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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55년)/선백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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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伯의 生涯


『二月十六日 동주 사망 시체 가져가라』

이런 電報 한장을 던져 주고 二十九年間을 詩와 故國만을 그리며 孤獨을 견디었던 舍兄 尹東柱를 日帝는 빼앗아가고 말았으니, 이는 一九四五年 日帝가 亡하기 바로 六個月前 일이었읍니다.

一九一○年代의 北間島 明東—그곳은 새로 이룬 흙냄새가 무럭무럭 나던 곳이요, 祖國을 잃고 怒氣에 찬 志士들이 모이던 곳이요, 學校와 敎會가 새로 이루어지고, 어른과 아이들에게 한결 같이 熱과 意慾에 넘친 모든 氣象을 용솟음치게 하던 곳이었읍니다.

一九一七年 一二月 三○日 東柱兄은 이곳에서 敎員의 맏아들로 태어 났읍니다. 그의 生家는 할아버지가 손수 伐材하여 지으신 기와집이었읍니다. 할아버지의 고향은 咸北 會寧이요 어려서 間島에 건너 가시어 손수 荒蕪地를 開拓하시고, 基督敎가 渡來하자 그 信者가 되시어 맏 손주를 볼지음에는 長老로 계시었읍니다.

東柱兄의 勤實하고 寬裕함은 할아버지에게서, 內省的이요 謙虛함은 아버지에게서, 溫和하고 緻密함은 어머니에게서, 각각 물려 받은 性品이라고 생각됩니다.

그의 兒名은 海煥이었고, 그 아래로 누이와 두 동생이 있었읍니다.

얌전한 小學生 해환은 兒童誌 『어린이』의 愛讀者였고, 그림을 무척 좋아 하였다고 합니다. 一九二一年에 明東小學을 마치고 大拉子라는 곳에서 中國人官立學校에 一年間 修學하였으니, 詩 『별 헤는 밤』의 佩, 鏡, 玉이란 妙한 異國少女의 이름은 이때의 追憶에서 얻어진 것이 아닌가 합니다.

一九三二年 그가 龍井 恩眞中學校에 入學하자, 저의 집은 龍井에 移舍하였읍니다. 中學校에서의 그의 趣味는 多方面이었읍니다. 蹴球選手이던 그는 어머니의 손을 빌지않고 네임도 혼자 만들어 유니폼에 붙이고 기성복도 손수 재봉틀로 알맞게 고쳐 입었읍니다. 낮이면 운동장을 뛰어 다니고 초저녁에는 散策, 밤늦게 까지 讀書 하거나 校內 雜誌를 만드노라고 등사 글씨를 쓰거나 하던 일이 기억됩니다. 끝까지 즐기던 이 散策은 이때부터 비롯 되었읍니다.

運動服이나 文學書籍만 들고 다니는 그의 成績에 뜻밖에도 數學이 으뜸 가는 것에는 다들 놀래었읍니다. 特히 幾何學을 좋아함은 그의 緻密한 性品에서 였다고 짐작 됩니다. 一九三五年 봄 三學年을 마칠 지음, 그는 불현듯 故國에의 留學을 꿈꾸고 겨우 아버지의 승락을 얻어 平壤 崇實中學校에 옮기었읍니다. 그의 習作集으로 미루어 平壤 時節 一年에 가장 文學에의 意慾이 高潮된듯 합니다. 이 즈음 白石 詩集 『사슴』이 出刊되었으나, 百部限定版인 이 책을 求할 길이 없어 圖書室에서 진종일을 걸려 正字로 베껴내고야 말았읍니다. 그것은 소중히 지니고 다닌 모양으로, 지금은 나에게 保管되어 있읍니다. 平壤 留學도 끝을 맞게 되었으니, 崇實學校가 神社參拜問題로 廢校케 되었던 까닭입니다. 一九三六年 다시 龍井에 돌아와 光明中學校 四學年에 들었읍니다. 이때 當時 間島에서 發刊되던 『카토릭 少年』誌에 童舟라는 닉네임으로 童謠 몇편을 發表한 일이 있읍니다.

그의 悲運은 中學校 卒業班에서부터 비롯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卒業을 한學期 앞둔 그는 進學할 科目을 選擇해야 했읍니다. 그때 벌써 많은 童謠와 詩稿를 가지고 있던 그에게 文學 以外의 길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읍니다. 외아들인 아버지는 젊어서 文學에 뜻을 두어 北京과 東京에 留學하고 敎員까지 지내셨건만, 自己의 生活上의 失敗를 아들에게 까지 되푸리 시키고 싶지 않으셨읍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醫師가 되기를 권하셨읍니다. 그러나 그는 굳이 듣지 않고 아버지의 退勤前부터 山이고 江가이고 헤매다가 밤중에야 自己 房에 돌아오는 날이 계속 되었읍니다. 한숨이 늘고 가슴을 뚜드리는 때도 있었읍니다. 이렇게 半年을 두고 아버지와의 對立이 계속되다가 卒業이 닥쳐오자 그는 이기고 말았읍니다. 할아버지의 권고로 아버지가 讓步하신 것입니다. 小學과 恩眞中學 同窓이며 姑從四寸이며 또 동갑인 宋夢奎兄과 同行하여 서울에 온것은 一九三八年 봄이었읍니다.

