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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플라나무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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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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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락장송의 우거진 경개가 장하지 아님이 아니나, 백설이 만건곤(滿乾坤)할 때 독야청청(獨也靑靑)할 만한 의열(義烈)의 사(士)가 아님을 어찌하며, 운표(雲表)에 우뚝 솟은 은행의 거수(巨樹)가 위관(偉觀)이 아님이 아니나, 인의에 기반을 세운 공부자(孔夫子)에게 경원하는 생각이 앞섬을 어찌하며, 매죽(梅竹)이 귀엽지 아님이 아니나, 시인 묵객의 취흥을 손(損)할까 저어하니, 차라리 우리는 계변(溪邊)에 반열(班列)지으며 혹은 고성(古城)에 외로이 솟은 포플라나무를 우러러보고자 하노라.

포플라는 하늘을 향하고 산다.

인간 살림에 세력투쟁이 있고 국가 생활에 영토확장의 야망이 없을 수 없는 것처럼 무릇 거대한 수목은 그 수세(樹勢)를 널리 횡(橫)으로 펴서 일장공성(一將功成)에 만골고(萬骨枯)라는 셈으로 거수의 광활한 지엽(枝葉)이 임의로 무성을 극하기 위하여 그 전후좌우의 만초(萬草)가 고갈을 당하고야 만다. 오직 포플라나무만은 횡으로 세력을 벌이려 하지 않고 종(縱)으로 하늘을 향하여 자라고 또 자라기만 한다. 그 일직한 구간(軀幹)과 수직적으로 하늘을 향한 대지(大枝)·소지(小枝)는 호렙산 아래서 축복하는 모세의 손인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흐리신 예수의 팔뚝인가? 유한한 횡으로 살지 앟고 무한한 종으로 하늘로 사는 포플라야말로 고귀하도다.

포플라는 비애의 나무다. 춘양(春陽)에 포플라의 새싹이 발동하는 것처럼 생명의 요동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다시 없으니 신추늬 포플라가 물론 가하며 녹음방초 승화시(勝花時)에 우후(雨後)에 천지를 새롭게 하느 포플라의 청풍이 또한 가상한 것임은 물론이나 포플라의 본색은 아무래도 추색(秋色)에 비창(悲愴)이 만신(滿身)함에 있는 듯하다. 단풍의 붉음은 오히려 염태(艶態, 고운 자태)를 보이거니와 포플라나무의 황엽(黃葉)은 문자 그대로 처참한 신세를 표시한다. 고성에 외로이 솟은 포플라 한 대가 풍우에 부대껴 큰 줄기와 가는 가지까지 끄들렸다간 풀리고 휘어졌다간 다시 서고 하는 광경이며, 만추(晩秋)에 석양을 황엽에 반영하면서 미풍에도 오히려 일엽씩 귀근(歸根, 뿌리로 돌아옴)하는 자태를 보라. 포플라의 장간섬지(長幹纖枝)가 만신에 비창을 머금은 것은 우리로 하여금 상복에 싸인 젊은 과부의 처지를 연상케 하거니와 그보다도 오히려 깊고 높고 넓은 비통이다.

실로 처재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비애의 사람〉 예수의 초상을 생각지 않고는 포플라 특유의 처참한 광경을 비기지 못하며,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의 한숨소리 없이는 포플라나무를 차마 보지 못한다. 천하의 비통을 일신에 머금은 포플라와 인류의 비애를 한몸에 걸머진 예수!

포플라나무는 지평선을 깨뜨린다. 호주에는 유카리수(樹)라는 고목(高木)이 있다 하나 우리 주위에는 100척 내지 150척까지 천공에 솟은 포플라가 우선 고수(高樹)가 아닐 수 없다. 무릇 시기와 당쟁은 왜소에서 생긴다. 홀로 운표에 두각을 두고 미풍과 전광(電光)에 전신이 진동하여 책하는 이 없어도 스스로 통회하고 섰으니 그 민감, 그 고결함이여! 놀랍도다.

<1934. 11>

(其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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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플라는 그 줄기나 가지나 다만 일직한 것 외에 볼 것이 없다. 기기묘묘한 곡절도 없고 시선을 새롭게 할 만한 색채도 없다. 다만 푸르고 오직 곧고 긴 것 뿐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수석을 즐기며 분재를 일삼는 이들에게는 포플라는 하등의 취할 점이 없으나 우리에게는 그 취할 데 없는 점이 고귀하다. 곡예와 술책은 모두 다른 나무에 구하라. 그리고 오직 순직하고 단명(單明)한 것만은 포플라나무에서 찾으라.

고색창연한 것을 찾는 이는 포플라나무의 새롭고 젊은 것이 불가하다 한다. 과연 포플라나무는 반도에 신래(新來)한 객이니 그 이름을 양류(洋柳)라고도 하거니와 포플라나무 보이는 데는 외래의 풍취가 없지 않고 경박의 가락이 전무함이 아니다. 그래도 포플라의 병렬한 재방은 수난(水難)과 풍재(風災)를 면하였다는 것을 말하이 되고 양류의 푸른 빛이 울타리처럼 둘러싼 동네는 신흥의 기운이 창일(漲溢)함을 시증(示證)하여 마지 않는다. 국수(國粹)가 가하고 전통이 귀하다하나 청태(靑苔)가 끼인 와편(瓦片)과 고총(古塚)에서 나온 파환(破環)은 골동가나 고곽자의 한시일(閑時日)에 맡기라. 생물은 새로울숡 그 생명이 왕성하니 적송(赤松)을 심었던 것이 반도 강산의 벌거숭이 된 일인(一因)인 줄 알았거든 적송을 뽑고 세력 강성한 나무를 대식(代植)할 것이요, 구간이 고쇠하였거든 새싹을 접목하는 일이 지당하지 않은가.

옛 것을 숭상하고 낡은 것을 생각한들 고각(故殼)이 된 후에야 무슨 소용이 있으랴. 고색을 자랑하는 불교도 가하지 않음이 아니요, 전통을 숭사아는 유교도 금할 것이 아니나 문제는 생명의 역량이다. 비록 반세기의 역사만을 가졌을지라도 영혼의 오저(奧低)에서부터 생명 건축의 마치소리 씩씩하게 자라나는 기독의 산 생명에 부딪쳐볼 때에, 우리의 눈은 신래의 나무 포플라의 울창함을 쳐다보게 된다. 부럽도다, 강변에선 포플라나무의 새로운 생명, 꾸준한 생명!

포플라는 그 세장(細長)한 자태로 인하여 그저 부드럽고 한갓 연약하여 여성적인 듯이도 보이나 이는 속단임을 면치 못한다. 외관과 원경(遠景)이 여성같이 보이지 아니함이 아니나 접근할 때에 그 거간(巨幹, 큰 줄기)이 지축을 뚫고나온 듯한 위세에 사람으로 하여금 압도케 함은 포플라나무의 특성이다. 높은 나무는 풍상이 많다. 그 지엽이 미풍에도 진동함으 감상적인 여성보다도 예민하나 대지에 떡 버티고 선 그 웅자(雄姿, 남성적 자태)는 장부의 넋 그대로이다. 유순할 대로 유순하면서도 성전을 도굴화하는 무리들을 향하여는 의분의 채찍을 휘날리지 않을 수 없었던 어린 양을 병상(竝想)하면서 저 포플라나무를 바라보라. 부드럽고도 굳센 것은 포플라나무로다.

<193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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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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