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 공격하여 원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았다. 1368년 명이 건국되자 명과 함께 원의 세력을 공략하였다. 그는 또 신 돈을 정치에 등용하여 귀족들이 불법으로 차지한 많은 토지를 소유자에게 되돌려주고, 죄없이 노비가 된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는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노국대장 공주가 난산으로 죽자, 모든 일을 신 돈에게 맡기고 그림 그리는 일로 나날을 보냈다. 다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홍건적과 왜구가 자주 쳐들어왔다. 신 돈은 풍기를 문란하게 하고 여러 가지 불상사를 일으켰는데, 왕은 이 사실을 은폐시킬 의도로 밀고자 최만생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오히려 최만생·홍 윤 일파에게 암살당하였다. 공민왕은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는데, 현존하는 것은 「천산대렵도」 한 점뿐이다.
공병우孔炳禹(1906~1995)안과 의사. 평북 벽동에서 태어났고, 1926년 조선 의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신의주 도립병원 의사를 거쳐 경성의전 부속병원 안과에 근무했다. 당시 중심적 망막염에 관한 5편의 연구 논문으로 일본 나고야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에서 개업하였다. 그는 또 한글 타자기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여, 이것을 완성했다. 저서로는 『안과학』 『대한 색맹표』 『대한 시력표』 등이 있다.
공양왕릉
공양왕恭讓王(1345~1394)고려의 마지막 왕(재위 1389~1392). 신종의 7대손으로 비는 노 진의 딸 순비이다. 창왕이 폐위되자 즉위하였으나, 이성계 일파의 압력과 간섭으로 우왕·창왕 부자를 살해하게 되었다. 이성계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정몽주가 살해된 후, 이성계 일파에게 덕이 없고 어리석다는 이유로 폐위당함으로써, 고려는 34대 475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그 후 원주로 추방되어 있다가 삼척에서 살해되었다.
곽낙원郭樂園(1859~1940)여류 독립운동가·민족운동가. 김 구의 어머니로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났다. 김순영의 부인으로 아들 김 구를 성장시키는 데 헌신적인 노력을 하였다. 『천자문』을 가르치고 『동몽선습』·『사서삼경』 등을 읽혔다. 82세로 중경에서 생을 마쳤다.
곽재겸郭再謙(1547~1615)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자는 익보, 호는 괴헌, 본관은 현풍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성일을 찾아가 의병을 모집하는 것과 군량미의 수집 등에 관해 많은 논의를 하였다. 서사원과 함께 의병을 모아 전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사촌 동생인 곽재우 등과 함께 화왕산성에서 많은 왜병을 물리쳐서 부호군에 임명되었다. 왜란이 끝난 뒤 제자들을 양성하는 일에 힘썼다.
곽재우 동상
왜적을 무찌르는 곽재우 장군
경북 달성군에 있는 곽재우의 신도비
곽재우郭再祐(1552~1617)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자는 계수, 호는 망우당, 시호는 총익, 본관은 현풍이다. 황해도 관찰사 곽 월의 아들로서 낚시질로 소일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붉은 옷을 입고 선두에서 싸워 많은 전공을 세워서 '홍의장군'이라 불리었다. 정유재란 때는 화왕성을 지켰고, 그 후 절도사 등 많은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