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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와 전망/프롤레타리아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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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는 전국민의 봉기 및 전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음으로써만 권력을 쟁취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는 국민의 혁명적 대표로서, 절대주의와 봉건적 야만성에 대한 투쟁에서 국민이 인정하는 지도자로서 정부를 이루게 될 것이다. 그러나 권력을 장악한 프롤레타리아는 새 시대, 즉 혁명 입법과 단호한 정책의 시대를 펼칠 것이다. 그리고 이 점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때, 프롤레타리아는 전국민의 의지에 대한 공인된 대변자로서의 역할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는 결코 확신할 수 없다. 구체제의 케케묵은 외양간을 말끔히 청소하고 그 안에 거주하는 자들을 몰아내기 위해서 프롤레타리아가 취할 최초의 조치들은 국민 전체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게 될 것이다. -비록 거세된 자유주의자들은 인민 대중 속에 아직도 어떤 편견들이 완강히 지속되고 있다고 말하더라도.

이러한 정치적 일소 작업에는 모든 사회 관계 및 국가 관계의 민주적인 재조직화 작업이 수반될 것이다. 노동자 정부는 대중의 직접적인 압력과 요구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모든 관련 사태들에 결정적인 개입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노동자 정부의 첫 번째 과제는 민중의 피로 얼룩져 있는 자들의 군대와 행정부로부터의 추방 및 반민중적인 범죄로 오염되어 있는 무리들의 면직과 해산이어야만 할 것이다. 이 과제는 반드시 혁명의 초기에 이루어져야만 한다. 즉, 사병들이 장교를 선출하고 선출된 장교는 사병들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제도의 도입 및 전국적인 민병대의 조직이 장차 실현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노동자 민주주의는 즉시 노동 시간에 관한 문제, 농업 문제, 실업 문제 등과 직면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점은 분명하다. 즉, 시간이 지남에 따라, 권력을 장악한 프롤레타리아의 정책은 보다 깊숙이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이며, 또한 더욱더 계급적 성격을 확고히 할 것이다. 이와 병행해서, 프롤레타리아와 국민 사이의 혁명적 유대는 결렬될 것이며, 농민내의 계층적 분열은 정치적 형태를 띠게 될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 정부의 정책이 자기 규정성을 더해 감에 따라, 즉 더 이상 일반 민주주의적인 정책이 되지 않고 계급 정책이 되어 감에 따라, 분열된 농민내의 각 계층간의 적대 관계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

농민과 인쩰리겐챠 사이에 부르조아 개인주의적인 전통이나 반(反)프롤레타리아적인 편견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쟁취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같은 편견의 결여는 정치적 의식 때문이 아니라 바로 정치적 야만성, 사회의 무정형성, 원시성 및 특징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후진적인 특성들 중의 그 어느 것도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프롤레타리아의 정책을 위한 신뢰할 수 있는 토대를 결코 마련해 줄 수 없다.

봉건제의 철폐는 그 제도 내에서 모든 부담을 떠맡는 계급(원문에는 estate로 되어 있음-역주)인 농민 전체로부터 지지를 얻을 것이다. 누진적인 소득세의 부과 역시 농민 대다수의 지지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농업 프롤레타리아를 보호할 목적으로 취해지는 어떠한 입법행위도 농민 다수의 적극적인 공감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소수 농민들로부터는 적극적인 반발에 부딪치게 될 것이다.

결국, 프롤레타리아는 촌락에서도 계급투쟁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적인 방식을 통해서, 모든 농민들 사이에 명백히 존재하고 있는 이익 공동체를 비록 비교적 제한된 범위 내에서나마 어쩔 수 없이 파괴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권력을 장악한 초기부터 프롤레타리아는 부유한 마을과 가난한 마을 사이의 적대 관계 및 농업 프롤레타리아와 농업 부르조아지 사이의 적대 관계 속에서 자신의 지지 세력을 발견해 낼 필요가 있다. 농민의 계급적 이질성이 프롤레타리아의 정책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안겨 주고 그 정책의 기반을 협소한 것으로 만드는 반면, 농민내의 계급분화가 불충분한 경우에는 농민 내에 발전적인 계급투쟁을 도입하는 데에서 난관이 발생할 것이다. 그런데 도시의 프롤레타리아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같은 발전적인 계급투쟁인 것이다. 따라서 농민의 원시성은 프롤레타리아를 향해 적대적인 얼굴로 모습을 바꿀 것이다.

농민의 냉담성과 정치적 수동성 및 더군다나 농민 상층부의 적극적인 반발은 일부 지식인들과 도시의 쁘띠부르조아지에게 일정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권좌에 오른 프롤레타리아의 정책이 더욱 단호하고 명확한 것이 되어 갈수록 프롤레타리아가 딛고 서 있는 기반은 더욱더 협소해지고 위태로워질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거의 확실한 일이며 또한 심지어는 거의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

프롤레타리아가 자기의 동맹 세력들로부터 반발을 사게 될 프롤레타리아 정책의 중요한 두 가지 특징은 집산주의와 국제주의이다.

