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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야담 사화 전집 (차상찬)/왕자의 원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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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王子)의 원혼(冤魂)

세상 사람들이 일국(一國)의 왕자나 왕손(王子, 王孫)이라 하면 의례히 팔자 좋고 호강스러운 사람들로만 알것이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그들같이 위태하고 가엾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과거 삼국시대(三國時代)와 고려시대에는 그래도 그들이 그렇게 큰 화난을 당하지 않았지만 이조시대(李朝時代)에 와서는 역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들로서 별로 화난을 당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

개국 초에(開國初) 태조(太祖)의 아들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芳蕃)과 의안대군 방석(義安大君芳碩) 형제가 태종(太宗)에게 화를 입은 것을 필두로 하여 세조시대(世祖時代)에는 단종사건(端宗事件)으로 관련되어 세종(世宗)의 아들 안평대군 용(安平大君瑢), 금성대군 유(錦城大君瑜) 화의군 영(和義君瓔) 한남군어(漢南君於) 영풍군 천(永豊君瑔) 등 여러 형제들이 참화를 입었었고, 성종(成宗)시대에는 임영대군 구(臨瀛大君璆〓世宗大王第四子[세종대왕제사자])의 아드님 구성군 준 (龜城君浚官至領相[관지령상])이 또한 원죄로 몰려 죽었으며, 중종시대(中宗時代)에는 왕자복성군 미(王子福城君 嵋)가 소위 작서사건 (灼鼠事件)으로 몰려 죽고, 또 명종시대(明宗時代)에는 계림군 류(桂林君瑠〓成宗二子桂城君恂[성종이자계성군순]의 繼子[계자])와 봉성군 완(鳳城君玩〓中宗 第六子[중종 제육자])의 옥사(獄事)가 있었고, 그후 광해조(光海朝) 때에는 임해군 진(臨海君珒) 영창대군 의(永昌大君㼁)의 참옥 사건이 있었으며, 숙종시대 (肅宗時代)에는 또 유명한 허견의 옥사(許堅獄事)와 관련되어 복창(福昌) 복선(福善) 복평(福平) 삼군 (三君〓仁祖第三子麟坪大君[인조제삼자인평대군]의 子[자])이 참화를 입고, 영조(英祖) 때에는 저 유명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참변이 있었으며, 그 외에도 왕자 왕손으로서 참변을 당한 일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위에 말한 여러 왕자 왕손 중에 사도세자나 복창군(福昌君)의 여러 형제 또는 구성군(龜城君), 안평대군(安平大君)같은 이들은 평소에 호강이나 실컷하고 또 방석(芳碩) 방번(芳蕃)과 금성대군(錦城大君) 같은 이는 실제에 거사(擧事)라도 하여보았지마는 그 외에는 대개가 당시 정치적 야심가들이 자기공을 탐하고 이를 취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음행 중상으로 애매하게 참화를 입은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복성군(福城君)도 또한 그렇게 애매하고 원통하게 죽은 왕자인 것이다.

처음에 중종대왕(中宗大王)은 아들 구형제와 딸 열하나가 있었으니, 계비 장경왕후 윤씨(繼妃章敬王后尹氏)의 몸에서는 인종대왕(仁宗大王)이 탄생하고, 삼비 문정왕후 윤씨(三妃文定王后尹氏)의 몸에서는 명종대왕(明宗大王)이 탄생하고 경빈박씨(敬嬪朴氏)의 몸에서는 복성군 미(福城君嵋)가 낳고 숙빈 홍씨(淑嬪洪氏)의 몸에서는 해안군 희(海安君㟓)와 금원군 령(錦原君嶺)과 봉성군 완(鳳城君岏)을 낳고 창빈 안씨(昌嬪安氏)의 몸에서는 영양군 거(永陽君岠)와 덕흥대원군 소(德興大院君岹)를 낳고 숙의 이씨(淑儀李氏)의 몸에서는 덕양군 기(德陽君岐)를 낳았다.

