 시방 제호라도 어서 들어와 주었으면 싶었다. 이렇게 되었으니 나 혼자서는 좀체로 바워 내기는 벌써 글렀고 한즉 제호는 기운도 세고 하니깐 어서어서 들어와서 저 위인을 혼띔을 주어서 쫓아보냈으면 하던 것이다. 제호는 사람이 너그럽고 하니까 지금 와서 낡은 비밀 하나가 드러났다고 어쩔 사람이 아니고, 또 가령 그걸로 제호한테 무안을 본다손 치더라도 형보에게 끝끝내 화를 당하느니보다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서…….
돌려다보니 마침 송희가 잠이 깨어 기지개를 쭈욱 펴더니, 눈을 둘레둘레하면서 때꾼한 목소리로 엄마를 부른다. 자고 깨면 맨 먼저 부르고 찾는 엄마, 이 근경이 새삼스럽게 반가우면서도, 그러나 단지 반갑지만 않고 눈물이 솟아났다.
송희는 엄마의 품에 담숙하니 안기어 젖을 빨고 있다. 누가 뺏어가는가 봐 한 손으로는 남은 젖을 간지게 움켜쥐고, 한 손으로는 꼼지락꼼지락하는 제 발을 잡아당기다가는 놓치고 그놈을 도로 잡으려고 바둥거리고 한다. 그 무심한 양이 들여다보고 있는 초봉이도 절로 따라 무심해지고, 방금 눈앞에 닥쳐온 위험이나 곤경은 저기 먼 데서 들리는 남의 이야긴가 싶기도 했다.
일곱시가 거진 다 되어, 가슴을 조마조마 죄면서 기다리던 제호가 술병을 손에 들고 터덜터덜 대문간으로 들어선다. 초봉이는 처음으로 제호라는 사람이 소중하고, 그가 집에를 들어오는 발길이 천하에 반가웠다.
"어허, 내가 이거 시간을……."
제호는 무심히 떠들고 들어서다가 주춤하고 서서 뚜렛뚜렛한다.
형보는 헴 밭은기침을 한번 하고, 걸터앉았던 마룻전에서 천천히 대뜰로 내려선다. 제호는 이 낯선 나그네를 의아스러이 짯짯 훑어보다가 때마침 부엌문으로 내다보는 식모한테로 눈을 돌린다. 그러나 식모는 무어라고 말을 해야 할지를 몰라 민망해서 고개를 숙여 버린다.
제호는 저도 모르게 가만가만 걸어들어오다가 초봉이가 송희를 안고 반기듯 문지방에 기대 서는 눈과 서로 마주치자, 힐끔 형보를 돌려다보면서 초봉이더러 이게 웬 사람이냐고 말없이 묻는다. 초봉이는 무슨 말을 할 듯이 눈이 빛나다가 이어 새침하고 외면을 한다.
그럴수록 제호는 점점 더 선잠을 깬 것처럼 얼떨떨해서 어릿거린다. 대체 웬 낯모를 곱사며, 여편네는 또 왜 저렇게 샐쭉하는고? 기색이 저리 나쁜 게 이 괴물 같은 나그네와 무슨 상지를 한 모양인데, 상지? 상지라니?
혹시 빚에 졸리나? 그렇지만 모르면 몰라도 빚은 졌을 리도 없거니와, 설사 그런 사단이라고 하더라도 빚이면 빚이지 저대도록 사색이 질리게까지 상지가 되었을 리야 없을 것인데…….
잠깐 동안이라지만 제호는 속이 갑갑해서 혼자 궁리 궁리, 그러느라고 종시 어릿어릿하면서 마루 앞으로 가까이 온다.
형보는 맞이하듯 모자를 벗어 들고 가슴을 발딱 뒤로 젖히면서,
"에, 복상(朴公)……이십니까?"
하고 되바라지게, 그러나 공순히 인사를 건넨다.
"네에! 내가 박제홉니다……."
제호는 속이야 이 기괴하고 추하게 생긴 인물이 마땅찮을 뿐더러, 더구나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의 침노로 해서 집안이 이렇게 불안하게 된 데 대한 적의도 없지 못했으나 저편에서 의외로 점잖게 하고 보니 그게 또한 이마빡을 부딪뜨린 것 같아 황망히 흔연한 인사 대답을 하던 것이다.
그리고는 이어,
"……게, 뉘신지요?"
하고 묻는다.
"네에, 나는 어, 장형보라구 합니다. 어, 참……."
"장형보 씨? 장형보 씨? 네, 네."
"어 참, 복상을 좀 뵐 양으로 찾아왔더니 방금 출입을 하셨다구 해서, 그러나 곧 들어오신대길래, 어 참 실례를 무릅쓰구서 이렇게 기대리구 있었습니다. 그리구, 또오……."
"아, 네에 네, 그러시거들랑……."
"그러구 참, 저 부인 되시는 정초봉 씨루 논지하면 진작부터 잘 알구 해서, 좀 허물이 더얼 하길래……."
"네에 네, 아 그러시거들랑 절러루 좀 올라앉아 기다리실걸…… 자, 올라오십시오."
제호는 어디라 없이 하는 투가 아니꼽기는 했으나, 그래도 생김새와는 달라, 공순한 데 적이 적의가 풀렸다.
앞을 서서 올라선 제호가 청하는 대로 형보도 마루로 따라 올라간다.
"여보, 거 손님이 오셨거들라컨, 거 좀…… 저, 방석 좀 이리 주구려?"
괜히 한참 덤비는 제호를 초봉이는 좋잖게 거듭떠보다가 또 외면을 한다.
"……허허, 이런 놈의! 이 방석은 다아 어디루 갔누? 거 원 손님이 오셨거들랑 좀 올라앉으시게두 허구 허는 게 아니라…… 그놈, 새끼가 안 떨어질려구 해서 미처 손이 안 갔는 게지…… 가만있자, 방석이……."
제호는 혼자 부산나케 쑹얼거리면서 안팎으로 끼웃거린다.
초봉이는 제호가 막 들어서자 선뜻 반가운 마음에, 그놈이 시방 칼을 품고 와서 우리 송희를 죽인다고 한대요, 하고 역성을 들어 달라는 원정을 하고 싶었다. 우선 그랬으면 여태까지 끕끕수를 받던 반 분풀이는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다시금 생각을 하니, 막상 그랬다가 저놈이 단박 칼을 뽑아 들고 덤빈다든지, 그래서 제호와도 당장에 툭탁 싸움이 얼려 붙는다든지 하고 보면, 혹시 조용히 조처를 할 수가 없지도 않았을 일인 걸 갖다가 자는 호랑이 코침 주더라고 지레 탈을 내놓고 마는 게 아닐지도 모르겠고, 하니 차라리 아무 말도 말고 제호한테 떠맡기고서 아직 하회를 보아 보느니만 같지 못할 것 같다는 것이었었다.
사실 제호한테다 맡겨만 놓으면 사람이 어디로 보나 형보보다는 한길 솟으니까 몰릴 까닭이 없이 버젓하게 일 조처를 낼 것이고, 그러나 만약 제호로서도 어찌할 수 없이 끝내 꿀리거들랑 그때는 같이 나서서 둘이 협력을 해가지고 하면, 가령 악으로 결더라도 형보 하나쯤은 못 바워 낼 성부르진 않던 것이다.
제호는 한참이나 두리번거리고 다니다가 방석을 찾아 가지고 나와서 주객이 자리를 잡고 앉는다. 부지중에 그리 된 것이겠지만, 손 형보가 안방 쪽으로 앉고, 주인 제호는 안방께가 마주 보이게 건넌방 쪽으로 앉아졌다.
"자아 담배 피우십시오."
제호는 양복 호주머니를 뒤져 해태곽을 꺼내 놓다가 다시 일어서서 마루 구석에 있는 헌 재떨이를 집어 온다.
초봉이도 문턱 안으로 넌지시 도사리고 앉는다. 편안히 앉지 못하는 것은, 제호가 미더운만큼 겁먹었던 마음이 풀려 차차로 속이 든든하기는 하다지만, 그러나 사세가 죽고 살기보다도 더 절박한 살판이라 자연 형세를 주의하느라고 저도 모르게 전신이 긴장해진 표적일 시 분명하다.
"어, 복상께서두 연전에 한동안 군산 가서 계셨지요? 저어 제중당……."
형보는 제 담배 피죤을 꺼내어 한 개 피워 물고는 말 시초를 이쯤 한가롭게 내놓는다.
"네, 그렇습니다. 그러면 댁에서두 군산 계셨던가요?"
"네, 한 삼사 년이 아니라, 그럭저럭 사오 년 군산서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여름참에야 서울루 다시 올라왔습니다…… 머 변변찮은 거나마 영업을 한 가지 시작하게 돼서……."
"네에 네, 거 대단 좋은 일이시군요."
제호는 묻지도 않은 형보의 그 영업이라는 것을 치하하는 게 아니고, 혼자 짐작되는 것이 있어 고개를 연신 끄덕거린다.
이 사람이 초봉이를 안다고 하니, 그러면 혹시 초봉이네 친가에서 무슨 까다로운 교섭을 부탁 맡아 가지고 온 것이나 아닌지? 그래서 초봉이도 제 비위에 안 맞는 전갈을 하니까 저렇게 뾰로통한 게 아닌지? 매양 그런 내평이겠지…….
형보는 훨씬 더 점잔을 빼가면서,
"어 참, 군산 있을 때는 복상을 뵙던 못 했어두, 성화는 익히 듣고 있었습니다. 다아 내가 위인이 옹졸해서 인사를 진작 이쭙덜 못하구 참……."
"온 천만에! 그야 피차 일반이지요…… 아무튼 군산 계셨다니 고향 친구를 만난 것이나 진배없이 반갑습니다."
