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야담 사화 전집 (차상찬)/노총각의 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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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총각의 만복(晩福)

때는 바로 이조 숙종시대(肅宗時代)였다. 전라남도 광주 땅(全南光州郡)에는 고유(高庾)라 하는 늙은 총각이 있었으니 그는 본래 선조시대(宣祖時代)에 문장으로 또는 충신으로 유명하던 고제봉경명선생(高霽峰敬命先生)의 후예로 대대 문벌도 상당하였고 생활도 또한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았지만은 그가 열한살 안팎될 시절에 와서는 가운(家運)이 아주 기울어지게 되어 그의 부친이 남의 빚 보증을 하였던 관계로 가산을 전부 탕진하고 최후에는 그 부모까지 내외가 세상을 떠나게 되니 홀로 남아 있는 고아고유(孤兒高庾)는 사고무친 몸을 의지 할 곳이 없어 동네 사람의 집 신세를 지며 동쪽에 가서 밥 한끼 얻어 먹고 서쪽에 가서 잠 한잠을 이루고 하면서 구걸을 하다싶이 하게 되니 아무 공부도 할 수가 없었다.

나이 근 이십이 되도록 글 한자를 알지 못하고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 동네에서 몇해 동안 그러한 생활을 하다가 하루는 우연히 생각하기를

『남자가 세상에 나서 남처럼 공부도 못하고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할 바에야 차라리 남모르는 타향에 가서 하는 것이 옳지, 창피하게 제 고장에서 할 수 있겠나.』

하고 굳은 결심을 하고 자기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더벅머리 쇠코 잠방이에다 헌옷 보따리를 둘둘 말아서 어깨에다 둘러메고 정든 산천을 이별하고 낯설고 눈설은 타도 타향을 향하여 갔었다.

먼저 경상남도 몇 고을을 거쳐서 다시 경상북도 지방으로 들어서게 되었는데 도중에서 마침 어떤 사람을 만나 같이 간다는 것이 바로 고령땅(高靈) 어떤 농촌이었다.

그는 평생에 배운 것이란 농사 짓는 일밖에 없는 까닭에 그곳에 가서도 역시 김첨지(金僉知)란 늙은 영감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는 비록 잠시 집안 운이 불길하여 집안이 다 망하고 자기 나이가 스물이 되도록 글 한자 배우지 못하고 타향에 와서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지만 원래에 혈통이 있고 천품을 잘 타고난 까닭에 얼굴도 남 보기에 그리 밉지 않게 잘 생기고 마음이 퍽 온순하고도 부지런하여 주인이 무슨 일을 시키면 아무 군말도 없이 잘 할 뿐만 아니라 자기가 항상 자진하여 아무 일이나 순서 있게 잘하고 또 성질이 결벽(潔癖)이 있어서 날마다 아침이면 일찌기 일어나서 자기 집 뜰을 깨끗하게 소제하는 이외에 또 동네 여자들이 물길러 다니는 우물길까지 깨끗하게 소제하여 그야말로 길에 밥알이 하나 떨어져도 그대로 집어 먹을만 하게 하니 그에 대한 칭찬은 그집 주인 뿐 아니라 동네 여자의 입에까지 오르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비록 글자는 배우지 못하였을망정 언어 행동의 여러 가지 일이 모두 범절있게 하니 동리에 사는 같은 농군 끼리도 모두 그를 존경하여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따라서 동네의 일반 남녀노소가 모두 고도령이란 별호를 만들어서 그의 대명사로 불러 쓰게 되었다.

그때 마침 그 동리에는 박좌수(朴座首)라는 노인이 살았는데 사람이 퍽 점잖고 학식도 상당하며 풍신도 남에게 빠지지 않아서 일찌기 그 고을에서 향촌으로 향좌수(鄕座首)까지 지냈으나 집안 살림이 극히 가난하여 땅이라고는 송곳 하나 거꾸로 꽂을 곳이 없고 집은 서너칸 되는 조그만 초가집이나마 잘 거둘 힘이 없어서 풍우(風雨)를 다 가리기 어려웠으며 거기다가 자손복(子孫福)까지 없어서 나이 육십에 가깝도록 슬하에 아들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고 단지 딸 하나가 있었는데, 인물이 절특하고 범절이 남달리 뛰어나니, 누구나가 다 칭찬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집이 가난한 탓으로 과년(瓜年)이 훨씬 넘도록 출가를 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박좌수는 평소 고도령을 매우 귀여워하는 까닭에 비오는 날이나 혹 밤 같은 때에 틈만 있으면 고도령이 박좌수를 찾아 가고 박좌수도 또 고도령을 찾어 가서 혹은 유익한 옛 이야기도 하고 혹은 우스운 이야기도 하고 또 흔히 서로 장기도 두었다.

