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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由來

今日, 咸鏡北道의 邊境一帶에 居住하는, 所謂 在家僧은 一便 僧侶로 行世를하면서 一便 俗人과같은 生活을 營爲하며, 蓄妻鞠子한다는 것은 周知하는바이어니와, 李能和氏는 朝鮮佛敎通史에서 在家僧에 對하여, 다음과같이 말하엿다—

『海東僧史, 有一奇事, 卽 北邊之在家僧是, 蓄妻食肉, 俱爲無碍, 可謂朝鮮之眞宗也, 咸鏡北道慶興, 慶源, 會寧, 富寧, 鏡城, 穩城等沿邊各郡, 特有一種僧侶, 群聚居生于山谷中, 自成村落, 其所居村落名山門, 必有公共佛殿一處, 婚喪之禮, 行於寺, 號曰在家僧, 血脈法脈, 兩俱相續, 以別良俗, 不令雜處, 劃定村落, 使有增殖……』이라 하여 大略 在家僧에 對하여 論述하엿고, 그由來에 對하여는 高麗圖經의 所說에 左袒하엿다. 그러나, 이由來問題에 對하여는 學界에잇어서는 尙今그結論을 얻지못하엿고 各其蓋然的所見을 披瀝하는 程度를 지나치지못하고잇는現狀이다. 從來로 이由來問題에對하여는 大體로 三說이流布되고잇으니 그것은 奴隸說(僧軍說), 僧侶說, 藩胡說인것이다. 勿論 主從을 달리하는程度에 지나지못하고 그根本問題인 種族問題에對하여는 女眞族에大體로歸一하는듯도하나 然이나 各其所說의根據가 薄弱하야信憑할만한決論을 얻기에는 아직前途遼遠이라 아니할수없다. 只今左[1]에 各說을紹介檢討하고저한다.


甲, 奴隸說(僧軍說)

첫재, 이在家僧의 由來에 對하여, 世間에 傳하는所謂 僧侶說, 或은藩胡說以外에, 宋의徐兢의所謂奴隸說을 紹介하려고 한다. 卽그의著, 高麗圖經에依하면,

『在家和尙, 不服袈裟, 不持[2]戒律, 白紵窄[3]衣, 束腰皁帛, 徒跣以行, 間有穿履者, 自爲居[4]室, 娶婦鞠子, 其於公上, 負載器用, 掃除道路, 開治溝洫, 修築城室, 悉以從事, 邊陲[5]有警, 則團結而出, 雖不閑於馳逐[6], 然頗壯勇[7], 其趨軍旅之事, 則人自褁糧[8], 故國用不費而能戰也, 聞中間契丹爲麗人所敗, 正賴此輩, 其實刑餘之役人, 夷人以其髡削鬚髮而名和尙耳.』라 하여 所謂, 在家僧은 袈裟를 입지아니하고, 戒律을 가지지아니하며, 邊境에서軍務에服하여, 所謂屯田兵과 恰[9]似한種類의 것임을말하고 잇는듯하다. 다시말하면, 世間에서, 이特殊階級을 在家和尙이라 指稱함에至한 그根據가 그들이鬚髮을髡削함에잇으나, 그實은 그들이 刑餘之役人인限, 이 階級을 在家和尙이라함은 틀림없이 誤謬를犯한 見解라고 보고잇는듯 하다.

그다음, 李能和氏는 在家僧의 由來에對한 一說로서 그著 朝鮮佛敎通史에서 世間에서는 이在家僧의由來를, 仁祖十四年에 勃發한 淸兵의 入寇[10], 卽, 丙子胡亂때에, 淸兵이 大擧南漢山城을 攻圍하여 四十五日만에 媾和解圍한 故事에 關聯시켜, 그當時, 淸國은 그媾和條件의一로서 朝鮮에 對하여, 그要求가잇는 卽時로, 大乳人 三千人과 牝馬三千匹을, 寧古塔에 入送하라는 要求를 하엿음으로, 北邊沿郡에 居住하는 女眞遺族으로서 이要求에 應할計劃을 樹立한後, 이를保護하엿고, 現今, 北邊沿郡에 蟠居하여 一種特殊部落을 形成하고잇는, 在家僧의 由來가여긔서 發足하엿다고 傳하는者가잇다고 하엿다. 그러나, 이說은 所謂在家僧이 高麗時代에벌서 邊境에서, 特殊 集團生活을 營爲하고 잇[11]엇다는 記錄이 儼然히 現存하는 以上, 坊間의一種俗說에 지나지못할것이다. 그러나, 徐兢의 刑餘之役人說은 그記錄이오래인點과, 當時의 政治的 特殊性을 吟味한다면, 在家僧의 由來問題檢討에 關하는限 一顧할만한 說이라고 하겟다.


乙, 僧侶說

다음에, 李能和氏는, 前揭書에 잇어서, 다시在家僧由來에 對하여 다시一說을 紹介하엿다. 卽,

『又說, 高麗尹瓘[12]驅逐女眞, 其殘落者造寺院, 以安處之, 使之奉佛, 族居爲僧…』이라하엿다. 只今, 그由來에對한所說을보건대女眞邊人을僧侶로變換시켯다는데, 그根據를찾고저하는說이다. 또盧□[13]氏는그著 淸津府一方面茂山郡會寧郡鍾城郡穩城郡各管內及間島古蹟調査의顚末에서

『初金宗瑞之驅出女眞也, 其窮不能徒去者, 歸化則斷髮區別之, 旣斷髮則, 屬之寺刹, 謂之在家僧, 戰時則運搬軍需(軍幕等)而在前驅, 平時則, 造黃紙以供官用, 極賤不可與平民同等故, 土豪亦皆以奴隸使之, 諸般討索, 罔有紀極, 距今前西北經略使魚允中, 革袪其賤役, 然慣習猶存故, 官每欲復其身役則, 渠自呼訴于京司, 僅民造紙之役, 然在鄕役不得免焉…』이라하여 女眞遺民을 政策上 斷髮시켜, 邊境各寺刹에分屬시켯다는데서 그由來를찾고저하는說이다. 勿論, 이女眞遺族의僧侶說도 充分히 在家僧 由來問題檢討上 그對象[14]이될만한 說이라하겟으나 이說을 肯定하기까지에는 아즉 相當한根據와時日이要하지안흘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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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원문에는 洽으로 되어 있다.
  10. 원문에는 冠으로 되어 있다.
  11. 원문에는 ‘엇’으로 되어 있다.
  12. 원문에는 權으로 되어 있다.
  13. 판독 불가.
  14. 원문에는 衆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