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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야담 사화 전집 (차상찬)/강릉기 홍장과 풍류 순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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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기 홍장(江陵妓紅粧)과 풍류순찰사(風流巡察使)

강원도 강릉군(江原道江陵郡)에는 경치 좋기로 유명한 경포대가 있고 그 경포대의 앞에는 주위가 약 십여리 되는 큰 호수(湖水)가 있으니 그 호수는 물이 항상 맑아서 곱기가 씻은 거울과 같고 또 비가 오던지 날이 가물던지 사시장철로 물이 줄지도 늘지도 않아서 깊기가 사람의 어깨에 달락말락 할 뿐이요 옛부터 한사람도 빠져 죽은 일이 없는 까닭에 특히 군자호(君子湖)라는 이름이 있었다.

그 호수는 한개의 약한 모랫둑(砂堤[사제])으로 만경창파(萬頃蒼波)의 큰 바다와 접하여 시시 때때로 산더미같은 큰 물결이 사정없이 무섭게 드리쳐도 그 모래 뚝은 조금도 무너지지 않고 똑바로 경계(境界)가 구별되어 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다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그 호수는 경치가 그렇게 좋으니만큼 또 여러 가지의 재미있고 신비(神秘)한 전설이 있으니 즉 옛날 어느 시절에 그 호수는 원래 육지(陸地)로서 어떤 한 큰 부자의 집터이었는데 그 부자는 당시 강릉의 갑부로 집안에 곡식이 항상 몇만석씩 쌓여 있었으나 누구를 구제하는 일은 손톱만치도 아니하는 유명한 인색한 구두쇠 영감이었다.

하루는 어떤 노승(老僧) 하나가 갈포장삼(葛布長衫)에 육환장(六環杖)을 짚고 문밖에 와서 목탁(木鐸)을 두드리며 양식을 구걸하였더니 그 인색한 부자집에서는 조금도 주지 않고 절대로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 노승은 백방으로 애걸하며 말하되

『한군의 거부 장자님으로서 집안에 몇만석의 곡식을 썩히도록 쌓아 놓으시고 일개 중에게 시주할 것이 없다는 말씀이 무슨 말씀이옵니까.』

고 하였더니 동냥은 아니 주고 쪽박을 깨친다는 격으로 그 부호는 동냥을 아니 줄 뿐 아니라 노발 대발 하면서 중을 때리며 또 무수히 욕을 하고는 나무박(木皿[목명])에다 똥(人糞[인분])을 하나 가득히 담아서 주었더니 그 노승은 아무 말도 아니 하고 그 똥을 그릇에 받아서 바리에 넣고 갔다.

조금 있더니 이상하게도 그때까지 새파랗게 개였던 하늘이 별안간에 흐리며 반짝반짝 하더니 우렁쿵꽝하고 천둥을 치면서 검은 구름이 뭉게 뭉게 몰려들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더니 돌연히 그 부호의 집과 그 부근의 땅이 둥그렇게 둘러빠져서 큰 호수가 되고 따라서 그 집의 사람이 하나도 남지 못하고 다 빠져 죽었으니 그 집에 쌓여 있던 곡식은 모두 물속에 들어가서 조개(具[패])가 되었는데 그 조개는 사람이 먹으면 다른 조개보다도 배가 불러서 흉년에 능히 기근을 구제 할만하므로 제곡(濟穀)이라 이름 짓고 지금까지 그 지방의 사람들이 많이 주어다 먹는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호수의 중앙(中央)에는 홍장암(紅粧巖)이라고 하는 큰 바위 하나가 있으니 그것은 옛날 국조때에 순찰사 박충숙신(朴忠肅信 〓 雲峰人官吏判[운봉인관리판])이 강릉미인(江陵美人) 홍장(紅粧)이라는 기생과 놀던 곳이다.