上京하자 두분 다 延專에 入學하고 그 後부터 집에 오기는 一九四二年까지 每年 二回, 여름과 겨울 放學때 뿐이었읍니다. 따라서 그 時節의 나의 追憶도 斷片的일 수 밖에 없읍니다.

지금도 눈앞에 선한 그 情답던 모습은 四角帽에 校服을 입은 형님이 아니라, 베바지 베적삼에 밀집모자를 쓰고 황소와 나란히 서 있는 형님입니다.

故鄕에 돌아 오면 그날로 洋服은 벗어 놓고 우리 옷으로 바꾸어 입고는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일을 도왔읍니다. 소꼴도 비고, 물도 긷고, 때로는 할머니와 마주 앉어 맷돌도 갈며 寡默하던 그도 유모어를 섞어 가며 서울 이야기를 하던 것입니다.

이러한 生活 속에서도 남몰래 쉬는 한숨을 나는 옆에서 가끔 들은 듯 합니다. 그것은 些少한 일로 傷함을 입는 끓어오르는 詩興과 讀書時間의 아쉬움에서 였을 것입니다.

노여움도 아까움도 微笑로서 흘려 보낼 수 있었던 그는, 집안 어른들의 일을 돕지 않고는 마음을 놓지 못하였읍니다.

寬裕함이 그의 意志를 지탱케 못하였을지나 決코 優柔不斷하지는 않았읍니다.

龍井은 人口 十萬에 가까운 작지 않은 都市였으나, 大學生인 그는 아무 쑥스러움 없이 베옷을 입은채 거리로 소를 이끌고 다녔읍니다. 그럴 때에도 그는 릴케나 바레리의 詩集, 또는 지이드의 책을 옆에 끼는 것을 잊지 않았읍니다. 으스름때면 으레이 하는 散策에, 동생인 나는 그의 손목을 잡고 같이 거니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 었는지 모릅니다. 街路樹가에서 北原白秋의 『고노미찌』를 콧노래로 부르기도 하고, 숲속에 앉아 새로 뜨는 별과 먼 강물을 바라보며 손 깍지를 낀채 묵묵히 앉았을 때에는 그의 얼굴에 무슨 憧憬과 感情이 끓어 오름을 年少한 나도 느낄 수 있었읍니다.

新作路를 걷다가도 賦役하는 시골 아낙네 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너고 싶어 하고, 골목길에서 노는 아이들을 붙잡고 귀여워서 함께 씨름도 하며, 한포기의 들꽃도 참아 못지나치겠다는듯, 따서 가슴에 꽂거나 책짬에 꽂아 놓곤 하였읍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하는 軟弱한 것에 대한 愛情의 表白은 그의 天稟의 記錄이었읍니다. 放學때 마다 짐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數十卷의 冊으로 한學期의 讀書의 傾向을 알수 있었읍니다. 나에게 小川未明童話集을 주며 퍽 좋다고 하던 일과 隨筆과 版畵誌 『白과黑』 七, 八卷권을 보이며 版畵가 좋아 求得하였으며, 機會가 있으면 自己도 木版畵를 배우겠다고 하던 일이 記憶됩니다. 이리하여 집에는 近八百卷의 책이 모여졌고 그중에 지금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앙드레·지이드全集 旣刊分全部, 또스토예프스키 硏究書籍, 바레리詩全集, 佛蘭西名詩集과 켈케고올의 것 몇卷, 그밖에 原書 多數입니다. 켈케고올의 것은 延專卒業할 즈음 무척 愛讃하던 것입니다.

一九四一年一二月 延專을 마치고 돌아 왔을 때는 卒業狀과 함께 정성스러이 쓴 詩稿集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들고 왔었읍니다.

그것은 初版七十七部로 出版할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소중히 지니고 다녔읍니다.

더 工夫하고 싶었던 그는 一九四二年에 『懺悔錄』이란 詩를 써 놓고 渡日하여 立敎大學에 籍을 두었읍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집을 떠난 것은 그해 七月 여름放學때였읍니다. 그때에는 病患으로 누어계시는 어머님의 寢床에 걸터 앉어 이야기 동무로 며칠을 보내다가 뜻밖에 速히 떠나게 되었읍니다. 東北大學에 있던 한 親友의 勸誘로 該校 入學手續치르라 오라는 電報 까닭이었읍니다. 놀이터에서 돌아온 나는 그가 떠났음을 알자 눈물이 글성 하였읍니다. 늘 정거장에서 맞고 바래던 그와 그렇게 헤여짐이 最後의 作別이 될줄이야 어찌 알았겠읍니까. 떠나면서도 어머님 걱정을 뇌이고 또 뇌이드랍니다. 아마 殞命時까지 눈앞에 어머님의 모습만 어른거렸을 것입니다. 東北大學에 간줄 안 兄에게서 무슨 意圖에서였는지 同志社 英文科로 옮겼다는 電報가 오자 아버지는 좀 노여운 기색이었읍니다.