하루는 비가 부슬부슬 와서 밖의 일은 할 수 없으므로 고도령도 집에서 짚신 한켜레를 삼아 놓고는 심심한 여가를 풀을 겸 박좌수 집을 찾아가서 의례히 하던 모양으로 박좌수와 같이 장기를 두게 되었다.

한판 두판 세판… 혹은 이기고 혹은 지고 하여 몇판을 두다가 고도령은 박좌수를 치어다 보며

『좌수님, 장기를 그대로만 늘 두게 되니까 너무 심심합니다. 이제부터는 무슨 내기를 하면 어떠할가요.』

하니 박좌수도 웃으며

『아 ─ 그것도 좋지, 그러나 무슨 내기를 하나?』

하고 물었다.

고도령은 또 웃으며 말하되

『황송한 말씀이나 이런 내기를 하시면 어떠하실가요, 저는 아무것도 가진 것도 없고 다만 노동일 하는 것 밖에 없으니까 제가 만일 진다면 새경(賃金)도 받지 않고 댁에서 일년 동안 머슴살이 해 드리고, 또 댁에도 별 재 산이 없고 딸만 가지고 계시니까 좌수님이 지시게 되면 저를 사위를 삼으시면 어떠하실는지요.』

하였다. 아까까지도 얼굴에 웃음만 띄고 있던 박좌수는 별안간 성을 버럭 내며

『예끼 ── 미친놈 같으니 농담도 분수가 있지 그런 말이 어디 있단 말이냐. 늙은이가 심심해서 아무리 너같은 애들을 데리고 장기를 두기로서니 그런 버르장머리 없는 말을 함부로 한단 말이냐. 너같이 함부로 버릇없이 구는 놈과는 다시 대면도 하기 싫으니 냉큼 네집으로 가거라.』

하였다. 고도령도 처음에 그러한 말을 농담삼아 하였지만 그가 정색으로 그렇게 핀잔을 주니 그만 부끄럽고 무안하여 얼굴 빛이 벌겋게 되어 머리를 잘 들지도 못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에 박좌수의 딸은 울타리 틈으로 자기 부친과 고도령의 장기 두는 것을 엿보고 있다가 고도령이 무슨 말을 꺼내는데 자기 부친이 역정을 내고 또 고도령이 그의 역정에 무안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는 한편으로 민망스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호기심도 생겨서 마음에 퍽 궁금증을 가지고 있더니, 마침 그 부친이 안방으로 들어오는데 그때까지도 얼굴에 노기를 띠우고 화를 내며

『에 ─ 참 관년한 딸을 두면 동네 강아지가 다 찝적인다더니 나중에는 별꼴을 다보는군 내가 아무리 가난해서 이 꼴을 하고 살지언정 남의 집 머슴 사는 늙은 총각 놈에게 내딸을 주어? 생전 처음으로 창피한 말을 다 들었군…….』

하였다.

그의 딸은 눈치를 대강 짐작하면서도 시침을 딱 떼고 나직한 목소리로

『아이고 ─ 아버지께서는 평생에 화증이라고는 아니 내시더니 오늘은 웬 일이십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더구나 철 모르는 남의 집 머슴 아이와 장기를 두시다가 별안간 화증은 왜 그렇게 내십니까.』

하니, 박좌수는 고도령의 하던 말을 그대로 옮겨 들려주고 또 담뱃대로 재떨이를 딱딱 치며 하는 말이

『아무리 우리 집이 가난하여 이꼴을 하고 살지언정 그까짓 놈이 다 없신 여기고 감히 그럼 말을 한단 말이냐…….』

고 하였다.

그것은 물론 그가 장래에는 당당하게 참판까지 할 인물이지만 그때까지는 아직 미숙한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는 까닭으로 멸시하고 그러는 말이었다.

보통 처녀들 같으면 박좌수의 딸도 그의 아버지와 같은 태도로 고도령의 하던 말을 들으면 퍽 창피하고 수치스럽게 생각하여 입으로 욕설이라도 퍼부었겠지만 그는 그저 심상하게 들을 뿐아니라 도리어 기뻐하는 안색으로 방긋 웃으면서

『아이구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화증까지 내실 일이 아니신데 그러십니다.