그때에 박충숙신(朴忠肅信)은 순찰사(巡察使)로 강릉에 갔다가 홍장이 강릉에서 상당히 예쁜 여자라는 말을 듣고 친히 찾아가서 일시의 아름다운 인연을 맺고는 항상 생각하며 꿈속에서도 그리워서 잊지않고 있더니 그뒤에 각군의 순찰을 마치고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홍장의 집을 찾으니 홍장은 간 곳이 없고 다만 빈집만 남아 있는데 무정한 개는 옛 주인의 정랑을 알지 못하고 문 앞에서 멍멍 짖고 의구한 달빛만 창공에 비치어 고객의 회포를 일으킬 따름이었다.

순찰사는 낙심천만하여 아무 말도 없이 초연히 여관으로 홀로 돌아 갔다.

그때에 강릉부사 조석간 운흘(趙石磵 云吃)은 역시 풍류남아로 그 순찰사와는 퍽 친절한 친구 사이었다. 순찰사를 찾아서 그 여관으로 갔더니 순찰사는 홍장에게 얼마나 반하였던지 아무 말도 하기 전에 먼저 홍장의 소식을 물었다. 부사는 그 순찰사를 한번 속이고 조롱할려고 거짓 대답하기를

『홍장은 원래 다정한 가인인 까닭에 상관(上官)을 한번 이별한 뒤로 주야로 생각다 못해 상사병(相思病)에 걸리어서 서너 달 전에 이 세상을 떠났소이다.』

고 말하였다.

순찰사는 자기가 자나 깨나 언제까지나 마음속에 사모하고 사랑하던 홍장이 죽었다는 말을 들으니 더욱 심화가 비창하여 구곡의 간장이 구비구비 끊어질듯이 만사가 다 무심하여 아무 일도 보지 않고 주야로 머리를 싸고 여관에 누워 있었다.

그런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이었다. 밤은 고요하여 인적이 끊어지고 처량한 달빛은 여창을 가득히 비치었는데 순찰사는 지난날의 옛추억이 머리속을 오락가락하여 자못 감회가 깊은 지라 일어나서 잠도 잘 자지 못하고 앉았다 누웠다 이리 딩굴 저리 둥굴 하던차에 우연히 강릉부사가 찾아와서 말하되

『달도 밝고 밤도 고요하니 산보나 하러 가지 않겠느냐 하고 말하면서 또 말하기를 우리 강릉에는 경포대라는 명승지가 있는데 그곳은 참별유천지의선경(別有天地之仙境) 인고로, 달이 밝고 바람이 맑은 좋은 밤이면 언제나 하늘에서 옥통소(玉筒肅) 소리와 선학(仙鶴)의 소리가 들리며 천상의 선녀들이 놀러 오는데 홍장이도 인간의 절대 가인(佳人)이었으니까 죽은 뒤에도 혹은 선녀(仙女)가 되어 서왕모(西王母)의 동쌍성(蕫雙成)이나 허비경(許飛瓊) 사자연(謝自然) 같은 선녀들과 짝이 되어 이러한 선경에 놀러 올런지도 알 수 없으니 만일 상관과 이 세상의 연분이 다 끊어지지 않았다면 옛날의 유완(劉玩)이가 천대산(天台山)에서 선녀를 만난것과 같은 기연(奇緣)이 있을는지도 알 수 없읍니다.』

하고 능청스럽게 말하였다.

순찰사는 홍장이를 연연불망(戀戀不忘) 할뿐 아니라 객지에서 고격한 회포를 잊지 못하던 중에 부사의 그러한 말을 들으니 무엇보다도 반갑게 생각하고 쾌히 승락하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여관을 떠나서 일엽의 편주(一葉片舟)를 잡아 타고 경포대로 향하니 때는 마침 추칠월(秋七月) 보름경이었다.

만리 창공은 씻은 거울같이 깨끗하고 반공에 솟은 둥근 달은 만리창해(萬里滄海)에 마주 비치어서 만곡의 금파가 출렁출렁 하며 좌우의 갈숲(蘆林[노림])에는 흰 이슬이 새로 내려 점점히 옥을 이루었으니 참으로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선경이었다.