중종(中宗)은 여러 빈(嬪) 중에도 경빈박씨(敬嬪朴氏)를 특별히 사랑하고 따라서 여러 왕자 중에도 박씨의 소생인 복성군(福城君)을 매우 사랑하였으며 당시 소인(小人)으로 유명하던 좌의정 심정(左議政沈貞)은 그 박씨와 결탁하고 정권을 천롱(擅弄) 하며 위복(威福)을 자행하여 세력이 자못 굉장하였다.

그러는 반면에 당시 조정에는 또 김안로(金安老)란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연안김씨(延安金氏)로 호(字)를 용천(龍泉〓野史龍泉談寂記著者[야사 용천담적기 저자])이라 하였는데 어려서부터 풍신이 좋고 문필이 모두 능란하여 한때에는 명망이 상당하였으나 위같이 탐오(貪汚) 간사(奸邪)하여 여러 번 원옥(冤獄)을 일으키고 현량(賢良)한 사람을 많이 죽였으므로 채무택(蔡無擇), 허항(許沆)과 같이 이씨조선 삼간(李氏朝鮮三奸) 또는 정유삼흉(丁酉三凶)이라 불리웠다.

그는 일찌기 과거하여 욱일승천(旭日昇天)의 세도로 중종십구년갑신경(中宗十九年甲申頃)에는 벼슬이 벌써 이조판서에까지 이르고 그 아들 김희(金禧)는 중종대왕의 큰따님 효혜공주(孝惠公主〓仁宗[인종]의 妹氏[매씨])에게 장가들어 연성위(延城尉)가 되니 그 세력이 또한 당당하여 항상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과 서로 세력싸움을 하더니 필경 심정일파에게 전권난정(專權亂政)이란 탄압을 받아서 중종(中宗) 갑신(甲申)에 먼 지방으로 귀양을 갔다가 그의 자부(子婦) 효혜공주(孝惠公主)의 주선으로 그 다음 다음해 병술(丙戌)년에 근기지방(近畿地方) 풍덕(豊德)으로 이배(移配)가 되었는데 마침 심정(沈貞)이 경빈박씨와 결탁하여 세력을 한참 부리게 되매 외간(外間)에서는 장차 동궁(仁宗[인종])을 폐하고 복성군(福成君)을 다시 동궁(東宮)으로 책봉한다는 풍설까지 떠돌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김안로는 비록 유배는 되었으나 항상 재기할 계획을 하던 차에 그 시기를 이용하여 다시 정권을 회복하려고 당시 이조판서 심언광(沈彥光)과 그형 심언경(沈彥慶)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하되

『만일 나를 불러다가 다시 쓰면 기묘사화(己卯士禍)때 몰린 사람을 모두 불러다가 벼슬을 시키겠다.』

하고 (그때 심씨 형제가 기묘인물들을 채용하고 싶었으나 그일을 후원하는 사람이 없어서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경기감사 민수천(閔壽千)이 안로(安老)에게 말하여 그런 것이다.) 또 그 처당(妻黨)의 정언채무택(正言蔡撫擇)을 시켜서 여론을 일으키게 하여 방금 동궁 (東宮)이 매우 고독하여 보호할 사람이 없은즉 김안로를 다시 불러들여 우익을 삼아야 되겠다고 하여 당시 경빈(敬嬪)박씨와 복성군(福成君)의 세력이 커짐을 시기혐의하는 문정왕후(文定王后)와 그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또 한편으로는 자기의 아들 연성위 김희(延城尉 金禧)를 시켜서 아침저녁으로 좌상 이행(左相李荇〓字容齋[자용재])의 집으로 찾아 다니며 별별 운동을 다하여 일반이 모두 그럴듯하게 생각하고 중종대왕(中宗大王)도 다년간 심정의 발호(沈貞의 跋扈)가 너무 심한 것을 염려하던 끝에 그 세력도 억제 할겸하여 안로(安老)를 다시 불러 복직(復職)시키니 조정은 다시 심정 일파와 김안로 일파의 싸움판이 되어 서로 음해 중상하기에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중종 이십이년 정해 이월 이십육일(中宗二十二年丁亥二月二十六日)에 어떤 자의 소행인지 알 수없으나 왕세자(王世子〓仁宗[인종])가 계신 궁(宮)에 해방(亥方)에다 불에 태워 죽인 쥐(所謂灼鼠[소위 작서])한 마리를 매달아 놓고 그 옆에는 나무조각에다 고약한 글을 써 붙여놓았다.