"네에, 나 역시 참 반갑구 다아……."
형보는 좀체로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우선 장황한 한담으로 초를 잡는다.
형보는 제가 외양으로부터서 한팔 꺾이는 곱사요,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지 처음 대하는 사람한테 불쾌한 인상을 주는 것으로 인해 받는 멸시가 우선 큰 손실인 줄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우정 점잔을 부려 그 점잔으로써 억울한 체면의 손실을 때우곤 하는 게 항투다.
미상불 세상 사람들은 형보가 곱사요 또 형용이 추하게 생겼대서 속을 주기 전에 덮어놓고 멸시를 했고, 이 멸시 속에서 형보는 자라났고,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다.
'곱사…….'
'병신…….'
'빌어먹게 생긴 얼굴…….'
'무섭게 생긴 상판대기…….'
특별히, 그리고 극히 드물게 우연한 기회로 친해지는 사람―---가령 죽은 고태수 같은―---그런 사람 외에는 대개들 뒤꼭지에다 대고, 혹은 맞대 놓고 그를 능멸을 하고 구박을 주고 했다.
어릴 적에 더욱이 그런 고까운 멸시를 많이 받고 자라났다. 노는 아이들 동무만 그런 게 아니라, 아무 이해도 없으면서 어른들도 그랬다.
연한 동심은 좋이 자라지를 못하고 속에서 갈고리같이 옥고, 뱀같이 서리서리 서렸다. 심술이 궂고 음험해졌다.
자란 뒤에 세상살이의 벼리 속에서도 남들은 보기 숭어운 형보를 꺼려하고 돌려 놓았다.
'오―냐, 나는 곱사다.'
'오―냐, 나는 병신이요, 얼굴이 빌어먹게 생겼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죽으란 법 있더냐? 나도 살아야겠다.'
형보는 세상에 대해서 피가 나도록 핍절한 앙심을 먹고, 마침내는 세상을 통으로 원수를 삼고서 넉 자 다섯 치의 박절한 일신을 부지했다.
그리하는 동안에 삼십여 년을 지내 온 지금에는, 소년 적과 이십 안팎 때의 그렇듯 불타던 앙심은 달궈질 대로 달궈져서 그놈이 한 개의 천품으로 굳어져 버렸다.
세상에 대한 울분이나 저주는 다 잊어버렸다. 그리고서, 꼬부라진 심청과 억지 뱃심으로다가 살기 띤 처세를 하기를 바로 물이나 마시듯 담담하니 무심코 해나갈 뿐이다. 그러므로 그가 가령 점잔을 부리더라도 그것은 저편을 존경하는 덕이 있어 그런 게 아니고, 그역 제 자신을 위하는 억지엣뱃심일 따름이던 것이다.
고운 꾀꼬리가 가을이면 회색으로 변하는 것과, 형보의 심청이 그처럼 꼬부라진 것과는 단지 생리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의 차이밖에는 더 다를 게 없는 것이다.
형보의 납작하니 서너 뼘밖에 안 되는 앉은키와, 그 세 곱은 되는 듯 우뚝한 제호의 키…… 제호의 대머리까지 벗어져 가뜩이나 위아래로 기다란 얼굴과, 두리뭉싯하니 중상〔僧相〕으로 생긴 형보의 얼굴…… 식인종을 연상할 만큼 흉악스러운 형보의 골상(骨相)과, 귀족태가 나게 세련된 제호의 골상…… 번화한 홈스판으로 말쑥하게 춘추복을 뺀 제호의 몸치장과, 때묻는 당목걸로 안팎을 감은 형보의 옷 주제…… 뱃심을 내어 몸을 좌우로 흔드는 형보와, 속으로 궁금해서 앞뒤로 끄덕거리는 제호…….
마주앉은 이 두 사람은 무얼로 보든지 구경스럽게 기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었었다.
어느덧 어스름이 내리고 전등도 켜져 있다. 도시의 아득한 소음이 두 사람의 이야기 소리에 무슨 심포니로 반주를 하듯 감감이 들려 온다.
"어 참, 복상을 보입자구 하는 건 다름이 아니라……."
훨씬 수인사의 한담이 오고 가고 하다가 잠깐 말이 끊였던 뒤를 이어 형보가 비로소 원대목을 꺼내 놓던 것이다.
"……어 참, 저 부인 되시는 정초봉 씨 그분한테 대한 조간인데……."
"네에."
제호는 역시 짐작한 대로 그런 교섭이었구나 생각하면서 순탄히 대꾸를 한다.
"허나, 이거 원 일이 실없이 맹랑해서 이야길 들으시기가 퍽 언짢으실 텐데, 허허…… 그렇더래두 다아 부득이한 사정이니깐 다아 그쯤 양해하시구…… 허허."
"네에 네, 좋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몰라두, 다아……."
"그러면 맘놓구서 다아 말씀하겠습니다, 헴 헴…… 어 참, 저 정초봉 씨가 첨에 결혼을 한 고태수 군, 그 군으로 말하면 나하구는 막역한 친구였습니다. 머 참, 친동기간이라두 그렇게 다정하구 가까울 수가 없었지요. 그런 관계루 해서 그 군이 저 정초봉 씨하구 결혼을 하느라구 신접살림을 채려 둔 집에두 내가 미리 가서 있었구, 다아 그만큼 참, 서루 믿구 지냈더란 말씀이지요."
"네에!"
"그건 그렇거니와, 그런데 복상께서두 아시겠지만, 그 사람이 어 참, 그런 참, 비명횡사를 하잖었겠습니까?"
"듣자니 참 그랬다더군요!"
"네에…… 그런데, 실상인즉 그 사람이 진작부터두 자살!…… 자살을 헐 양으루 맘을 먹구 있었습니다, 결혼하기 그저언부터 그랬지요."
"네에! 건 어째?"
"역시 다아 아시다시피, 은행돈 그 조간이죠. 그게 발각이 나서 수갑을 차, 징역을 살어, 하자면 챙피할 테니깐, 여망 없는 세상, 치소받고 사느니 깨끗이 죽는 게 옳겠다는 생각이죠. 혹간 징역이란 말만 해두 후울훌 뛰었으니깐요."
제호는 속으로 흥! 하고 싶은 것을,
"네에!"
하고 대꾸한다. 유유하게 결혼까지 할 사람이 자살을 하려고 결심했다는 건 종작없는 소리같이 미덥지가 않던 것이다.
"그래서 어 참, 그렇게 자살을 할 결심을 했는데 공교롭게스리 그 일이 생겼으니깐, 일테면 기왕 죽기는 일반인 것을 좀 창피하게 죽었다구 하겠지요, 허허!…… 아 그런데, 그런데 말씀입니다. 그 사람이 자살할 결심을 하구서는 내게다가 유언 비슷하게 부탁을 해둔 게 있단 말씀이죠!"
"네에!"
제호는 처음 짐작한 대로 초봉이네 친가에서 온 담판이 아니고, 그다지 듣고 싶지도 않은 고태수의 일을 장황히 늘어놓다가 필경 유언 소리가 나오니까, 옳지 그러면 고태수의 유복자를 찾으러 온 속이로구나 생각하고서 그럴 법도 하대서 혼자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런데 어 참, 그 유언이라는 게 어떻게 된 거냐 하면 말씀이죠. 그 사람이 누차 두구서 날더러 하는 말이, 여보게 형보, 난 아무래두 이 세상 오래 살구 싶잖으이. 다아 각오했네. 그렇지만, 두루두루 미망진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세. 아닌데, 그 중에도 꼬옥 한 가지 정말 맘 뇌잖는 일이 있네. 눈이 감길 것 같잖으니. 아 이런 말을 하군 한단 말씀이죠!…… 그래 오다가 맨 나중 번엔, 그게 그러니깐 바루 그해, 오월 삼십일날 그 사건이 생기던 전전날입니다. 장소는 개복동 살던 행화라구, 그 사람이 전부터 상관하던 기생의 집이구요……."
만일 고태수가 초봉이와 결혼을 한 뒤로는, 행화의 집에는 통히 발걸음을 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듣는다면, 지금 형보의 하는 소리가 생판 거짓말인 게 빤히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제호는 물론이고, 초봉이도 그 진가를 분간할 길이 없던 것이다. 또 그 시비를 가린대야 그게 그다지 효험도 내지는 못하겠지만…….
"……그래서 말씀입니다……."
형보는 하던 말끝을 잇대어,
"……내 말이, 아 이 사람아 자네두 거 미친 소리 인전 작작 해두게! 한 삼사 년 전중이나 살구 나오면 그만일 걸 가지구 무얼 육장 그런 청승맞은 소릴 하구 있나!…… 이렇게 머쓰리질 않었겠습니까? 그랬더니 그 군은 종시 고개를 흔들면서, 아닐세. 답답한 소리 말구 아무튼지 내 말을 허수히 여길 것이 아니라 잘 유념해 뒀다가 꼭 그대루 해주게…… 해주는데, 다른 게 아니라, 우리 초봉일 내가 죽은 뒤엘라컨 뒤두 거둬 줄 겸 아주 자네 마누랄 삼아서 고생살이나 않게 해주게 응? 형보, 나는 자넬 믿구 부탁이니 부디 무엇하게 생각 말구서…… 아, 이런 말을 한단 말씀이죠!"
"네에!"
제호는 속으로, 하하 옳거니! 하면서 무릎이라도 탁 칠 듯이 고개를 끄떡거린다.
인제 보니 조그만 놈 유복자 문제가 아니고, 이 친구가 시방 다 자란 어미 초봉이를 업으러 왔구만? 바루…… 딴은 그래!…… 초봉이도 그래서 저렇게 앵돌아져 가지고는…….