부사와 순찰사는 모든 흥취에 겨워서 배를 타고 마음대로 오르락 내리락하더니 홀연히 운무(雲霧)가 자옥한 속에서 이상한 향기로운 냄새가 나며 옥통소 소리가 은은히 멀리서 또는 가까이서 들려오는데 도저히 어느 방향에서 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순찰사는 그 소리를 듣고 정신이 황홀하여 의관을 잘 갖추며 부사더러 어찌 된 영문인가를 물었다.

부사는 조금도 서슴치 않고 대답하기를

『아까 말하던 선녀들이 놀러온 모양인데 아마 상관(上官)과 선녀 간에 무슨 기연(奇緣)이 있어서 그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닙니까.』

라고 물었다.

순찰사는 그 말을 듣고 더욱 반가히 여기면서 혼자 생각에 오늘 밤에는 참말로 선녀를 만나 볼 수 있구나하고 무릎을 꿇고 향을 피우며 단정히 앉았다.

조금 있다가 본즉 한조각 적은 배가 순풍에 돛을 달고 한가운데로 쫓아 내려오는데 돛 위에는 채필로 쓴 다음 같은 시구(詩句)가 뚜렷이 보이고

신라성대노안상(新羅聖代老安詳)
천재풍류상미망(千載風流尙未忘)
문설사화유경포(聞說使華遊鏡浦)
란주불인재홍장(蘭舟不忍載紅粧)

『신라 성대의 늙은 안상이 (안상은 신라때 사람의 이름이다) 몇천 년 되어도 그 풍류를 잊지 않고 들으니 사신이 경포에 논다 하니 홍장을 배에 싣고 차마 못가겠구나.』

그 위에는 한 사람의 백발노인이 선관우의(仙官羽衣)를 입고 단정히 앉았으며 앞에는 두 청의동자(靑衣童子)가 호로병(葫蘆瓶)을 차고 옥통소를 빗겨 들고 섰고 그 곁에는 나이 올해 스무나믄살 된 예쁜 여자 하나가 화관(花冠)을 쓰고 옥패(玉佩)를 쟁쟁히 울리며 푸른 소매 붉은 단장에 옥잔(玉盃[옥배])을 들고 시립(侍立)하였으니 그의 곱고 어여쁜 태도는 참으로 월궁의 항하(月宮姮娥)도 같고 낙포의 선녀(洛浦仙女)와도 같았다.

순찰사는 한번 바라보니 너무나 황홀하여서 정신이 아찔하여 꿈인지 생시인지 알지 못하고 다만 묵묵히 있을 뿐이었다.

한참 있다가 정신을 차리어 다시 바라본즉 그 선녀는 전에 자기가 사랑하던 홍장과 비슷하였다.

순찰사는 죽은 사람을 다시 만난듯이 반가워하며 앞에 선뜻 나서서 절을 하며 사례하면서

『하계(下界)의 속인(俗人)이 예의를 알지 못하여 천상의 선관이 강림 하시는 데도 멀리 영접치 못하였사오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니 그 노인은 크게 웃으면서

『그대는 아무 일 없이 잘 지냈는가 상계의 선관으로 인간 세계에 귀양온지가 벌써 사십년이 되도록 피차에 소식이 없더니 오늘밤 경포대 호상(湖上)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니 이것도 또한 기연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고 말하더니 또 곁에 있는 미인을 가리키며 웃으면서 말하되

『그대는 이 여자를 아는가, 이 여자는 본래 옥황상제의 향안시녀(香案侍女)로 죄를 짓고 잠시 인간세계에 귀야살이 하러 왔더니 죄의 풀릴 날이 멀지 않아서 지금 천상으로 들어 가는 길인데 그대와 연분이 있어서 오늘 밤 이곳에 와서 만나게 되는 것이니 그리 알라.』

하였다.