농민의 원시성 및 쁘띠부르조아적인 성격, 농촌에 한정된 그들의 시야, 국제정치적 유대 및 헌신으로부터의 고립 등은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혁명 정책을 공고히 하는 데 심한 어려움을 안겨 줄 것이다. 임시 정부에 참여해서 제반 혁명적 민주 개혁의 기간 동안 그 정부를 이끌어 가면서, 그러한 개혁 조치들이 보다 철저하게 근본적인 성격을 갖도록 조직화된 프롤레타리아에 의지해 싸우고, 그리고 나서 민주주의의 강령이 완전히 실현된 후에는 스스로 닦아 놓은 터전을 떠남으로써 부르조아 정당들에게 길을 열어 주고 자신은 야당으로 돌아가 의회 정치 시대의 막을 열어 주는 것이 사회민주당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것은, 노동자 정부라는 생각 자체의 신용을 떨어뜨리는 식으로 상황을 상상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러한 단계론이 '원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원칙적'이라는 추상적인 형태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전혀 무의미한 일이다- 바로 그것이 절대로 비현실적이며 가장 나쁜 종류의 공상-일종의 속물 혁명가의 공상-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강령을 최대강령과 최소강령으로 구분하는 것은 권력이 부르조아지의 수중에 있는 동안에는 아주 중대하고 원칙적인 의의를 지닌다. 부르조아지가 권력을 잡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우리의 최소강령에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양립할 수 없는 모든 요구들을 제외시키게 된다. 그러한 요구들(즉, 최대강령을 이루는 요구들)은 사회주의 혁명의 내용을 형성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력이 사회주의자들을 다수파로 하는 혁명 정부로 넘어가게 되면, 그 즉시로 우리의 강령을 최대강령과 최소강령으로 나누는 것은 전혀 무의미하게 된다. 그것은 원칙이나 즉각적인 실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프롤레타리아 정부는 결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그러한 제약 내에 한정시킬 수 없는 것이다. 하루 8시간 노동의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알다시피, 이 문제는 결코 자본주의의 관계들과 모순되지 않는다. 따라서 사회민주당의 최소강령의 어느 한 항목이 될 것이다. 그러나, 혁명기간 동안에, 즉 계급의식들이 서로 열정적으로 비화된 시기에 이러한 방침을 실제로 도입한다고 상상해 보자. 그 경우, 이러한 방침이 공장 폐쇄 및 공장의 가동 중지라는 형태로 나오는 자본가들의 조직적이고도 단호한 저항에 부딪치게 될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결과, 수십만 명의 노동자들이 거리를 헤매게끔 될 것이다. 이 때 정부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그것이 만일 부르조아 정부라면, 아무리 급진적인 정부라 할지라도 결코 사태를 그러한 지경에 이르게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공장 폐쇄와 직면해서는 그러한 정부는 권력(힘)을 상실한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는 어쩔 수 없이 사임하게 될 것이며, 하루 8시간 노동제는 도입되지 않을 것이고 항의하는 노동자들은 해고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가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상황에서는 하루 8시간 노동제의 도입은 전혀 상반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자유주의와는 달리, 자본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에게 의지하고 있으며 또한 부르조아 민주주의가 주장하는 소위 "공정한"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할 의사가 없는 정부에게 공장 폐쇄 행위는 당연히 노동 시간을 연장시키기 위한 구실이 될 수 없다. 노동자 정부에게는 오직 한 가지의 해결책 밖에는 없다. 즉, 폐쇄한 공장들을 몰수하고, 사회화된 토대에 기초해서 그와 같은 몰수된 공장들의 생산 활동을 조직화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자신의 강령에 충실한 노동자 정부는 하루 8시간 노동제를 위한 법령을 공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자본이, 사유재산 제도에 기초한 민주주의 강령이 취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가지고도 진압할 수 없는 강력한 저항을 꾀한다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사임함과 동시에 프롤레타리아에게 직접 호소할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해결책은 단지 정부에 참여하고 있는 집단의 관점으로부터 도출된 해결 방식이다. 그리고 그러한 해결 방법은 결코 프롤레타리아나 혁명의 발전을 위한 것이 못 된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사임한 후에 상황은 처음 그들이 권력을 잡지 않으면 안 되었던 때와 똑같이 될 것이다. 자본의 조직화된 반발 앞에서 도망친다는 것은 애당초 권력을 잡기를 거부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큰 혁명에 대한 배신이 될 것이다. 정부에 참여해서는 자신의 약점을 노출시키고 그 다음에 도망치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정부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실제로 노동계급의 당을 위해서 훨씬 더 나은 일이 될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프롤레타리아 권력은 실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적극적인 조치들을 채택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정부 내에 있는 노동자 대표들이 해고된 노동자들의 요구에 대해서 혁명의 부르조아적인 성격을 근거로 응답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정부가 실업자들을 부양하는 책임을 맡는다면 -그러한 부양책이 어떠한 형태로 이루어질까 하는 문제는 여기서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경제적 권한이 즉시 그리고 완전히 실질적으로 프롤레타리아에게로 넘어가는 것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노동자들을 억압할 때 언제나 산업 예비군의 존재를 활용해 은 자본가들은 자신들이 경제적으로 무력해지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혁명 정부는 그들에게 정치적 무능력이라는 낙인을 찍는 것이다.