고도령이 지금에는 아무리 머슴살이를 할지라도 소문을 듣자온즉 그 집의 내력도 상당하고 공부는 비록 못했으나 사람이 진실하고 마음씨가 좋아서 동네 사람들이 남녀노소 할것 없이 모두 칭찬을 하는 터이온즉 그를 맞아 사위를 삼으신다면 우리 가문의 영광이지 무슨 수치스러운 일이 있겠읍니까.』

박좌수는 그 딸의 말에 더욱 기가 막히고 노염이 나서 소리를 높여 꾸짖되

『집안이 망할려니까 별꼴을 다 보겠구나, 아무리 낫살은 먹었더라도 아직 편발의 기집애년이 그런 말을 염체없이 한단 말이냐, 아 ─ 참 세상은 다 망했어 ─ 우리 집안의 영광…… 영광이 다 무엇이며 행복이 다 무엇 말러죽은 것이란 말이냐.』

하고 그만 바깥 방으로 뛰어 나갔다. 아까까지도 화기가 융융하던 박좌수의 집은 고도령의 그 말 한마디로 별안간 살풍경을 이루워 온 집안에는 쌀쌀한 공기가 가득히 충만하였다.

그 후 며칠 만이었다. 그 이야기가 박좌수의 입에서 나왔던지 또는 고도령의 입에서 나왔던지 그것은 알 수 없으나 말이 한입 건느고 두입 건너서 온 동리 사람들이 모두 알게되니 동리 사람들은 평소에 모두 고도령에게 호감을 가졌기 때문에 무한한 동정을 하여 무조건하고 그 일을 진행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던 차에 마침 어느 날 고도령의 주인 집에 큰 생일잔치가 있어서 그 동리의 남녀 노소가 모두 모이게 되었다.

여러 사람들은 술을 먹고 얼근한 판에 이런말 저런말을 하다가 고도령의 혼인 문제가 역시 화제에 올라서 서로 찧고 까불고 하다가 최후에는 거기에 참석한 박좌수를 불러다 놓고 여러 사람들이 둘러 앉아서 무리하게 강제로 권하다 싶이 그 딸의 허혼하기를 청하니 박좌수도 그제는 할 수 없이 권에 비지떡 모양으로 허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남녀 양편이 모두 과년 하고 또 생활도 곤난하니 만치 날자를 끌고 무슨 준비도 할 여지가 없으므로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날자를 정하고 작수 성례로 그럭 저럭 예식(禮式)을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첫날 밤을 당하여 신부인 박좌수의 딸은 남의 집 신부들처럼 무슨 부끄러워 하는 기색도 없고 마치 여러 해 동안 같이 살던 남편을 대하는 것 모양으로 고도령을 대하여 말하되

『내가 비록 농촌의 빈한한 집 여자로 아무 배운것과 아는 것은 없으나 전하는 말을 들은즉 당신은 양반집 후예라하고 또 당신의 관상을 본즉 그렇게 장래까지 빈궁할 양반은 아닌 것 같읍니다. 그러나 사람이란 배우지 않는다면 아무리 문벌이 좋고 잘난 사람이라도 소용이 없는 것인즉 지금과 같이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일년에 몇말 주는 새경(賃金)벼를 얻어 먹을 생각을 두지 말고 어떠한 고생을 하든지 피차에 십년 작정을 하고 나는 밤낮으로 길쌈을 하여 돈을 모으기로 하고 당신은 열심히 공부를 하여 입신양명(立身揚名) 하기로 하십시다. 그리고 또 이러한 맹서를 한 이상에는 부부간에 아무리 보고 싶드라도 절대로 만나지를 마십시다…….』

하니 고서방은

『부인의 말이 좋기는 하나 일이 잘 되고 안 되고는 어떻게 지금부터 예측할 수가 있으며 또 기약할 수가 있겠오.』

하고 대답하였다. 신부는 더욱 힘있는 목소리로

『옛말에도 뜻이 있는 자는 마침내 성공을 한다 하였으니 우리 두 사람이 마음만 굳게 먹은 다음에야 어찌 성공 못할 것을 염려 하오리까?』

하니 고서방도 그 부인의 말에 감격하여 그리하겠다고 승락하였다.