제호는 일이 어떻게 신통한지 몰랐다.
마침 주체스럽던 수하물(手荷物)이 아니었더냐! 하나 그렇다고 슬그머니 내버리고 가자니 한 조각 의리에 걸려 차마 못 하던 노릇이다. 그렇던 걸 글쎄 웬 작자가 툭 튀어들어, 인 다구 그건 내 거다 하니 이런 다행할 도리가 있나! 아슴찮으니 돈이라도 몇 푼 채워서 내주어야겠다. 어허 실없이 잘되었다. 좋다.
제호는 전자에 호남선 찻간에서 처음 초봉이를 제 것 만들기로 하고 좋다고 하던 때와 다름없이 시방 와서는 그를 남한테 내주어 버리게 될 것을 역시 좋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초봉이는, 건뜻 넘겨다보니 눈을 내리깔고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문다. 성미가 복받치는지 숨길이 거칠어 코가 발심거리는 것까지 보인다.
이것은 실상 초봉이가 아까 형보한테 직접 그 말을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태수가 작히 그런 염장 빠진 소리를 했으려니 해서, 태수 그에게 대한 반감이 다시금 우러난 표적이었었다. 그러나 제호는 단지 그가 이 괴물 같은 사내한테로는 가지 않겠다는 항거로만 보았고, 그러니 그야 처지를 뒤바꿔 놓고 생각하더라도 이런 위인한테 팔자를 고치고 싶지 않을 건 당연한 인정이려니 하면 초봉이를 여겨 일변 마음 한구석이 민망하기도 했다.
"아, 그런데 참……."
형보가 갑자기 당황하게, 잠깐 말 그쳤던 뒤끝을 얼른 잇대어,
"……거 그 사람 고군이 말입니다. 짐작건대 정초봉 씨한테는 그런 말을 미처 못 해뒀을 겝니다. 그 군인들 머 그런 불의지변을 당할 줄은 몰랐으니깐, 종차 이야기하려니 하구만 있었겠죠. 그리다가 갑재기 그 변을 당했구, 허니 유언 같은 건 할 새두 없었습니다. 그런 유언이라껀 아내 되는 분한테다야 미리서 해두지는 못하는 것이구, 다아 자살이면 자살을 하기루 약까지 먹구 나서 하게 되는 거니깐, 그러니깐 아마 모르면 몰라두 정초봉 씨는 그 사람한테서 그런 이야긴 못 들었을 게 십상이지요. 그렇지만 그걸 머, 이 장형보 혼자만 들었을새 말이지, 한자리에 앉아서 같이 들은 행화라는 그 기생두 시방 멀쩡하니 살아 있으니깐요."
형보가 황망하게 중언부언, 이 말을 되씹고 되씹고 하는 것은 행여 초봉이라도, 나는 그런 말 들은 일 없다고 떠받고 나설까 봐서 미리 덜미를 쳐놓자는 계책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러고저러고 간에 초봉이는 아직 말참견을 하지 않을 요량일 뿐 아니라, 또 그것만 하더라도 태수가 정녕 그런 소리를 했기 쉬우리라고 여기는 터라 그까짓 걸 가지고는 이러네저러네 상지를 할 생각은 통히 나지도 않았었다.
형보는 한참이나 있어 보아도 그냥 잠잠하니까, 제 재치 있는 주변이 효험이 났거니 하고 안심한 후에 이번은,
"자아 그런데 말씀입니다……."
하면서 음성도 일단 높여,
"……어 참, 그렇게 다정한 친구한테 간곡하게 부탁을 받았을 양이면, 그게 다소간 거북한 일은 일이라구 하더라두 말씀입니다, 그 유언을 갖다가 꼭 시행을 해야 옳겠습니까? 그냥 흐지부지해 버려야 옳겠습니까? 어떻습니까? 복상 생각은……."
"글쎄올시다, 원……."
제호는 힐끗 초봉이를 건너다보면서 어물어물한다.
제호는 실상 형보의 그 말을 선뜻 받아, 그러니 마니 하겠느냐고, 아무렴 그래야 옳지야고 맞장구를 치고 싶었다. 일 되어 가는 싹수가 그만큼 굴지고 제 맘과 맞아떨어지던 것이다. 그러나 초봉이의 얼굴을 보면은, 하기야 그것도 마음이 한구석 이미 저린 데가 있으므로 하여 보는 눈도 자연 그렇게 어린 것이겠지만, 어쩐지 안색이 다 죽은 듯 암담한 것만 같고 해서, 차마 그쯤 어름어름하고 만 것이다.
제호의 얼굴을 곁눈질로 올려다보고 올려다보고 하던 형보는 말끝을 더 기다리지 않고 이어 흠선하게,
"아니 머, 복상 의견을 말씀하시기가 거북하시면 그만두셔도 좋습니다. 인제 대답은 단 한마디만 해주실 기회가 있으니깐요. 그러니 아직 내가 하는 말씀을 끝까지 다 듣기나 하십시오……."
하고는 다시 목을 가다듬어,
"……헌데, 어 참 그 뒤에 그 사람이 가뜩이나 그러한 비참한 죽음까지 하구 보니까, 명색이 친구라는 나루 앉아서 당하자니 행결 더 불쌍한 생각이 들구, 이래저래 여러 가지루 비감이 나구 하더군요…… 그래서 어 참, 며칠 두구 밤잠을 못 자구 곰곰이 궁구 마련을 하다가 필경, 그러면 내가 그 유언이라두 시행을 하는 게 도리상 옳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어 참, 그걸 어떻게 보면 다소 언짢은 노릇이 아닌 것두 아니긴 하지만, 남이야 무어라던 그대루 시행을 하는 게 생전시에 다아 정다웠던 친구한테 대한 의리니깐요……."
제호는 의리하고는 별 되놈의 의리도 다 있던가 보다고, 그런 중에도 실소를 할 뻔했다.
사실 제호는 일이 다 십상으로 계제가 좋고 해서 따로 컴컴한 배짱을 차리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이 괴상한 위인의 하는 수작이 제 모양새대로 해괴망측하고, 단지 초봉이라는 애틋한 계집 하나를 보쌈하듯 업어 가자는 생 엉터리 속이고 한 것을 몰랐다든가, 그래서 맞 다잡고 시비를 캐지 못한다든가 하던 것은 아니었었다.
"……그리구, 그리구 말씀입니다, 또 한 가지, 어 참 대단 요긴한 조간이 있습니다…… 그건 다른 게 아니라, 허허 이거 원 말씀하기가 거북해서……."
"머, 괜찮습니다. 어서 다아……."
"그럼 실례를 무릅쓰구 다아…… 헌데, 그 요긴한 조간이라껀 다른 게 아니라, 그 사람 고군 말씀입니다. 그 군이 변을 당하던 바루 그날 밤인데…… 그날 밤에, 어 참 정초봉 씨와 나와는 어 참, 그 하룻밤 거 참, 에, 관계라는 게 있었단 말씀이지요! 허허."
제호는 단박에 제 낯이 화틋 다는 것 같았다. 그는, 대체 어떻게 된 속셈이냐고, 족치듯이 좋잖은 낯꽃으로 초봉이를 건너다본다. 하기야 시방 계제 좋은 핑곗거리를 만나, 계집을 떼쳐 버릴 요량을 하고 있는 마당에, 계집이 일찍이 몇 사내를 했던들 상관할 게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여자의 정조에 대한 남자의 결벽은 결코 그렇게 담담하지가 않던 것이다.
제호의 기색을 살필 겨를도 없고, 다만 그와 눈이 마주칠까 저어서 초봉이는 지레 고개를 숙이고 들지 않는다.
그는 억울한 대로,
'그놈이 나를 강제로다가 겁탈을 했대요!'
이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첫째 제호한테 마주 얼굴이 둘러지질 않고, 또 시방 그 변명을 한들 무슨 소용이겠느냐고 그대로 꿀꺽 삼켜 버리고 말던 것이다.
제호는 초봉이가 변명을 할 말이 없어 고개를 숙인 걸로 보았지, 달리 해석할 길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원 저게 어쩌면 그다지도 몸을 헤프게 가졌을까 보냐고 내내 불쾌한 생각이 가시지를 않았다. 그러나 일변, 전자에 호남선에서 만나 이편이 하자는 대로 유성온천으로 따라와서 별반 그리 주저도 없이 몸을 내맡기던 일을 생각하면, 본시 행실머리가 출 수 없는 계집이었구나 싶고, 해서 금시로 초봉이가 훨씬 내려다보이는 것도 같았다.
그러고 보니, 그 동안 저 계집의 정조의 경도(硬度)를 시험해 보지도 않고서, 그의 정조도 얼굴 생김새와 같이 점수가 높으려니 믿었던―---믿고 안 믿고 할 여부도 없이―---의심 한 번 해보지도 않은 제호 제 자신이 소갈머리없는 등신 같기도 했다.
"어 참, 그렇게 하룻밤 관계가 있었을 뿐 아니라……."
형보는 제호의 낯꽃이 변한 것을 보고, 오냐 일은 잘 되어 간다고 좋아하면서,
"……그것두 참 다아 인연이라구 할는지, 공교롭다고 할는지…… 아, 어린것 하나가 생겼습니다그려!…… 바루 저게 그거지요."
형보는 고갯짓을 해서 뒤를 가리킨다.
어린아이 송희가 형보의 혈육이라는 것도 제호가 듣기에는 의외엣 소식이었었다. 그러나 곧 그도 그럴 법하다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러자 또, 작년에 초봉이가 ××를 시키려고 약까지 집어 먹고 그 야단을 내던 속도 비로소 옳게 안 것 같았다.
고태수의 씨라서 그런 줄만 알았더니 옳아! 이 장형보와 그러고 그래서 생긴 불의한 자식이라서…….