그것을 심상히 본다면 일개 무지한 자들의 장난으로 돌려보내고 말 것이지만 소위 무고(巫蠱)니 저주(咀呪) 예방 같은 것을 크게 기휘(忌諱)하던 그 당시로 말한다면 그것이 여간한 문제 거리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세자(世子)는 을해생(乙亥生)이요 그날이 또한 탄일(誕日)인데 해(亥)는 도야지(猪))에 속하고 쥐(鼠)는 도야지와 유사한 짐승인즉 특히 그것을 태워 죽여서 동궁(東宮)의 해방(亥方)에다 매달고 나무패에 좋지 못한 방(榜)을 써붙인 것은 누가 생각하든간에 분명히 왕세자를 저주(咀呪)하느라고 그러한 것으로 해석하기 쉽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궁중 일반과 만조백관들은 그것을 가지고 문제를 삼아 아주 상하 불끈 뒤집게 되었다.

그러는 차에 누가 먼저 말을 냈는지 그것은 경빈 박씨가 꾸며낸 일이라 하여 마침내 박씨가 그 혐의를 받게 되었다.

일이 그렇게 되고 보니 그 기회야말로 다년간 심정 일파에게 원한을 품은 김안로에게 있어서는 천재에 다시없는 큰 복수(復讎)의 좋은 기회였다.

안로는 이 시기를 타서 안과 밖으로 크게 활동하여 기어이 옥사(獄事)를 일으키게 되니 그 주범(主犯)의 지목을 받은 경빈박씨와 그의 아들 복성군(福成君)은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아 박씨의 고향인 상주(尙州)로 귀양보냈다가 마침 내 사약(賜藥)을 내려 무참히 모자를 한날에 죽이게 되고 박씨의 둘째 딸 혜정옹주(惠靜翁主)의 남편 당성위 홍려(唐城洪礪)는 고문을 하다가 장하에서 죽게되고 박씨의 큰딸 혜순옹주(惠順翁主)의 남편 광천위 김인경(光川尉 金仁慶)은 먼 지방으로 귀양 보내되 두 옹주는 폐하여 서인(庶人)을 삼고 또 좌의정 심정(左議政 沈貞)은 박씨와 가까웠던 까닭에 강서(江西)로 귀양보냈다가 그후 임진년(壬辰年)에 사약을 내려 죽이고 심씨 일파와 그밖에도 평소 김안로와 사이에 좋지 못하던 사람들은 모두 모함하여 죽이고 혹은 귀양보내며 혹은 또 삭직 파면을 시키니 그때 우리나라의 정계는 일시에 김안로의 한 복수장이 되었다.

그때 소위 작서사건(灼鼠事件)이란것은 과연 경빈박씨의 소위인지 또는 문정왕후가 박씨를 시기하여 일부러 만들어 놓은 허물을 박씨에게 돌려 씨웠는지 또는 김안로가 그 옥사를 일으키기 위해 그 흉계를 꾸몄는지 그것은 아직까지도 누구나 그 진가를 알 수가 없지마는 그 결과로 보아서는 김안로가 심정을 미워하고 그 세력을 빼앗기 위하여 그 옥사를 일으킨 것이 분명한즉 사실 경빈 박씨의 모자는 참으로 억울하고 원통하게 죽은 것이니 중종도 또한 안로의 간계에 빠져서 사람으로서 차마 못할 박정멸애(薄情滅愛)의 일을 한 것이다.

그렇게 부자상잔한 참변은 뒷날에 영조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죽인 것과 별로 차이가 없는 참변이었다.

