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 천지에서 천녀(女女)가 셋이서 목욕하고 있다가 그중의 하'나인 불고룬(佛庫倫)이란 천녀가 붉은 산실과를 먹고 애기를 배서 낳은 것이 그 시조인 불고리(佛庫里)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옛날부터 만주에서 전해 내려온 우리 역사의 고구려의 시조 전설을 끌어낸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는데, 이러한 전설을 메어다가 붙이기 까지는 청나라가 역시 하늘이 내린 왕을 떠 받들고 있다는 존엄을 보이기 위한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고 청나라에서는 그 뒤에 대단히 훌륭한 임금이었던 강희제(康熙帝)는 친히 만주를 시찰할 때 지금 길림(吉林)에까지 와서 직접 백두산의 산신을 "장백산지신"(長白山之神)을 신당에 모시고 제사를 지내고, 백두산을 만주의 산이라고 보다도 중국 본토의 산과 맥락을 같이 한 것이라 했다. 이것은 단순히 산을 위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산줄기 뻗친 땅이 통털어 청나라의 땅이요, 그 안에 사는 백성은 모두 청나라를 따르게 하려는 생각을 품은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만주와 조선땅의 여러 족속과 나라가 옛날 옛적부터 산을 위하되 그중 높고 큰 산인 백두산에 그 마음을 모으고 있었다는 것은, 백두산 하나가 귀하다느니 보다도 한종족이 발전해 나갈 근본인 자기의 국토를 애끼고 숭상하는 굳은 신념을 표시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누구나 사람마다 조상을 모시고 일가 친척이 부접해서 살던 동리인 고향을 가지듯이 민족과 국가는 영원한 고향인 그 국토를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 나라의 훌륭한 산은 그 민족에게 그 국토의 주장되는 목표로 생각하게 된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의지에 나갔다가 고향에 돌아갈 때 동리 앞산이나 뒷산을 멀리 바라보며 반가운 느낌이 더 간절해지는 것에 비길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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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산마루에서 천지를 바라보는 감격에 잠겼던 우리는 그날밤은 산상에 천막을 치고 자기로 하고 모든 준비를 하게 되었는데, 산상에 까지 일행의 짐을 저올려오기 위해서 나는 다시 한번 산밑으로 내려갔었다. 말하자면 나는 그 때문에 하로에 백두산을 두번 오른 셈이었다. 대단히 고달프기는 했으나, 저녁을 치르고 천막 속에 들어갔을 때 동천에 솟는 달빛조차 은은하여 우리 민족의 신령한 산, 대 백두산 품속에 안긴 기분이 더욱 정신하고 숭엄해질 때는 하루에 두번 오른 백두산이 더욱 정답고 믿어워졌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