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모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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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어머니를 따라 빨래터에 쫓아다닌 듯하나 이렇다 하고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자취는 없습니다. 좀 자라선 공부하러 뛰어다니기에 가정일에는 전연히 손도 대어보지 않았습니다.

이십여 세에 나는 출가를 하였습니다. 음식도 바느질도 빨래 같은 것도 할 줄 모르는 것이 가정에 들어앉아 놓으니 이 위에 더 가깝하고 안타까울 데는 없는 듯합니다. 연애시기를 지나 결혼기에 들어온 남편은 왜 그다지도 쌀쌀하고 냉정합니까. 참말 눈물겨운 일입니다. 더구나 남편은 구여성을 전 아내로 가졌더니 만큼 그의 눈에 비치는 나는 아마도 한심하기 짝이 없는 모양입니다. 나는 거의 날마다 남편과 싸움을 하고 친가로 간다고 보따리를 싸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선뜻 그리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나의 이성이 나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편과 날마다 쌈하게 되는 이유를 가만히 생각하니 내가 가정일에 서툴러서 그러한 듯하였습니다. 그 후 나는 적으나마 가정일에 충실해야 할 것을 깊이 깨닫고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물동이를 사다가 물을 긷고 때묻은 옷을 빨고 장에 나다니며 찬거리와 쌀을 사들였습니다. 처음에는 물동이를 이지 못하여 물 길러 온 부인들에게서 미움을 받았으며 겨우 집에까지 오면 남편이 달려나와서 물동이를 내려놓았습니다. 이러는 사이에 물동이를 몇 개나 깨뜨리고 나는 눈물까지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마는 그것도 며칠이지, 월여가 지나니 그 큰 물동이가 휭휭 올라가더이다.

그 다음은 빨래를 하였습니다. 애벌 빠는 것은 비누칠만 해서 방망이로 두드리면 되니까 그리 어려울 것이 없으나 애벌 빤 것을 잿물에 삶는 것이 서툴러서 퍽이나 힘을 들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잿물을 너무 많이 풀었던 모양입니다. 나의 손끝은 빨갛게 벗겨져서 며칠이나 앓으며 눈물동이나 좋이 흘렸습니다. 그때마다 남편은 흥! 흥 하고 비웃었습니다. 나는 끝없이 원망스럽고 안타까웠습니다. 이렇게 지나기를 한 일년이 넘으니 힘들던 빨래질에도 일종의 취미가 붙으며 때로는 예술적 감흥이 생기더이다.

이렇게 힘들이며 애쓰던 때도 이미 지나친 과거! 3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금은 봄철입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이 봄, 나는 빨래광주리를 이고 해란강을 향하여 나갑니다. 이곳은 봄이 와도 이때까지 꽃 한 송이 볼 수 없고 적적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바람이 지동치듯 불어서 겨울날인 듯이 생각됩니다. 그러나 오늘만은 이 북국에서 보기 힘든 따뜻한 날이외다. 길에는 빨래를 인 부인들뿐입니다.

가는 부인, 오는 부인, 나는 햇빛을 눈등에 받으며 지나가는 부인의 빨래 광주리를 보았습니다. 눈이 부시도록 빛나는 빨래! 나는 그 순간에 그 흰 빨래가 내 가슴에 선뜻 부딪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햇볕에 빛나는 저 빨래!

저것은 정성스레 빨래한 저 부인의 순결한 마음을 대표하는 듯하였나이다.

사랑하는 남편과 귀여운 어린애들을 생각하며, 곱게 씻은 저 빨래, 어머니와 아내의 마음을 대표한 것이 아니고 무엇일까. 봄볕은 저들의 다정한 맘에 따뜻하게 비치는 듯하외다.

강가에까지 온 나는 빨래를 내려놓고 빨래를 하였습니다. 강가에는 방망이 소리로 요란하였습니다. 봄 하늘 아래 방망이소리, 얼마나 시원한 소리입니까. 나는 나의 어리석었던 과거를 회상하며 저 하늘가를 바라볼 때 지금의 나는 하늘을 건너질러 펄펄 나는 새의 몸같이도 가벼운 듯합니다.

내 손끝은 물에서 헤엄질 칩니다. 빨래는 희어집니다. 헤우면 헤울수록 희어지는 이 빨래, 새 옷을 입을 때의 쾌감보다도, 때묻어 버릴 것같이 알았던 이 빨래가 눈이 시어지도록 희어지는 쾌감이야말로 빨래하는 이가 아니고서는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무심히 보니 내 손끝은 파란 물결 속에서 붉게 타오릅니다. 나는 손을 번쩍 들며 ‘봄이다!’ 하고 중얼거렸나이다.

간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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