실업자들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정부는 파업자들을 지원하게 된다. 만일 정부가 파업자들을 지원하지 않는다면, 정부는 그 즉시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정도로 자신의 존재 기반 자체를 손상당하게 된다.

정부가 그러한 지원 조치를 취하면 자본가는 공장 폐쇄에 의지하는 수밖에는 다른 어떤 방법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고용주들이 노동자들보다 훨씬 오랫동안 조업 중단을 견디어 낼 수 있음은 극히 명확한 사실이다. 따라서 노동자 정부가 전반적인 공장 폐쇄 사태에 대응할 수 있는 길은 단 한 가지뿐이다. 즉, 공장들을 몰수하고 되도록 많은 공장 내에 국영 생산방식이나 공동 생산방식을 도입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문제들이 단순히 토지를 몰수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농업에서 발생하게 된다. 프롤레타리아 정부는, 대규모 생산을 수행하는 대규모 사유지들을 몰수하자마자 그 즉시로 그것들을 분할해서 소규모의 경작자들에게 매각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된다. 이 문제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 정부에게 가능한 유일한 길은 공동 통제에 의한 협동 생산방식을 조직하거나 아니면 직접 국가의 통제에 의한 생산방식을 조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사회주의를 향한 길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극히 명확히 무엇이 문제의 핵심인가를 보여 주고 있다. 즉, 만일 노동자들에게 최소강령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겠다고 미리 약속했다면, 그리고 그와 동시에 부르조아지에게는 최소강령을 넘어서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혁명 정부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 그 같은 양면적인 약속을 실현한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의 대표자들이 무기력한 인질로서가 아니라 지도 세력으로서 정부에 참여한다는 사실 자체로 인해서, 최소강령과 최대강령 사이의 경계선은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즉, 집산주의가 당면 과제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가 이러한 방향으로 전진하는 과정에서 봉착하게 되는 한계점은 세력 관계에 달려있는 것이지, 결코 프롤레타리아 당의 원래의 의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부르조아 혁명에 있어서의 어떤 종류의 특별한 형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즉 민주주의적인 프롤레타리아 독재(또는,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독재) 따위를 결코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노동계급은 민주주의 강령의 한계를 과감히 넘어서지 않고서는 자신들에 의한 독재의 민주주의적인 성격을 보존할 수 없다. 이 점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환상을 갖는 것은 치명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러한 환상이야말로 사회민주당에 대한 신뢰를 처음부터 실추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일단 권력을 잡은 프롤레타리아는 끝까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싸워야 한다. 권력의 유지와 강화를 위한 이러한 투쟁에서의 주요한 무기 중의 하나가 선동과 조직화 작업-특히 농촌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이라면, 집산주의 정책 역시 그러한 무기 중의 하나인 것이다. 집산주의는 당이 권력을 잡자마자 서 있게 될 최초의 위치로부터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필연적인 수단일 뿐만 아니라 또한 프롤레타리아의 지원 아래 그 위치를 고수하기 위한 수단이기도하다.

연속 혁명(uninterrupted revolution)이라는 생각은 이미 사회주의 신문에서는 정식화되어 있다. 즉, 점증하는 사회적 갈등과 새로운 부문들에서 일어나는 대중의 반란들, 그리고 지배계급의 경제적․정치적 특권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끊임없는 공격과 더불어, 절대주의와 봉건주의의 일소를 사회주의 혁명과 연계시킨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우리의 소위 "진보적"인 신문들은 한결같이 분노에 차서 외치고 있다: "이런, 우리는 많은 것을 참아 왔지만 이것만은 용납할 수 없다. 혁명은 합법화될 수 있는 길이 아닌 것이다. 예외적인 조치의 적용은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법이다. 해방을 위한 운동의 목적은 혁명을 영구적으로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혁명을 가능한 한 빨리 법의 통로로 유도하는 데 있는 것이다" 기타 등등.

이러한 진보적 민주주의를 보다 근본적으로 대변하는 자들은 이미 확보된 입헌적인 "성과들"이라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감히 혁명에 반대하는 태도를 취하는 모험을 감수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견해로는, 의회주의 자체가 실현되기 전에 나타나는 이러한 의회에 대한 과대망상증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강력한 무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다른 길을 택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법률이라는 기반 위에 기초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사실적으로 여겨지는 기반들, 즉 역사적 "가능성"과 정치적 “현실주의”라는 기반 위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끝내는 "마르크스주의"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왜 안 그러겠는가? 저 신앙심 두터운 베니스의 부르조아인 안또니오(Antonio)가 아주 적절하게 말했듯이, "악마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성서까지도 인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근본적 민주주의자들은 러시아에서의 노동자 정부라는 생각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긴다. 뿐만 아니라, 장차 도래할 역사적 전환기에도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은 불가능하다고까지 단언한다. 그들은 “혁명의 선행 조건들이 아직 보이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사실일까? 물론 사회주의 혁명의 일정을 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혁명의 현실적인 역사적 전망을 지적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