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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권30.pdf/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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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피안감성(彼岸感性)』 『해변의 운문집(韻文集)』이 있고, 에세이로 『한용운평전』 『한국의 지식인』 등 비롯 여러 권이 있다.

고이왕古爾王(?~286)백제 제8대 왕(재위 234~286). 구이왕·고모왕이라고도 한다. 개루왕의 둘째 아들이며 초고왕의 동생이다. 왕위에 오르자 나라의 기초를 닦는 데 힘써, 260년 16등의 관제를 제정하고, 복장의 법을 제정하여 품계에 따라 각각 정해진 색깔의 관복을 입게 하였으며, 신라와 자주 싸워 변방을 넓히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국가적 체제를 확립한 최초의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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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고종이 조판하게 한 팔만대장경

고종高宗(1192~1259)고려 제23대 왕(재위 1213~1259). 강종의 맏아들로 그가 즉위했을 당시 정권은 최씨 일파가 쥐고 있었다. 1218년 거란의 침입을 받고 이를 물리쳤으며 몽고의 침입에 대해서는 협약을 맺었다. 1225년 몽고 사신 저고여가 귀국 도중 도적에게 피살된 것을 구실로 하여 다시 침입하자, 강화조약을 체결, 각처에 다루가치(몽고의 지방장관) 72명과 약간의 수비군을 주둔케 했다. 1232년 강화도로 천도하여 몽고에 항거하였다. 1235년에 몽고의 제3차 침입으로 황룡사 9층탑이 소실당하였으며, 그 외에도 귀중한 국보를 많이 잃었다. 1252년 6차의 침입을 받아 남녀 2만여 명이 포로로 끌려갔으며, 태자의 입조를 약속으로 강화하여 사실상 몽고에 굴복하였다. 고종은 문화사업에 유의하여 「팔만대장경」을 조판하게 하였으며 유학을 장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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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高宗, 조선 제26대 왕)

고종高宗(1852~1919)조선 제26대 왕(재위 1864~1906). 영조의 현손인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로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흥선 대원군이 모든 정사를 결정하였다.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실권을 잡게 되었으나, 다시 왕비인 민씨 일파에게 실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고종은 대원군의 쇄국 정책을 폐지하고 문호를 개방하였으며,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하여 여러 가지 문물을 시찰하게 하였다. 당시는 개화당과 사대당 사이의 대립이 심하였으며, 그 결과 임오군란·갑신정변 등이 잇달아 일어났다. 1894년 동학운동이 원인이 되어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김홍집 등 개화당이 집권하여 갑오경장을 단행하였다. 이로써 종래의 청의 굴레를 벗어나 독립국으로 되는 듯했으나, 실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일본의 억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897년 고종은 국호를 대한이라 고치고 연호를 광무, 왕의 칭호를 황제라고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부당성을 세계에 호소하기 위하여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 준 등 특사를 보냈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일본은 이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퇴위하게 하였으며, 고종은 그 후 덕수궁에 기거하다가 일본인들의 음모에 의해 독살당하였다. 당시는 조선말의 복잡다난한 시대로서 고종은 강대국들의 세력과 민비와 대원군의 세력 다툼 속에서 제대로 정치를 펴보지도 못하였다.

고종후高從厚(1554~1593)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자는 도충, 호는 준봉, 시호는 효열, 본관은 장흥이다. 고경명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현령에까지 이르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며, 아버지와 동생 인후는 금산에서 왜군과 격전 끝에 전사하였다. 이듬해 스스로 복수 장군이라 부르며 각지에서 의병을 모아 싸웠다. 진주성이 위급해짐을 듣고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에 들어가 김천일·최경회 등과 함께 끝까지 싸우다가 남강에서 전사하였다. 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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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의 「천산대렵도」

공민왕恭愍王(1330~1374)고려 제31대 왕(재위 1352~1374). 충숙왕의 둘째 아들로 1341년 원나라에 갔다가 위왕의 딸 노국대장 공주를 비로 맞았다. 원의 지시로 충정왕을 폐하고 왕위에 올랐으나 원나라에 반항할 뜻을 갖고 있었다. 원에 다녀온 최 영·유 탁 등의 보고로 원이 쇠약해지는 것을 알고서 변발·호복 등 몽고풍을 폐지하였으며, 몽고의 연호와 관제도 폐지했다. 그 동안 내정을 간섭하던 정동행성을 없애고 고려의 옛 제도를 복구하였다. 또한, 원 황실과 인척 관계를 맺은 세도가 기 철 일파를 숙청하고, 쌍성총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