是天帝子河伯孫。今日逃遁。追者垂及。奈何。於是魚鱉成橋。得渡而橋解。追騎不得渡。至卒本州玄葂郡之界遂都焉。未遑作宮室。但結廬於沸流水上居之。國號高句麗。因以高為氏本姓解也。今自言是天帝子。承日光而生。故自以高為氏時年十二歲。漢孝元帝建昭二年甲申歲即位稱王。高麗全盛之日二十一萬五百八戶。珠琳傳第二十一卷載。昔寧稟離王侍婢有娠。相者占之曰。貴而當王。王曰。非我之胤也。當殺之。婢曰氣從天來。故我有娠。及子之產。謂為不祥。捐圈則豬噓。棄欄則馬乳。而得不死。卒為扶餘之王即東明帝為卒本扶餘王之謂也。此卒本扶餘。亦是北扶餘。之別都。故云扶餘王也。寧稟離乃夫婁王之異稱也 |
천제(天帝)의 아들, 하백(河伯)의 외손이오. 오늘 달아나고 있는데, 쫒는 자들이 거의 다가왔으니 어찌하리오?”라 하였다. 이에 물고기와 자라〔鱉〕가 떠올라 다리를 이루어 (주몽은) 건널 수 있었고 다리는 흩어져, 쫓아오던 기병들은 건널 수 없었다. 졸본주(卒本州)현토군(玄葂郡)의 경계이다.에 이르러 나아가 도읍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미처 궁실(宮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다만 비류수(沸流水) 위에 임시거처를 짓고 거기에 머물러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였는데 이는 고(高)씨를 성으로 삼았기 때문이다.본래 성은 해(解)이다. 지금 스스로 말하기를 천제의 아들이라 한다. 햇빛을 받아 태어났기 때문에 스스로 고씨라 하였다. 이 때 나이는 스물 두살, 한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 갑신(甲申)년(기원전 37년)이었다. 고구려의 전성기 때, (가구수는) 21만508호(戶)였다. 《주림전》(珠琳傳) 제21권에 실린 바, 일찍이 영품리왕(寧稟離王)의 시녀가 임신을 하자, 점쟁이가 점을 쳐 말하기를 (아이가 태어나면)“귀인이 되어 반드시 왕이 될 것이오”라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내 자식이 아니니 반드시 그를 죽이리라” 하였다. 시녀가 말하기를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온지라 제가 임신을 하였사옵니다”라 하였다. 이윽고 아들을 낳자, 상서롭지 못하다고 이르고는 (돼지)우리에 (아이를) 버리자 돼지가 입김을 불어 (넣어 따뜻하게 해 주었다. 말)우리에 (아이를) 버리자 말이 젖을 먹였다. 이에 죽지 않게 되었고 마침내 부여(扶餘)의 왕이 되었다. 이는 곧 동명제(東明帝)가 졸본부여(卒本扶餘)의 왕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 졸본부여는 또한 북부여의 별도의 도읍이므로, 곧 부여왕이라고 한 것이다. 영품리는 부루왕(夫婁王)의 다른 호칭이다. |
페이지:三國遺事 卷第一 1512年 奎章閣本.pd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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