제호는 눈을 갠소롬히 뜨고 연거푸 기다란 얼굴을 끄덕끄덕한다.
잠잠하니 말이 없다. 형보는 제가 던진 돌멩이가 일으켜 놓은 파문을 시험하느라고 담배만 뻐억뻑 피우고 있다.
조용해진 틈을 타서 또옥 딱 또옥 딱, 뒷벽의 괘종이 파적을 돕는다. 밤은 차차로 어두워 온다. 안방과 건넌방의 전등이 내비쳐 마루에 앉은 두 사내의 그림자를 괴물같이 앞뒤로 늘여 놓는다. 격동을 싼 순간의 침묵은 임종을 기다리는 것같이 답답하게 무겁다.
초봉이의 떨어뜨린 눈은 품에 안겨 젖을 빨면서 무심히 꼼질거리는 송희의 고사리 같은 손에 가서 또한 무심히 멎어 있다.
초봉이는 제호가 어떤 낯꽃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하면서도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한다. 비록 낡은 새 흉이 드러났대야 그것은 제호가 다 눈감아 주고 탈을 않겠거니 하면 안심이 되기는 하나, 그렇다고 노상 부끄럼이 없진 못했다. 물론 제호가 시방 딴 요량을 먹고서 딴 궁리를 하고 있는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령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눈치를 알아챘다고 하더라도, 설마 그게 벌써 오래전부터 다른 원인이 있어 그래 오던 것이라고까지는 아무리 해도 깨닫지야 못할 것이고, 그저 오늘 당장 장형보라는 저 원수가 들이덤벼 가지고는 조사모사 해놓는 소치로만 여겼을 것이다. 따라서 그냥 잠자코 있으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가령 송희를 두고 말하더라도, 그건 결코 그런 게 아니라 사실이 약시 이만저만한 사맥인즉 장가의 자식일 법도 하나, 꼭이 그러랄 법도 없소, 또 ××를 시키쟀던 것은 불의한 자식이라서가 아니라 원수의 자식일는지도 모를 뿐더러, 일변 아비 없는 자식을 낳지 않으려고 그랬소 하고 변명을 하자고 들었을 것이다.
그것뿐이 아니다.
형보와의 하룻밤 관계라는 것도 잠든 틈에 그놈이 나를 겁탈을 한 것이지, 내가 그러구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오.
고태수의 명색 유언이라는 것도 다 종작없는 소리겠지만, 가령 고태수가 주책 없이 그런 부탁을 했다기로서니, 내가 고태수의 물건이길래 저희끼리 주고받고 한단 말이오? 또 내가 죄인이고, 고태수가 법관이라서 내가 그 말을 준수해야 한단 말이오?
이렇게 초봉이는 들고 나서서 변명하고 마주 해댈 말이 없던 것이 아니다.
물론 천언 만언 변명을 한대야 제호의 배짱 토라진 내력이 따로 있는 이상 아무 효험도 없을 것이고, 그런즉 이 경우에 초봉이가 잠자코 변명을 않기 때문에, 그런 때문에 장차 몇 분 후면 판연히 드러날 한 새로운 운명을 자취하게 된 것은 아니다.
운명은 넌출이 결단코 조만치가 않다.
시방 초봉이의 새로운 이 운명만 하더라도 그 복선(伏線)은 차라리 그가 어머니로서 송희를 사랑하는 죄…… 하기야 마니아(狂)에 가깝도록 편벽된 구석이 없진 않으나…… 아무튼 어머니 된 죄, 그 속으로부터 넌출은 뻗어 나온 것이다.
하나, 그놈을 다시 추어 보면 넌출은 애정 없이 사랑할 수 없다는 서글픈 인정 속에 묻혀 있는 복선의 연맥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다시 그 끝은, 팔자를 한 번 그르친 젊은 여인이란, 매춘의 구렁으로 굴러들기 아니면, 소첩 애첩의 이름 밑에 아무 때고 버림을 받아야 할 말이 없는 위험지대에다가 몸을 퍼뜨리고 성적 직업에나 종사하도록 연약하기만 하지, 여자이기보다 먼저 인간이라는 각오와 다구지게 두 발로 대지를 밟고 일어서서 버팅길 능(能)이 없이 치어났다는 죄, 그 죄로 복선의 끝은 면면히 뻗어 들어가서 있는 것이다.
만일 이 복선의 넌출을 마지막, 땅에 뿌리 박은 곳까지 추어 들어가서 힘껏 뽑아 낸다면 거기엔 두 덩이의 굵은 지하경(地下莖)이 살찐 고구마와 같이 디룽디룽 달려 올라오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한 덩이는 세상 풍도(風度)요, 다른 한 덩이는 인간의 식욕(食慾)이다.
기구한 생애가 시초를 잡고 뻗쳐 나오는 운명의 요술주머니란 바로 이것인 것이다.
형보의 그 다음 이야기는 대강 이러했다.
박제호 너도 저 어린것이 네 혈육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그렇다. 혹시 고태수의 것이라고 한다면 그건 근리할 말이겠지만, 그러나 역시 그렇지도 않은 것이, 고태수는 몇 해를 두고 뭇 계집을 상관했으되 단 한 번이라도 자식을 밴 적이 없었다. 그러니 정초봉이와 한 십여 일 지냈다고 임신이 되었을 이치가 없고, 한즉 고태수의 자식도 아니다. 그렇다면 묻지 않아도 내 자식일 것이 분명하다. 보아한즉 어린것이 제 어미를 그대로 닮았더라. 하니, 모습을 가지고는 아비를 찾을 수야 없겠지만, 자세히 뜯어 놓고 볼 양이면, 이목구비나 손발 어느 구석이고 한 곳은 나를 탁한 데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군색스럽게 꾸며 대는 형보는, 그러나 동인(東仁)의「발가락이 닮았다」의 독자는 아니리라.)
고태수가 죽자 정초봉이는 바로 서울로 올라왔었다. 웬만했으면, 그때에 그 뒤를 곧 쫓아 올라와서 도로 데리고 내려가든지, 혹은 그대로 주저앉아 동거를 하든지 했을 것이나, 내가 그때까지는 통히 축재를 해둔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런 책임 있는 일을 하자니 섬뻑 엄두가 나지를 않았다. 그래서 걱정 걱정 하던 중에, 듣잔즉 박제호 너와 만나서 산다기에 우선 안심을 했었다.
그 뒤에 나는 이를 갈아 가면서 부라퀴같이 납뛴 결과 요행 돈을 몇천 원 손에 잡았다. 그것도 따지고 보면 다 친구의 간절한 부탁을 저버리지 않겠다는 일편단심이던 것이다.
또, 알아보니 자식을 낳았다고 하는데 속새로 염탐을 해본 결과 내 자식인 게 분명했고, 그래서 그때부터는 자식을 찾아야 하겠다는 아비 된 책임도 크게 나를 채찍질했었다.
일변 나는 전부터 경륜하던 유리한 영업이 한 가지 있던 터라, 지난 여름 서울로 올라와서 그 돈 기천 원을 밑천삼아 우선 영업을 해보았다. 미상불 예상한 대로 이익이 쑬쑬하고 해서 몇 식구는 넉넉 먹고 살고도 남을 형편이다. 만약 못 미덥거든 증거물이라도 보여 주마. 저 가방 속에 들어 있는 수형이 그것이다. 수형 할인 장사다.
바야흐로 나는 만단 준비가 다 되었다. 즉 두 인간을 데려다가 고생살이는 안 시킬 만한 힘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하루를 천추같이 기다리던 이 오늘에 비로소 너와 및 저 모녀를 찾아온 것이다.
형보는 여기까지 말을 끊고, 마른 입술을 혓바닥으로 침질을 하면서 꺼진 담배를 다시 붙여 문다. 그 다음 말을 힘주어서 하자고 호흡을 가다듬는 것이다.
"자아, 그러니 말씀입니다……."
형보는 오래 지체를 않고서 곧 뒤를 잇대어,
"……나는 저 모녀를 데려가야 하겠습니다. 어 참, 절대루 그래야만 하겠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나는 앞으로 남은 세상을 단지 친구의 소중한 부탁을 시행한다는 것 하나허구, 내 자식을 찾아서 길르는 것 하나허구, 단지 그 두 가지를 낙을 삼고 여망을 삼아서 살아가자는 사람이니깐요.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이건 말하자면, 어 참, 내게는 생사가 달린 일이라구두 할 수 있습니다. 생사가…… 허니 그런 것두 충분히, 참 양해를 하셔서……."
형보는 쨍쨍 울리는 목소리로 꼬박꼬박 제겨서 말을 내뱉어 놓고는 고개를 꼿꼿 쳐들어 똑바로 제호를 건너다본다.
제호는 비로소 말대답을 해야 할 경운 줄은 아나 침음하는 체 입술을 지그시 물고, 깍짓손으로 한편 무릎을 안고 앉아서 입을 열려고 않는다. 그러나 시방 그가 이럴까저럴까 주저를 하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요량은 다 대놓았으면서 말을 내기가 차마 난감하여 그러던 것이다.
이러한 속을 알아서가 아니라도, 초봉이한테는 진실로 간이 녹는 순간이다.
형보의 하는 수작은 어느 모로 따져야 경우도 조리도 안 닿는 생판 억지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초봉이는 그 억지가 무서웠다. 만일 까딱 잘못하여 이 자리에서 제호를 놓치는 날이면 영영 꼼짝없이 형보의 밥이 되어 그 억지에 옭히고 말지, 아무리 버티고 부스대고 해도 모면할 수 없게 그렇게시리 꼭 사세가 절박한 것만 같았다.
