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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권30.pdf/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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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20년 소정방과 김유신의 나·당 연합군이 백제로 쳐들어오자, 결사대 5천명을 거느리고 황산벌로 나갔다. 그는 싸움터에 나가기에 앞서 손수 처자식을 죽이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굳게 맹세하였다. 결사대는 신라 김유신의 5만여 군사와 네 차례나 싸워 이겼다. 이때 계백은 신라의 선봉인 관창을 사로잡았는데, 투구를 벗겨보니 아직 애띤 소년임을 알고 살려보냈으나, 다시 그가 선봉이 되어 쳐들어왔으므로 그를 베어 돌려보냈다. 이같은 관창의 용기를 본 신라의 군사들은 결사적으로 총공격해 들어왔다. 결사대는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전원이 모두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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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용묵

계용묵桂鎔默(1904~1961)소설가. 평북 선천에서 출생하였으며 「상환」을 『조선문단』에 발표하여 문단에 등장하였다. 「최서방」 「인두지주」 등 현실적이고 경향적인 작품을 발표하였으나 이후 약 10여 년 간 절필하였다. 1935년 인간의 애욕과 물욕을 그린 「백치 아다다」를 발표하면서부터 순수문학을 지향하였다. 비교적 작품을 많이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묘사가 정교하여 단편 소설에서는 압축된 정교미를 잘 보여주었다. 대표작으로 「병풍 속에 그린 닭」 「상아탑」 등이 있다.

계월향桂月香(?~1592)조선 시대 평양의 명기. 당시 평안도 병마 절도사 김응서의 애첩으로,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에게 몸을 더럽히게 되자, 적장을 속여 김응서로 하여금 적장의 목을 베게 한 후 자결하였다.

고경명高敬命(1533~1592)조선 시대의 문인·의병장.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峰). 1558년 문과에 급제하고, 1563년 교리로 있다가 울산 군수로 좌천된 뒤 파면되었다. 1581년 영암 군수로 재등용되고 이어서 종계 변무 주청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91년 동래 부사로 있다가 서인이 제거될 때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는데 이듬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에서 모집한 6천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에 침입한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시, 글씨, 그림에 뛰어났으며 저서에는 『제봉집』 『유서석록』 등이 있다. 후에 좌찬성 벼슬이 주어졌다. 시호는 충렬이다.

고국양왕故國壤王(?~391)고구려 제18대 왕(재위 384~391). 소수림왕의 동생이며 요동을 정벌하고 남녀 1만 명을 포로로 하여 돌아왔으나, 연의 모용 농의 침입을 받아 요동을 내주었다. 386년 백제를 공격하여 국토를 넓혔으며, 392년 신라와 수교를 하였다. 불교를 널리 보급하여 문화를 발전시켰다.

고국원왕故國原王(?~371)고구려 제16대 왕(재위 331~371). 미천왕의 아들이며, 336년 동진에 사신을 보내고 342년 환도성으로 천도하였다. 같은 해 연의 모용 황이 침입하여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왕모를 인질로 데려갔으며, 미천왕의 묘를 파서 시체를 싣고 갔다. 또한, 많은 보물과 5만여 명을 포로로 하여 돌아갔다. 343년 동생을 연에 보내어 많은 보물을 바치고 미천왕의 시체를 찾아왔다. 평양의 동황성으로 다시 천도했고, 355년 왕모를 데려왔다. 백제의 근초고왕과 평양에서 싸우다가 죽었다.

고국천왕故國川王(?~197)고구려 제9대 왕(재위 179~197). 국양왕이라고도 한다. 신대왕의 둘째 아들로 신하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모든 일을 잘 판단하여 처리하였으며 관용과 용맹을 갖추었다. 191년 을파소를 등용하여 어진 정치를 하였고, 194년에 가난한 농민에게 양곡을 꾸어주는 진대법을 실시하였다.

고상돈高相敦(1948~1979)산악인. 제주도에서 태어나 충북 청주에서 자랐다. 청주상고를 졸업, 청주대학교 경영학과 2년을 수료하였다. 1977년 대한 산악연맹 회원으로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참가, 9월 15일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하였다. 그 후 1979년 알래스카 매킨리 원정대에 총무 자격으로 참가, 등정 후 하산하다가 자일 사고로 추락하여 사망하였다. 1979년 청년대상·체육훈장 청룡상을 수상하였다.

고시언高時彦(1671~1734)조선의 시인·역관. 자는 국미, 호는 성재, 본관은 개성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였으며, 한학과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역관으로서 벼슬이 2품에까지 올랐으나, 부모가 죽은 뒤 물러나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734년 사신으로 청나라에 가는 도중 병사하였다. 그는 경사에 밝고 한시에도 뛰어났는데, 특히 그가 세조 때부터 영조 때까지의 서민시를 수집하여 편찬한 『소대풍요』는 문학사 정리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저서로 『성재집』 등이 있다.

고안무高安茂백제의 박사. 중국 한나라 사람으로 백제 무녕왕 때 들어와 오경박사로 있었다. 516년 일본에 가 있던 단양이와 교대하여 일본에 건너가 한학을 전하였다.

고 운高雲(1495~?)조선의 문신·화가. 자는 종룡, 호는 하천, 본관은 제주이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문장과 그림이 뛰어났다. 특히 호랑이를 잘 그렸는데, 「맹호도」는 그의 대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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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은

고 은高銀(1933~ )시인. 전북 옥구 출생. 1951년 해인사(海印寺)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다. 58년 『현대문학』에서 시 추천을 완료받아 시작(詩作)에 나섰다. 60년대 초에 본산(本山) 주지, 불교신문사 주필 등을 지냈고, 환속하여 문필 생활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의 시는 75년 무렵 현실참여적인 데로 지향, 그 뒤 '자유실천 문인협의회' 대표로 행동면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저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