그러나 적수전인 고서방은 십년 공부를 하기로 아내에게 맹서 하였으나 십년 공부를 할 학비(學費)가 없는 까닭에 한편으로 큰 걱정이 생겨서 다시 부인에게 말하되

『당신의 마음대로 공부하는 것은 좋지만 대관절 학비가 있어야 되지 않겠오.』

하니 부인은 또 말하기를

『내가 평소에 길쌈을 하여 저축해둔 면포가 사오필 있으니 위선 그것을 팔아서 노자(路資)나 하시오.』

하고 선반 위에 얹혀 있는 목롱(木籠)을 내려 놓더니 그 속에서 명주 두필과 무명 세필을 꺼내서 고서방을 주었다. 고서방은 받아서 머리 맡에다 놓고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는 바람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날 밤을 그대로 새우고 동이 훤하게 틀까 말까 할 때에 집안 사람도 모르게 두 신혼부부가 서로 동반하여 집을 떠나게 되니 그때 고서방의 행색이란 마치 장보러 다니는 장돌뱅이도 같고 남의 집 머슴살이가 주인집 물건을 집어 가지고 도망질 하는 것과도 같었다.

길을 떠난 고서방은 그길로 바로 고령읍내(高靈邑內) 시장(市場)으로 가서 짊어지고 간 명주필과 무명 필을 팔아서 약간의 노자를 장만하여 가지고 이 동리 저 동리로 돌아 다니며 서당(書堂)이 있는 집만 찾아 다니던 차에 그럭 저럭 경상남도 합천(陜川) 땅에까지 당도하였다.

한곳에 이르러 우연히 바라본즉 저편에 깨끗한 집 한채가 있는데 앞으로는 맑은 개천물이 좔좔 흐르고 그 개천 위에는 수양버들이 제멋대로 척척 늘어져서 바람이 불 때마다 마치 키크고 허리가 가느다란 아름다운 미인이 춤을 추듯이 흔들거리며 그 버들 사이로는 청아한 매미(蟬)떼들의 우는 소리와 비슷한 젊은 학동(學童) 들의 글 읽는 소리가 바람결에 새여 나왔다.

고서방은 그 글소리를 듣고 크게 기뻐하면서 바로 그 집을 찾아가니 약 육십세 가량된 점잖은 노인이 학발 동안에 정자관(程子冠)을 쓰고 앉아서 오륙명의 학동을 앞에다 놓고 공부를 시키고 있었다.

고서방은 그 선생에게 공손히 절을 하고 여쭈되

『소생은 ○군 ○동에 사는 고○이 온데 조고여생(早孤餘生)으로 집안 살림조차 빈한하여 글을 배우지 못한 까닭으로 여태까지 자기 이름도 쓰고 읽지 못하여 철천의 한이 되옵기로 불원천리 하옵고 공부하러 왔사오니 비록 우둔한 소생이나마 저버리지 마르시고 가르쳐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하니 그 노인 선생은 고서방을 한참 바라보더니

『그러면 전엔 무엇까지 배웠던고?』

하고 점잖게 물었다.

고서방은 당초에 아무것도 읽은 적이 없다고 대답한즉 노인은 천자문(千字文)을 내놓으며

『이것이 처음 배우는 사람이 먼저 읽는 것이니 자네도 먼저 읽어 보아라.』

한다.

고서방은 죄송스럽고 한편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몸을 굽히며

『고맙습니다.』

하여 치사를 한 후 자기가 가지고 간 돈을 내 놓으며

『이것은 비록 약소하오나 양식(糧食) 값으로 보태 쓰십시요.』

하니 그 노인은 웃고 사양하며 말하되

『내가 왜 밥 장사를 하는 사람인가 우리 집 양식 걱정은 그만 두고 그 돈으로 자네의 신발과 의복 같은 것이나 작만하게……』

하였다. 고서방은 그날부터 천자을 배우는데 「하늘천 따지」 소리가 밤낮으로 그칠 사이가 없이 열심으로 읽으며 다른 아이들이 서로 웃고 흉을 보아도 그것은 도무지 상관하지 않고 언제나 열심으로 공부하였다.

노인은 고서방이 부지런히 공부하는데 감동되어 또 성심 성의를 다하여 가르치니 한달 남짓하여 천자를 다 떼고 계몽편(啓蒙篇)을 또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낮이나 밤이나 글만 읽기를 오륙년이 지나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다니 문리가 막힐데 없이 뚫리었다. 노인은 그걸 읽고 나서 과문육체(科文六體)를 가르치기 시작하여 또 사오년을 지나니 시부표책(詩賦表策) 등과 문각체에 능하지 않은 바 없어 노사숙유(老師宿儒)라도 당하지 못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때에 와서 노인은 고서방을 보고

『자네의 문장이 이만 하면 장중(場中)에 나아가 과거도 볼만 하니 그만 과거를 보도록 하여라.』

하며 권하였다.