도무지 천만부당한 엉터리요 하니, 비웃어 버리고 대거리도 할 것 없는 억지인 것을, 눈 멀거니 뜨고 옭혀들어, 되레 엉엉 울어야 할 기막히는 재앙…….
이 재앙을 면하자니 제호가 아쉬웠다. 물론 그가 미덥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래도 혹시 어떨까 저어하는 마음에, 마치 신탁(神託)을 듣는 순간처럼 그의 입 떨어짐을 기다리기가 무서웠었다.
지리한 찰나가 무겁게 계속되는데 갑자기 때앵땡 괘종이 연달아 여러 번을 친다. 그러자 시계 치는 소리에 깜짝 놀란 것처럼 제호는 앉았던 자리에서 후닥닥 일어선다.
하릴없이 무엇에 질겁을 한 것처럼 제호가 벌떡 일어서는 바람에 형보나 초봉이나는 미처 무슨 일인지는 몰랐어도 다 같이 놀라 고개를 쳐들고 그를 올려다본다.
"잘 알아들었습니다……."
제호는 쾌히 말을 꺼내다가, 처음 그렇게 후닥닥 일어서던 것은 어디로 가고 천천히 허리를 꾸부려 앉았던 옆에 놓아 둔 모자를 집어 얹는다. 제가 생각해도 무단히 그리 납뛴 것이 남 보기에 점직했던 것이다.
"……헌데, 거 원 무슨 곡절이 있어서 사단이 그쯤 엉클어졌는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허나 시방 대강 듣자니 아무튼 일은 맹랑하기는 한 것 같군요. 보매 단순치는 않은 상싶어요. 그런데 내라는 사람은 본시 성미루 보던지, 처신으루던지 어디루던지 간에 그런, 말하자면 성가신 갈등에 참례를 해서, 내가 옳으네 네가 그르네 하고 무릎맞춤을 한다던가 하길 싫여하는 사람입니다. 싫여할 뿐 아니라, 사람 됨됨이 그러지를 못하게시리 생겨먹었습니다. 허허…… 그러니 에 참……."
제호는 잠깐 말을 더듬고 있고, 제호를 따라 마주 일어섰던 형보는 벌써 결과를 다 거니를 채고서, 꽝꽝하던 낯꽃이 금시로 풀어진다. 그는 박제호가, 상당히 아귓심 있게 버팅기지, 그래서 저는 위협깨나 해보다가 필경 뒤통수를 툭툭 치고 말겠거니, 그렇더라도 밑져야 본전이니 그만인 것이라고 했던 것인데, 이대도록 선선히 박제호가 물러서고 보매 도리어 헛심이 씌는 것 같았다.
"……그러니……."
제호는 초봉이에게로 얼굴을 돌리려다가 못 하고서 그대로,
"……나는 이 당장에서 아주 깨끗이 손을 끊겠습니다. 나는 모르구서, 고의가 아니라 말씀이지요…… 모르구서 남의 권리를 침해했던 맥이니깐요, 허허…… 그리구 뒷일은 두 분이 상의껏 다아 조처하십시오. 나는 인제부터 아무 상관두 없는 사람입니다."
제호는 종시 형보를 맞대 놓고 하는 소리는 하는 소리나, 그것이 초봉이더러 알아들으란 말임은 물론이다.
말을 마지막 잘라서 하고 난 제호는 이어 몸을 움직여 대뜰로 내려갈 자세를 갖는다.
인제 할 말도 다 했거니와 볼일도 없으니 나는 아무 상관도 없는 객꾼인 걸 더 충그리고 있을 며리가 없지 않으냐?
이렇게 생각하면 자리가 열적기라니, 기다란 몸뚱이를 어떻게 건사할 바를 모르겠었다. 그러나 그러는 하면서도 선뜻 발길을 떼어 놓잔즉, 그것은 더구나 점직해서 할 수가 없었다.
짜장 초봉이더러는 검다 희단 말 한마디 않고서 코 벤 돼지처럼 이대로 휭하니 달아나자니 원 천하게 열적기란 다시 없는 짓이다.
여태 가까이 두고 제가 탐탁해서 데리고 살던 계집인 걸 비록 요새로 들어 안팎 켯속이 다 파탈은 날 형편이라고 하더라도, 한데 마침 처분하기 십상 좋은 계제는 만났다고 하더라도, 그렇더라도 아무려면 남보다 갑절이나 긴 얼굴을 들고서 이다지도 박절하게 (실상인즉 싱겁게) 꽁무니를 빼다니, 항차 저게 생억지엣뗀 줄을 빤히 알면서 언덕이야 그걸 핑계삼아 부우 거짓말을 흘려 놓고 도망가는 마당에 말이다.
제호는 어쩔 줄을 몰라 속으로 쩔쩔맬 것 같았다. 그런 걸 마침 또 이 열없는 곱사 서방님이 귀인성 없이 재치를 부려 놓으니 딱 질색할 노릇이다. 형보가, 바야흐로 제가 주인이 된 듯 손님을 배웅하는 좌석머리의 태를 내어,
"어 참, 이렇게 다아 깊이 이해를 해주시니……."
하면서 곱사등을 너풋 꾸부리던 것이다. 그래, 제호는 사뭇 질겁을 하여,
"이해라니요! 건 아닙니다……."
하면서 화급히 형보를 가로막는다.
"……천만엣말씀이지, 난 머 그런 이해구 무어구 그런 게 아닙니다. 난 참 말하자면, 패하구서 쫓겨가는 패군지졸인걸요. 별수없이 그렇지요, 패군지졸!"
제호는 맨 끝에,
'패하고 쫓겨가는 패군지졸.'
이란 말을 일부러 감회 있이 소리나게 하느라고 없는 재주를 부리다가 잘 되지를 않으니까, 건 세리프로 한번 더 되풀이를 한다. 연극을 하자는 것이다.
그는 제 의뭉한 배짱은 깊이 묻어 두고 약삭빨리 서둘러, 얼은 입지 않고서 되도록이면 좋게 갈리고 싶었다. 그래야만 오늘 갈리고 내일부터는 안 볼 값에, 초봉이며 또 그의 부친 정영배한테라도 체면이 유지가 될 것이었었다. 그래서 이 마마손님을 건드릴세라, 어물쩍하고 달아나려는 참인데, 형본지 곱산지가 나서서 긴찮게 방정맞은 소리를 지절거리고 보니, 일이 단박 외창이 나게 되던 것이다.
형보의 말이 깊이 이해를 해주어서라고 했으니, 그걸 그냥 두고 만다면 초봉이의 해석이 자연 온당치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사내 둘이 대가리를 맞대고 앉아서, 자 그건 내 계집이다 인 다구, 아 그러냐 그러면 옜다 나는 방금 염증이 나던 판인데 실없이 잘되었다 자 가져가거라, 이렇게 의논성 있이 한 놈이 한 놈한테 떠맡기고서 내빼는 놀음쯤 된 혐의가 없지 못했다. 거기서 제호는 연극이 필요했고, 그래서 그는 우정 초봉이더러 들으라고 이해라니 천만엣소리라고 펄쩍 뛴 것이요, 그리고 나도 할 수 없어 너를 뺏기고 쫓겨나니 그 회포가 자못 처량쿠나, 그러니 너도 이러한 내 심정이나 헤아려 다구, 이런 옹색스런 근천을 피우느라고 쫓겨가는 패군지졸이네 무어네 하면서 아쉰 세리프를 뇌어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출 수 없는 그 세리프가 우환중에 침통한 소리로 나오지도 못하고 어색하디어색했으니 연극은 실패요, 하니 인제는 영영 민두룸히 달아나 버릴 수는 없고 말았다.
제호는 할 수 없이 초봉이한테 이를 말을 생각해 가지고 몸을 돌이키면서 안방께로 두어 걸음 주춤주춤 다가선다. 영락없이 어린 아이들이 쓴 약이 먹기 싫어서 눈을 지그려 감고 약그릇을 집어 드는 꼬락서니다. 그는 눈이야 감지 않았어도, 얼굴은 아직 똑바로 두르지 못하고서 거진 옆 걸음걸이를 하듯 우선 안방 문께로 다가서기만 해놓는다. 그러고 나서야 마지못해 고개를 바로 돌려 초봉이의 얼굴을 마주본다.
그 선뜻 얼굴이 마주치는 순간이다. 제호는 등골이 그만 서늘해서 오싹 몸서리를 친다.
쏘아 올라오는 초봉이의 눈살…… 마침 기다리던 듯이 이편의 돌리는 눈앞에 와서 딱 마주치는 초봉이의 눈살은 금시로 새파란 불이 망울망울 돋는 듯했다. 그것은 매서운 걸 한 고비 지나서 일종 처염한 광망(光芒)과도 같았다. 분명한 살기이었었다.
제호는 사람의 눈에서, 더욱이 여자의 눈이 이다지도 무서운 살기가 뻗쳐 나올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하려던 말도 칵 막혀 버리고 제호는 어름어름한다. 남의 웬만한 노염이나 흥분 같은 것은 짐짓 모른 체하고 제 할 노릇만 버엉뗑 하면서 해치우는 제호지만 이대도록 칼날이 선 이 자리의 초봉이 앞에서는 그러한 떡심도 별수없고 오갈이 들려고 하던 것이다.
초봉이는 실상 제호가 아까 첫번에 하던 말은 그게 무슨 뜻인지 분간을 못 하고 어릿두웅했었다. 다음 번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속을 알기는 했는데 진실로 마른 하늘의 벼락이었었다.
사세가 옴나위할 수 없게 절박했던 만큼 기대도 천근으로 무거웠던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이 무거운 기대를 메고 동동 달려 팽팽하게 녗겼던 다만 한 가닥의 줄이 의외에, 참으로 의외에도 매정스런 한 칼에 뚝 잘려 버리는 순간, 천길 높은 절벽으로부터 쏟쳐 내려치는 듯 아찔해서 정신을 수습지 못했다.