그후 인종(仁宗)께서는 차차 장성하시매 그 총명하시고 우애지심이 갸륵하신 마음에 박씨의 모자가 당시의 일로 말미암아 원통히 죽은 것을 아시고 그대로 둘 수가 없어서 친히 중종께 상소(上䟽)하시되

『하늘이 내신 동기 형제는 숨을 쉬는 것과 혈맥의 흐르는 것이 서로 통하는 까닭에 우애하는 정도 없으려야 스스로 없을 수 없는 것이 올시다. 그러므로 옛날에도 혹시 뜻밖에 형제간에 상비한 변이 있더라도 서로 은의(恩義)로 감추어 준 것입니다. 그전 날에 미(嵋)에 관한 일은 신(臣)이 그때 나이 어렸던 까닭으로 그 사실을 자세히 알 수 없사오나 그 화의 참혹한 것은 차마 무엇이라고 말씀을 할 수없읍니다. 요괴스러운 장난이 비록 박씨가 저지른 일이라 할지라도 미(嵋)가 어찌 그 일을 알겠읍니까. 먼곳으로 귀양을 보내는 것도 너무 과한 일이옵거든 그후 또 큰 옥사를 일으켜서 모자를 일시에 죽게 하시고 그 사위 홍려(洪礪)까지 무참하게 장하에 죽게 하신 것은 자고로 드문 변고이오니 형제되는 저의 마음에 과연 어떠하겠읍니까.

죽은 자는 이미 어찌할 수 없삽거니와 미(嵋)의 소생인 딸하나가 아직까지 민간에 떨어져 있어 서인의 자식이나 다름이 없게 되었사오니 철모르는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겠읍니까, 그것이 역시 가슴이 아픈 일이올시다. 그리고 또 두 옹주(翁主)는 나 어린 여자로서 그일에 상관이 없을 것은 명백하온 바 속족(屬族)이 또한 끊어졌사오니 그 일을 생각하오면 눈물을 스스로 금할 수 없읍니다. 신(臣)의 한몸으로 말미암아 형제의 변이 거기까지 이르게 되었사온즉 그것은 신의 평생에 가슴에 맺히고 아픈 일이올시다.

맹자(孟子)가 말씀하시기를 형이 천자(天子)가 되고 아우가 필부(匹夫)가 되는 것이 옳으냐……고 하더니 이제 신은 동궁에 있어서 천총의 후은은 있사오나 두 누이(兩姉)와 한 조카는 모두 천한 몸이 되어 있사오니 혼자 도리켜 생각할 때에 얼굴이 부끄러워 들 수가 없읍니다. 착한 사람은 자기의 형제간에 묵은 노염과 묵은 원망을 두지않고 항상 친애할 따름이라고 하였건마는 신(臣)과 같은 자는 형제간에 무슨 원노(怨怒)가 있어서 서로 친하고 사랑하며 지내지를 못합니까 심지어 제사를 지낼때와 무슨 맛난 음식을 먹을 때에도 역시 한곳에 모여서 즐겁게 놀고 이야기도 못하오니 측은한 마음이 스스로 솟아 나옵니다.』

라고 하셨더니 중종께서도 그 상소를 보시고는 그만 감동이 되어 후회의 눈물을 흘리시고 다시 복성군의 작위를 회복시키고 또 양자를 세워서 그 봉사를 하게 하였다.

그 뒤 선조초(宣祖初)였다. 오성 이항복(鰲城李恒福)은 나이 아직 소년이었을 때에 어떤 집에 가서 글 공부를 하는데 얼굴이 어여쁘고 보기에 다정스러운 어떤 소녀 하나가 날마다 찾아와서 오성을 유심하게 쳐다 보았다. 오

성도 처음에는 그 소녀가 심심하니까 날마다 글 읽는 구경을 하러 오는 줄로만 알고 심상히 여겼더니 점점 여러 날을 두고 그의 행동을 살펴본즉 그 여자는 그냥 놀러만 다니는 것이 아니라 무슨 소청이 있어서 다니는데 여러 소년들이 있어서 차마 부끄러워 말을 못하고 그냥 마음에만 안타까워 하는 듯 하였다. 오성은 마음에 퍽 괴상히 여기고 어느 날 조용한 틈을 타서 묻되

『너는 어떤집 여자인데 날마다 나를 찾아 오느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있거던 조금도 숨기지 말고 다 하여라.』

고 말하였더니 그 소녀는 대답하되

『저는 이집 이웃에 사는데 보통의 여자가 아니고 귀신(鬼神)이 잡힌 무당인데 내가 모신 귀신님이 항상 당신을 보고 싶어 해서 그 말을 하려고 왔었으나 항상 조용치가 않아서 말을 못하고 그대로 갔었읍니다.』

고 하였다. 오성은 더욱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 소녀에게 다시 말하되

『그 귀신이 나를 만나자고 한다면 반갑게 만나겠으니 아무 때나 같이 오라.』

고 하였다.