순찰사는 더욱 반가워서 그 여자를 자세히 바라보니 과연 지난날 자기가 사랑하던 홍장이었다.

구름같은 머리를 달 아래서 숙여들고 춘산같은 아미를 찌푸리며 무한한 정과 한을 머금고 있으니 제아무리 강장(强壯)의 남아라도 한 번에 반하지 않고서는 못배겼다.

순찰사는 홍장의 옥같은 손을 덥석 잡고 눈물을 흘리며

『너는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고 물으니 그 여자도 또한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하되

『첩은 진세(塵世)와 인연이 벌써 끊쳤은즉 아무리 다정한 사또라도 이제 다시 어찌 할 수는 없으나 사또가 첩을 생각하신다는 소문이 하늘에까지 사무치므로 옥제께서 특히 하렴하셔서 오늘밤 이곳에서 만나게 된것이 올시다.』

라고 말하였다.

순찰사는 다시 그 노인 앞에 가서 절하며 간청하되

『이미 옥제의 명령이 계시다 하니 홍장과 하룻밤의 인연을 더 맺게 하여 주십시요.』

한 즉 그 노인은 대답하되

『이미 상제의 명령이 계셨으니까 그대가 홍장과 잠시 같이 가는 것이 좋겠으나 나는 본래 인간의 진연(人間塵姻)을 꺼리는 까닭에 같이 갈 수가 없으니 둘이서만 가는 것이 좋으니 부디 둘이서 잘 가라.』

하고서 또 홍장을 보면서

『이것도 천생의 좋은 인연인즉 이 손님과 같이 가되 날이 밝기 전에 돌아 오너라.』

하고 말하였다.

순찰사는 그 노인에게 사례하고 홍장과 같이 배를 타고 일진의 청풍으로 돛을 둘러 상륙한 후 여관으로 돌아가니 그날 밤의 진진한 정은 마치 칠월칠석에 견우직녀가 서로 만난 것과 같았다.

그러나 무정한 것은 시간이라 두 사람이 단꿈을 다 마치기 전에 어느덧 동창이 벌써 밝아서 날이 새게 되니 순찰사는 놀라 깨며 혼자 생각하기를 홍장은 약속한 대로 벌써 갔으려니 했다.

그러나 눈을 부비고 자세히 본즉 홍장은 아직까지 의연히 있어서 아침 단장을 하고 있었다.

순찰사는 한편 이상하게 여기면서 홍장에게 그 연고를 물으니 홍장은 아무 대답도 없이 다만 웃을 뿐이었다

그러자 강릉부사가 들어오면서 웃으며 말 하되

『어제밤에는 얼마나 재미 보셨오. 나는 죽은 홍장을 능히 살리기도 하고 또 중매도 잘 하였으니까 단단히 한턱을 하여야 되겠소.』

하고 조롱하였다.

순찰사는 그제야 비로소 부사에게 속은 줄을 알고 또한 같이 껄껄 한바탕 크게 웃으면서 술상을 차려 놓고 재미있게 마시며 놀았다.

이것은 본래 부사가 그 순찰사가 원래부터 기생을 좋아하는 것을 보고 조롱하기 위하여 그러한 장난을 꾸민 것이었다.

그 뒤에 순찰사는 서울에 와서 강릉 부사에게 이러한 시를 지어 보냈다.

소년시절접관동(少年時節接關東)
경포청류입몽중(鏡浦淸流入夢中)
대하란추사우범(臺下蘭舟思又泛)
각험홍장소쇠옹(却嫌紅粧笑衰翁)

전날 소년 때 관동에 갔더니 경포의 맑은 물결 꿈속에 완연하다. 그곳에 배를 띄고 또 한번 놀려고 하니 어여쁜 홍장이 다 늙은 나를 비웃을가 험의 하노라.

그런데 그때에 그 순찰사와 홍장이 서로 만나던 곳에 큰 바위가 있으므로 그 뒤 사람들이 그 바위를 홍장암(紅粧嚴)이라고 이름 지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