순간이 지나자 빼쳐 나갈 골이 없는 절망은 곧 악으로 변했다.
초봉이는 제호가 혹시 일을 저 혼자 감당하기에 힘이 겨우면 초봉이 저더러라도, 자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또 하다못해 형보의 요구를 들어주는 게 좋겠다고라도 일단은 상의나 권고를 해는 볼지언정 이대도록까지 양박스럽게 잡아 끊고 나서리라고야 천만 생각도 못 했던 일이다.
핍절한 여망을 배반당한 분노는 컸다. 아드득 깨물어 먹고 싶단 말이 있거니와, 시방 초봉이가 제호한테 대한 노염이나 원한은 마치 그런 것일 게다.
형보는 아직 둘째다. 생각도 안 난다. 시방은 제호, 오직 제호가 눈에 보일 뿐이다.
천하에 몹쓸 놈이다. 내게다가 그다지도 흠선히 굴면서 평생 두고 변치 않을 듯이 하던 건 누구며, 그러던 박제호가 나를 저 흉악한 장형보한테다가 떠밀고 도망을 치다니! 의리부동한 놈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속여 농락만 해온 것이 아니냐?
초봉이는 생각할수록 분했다. 타오르는 분노에 악이 기름을 친다. 치가 떨렸다.
제호의 변해 버린 근일의 심경을 알지 못하는 초봉이로서는 당연한 원혐이기도 했다.
제호는 초봉이의 이 지나친 격동에 언뜻 한 가지 의념이 솟아났다.
내가 표변을 한 걸로 저렇게 격분을 한 모양인데, 그렇다면 그것이 단지 이 곱사한테로 가기가 싫어서만 그러는 것일까? 그러나 그거야 제가 싫으면 내쫓아 버리면 고만일 걸 가지고 저다지도 지레 요란떨이를, 더구나 내게다 대고…….
이렇게 생각할 때에 제호는, 그러면 저 계집이 쌀쌀하던 것은 겉뿐이요, 실상 속은 따로 내게다가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던 게 아니던가 하는 반성이 노상 없을 수는 없었다.
제호는 그러나 잠깐 침음하다가 역시 허황한 생각이라고 혼자 고개를 흔든다. 초봉이를 데리고 살아오는 동안 어느 한구석, 어느 한 고패서고 그의 계집다운 진정의 포즈를 본 적이 있다고는 믿고 싶어야 믿을 건지가 없던 것이다.
제호는 시방이야 다 식어졌다 하지만 돌이켜서는 저 혼자나마 정을 붙였던 계집이요, 일변 또 그 마음을 앗으려고 온갖 정성을 다 들이던, 말하자면 애원(愛怨)이 상반하던 계집이다.
그러던 것을 마침내는 그다지 간절하던 뜻을 풀지를 못하고서, 내 정이 식은 끝에는 두루두루 짐스러운 생각만 남았는데, 계제에 핑곗거리를 얻은 터라, 덤쑥 남의 손에다 떠맡기고 바야흐로 물러서는 마당에 이르고 보니 다 시원하고 일이 다행스런 것이야 여부가 없으나, 그러나 그래도 어느 한구석엔가는 가느다란 미련이 한가닥 처져 있지 않진 못했었다. 이런 제호 제 자신 의식지도 못할 미련으로 해서, 혹시나 내가 애정의 관측을 그릇했던 것이 아니던가 하는 저도 모를 새에 센티멘털한 반성을 해보았던 것이다.
제호는 그러느라 잠시 침음에 잠겼었으나 실상 일순간이요, 곧 정신이 들었다.
이 잠깐 동안의 침음으로 해서 제호는 초봉이에게 대한 과거의 불만을 되씹은 덕에 도리어 생각잖은 이문을 보았다.
'흥! 저는 내게다 무얼 잘했다고 눈살이 저리 꼬옷꼿한고? 아니꼽다!'
'계집애 한 마리 겁나서 할 일 못 할 내더냐? 그래 어때? 헌계집 데리고 살다가 내버리는 게 머 역적도모더냐?'
제호는 뱃심이 금시로 불끈 솟았다. 그러면서 그는 우정 초봉이게로 한발짝 다가선다.
초봉이는 종시 깜짝도 않고 제호를 올려 쏘고 있다. 가쁜 숨길이 보이는 것 같다. 얼굴은 해쓱하니 핏기 한 점 없고, 지그시 문 아랫입술은 새파랗게 질렸다. 젖꼭지를 물고 안겨 있는 송희의 가슴께로 드리운 왼편 팔끝의 손이 알아보게 바르르 떨린다. 무슨 말이 와락 쏟아져 나올 텐데 그게 격분에 막혀 터지지를 못하는 체세다.
"어, 그새 참……."
제호는 저편이야 무얼 어쩌거나 말거나 인제는 상관 않기로 하고, 제가 할 말만 의젓이 늘어놓는다. 그래도 살기 띤 눈살은 피해서 입께를 보면서,
"……변변찮은 내한테 매달려서 고생 많이 했소. 생각하면 미안한 말이야 다아 이를 데가 없소마는……."
초봉이는 말소리가 들리는가 싶잖게 이내 그 자세로 까딱도 않고 있고, 제호는 잠깐 숨을 돌렸다가 다시 뒤를 이어,
"……그리구 어, 그 동안 두구 보았으니 내 성밀 알겠지만, 내가 이렇게 선뜻 일어서는 건, 결단코 임자가 부족한 데가 있어서 그런다거나, 또 새삼스럽게 과거지살 탈을 잡아 가지구서 그리는 건 아니구, 내란 위인이 본시 못생겨 먹은 탓으루, 가령 이런 일만 하더래두 마주 겯구 틀구 다아 그리질 못하는구려!…… 그렇지만 나는 물러나선다구, 그렇다구 임자더러 저 장씨의 사람이 되란다거나 다아 그런 의사는 아니니깐, 그런 거야 종차 두 분이 형편대루 상의껏 조처할 일이지, 내가 그걸 좌지우지할 동기가 된다던지, 더욱이 내가 또 이러라저러라 시킬 며리는 없는 것이니까……."
제호는 여기까지 단숨에 말을 해놓고 보니 끝이 무뜩 잘리기는 하나, 그렇다고 그 끝을 잇댈 말도 별반 없었다. 그래서 그만하고 작별인사 겸,
"자아, 그러면……."
마침 이 말이 나오는데, 그러자 별안간 초봉이가,
"다들 가거라 이놈들아!"
하고 목청이 터지게 외치면서 미친 듯 뛰쳐 일어서던 것이다. 그 서슬에 송희를 문턱 안에다가 내동댕이를 쳤고, 그래 아이가 불에 덴 듯이 까무러치게 울고 해도 초봉이는 모르는 모양이다.
눈에서는 닿으면 베어질 듯 파랗게 살기가 쏟쳐 나온다. 아드득 깨물어 뜯은 아랫입술에서는 검붉은 피가 한 줄기 조르르 흘러내려 턱으로 또렷하게 줄을 긋는다. 풀머리를 했던 쪽이 흐트러져 머리채가 한가닥 어깨 앞으로 넘어와서 치렁거린다. 그다지 고르고 곱던 바탕이 간곳없고, 보기 싫게 사뭇 삐뚤어진 얼굴은 터질 듯 경련을 일으켜 산 고깃덩이같이 씰룩거린다. 이는 여느 우리 인간의 눈이나 얼굴이기보다도 생명을 노리는 적에게 바투 몰려 어디고 침침한 막다른 골로 피해 들었다가 절망코 되돌아선, 한 약한 짐승의 그것이라고 하는 게 근리하겠다.
옳게 겁을 먹은 제호는, 이 계집이 혹시 상성이 되는 게 아닌가 하고 눈이 휘둥그래진다.
초봉이는 처음 한마디 고함을 치다 말고 숨이 차서 가쁘게 씨근씨근한다.
형보는 등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초봉이의 형용을 보지 못하기도 했지만, 종시 귀먹은 체하고 서서 담배만 풀썩풀썩 피울 뿐 아무렇지도 않아한다.
제호는 물심물심 뒤로 물러서다가 슬금 돌아서 버린다.
송희가 으악으악 울면서 치마폭을 잡고 기어올라도 초봉이는 눈도 거듭떠보지 않는다.
"……이 악착스런, 이 무도한 놈들 같으니라고!"
마침내 초봉이는 마루청을 쾅쾅 구르면서 두 주먹을 부르쥐고 목청껏 외쳐 댄다.
"……하늘이 맑다구 벼락두 무섭잖더냐? 이 천하에 무도하구 몹쓸 놈들아……."
음성은, 외치던 고함이 그새 벌써 넋두리로 변해 목이 멘다.
"……내가 느이허구 무슨 원수가 졌다구 요렇게두 내게다 핍박을 하느냐? 이 악착스런 놈들아!…… 아무 죄두 없구, 아무두 건디리잖구 바스락 소리두 없이 살아가는 나를, 어쩌면 느이가 요렇게두 야숙스럽게…… 아이구우 이 몹쓸 놈들아!"
목에서 시뻘건 선지피라도 쏟아져 나오도록 부르짖어 백천 말로 저주를 해도 시원할 것 같잖던 분노와 원한이건만, 다직 몇 마디를 못 해서 부질없이 설움이 복받쳐올라, 처음 그다지 기승스럽던 악은 넋두리로 화하다가 필경 울음이 터지고 만다.
제호는 쫓기듯 휭하게 대문께로 나가고, 형보는 배웅삼아 그 뒤를 아그죽아그죽 따른다.
"어 참, 대단 죄송스럽습니다!"