그러나 고서방의 생각에는 아직도 공부가 완성되지 못하였으니 수년만 더 하였으면 만장 중에 독보를 할듯도 하니 그때에 과거 보는 것도 늦지 않다 하고 거기에서 그만 그 노인을 하직하고 해인사(海印寺)를 찾아 들어가서 여러 중에게 청하되

『내가 이절의 방 한 간을 빌려서 수년 동안 공부를 하고 싶으나 양식을 팔아올 도리가 없으니 여러 대사가 매일 마다 돌려가며 밥을 먹여 주었으면 어떻겠읍니까.』

하였더니 중들은 그리 어려워 하지 않고 모두 허락하였다.

그는 거기서 다시 혼자서 수년간 열심히 공부를 더 하는데 졸음이 오면 송곳으로 다리를 찔러가며 글을 읽었다. 이리하여 계획하였던 십년간이란 기한이 다 되었는데 그때 숙종대왕께서는 마침 정시령(庭試令)을 내리셨다.

고서방도 그때 자기 자신에도 그만 하면 시험쳐볼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고 바로 서울로 올라와서 과거를 보았는데 다행히도 병과(丙科)에 참방하여 전례대로 가주서(假注書)에 피명되었다.

그런데 마침 대신들이 등연(登筵)하고 그옆에서 기주(記註)를 하게 되었는데 별안간 창대 같은 비가 쏟아지며 처마 끝에 떨어지는 소리가 하도 요란하여 말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상감께서는

『제신들의 주대(諸臣奏對)하는 소리를 높히라.』

고 분부 하셨다.

고주서는 그 분부를 기주하되

『잠령괄이(簪鈴聒耳) 주성의고(奏聲宜高)』

라고 적었더니 입시한 승지들이 그 글을 보고 모두 칭찬하였다.

상감께서도 그 칭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가져오라 하시며 어람(御覽) 하신 후 크게 칭찬하시며

『네가 누구의 후손이냐?』

고 물으시니 고주서는 엎드려서

『고충신 경명(敬命)의 후손이올시다.』

라고 아뢰었더니 상감께서는 다시 제봉유손(霽峰有孫) 이라고 칭찬하시고

『네가 부모가 있느냐?』

고 또 물으셨다.

고주서는 조실 부모하고 영남지방으로 떠 돌아 다니던 사실 이야기를 아뢰었더니 상감께서는 또

『너 장가 들었느냐.』

고 물으셨다. 고주서는 자기의 장가든 사실과 첫날 밤에 아내와 맹서하고 서로 헤어진 사실을 자세히 아뢰었더니 상감께서는 대단히 기특히 여기시며

『네가 집 떠난지 십년이 넘었으면 그동안 소식이나 들었느냐.』

고 물으셨다.

고주서는

『맹서한 언약이 있어 아직 소식을 못들었읍니다.』

고 아뢰었다.

상감께서는 칭찬도 하시며 탄식도 하시고 즉시 고령현감(高靈縣監)을 특별히 제수하시와 금의환향(錦衣還鄕)하는 영광을 자랑하게 하시었다.

뜻밖에도 이런 천은(天恩)을 받은 고주서는 뼈에 사모칠만콤 감동되어 사은숙배(謝恩肅拜)하고 떠난지 십여일만에 고령 땅에 당도하였다.

거기서부터는 데리고 가던 관속을 모두 역말에서 떨어져 있게 하고 자기 혼자서 폐포파립(弊布破笠)에다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의 궁하고 초라한 모습을 차리고 집을 찾아가니 그것은 자기의 궁하고 천한 모습을 아내에게 보여서 아내의 마음을 떠 보려고 하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암행어사 이몽룡(暗行御使李夢龍)이 박색고개를 넘어가던 격으로 천천히 걸어 박좌수집을 찾아간즉 그 집은 다 쓰러지고 빈터에 쑥대만 우거져 바람에 이리 흔들 저리 흔들 하며 홀로 옛 주인을 맞는 듯 하였다.