그런지 얼마후에 하루는 큰 비가 종일 오다가 개이고 밤에 달이 유난하게 밝았는데 오성은 홀로 서당에서 글을 읽고 있노라니까 전날에 오던 소녀가 또 찾아와서 말하되

『오늘 밤은 달도 밝고 조용하여 우리 귀신님이 찾아 올 것이오니 그리 아십시요.』

하고 일러 주고 갔다.

오성은 의관을 정제하고 문을 열어보니 과연 어떤 소년 하나가 사랑 대문으로 들어오는데 얼굴이 관옥같고 살빛이 달빛에서 보아도 백설같이 희며 눈섭이 그린듯이 곱게 생긴데다 남색도포에 홍띠를 맵시있게 띠어서 어디로 보든지 왕공 귀족의 아들과 같고 범상한 사람은 아니었다. 오성은 한번 바라보니 자연 존경하는 마음이 생겨서 뜰 아래까지 나아가 읍을 하고 맞이하며 그에게 묻되

『저 소녀에게 말을 들은즉 당신은 우리 인간사회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 저세상에 있는 귀신인것 같은데 피차 유명(幽明)이 다른 터에 무슨 까닭으로 나를 찾아 볼려고 하시오.』

하니 그 소년은 길게 한숨을 한번 쉬고 말하되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전 중종대왕의 아들 복성군으로서 그 몹쓸 놈의 간신배들의 모함에 빠져서 모자가 일시에 원통하게 죽었는데 어디까지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억울한 것을 아는 사람이 적으므로 그 하소연을 하려고 여러 사람을 찾아보았으나 모두가 정신 기백이 유약하여 나와 서로 대할 수가 없더니 당신을 본즉 나이 비록 연소하나 정신 기백이 남보다 특수하고 장래에 큰 귀인이 될만한 자격이 있어서 나와같이 서로 말을 주고 받고 할 수 있으며 또 당신의 하는 말은 능히 신용할 만 하겠기에 이 세상에서 나에 대한 여러 사람의 공의가 어떠한지 그 일을 좀 들어보고 싶어서 왔소이다.』

고 말하였다. 오성은 그 말에 대답하되

『당신의 일은 벌써 신원(伸寃)까지 하였는데 그것을 어찌 알지 못하시요.』

하였더니 그는 또 말하되

『그것은 그때 고축문(告祝文) 읽는 소리를 듣고 알았지만 그것은 왕실(王室)에서 그저 우애하는 정으로 그리한 것이오, 이 세상에서 일반의 공론이 어떠한지 그것을 알고저 하옵니다.』

하였다.

오성은 그의 말을 듣고 그때 그 옥사의 잘못 처결한 것과 세상 사람들이 모두 원통하게 생각한다는 말을 하였더니 그 소년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또 말하되

『만일 이 세상의 공론이 그러하다면 내가 비록 일백번 죽어서 구천(九泉)의 고혼(孤魂)이 되었을지라도 유감이 없겠소이다.』

하고 그 소녀 무당에게 명하여

『이 어른에게 실과(實果)를 올리라.』

하고 사례를 하며 돌아가므로 오성은 그를 전송하여 두어 걸음을 나아가 보았으나 잠간 사이에 그의 종적이 그만 사라져 없어져 버렸다.

이 이야기는 하두 신기하고 허탄한 것 같아서 오성이 평생에 누구에게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가 만년(晩年)에 북청(北靑)에 귀양갔을 때 동악 이안눌(東岳李安訥)을 보고 비로소 말하였다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