대문간에서 형보는 무엇이 어쩌니 죄송하다는 것도 없으면서 죄송하다고 인사를 한다.
"아, 아닙니다. 원 천만에!"
뒤도 안 돌아다보고 씽씽 나가던 제호는 마지못해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이내 달아나 버린다.
제호는 시원했다. 형보도 시원했다. 둘이 다 시원했다.
초봉이는 방문턱에 엎드린 채 두 손으로 얼굴을 싸고 흑흑 서럽게 느껴 운다. 송희는 자지러져 울면서 엄마의 겨드랑 밑으로 파고든다.
식모가 난리에 넋을 잃고 우두커니 부엌문에 지여 섰다.
대문간에서 형보가 도로 들어오다가 식모를 힐끔 보더니,
"거, 올라가서 애기나 좀 안아 주지? 응?"
하는 게 제법 바깥주인이 다 된 말씨다. 식모는 그냥 주춤주춤하고 섰다. 시키지 않더라도 아기가 우니 안아다가 달래 줄 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집안이 갑자기 난리를 몰아 때려 짜였던 질서가 뒤죽박죽이 되고 마니, 식모도 습관 치인 제 일이 남의 일같이 서먹거리고 섬뻑 손이 대지지를 않던 것이다.
"어 참, 그리구 말이야……."
형보는 몸을 안 붙여 주고 낯가림을 하듯 비실거리는 식모를 다둑다둑 타이르듯,
"……인제 차차 알겠지만, 오늘부터는 내가 이 집의, 어 참 바깥주인이란 말이야…… 그러니 그리 알구 있구…… 그리구 집안이 좀 소란했어두 별일은 없으니깐 머, 달리 생각할 건 없단 말이야, 알겠나?…… 응, 그럼 그렇게 알구서, 아씨 대신 집안일이나 이것저것 두루 잘 좀 보살피구……."
형보는 계집과 살 집을 한꺼번에 다 차지한 요량이다. 사실 제호는 그 두 '집'을 몽땅 내놓고 가기는 갔으니까.
식모는 형보의 말을 듣고 서글퍼 웃을 뻔했다. 세상에 첩은 그날로 나가고 당장 갈려 든다지만, 이건 사내가 이렇게 하나가 나가고, 하나가 들어오고 하다니 도무지 망측했던 것이다.
초봉이는 아무리 울어도 끝이 없는 설움에 마냥 자지러졌다가 겨우, 보채면서 파고드는 송희를 그러안으려고 고개를 쳐드는데 마침 형보가 마루로 의젓이 올라서고 있었다.
그는 형보가 선뜻 눈에 뜨이는 순간, 설움에 눌려 속으로 잠겼던 분이 이것저것 한데 똘똘 몰려 그리로 쏟쳐 올랐다.
"옜다, 이놈아, 네 자식!"
와락 일어서면서, 악을 쓰면서, 안아 올리던 송희를 그대로 형보한테다 휙 내던져 버리면서 하느라고 미친 듯 날뛴다.
마루청에 떨어질 뻔한 아이를 어마지두 형보가 움키기는 했고, 그러나 그전에 벌써 제정신이 든 초봉이는, 아이구머니 이를 어쩌느냐 싶어 가슴을 부둥켜 안는다. 방금 시퍼런 칼날이 번쩍하는 것만 같고, 간이 떨렸다. 아이는 까무러치듯 운다. 수각이 황망하고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할 수 없으니깐 악만 부쩍 더 난다.
"오냐, 이노옴! 계집의 원한이 오뉴월에 서리 친다더라! 두구 보자. 네가 이놈 내 신세를 갖다가 요렇게 망쳐 주구! 오냐 이놈!"
초봉이는 이를 보드득 갈면서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형보를 노려본다. 그러나 앙칼지게 노리기는 해도 실상 그것은, 형보가 혹시 칼을 뽑아 들고 송희를 해치지나 않는지 그것을 경계하기에 주의가 엉키고 만다.
"아, 네가 정녕 이럴 테냐?"
형보는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눈을 부릅뜬다. 만약 한옆으로 칼을 뽑아 송희한테다가 겨누면서 그랬으면 꼼짝 못 하고 초봉이는 (제법 그걸 가로막자고 달려들기는커녕 오금이 지레 밭아서) 그대로 털썩 주저앉아 두 손을 합장하고 개개 빌고 말았을 것이다.
형보는 짐짓 보아라고 아이를 한 손으로다가 등덜미 옷자락을 움켜 고양이 새끼 다루듯 도옹동 쳐들고 섰다. 아이는 네 손발로 허공을 허우적거리면서 그런 중에도 엄마를, 엄마를 부르면서 기색할 듯 자지러져 운다.
초봉이는 겁을 냈던 대로 형보가 칼부림을 않는 것이 다행했으나 안심할 경황은 없고, 당장 송희가 저리 액색하게 부대끼는 정상을 차마 못 보아, 몸을 홱 돌이켜 안방 아랫목 구석에 가서 접질리듯 주저앉는다. 하릴없이 항복은 항복인 줄이야 저도 알기는 하지만, 차라리 항복을 한 것이 안타깝기보다 도리어 송희가 곤경을 면할 것을 여겨 다행했다.
"괜히 그리다간 네 눈구멍으루 정말 피를 보구 만다!"
형보는 안방으로 대고 눈을 흘기면서 씹어 뱉는다. 그러나 형보 역시 큰소리는 해도 이 깽깽 소리가 나는 생물을 어떻게 주체할 수가 없었다. 치켜 올려서 품에 안아 보았으나 평생 아기라고는 안아 본 일이 없으니 거추장스럽기만 하다.
귀찮은 깐으로는 골병이 들거나 뒤어지거나 조금도 상관없으니 마루청에다가 내동댕이를 쳤으면 좋겠었다. 그러나 제 자식인 체, 소중해하는 체, 우선은 그렇게 해야 할 경우라 함부로 다룰 수는 없었다. 그런데 아이는 우는 사발시계처럼 그칠 줄을 모른다. 골치가 띠잉하고 정신이 없다. 벌치고는 단단한 벌이다. 이대로 한 시간만 있으라면 단박 미치고 말 것 같았다.
민망했던지 식모가 와서 팔을 벌리니까 그만 다행해서,
"잘 달래서 재던지 허게……."
하고 넌지시 내맡기고는 일변 혼자말로 탄식하듯,
"……것두 다아 에미 잘못 만난 죄다짐이다! 고생 면하려거든 진즉 뒤여지려무나!"
초봉이는 이 소리가 배가 채이기보다 형보의 입잣이 밉살스러웠다.
송희는 식모한테 안겨서도 엄마를 부르면서 떼를 쓴다. 초봉이는 안방으로 데리고 들어왔으면 선뜻 받아 안겠는데 눈치 없는 식모가 답답했다.
식모는 송희를 달래느라 성화를 먹는다. 얼러 주기도 하고, 문도 뚜드려 소리를 내주기도 하고, 그래도 안 그치니까 마당으로 대문간으로 요란히 설레발을 놓고 다닌다.
한동안 그러다가 식모도 준이 나서 할 수 없이 안방으로 들어오고, 송희는 엄마한테 안기기가 무섭게 울음을 꿀꺽 그치면서 대주는 젖을 움켜다가 쭉쭉 소리가 나게 빨아들인다. 오래 울어서 젖을 빨다가도 딸꾹질을 하듯 느끼곤 한다.
초봉이는 하도 가엾어서 볼기짝을 뚝뚜욱 두드려 주면서,
'어이구 내 새끼를 누가 그랬단 말인가! 어이구 가엾어라!'
이렇게 귀애하고 얼러 주고 하고 싶어도 마루에 앉은 형보가 열적어 못 한다.
송희는 아직도 눈물이 눈가로 볼때기로 흥건히 묻었다. 엄마가 손바닥으로 가만가만 씻어 주니까, 젖을 빨다 말고 말끄러미 엄마를 올려다보다가 금시로 입이 비죽비죽하더니,
"엄마!"
하면서 울먹울먹한다. 노염이 새롭다고 역성을 청하는 것이다.
"오―냐, 워야 내 새끼!"
초봉이는 마침내 형보를 꺼릴 겨를도 없고, 제 입도 같이서 비죽비죽 해주면서 소리가 요란하게 볼기짝을 뚝뚜욱 쳐준다. 송희는 안심을 하고서 도로 젖꼭지를 문다.
초봉이는 이 끔찍이도 소중하고 귀여운 것을 품안에서 떼어 놓다니, 그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항차 그 어떠한 흉악한 해를 보게 한다는 것은 마음에 상상만이라도 하는 것부터 어미가 불측스런 것 같았다.
방금 일어난 풍파는 초봉이로 하여금 더욱 힘있게 애착과 애정으로써 송희를 끌어안게 해주었다.
송희를 곰곰이 들여다보는 동안, 비장하게 솟아오르는 것은 일찍이 제 자신에 있어 본 적이 없던 하나의 용기이었었다.
물론 솟아오른 그 용기도 적극적인 것은 못 되고서 소극적이요, 그래서 몸을 살리려는 태가 아니고, 몸을 죽이려는 태에 지나지 못했다. 그렇지만 본시 타고나기를 그렇게 타고났고, 치어나기를 그렇게 치어난 초봉이에게 오늘이야 그렇지 않은 것을 바람은 억지일 것이다.