고주서는 무한히 비감한 생가이 별안간 들어서 눈물이 핑 돌며 혼자 생각에 대체 이 집이 다 망했단 말인가? 어디로 이사했단 말인가? 하고 여러 모로 의심 하다가 이끼가 낀 주춧돌만 어루 만지다가 다시 동리를 한바퀴 돌아 보니 동리 모양도 아주 쓸쓸하여 전날에 그 즐비하던 가옥들이 지금은 띠엄띠엄 떨어져 아주 적으며 예전에 알던 사람도 한 사람도 만나 볼 수가 없었다.

이웃 사람에게 박좌수집 일을 물었더니 그들 말이

『박좌수는 이미 작고하고 딸 하나가 있어서 고도령이란 작자에게 시집 보냈더니 첫날 밤에 고도령은 까닭없이 집을 떠나 여지껏 십년이란 세월이 흘러도 생사 존망을 모르고, 그 부인이 대단히 현숙(賢淑)하여 손수 돈 벌이를 하여 돈을 많이 모아서 지금은 벌써 장자(長者)가 되어 집안 살림살이도 많이 장만하였는데, 이 산너머에 있는 백여호나 되는 큰 촌락이 모두 그의 일족(一族)의 것이며 또 남들이 부르기를 고도령 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고도령의 유복자(遺腹子)가 있는데 지금 벌써 열 살이 되어 선생님을 두고 글도 가르치며 이따금 걸인(乞人) 잔치를 하여 고도령의 소식을 알려고 하니 당신도 찾아가 보십시요. 술과 밥도 잘 얻어 먹을 터이고 노자 돈량이나 얻으리다.』

하고 수다하게 떠들어댔다.

이 말을 들은 고현감은 한편으로 슬픈 생각도 나고 한편으로 기쁜 생각도 났다.

더우기 그 아내의 수단과 결심에 대하여 탄복하였다.

그때의 급한 마음으로는 바로 뛰어 들어가 그리웠던 아내와 생면도 못한 아들을 대하고 싶지마는 자기도 소원 성취하고 자기 아내도 언약대로 부자가 되어 천하 경사가 자기 혼자의 것처럼 기쁜 그는 자기의 행색을 잠간 속이어 더 재미있는 장면을 꾸며보려고 수행관속을 가딴히 모아

『고도령 집이라고 부르는 우리집 이웃 마을에 소문없이 모였다가 피리소리가 들리거든 일제히 문 밖으로 들어와 기다려라.』

하고 쥐도 못들을 정도로 낮으막 한 소리로 약속을 하고 발이 땅에 닿을 사이도 없이 달려가 고도령 집을 찾으니 과연 백 여호(百餘戶)나 되는 큰 마을이 즐비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곡식이 산더미 같이 쌓이어 여기 저기 있는 것이 모두가 노적(露積)이 되고 백여호의 기와집들이 숲 사이로 번화한 모습을 나타냈다.

고현감은 걸인의 모양으로 그 집에 당도하니 팔도 거지가 다 모인 것처럼 넓은 마당에 꽉 들어 차고 빈 틈이 없었다.

고현감은 서슴치 않고 사랑대청으로 성큼성큼 올라간즉 늙은 글방 선생님이 먼지 묻은 관은 쓰고 앉었고 옆에는 미목이 준수한 어린 아이가 책을 펴놓고 있었다.

이 아이를 본 고현감은 바로 네가 내 아들이다 하고 싶지마는 시침을 떼고

『빌어 먹는 놈이 한끼의 신세를 지고 가면 어떻겠습니까.』

고 청하였더니 그 아이는 공손히

『손님의 성씨가 누구 십니까.』

고 물었다.

고현감은

『내성은 고(高)가요.』

하고 대답하였더니 이 말을 들은 아이는 쭈루루 안으로 쏜살같이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며

『그러시면 손님의 부인 되시는 분의 성함은 누구십니까.』

고 또 묻는다. 고현감은,

『내 아내의 성은 박(朴)이고 우리 장인은 박좌수이오.』

라고 대답하였다.

이때 고현감의 아내가 문틈으로 엿본즉 십년간 생사 존망을 몰라 몽매간에도 잊어지지 않던 자기 남편인 고도령이었다.

급히 자기 아들을 불러 고현감을 안으로 맞아들이고 내외가 서로 안고 통곡을 한참 동안 하니 옆에서 보는 사람도 창자가 끊어질 만큼 슬펐다. 그러나 그들은 최초의 굳은 맹세를 소원대로 성취하고 그들의 앞에는 행복과 영화(榮華)가 일시에 병진(併進) 하여 만인의 흠모하는 촛점이 되고 백대에 전해 내려오는 한 미담이 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