東京과 京都에서의 그의 孤獨은 絶頂에 達했읍니다. 太平洋에서는 戰火가 들끓고 尊敬하던 先輩들은 붓을 꺾거나 變節하였고 사랑하던 친구들은 뿔뿔이 헤여졌고—下宿房에서 홀로인듯 한 自己를 發見하고 스스로 눈물 짓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

六疊房은 남의 나라
窓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時代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慰安으로 잡는 最初의 握手.

(『쉽게 씨워진 詩』의 一一節 一九四二•六•三作)

그러나 홀로 『새로운 아침』을 기다리며, 그의 孤獨만으로 抗拒하기에는 現實의 물결은 너무 거센 것이었읍니다.

一九四三年七月 歸鄕日字를 알리는 電報를 받고 驛에 나갔으나 그는 나타나지 않았읍니다. 每日 같은 마중 끝에 한 열흘 후에 온 것은 우편으로 보내온 車票와, 그 車票로 찾은 若干의 手荷物뿐이었읍니다. 車票를 사서 짐까지 부쳐놓고 出發直前에 警察에 잡혔던 것입니다. 京都大學에 있던 夢奎兄도 함께 잡혔읍니다.

鴨川署에 未決로 있는 동안 當時 東京에 계시던 堂叔 永春先生이 面會했을 때는 『고오로기』란 刑事의 담당으로 日記와 原稿를 번역하고 있었으며, 每日 散策이 許諾된다고 하더랍니다. 곧 나갈 것이니 安心하라고 하던 刑事의 말은 結局 거짓이 되고 말았읍니다.

東柱와 夢奎 두 兄이 各 二年言渡를 받고 福岡刑務所에 投獄된 一九四四年六月 以來, 한달에 한 장씩만 許諾되는 葉書로는 그의 仔細한 獄中生活은 알길이 없었으나, 英和對照 新約聖書를 보내라고 하여 보내 드린 일과 『붓끝을 따라온 귀뜨라미 소리에도 벌써 가을을 느낍니다』라고 한 나의 글월에 『너의 귀뜨라미는 홀로 있는 내 감방에서도 울어준다. 고마운 일이다』라고 答狀을 주신 일이 기억됩니다.

매달 初旬이면 꼭 오던 葉書대신 一九四五年 二月에는 中旬이 다거서야 上記한 電報로 집안 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밖고 말았읍니다.

遺骸나마 찾으려 갔던 아버지와 堂叔님은 우선 살아있는 夢奎兄부터 面會하니 『東柱!』하며 눈물을 쏟고, 每日 같이 이름모를 注射를 맏노라는 그는 皮骨이 相接하였더랍니다.

『東柱先生은 무슨 뜻인지 모르나 큰소리를 외치고 殞命했읍니다』 이것은 日本人 看守의 말이었읍니다.

아버지가 福岡에 가신 동안에 집에는 한장의 印刷物이 配達되었으니 그 內容인즉 『東柱 危篤하니 保釋할 수 있음. 萬一 死亡時에는 屍體는 가져가거나 不然이면 九州帝大에 解剖用으로 提供함. 速答하시압』라는 뜻이었읍니다. 死亡 電報보다 十日이나 늦게온 이것을 본 집안 사람들의 원통함은 이를 갈고도 남음이 있었읍니다.

『白骨 몰래 또 다른 故鄕에』 가신 나의 兄 尹東柱는 한줌의 재가 된채 아버지의 품에 안겨 故鄕땅 間島에 돌아 왔읍니다. 約 二十日後에 夢奎兄도 같은 節次로 獄死하였으니 그 遺骸도 故鄕에 돌아 왔읍니다.

東柱兄의 葬禮는 三月初旬 눈보라치는 날이었읍니다.

자랑스럽던 풀이 매마른 그의 무덤 위에 지금도 흰 눈이 나리는지——

十年이 흘러간 이제 그의 遺稿를 上梓함에 있어 舍弟로서 부끄러움을 禁할 길이 없으며, 詩集 앞뒤에 군것이 붙는 것을 퍽 싫어하던 그였음을 생각할 때, 拙文을 주저하였으나 生前에 無名하였던 故人의 私生活을 傳할 責任을 홀로 느끼어 敢히 붓을 들었읍니다. 이로하여 거짓없는 故人의 片貌나마 傳해지면 多幸이겠읍니다.

一九五五年二月

一柱 謹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