송희는 인제 노염도 다 풀리고, 젖도 배불러 엄마가 안은 대로 무릎 안에 버얼씬 드러누워 엄마 얼굴을 말끄러미 올려다보면서 쏭알쏭알 이야기를 하는지 노래를 하는지 저 혼자만 아는 소리를 쏭알거리면서 마음을 놓고 한가하게 놀고 있다. 송희는 엄마한테만 있으면 울어지지도 않고 심심하지도 않다. 좋고 편안하다. 입으로는 노래도 하고 이야기도 한다. 입이 고프면 바로 그 앞에 단 젖이 있다. 빨면 쭉쭉 나온다. 눈으로는 엄마의 얼굴을 본다. 보면 재미가 있다. 손이 심심하면 엄마 젖꼭지를 만진다. 발이 심심하면 손이 가서 쥐고 같이 논다. 다 좋다. 편안하다.
초봉이는 송희가 이러한 줄을 잘 안다. 오늘은 더욱 그렇다.
이 살판에서도 송희는 엄마가 있으니까 이렇게 편안히, 이렇게 마음을 놓고 잘 있지를 않으냔 말이다. 천하없어도 송희는 이대로 가축을 해야 하고 그러자면은 초봉이 제 한몸은 아무래도 좋았다.
칼을 맞아도 좋고, 시뻘건 불꼬챙이로 단근질을 해도 좋고, 그러하되 아무라도 송희의 털끝 하나라도 다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말고, 누가 송희한테 눈 한번이라도 크게 뜨고, 소리 한번이라도 몹시 질러도 안 될 말이다.
내 몸뚱어리는 송희를 위하연 굳센 무쇠방패가 되어야 하고, 그도 부족하면 큰 바위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추운 때에는 뜨뜻한 솜이 되어야 하고, 비가 올 때에는 우장이 되어야 하고, 바람이 불 때에는 바람막이가 되어야 하고, 어둔 밤에는 등불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배고파할 때에는 밥이 되어야 하고.
내 몸뚱어리는 이미 버린 몸뚱어리다. 두 남편에 벌써 세 남자를 치르어 온 썩은 몸뚱어리다. 이런 썩은 몸뚱어리가 아까워서 송희의 위험을 막아 주기를 꺼릴 필요는 조금도 없다. 차라리 썩은 몸뚱어리를 가지고 보람 있게 우려먹으니 더 좋은 일이다.
형보? 좋다, 형보는 말고서 형보보다 더한 놈도 좋다. 원수는 말고 원수보다 더한 것도 상관없다. 송희만 탈없이 편안하게 기르면 그만이다.
여기까지 생각을 했을 때에 초봉이는 깜짝 놀라 몸을 떤다. 대체 어느 겨를에 저 장형보의 계집이 되기로 작정을 하고서 시방 이러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제 자신이 모르기는 몰랐어도 인제 보니 이미 그러기로 다 작정이 된 것만은 사실인 것이 분명했다.
호 하고 한숨이 절로 터져 나온다. 제가 저를 생각해 보아도 너무 갈충머리가 없는 것 같았다.
마침 마루에서 형보의 캐액 하는 기침 소리가 들렸다. 초봉이는 새삼스럽게, 제 몸에서 형보의 살을 감각하고, 뱀이 벗은 발 발등 위로 지나가는 것같이 오싹 진저리가 치었다.
부엉이처럼 마루에 가서 지켜 앉았던 형보는 열시 치는 소리를 듣고 마침내 방으로 들어왔다. 초봉이는 이미 각오한 바라 속으로,
'오냐, 그렇지만 기왕 그렇게 하는 바에야 나도 다아…….'
이렇게 마음을 도사려먹었다.
형보는 그래도 점직함이 없지 못해, 비죽 웃더니 윗목으로 넌지시 비껴 앉으면서 슬금슬금 초봉이의 눈치를 본다. 이윽고 있어도 (실상 다시 발악을 할 줄 알았던 초봉이가) 아무 반응도 없이 외면만 하고 있으니까 우선 마음을 놓고 처억 수작을 끄집어낸다. 그러나 위협 같은 것은 싹 걷어치우고 없다. 말도 좋은 말로, 조르듯 타이르듯 순하다.
인제는 더구나 별수가 없지 않으냐. 그러니 부디 마음을 돌려라. 너만 고집을 세우지 않을 양이면, 너도 좋고, 자식한테도 좋고, 또 나도 좋고 다 두루 좋잖으냐.
아까 박제호더러도 이야기를 했지만, 돈 오륙천 원을 들여서 장사를 하는 게 수입이 상당하니 너의 모녀는 웬만한 호강이라도 시키면서 먹여 살릴 수가 있다.
또, 그새까지는 네가 박제호의 첩으로 있었지만, 나는 독신이니까 인제부터는 버젓한 정실 노릇을 할 뿐더러 어린것도 사생자라는 패를 떼게 되지 않느냐.
형보는 간간 담배도 피워 가면서 한 마디씩 두 마디씩 넉장으로 뜅기고 앉았고, 초봉이는 자는 송희 옆에 두 무릎을 깍짓손으로 껴안고 모로 앉아 형보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그냥 그러고만 있다. 그렇게 하기를 한 식경은 한 뒤다.
"오―냐! 네 원대루, 네 계집 노릇 해주마. 그렇지만……."
초봉이는 마침내, 모로 앉았던 몸을 돌려 윗목의 형보한테로 꼿꼿이 고개를 두른다. 물론 마음먹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지, 무슨 졸리다 못해 나오는 대답인 것은 아니었었다.
승낙이 내리자 형보는 좋아라고 그러잖아도 큰 입이 더 크게 째지면서, 아무렴 그래야 옳지야고 진작 그럴 것을 가지고 어째 그랬단 말이냐고, 버엉떼엥 아랫목께로 조촘조촘 내려앉는다. 하는 것을 초봉이는 소리를 버럭,
"왜 이 모양이야?……아직 멀었으니 거기 앉아서 말 듣잖구서……."
"네에 네, 흐흐."
"흥! 물색 없이 좋아 마라! 내가 뭐어 맘이 내켜서 네 계집 노릇 하겠다는 줄 알구?…… 괜히 원수풀이 하잔 말이다, 원수풀이……."
"허어따! 쓸데없는 소릴!"
"두구 보려무나? 내 신세를 요렇게두 지긋지긋하게 망쳐 준 네놈한테 그냥 거저 다소굿하구 계집 노릇이나 해줄 성부르더냐? 흥!…… 인제 대가리가 서얼설 내둘리게 해줄 테니 두구 보아라!"
초봉이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큰소리를 하기는 해도 마음은 결코 시원하지 못했다. 원수풀이를 하잔들 무얼로 어떻게 원수풀이를 할 도리가 있을까 싶질 않았다. 자는데 몰래 칼로 배를 가른다거나, 국그릇에 비상을 쳐서 먹인다거나 한다면 그거야 못 할 바는 없지만, 그런다고 짓밟힌 생애를 도로 물려 오지는 못할지니, 헛되이 내 손에 피칠이나 하는 짓이지, 원한이 풀릴 리가 만무하니 말이다. 생각하면 속절없는 팔자요, 눈물이 솟아났다.
"여보, 이왕지사 다아 이리 된 바에야……."
형보는 곱사등을 흔들흔들, 쪼글트렸다 주저앉았다 못 견디어 납뛰면서,
"……노염 다아 풀어 버리구려, 응?…… 그리구서 우리두 처억 어쨌든지, 응? 재미있는 가정을, 쓰윽 한바탕…… 흐흐."
"어이구, 옜다!…… 메시껍구 아니꺼워!"
"허허엉, 그리지 말래두 자꾸만 그러는구려!"
"너 돈 있는 자랑 했겠다? 대체 몇 푼이나 되느냐?"
"한 육천 환……."
"거짓말 없지?"
"아무렴! 당장이라두 보여 주지!"
형보는 잊지 않고 끌고 들어온 손가방을 돌려다보면서,
"……예금통장에 이천여 환 있구, 수형 받은 게 사천 환 가까이 되구…… 자아 시방 볼 테거들랑 보지?"
"가만있어, 인제 꺼내 노라는 때 꺼내 놓구…… 그러면 어쩔 테냐? 너 내가 해달라는 대루 해줄 테냐?"
"네에, 거저 하늘의 별이라두 따올 수만 있다면 냉큼 가서 따다 디립죠!"
"그러면 첫째, 이 애 앞으루다가 네 이름으루 하나 허구, 내 이름으루 하나 허구, 생명보험 하나씩……."
"얼마짜리?"
"천 원짜리."
"천 원짜리? 천 원짜리가 둘이면 가만있자…… 얼마씩 부어 가누?"
형보는 까막까막 구누를 대보다가,
"……그랬다!"
하면서 고개를 꾸벅한다.
"그건 그렇구…… 그 댐은, 그새 박제호두 그래 왔으니깐 너두 나무 양식 집세는 다아 따루 내려니와, 그런 것말구두 가용으로 다달이 오십 원씩 내 손에다 쥐어 줘야지?"
"그러자면?…… 매삭 백 환이 훨씬 넘는데…… 그렇지만 할 수 있나! 박제호만큼 못 한대서야 안 될 말이지. 그럼 것두 자아 그랬다!"
"그리구 또, 그 댐은, 돈을 한목아치 천 원을 나를 주어야 한다?"
"천 환? 현금을?"
"그래."
"그건 좀 문젠걸?…… 돈이 없는 건 아니지만 장사하는 밑천이라 놔서 한목에 천 환을 집어 내구 보면 그만큼 수입이 준단 말이야!…… 시방 육천 환을 가지구 주물러서 맥삭 이백 환 가량 새끼가 치는데, 만약 천 환을 없애구 보면 아무래두 어렵겠는걸?…… 대관절 현금 천 환은 무엇에다 쓸려구 그러누?"
"우리 친정두 먹구 살게시리 한끄터리 잡어 주어야지!"
"얘! 이건 바루 기생 여대치는구나?"
"머, 내가 기생보담 날 건 있다더냐?"
"무서운데!"
"또 있다…… 우리 친정 동생들 서울루 데려다가 공부시켜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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