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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권30.pdf/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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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정권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었는데, 명종이 정중부 일파의 무단 정치를 싫어함을 알고 그들을 없애고 정권을 잡았다. 그는 자기 신변 보호를 위해 도방을 두어 사병 1백여 명을 거느렸다. 명종 13년 30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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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왕릉

경덕왕景德王(?~765)신라 제35대 왕(재위 742~765). 성덕왕의 아들이며 효성왕의 아우로 휘는 헌영이다. 신라의 여러 제도와 관직을 당 제도로 바꾸고 행정구역을 9주 5소경으로 나누었다. 그는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봉덕사 종을 만들게 했는데,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으며 아들인 혜공왕이 완성하였다. 이 종의 소리는 맑고, 멀리까지 들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원래 이름은 '성덕 대왕 신종'으로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종인 동시에 국보(99호)이며, 후에는 봉덕사 종으로 불렀다. 경덕왕은 당과도 활발히 교역하는 등 산업 발전에 힘써 신라의 전성 시대를 이루었다.

경문왕景文王(?~875)신라 제48대 왕(재위 861~875). 헌안왕에게 아들이 없자 헌안왕의 딸과 결혼하여 왕위에 올랐다. 신라가 혼란하여 중앙 귀족들이 음모와 반란을 일삼았으므로 수습에 힘썼고, 황룡사를 개수하였다.

경순 공주慶順公主조선 태조의 셋째 딸. 태조의 계비 신덕 왕후 강씨의 소생으로 개국 공신 흥안군 이 제에게 출가하였다. 남편이 태조 7년(1398) 제1차 왕자의 난 때 방원의 손에 죽자 승려가 되었다.

경순왕敬順王(?~978)신라의 마지막 왕(재위 927~935). 문성왕의 6대손이며 이찬 효종의 아들이다. 927년 견훤에 의해 경애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당시 신라는 국력이 쇠퇴하여 국가의 기능이 완전 마비되었다. 민심이 왕 건의 고려에게로 기울어지자, 군신회의를 소집하여 고려에게 나라를 넘겨주기로 결정하고, 935년 항복하였다. 왕 건의 딸인 낙랑 공주를 아내로 맞고 정승에 봉해졌으며 경주를 식읍으로 받았다. 한편, 경주의 사심관에 임명되었는데, 이로써 신라 천 년의 역사는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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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왕이 열락에 빠져 나라를 망쳤다고 하는 경주 포석정

경애왕경애왕이 열락에 빠져 나라를 망쳤다고 하는 경주 포석정 景哀王(?~927)신라 제55대 왕(재위 924~927). 신덕왕의 아들이며 경명왕의 아우이다. 신라 말의 혼란기에 즉위하여 왕 건·견훤 등의 강대한 세력에 밀려 국가다운 면모를 갖추지 못하였다. 927년 포석정에서 연회를 벌이다가 견훤의 습격을 받고 죽임을 당하였다.

경의 왕후敬懿王后(1735~1815)조선시대 『한중록』의 저자. 영조의 아들인 장헌(사도 세자)의 비로, 본관은 풍산이며 영의정 홍봉한의 딸이다. 1744년 세자빈에 책봉되었고, 1762년 남편이 살해된 후 혜빈의 칭호를 받았다. 1776년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혜경의 호를 받았으며, 남편이 장조로 추존됨에 따라 경의 왕후로 되었다. 그가 쓴 『한중록』은 자신의 한평생을 돌이켜보면서 남편의 비참한 죽음에 대한 슬픔과, 자신의 외롭고 슬픈 생애를 소설 형식으로 쓴 작품으로 궁중 문학의 주옥편으로 평가된다.

경종景宗(1688~1724)조선 제20대 왕(재위 1720~1724). 숙종의 아들로 어머니는 희빈 장씨이다. 3살 때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어려서부터 몸에 병이 있었으므로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김창집 등의 노론과 김일경 등의 소론이 싸움을 벌였다. 이 사건으로 김창집 등 4명의 노론파 대신이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재위 기간인 4년 동안은 당쟁의 절정기를 이루었다.

계고階古신라의 음악가. 가야에서 망명해 온 우륵이 진흥왕의 명으로 가무를 가르치자 왕명으로 법지는 노래를, 만덕은 춤을, 그는 거문고를 배웠다. 재주가 뛰어나 자주 임금 앞에서 연주하였다.

계국대장 공주(?~1315)고려 충선왕의 왕후. 원나라 진왕의 딸로, 1296년 세자비가 되어 고려로 들어왔다. 충선왕이 자기보다 앞서 맞아들인 조비를 더 총애하자 시기하여 충선왕을 원으로 불러들이게 하였다. 충선왕의 아버지인 충렬왕이 그녀를 쫓아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정치적으로 많은 말썽을 일으키고 원에서 죽었으나 고려에서 장례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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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의 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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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성충·홍수의 충의를 받드는 충남 공주의 삼충사

계백階伯(?~660)백제 말기의 장군. 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