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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야담 사화 전집 (차상찬)/장대에 스러진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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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將台)에 스러진 별

신라(新羅)의 일천년 왕업도 어느덧 운이 다하여 청옥저(靑玉笛) 백옥저(白玉笛)도 그 청아하던 소리가 끊어지고 계림의 황엽(鷄林 黃葉)이 서늘한 가을 바람에 떨어지기 시작하니 신라 말년의 일대 문호(文豪)요, 도학가인 최고운 선생(崔孤雲先生)도 이 세상을 아주 비관하게 되어 하던 벼슬을 헌신짝같이 던져 버리고 방랑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동쪽으로 금강산(金剛山) 오대산(五臺山)이며 서쪽으로 묘향산(妙香山) 구월산(九月山)과 남으로 지리산(智異山) 가야산(伽倻山)등의 명산이란 명산은 모두 밟아 구경하고 최후에 가야산 홍류동(紅流洞)으로 들어가서

『광분첩석후중만(狂奔疊石吼重巒)
인어난분지척간(人語難分咫尺間)
고교류수주농산(故敎流水晝籠山)
혹공시비성도이(或恐是非聲到耳)』
『큰 물결 돌을 쳐서 여러 산 다 울리니
사람의 말소리 지척에도 안 들린다
유수야 너 부디 산을 다 쌓거라
인간의 시비 소리 내 귀에 들려 온다』

이러한 시가(詩歌)를 지어 부르며 이 세상과 인연을 아주 끊고 산수간에서 일생을 방랑하니 세상 사람들이 그의 생사를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전하여 말하기를

『그는 신선이 되어 청학(靑鶴)을 타고 지금까지도 지리산의 쌍계동(雙溪洞) 화개동(花開洞)이나 또는 가야산의 홍류동 무릉교(武陵橋) 같은 곳으로 내왕하고 있다.』

하는 소문이 자자 하였다.

그는 이렇게 문학과 도학에 조예가 깊을 뿐만 아니라 인품 또한 고결하니 만큼 그의 피를 받은 자손도 문장이 남보다 뛰어나 문장가 또는 도학가 출신이 많았다.

그의 후손중 최눌(崔訥=水雲[수운]의 十三代祖[십삼대조]) 같은 분은 문학으로 저명하여 성균사성(成均司成)까지 하고 최진립(崔震立=水雲[수운]의 七代祖[칠대조])은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순절하여 충열사(忠烈祠)에 배향하고 이십칠대 손에는 최옥(崔沃)이라는 분이 있었으니 그는 호를 근암(近菴)이라 하고 경주 가정리(慶州柯亭里)에서 살았는데 육대(六代)를 계속하여 내려온 큰 유학자로 문장과 도학이 갸륵한 것은 물론이고 가세가 또한 넉넉하니 당시 경상도 일대에서 명망이 상당하였었다.

그러나 나이 사십이 넘도록 슬하에 자식이 없으므로 항상 걱정을 하더니 하루는 어디를 갔다가 집에 돌아와 본즉 평소에 보지도 못하던 어떤 소복한 부인이 와서 자기 집 안방에 있었다. 그는 이상히 여기어

『여보 당신은 어떤 부인이신데 남의 집 안방에 와서 있오?』

하고 물었더니 그는 대답하되

『예, 나는 저 금적리(金尺里=경주시 서쪽)란 동네에 사는 한서방 집에서 왔읍니다.

나이 스물에 불행히 청춘 과부가 되어 지금 삼십이 되도록 십년 동안이나 수절을 하고 있었더니 오늘 아침에 별안간 정신이 아찔하여지며 해와 달이 품속으로 들어오고 이상한 기운이 온몸을 싸더니 불식부지 중에 여기에 왔읍니다.』

하고 하였다.

최옥은 그의 말을 듣고 이상히 여기며 그 여자가 혹시나 정신 병자나 아닌가 하고 자세히 살펴보던중 자기도 역시 이상한 감동이 생겨서 두 사람이 서로 부부의 의를 맺었더니 그달부터 태기가 있어 십삭만에 일개 옥동자를 낳으니 때는 바로 순조 이십 사년 갑신(純祖二十四年甲申=西紀一八二四[서기일팔이사]) 시월 이십 팔일이었다.

처음에 이름을 제선(濟宣)이라 지었다가 뒤에 제우(濟愚)로 고치고 장성한 다음에 자(字)를 성묵(性默)이라 짓고 호를 수운재(水雲齋)라 하였으니 오늘날 천도교의 제일대(第一代)교주 최수운이요 수운이란 운(雲)자는 그의 선조 고운 선생의 호와도 무슨 인연이 있는듯 하다.

그가 탄생 할때에 이상한 구름이 집을 싸돌고 그집 앞에 있는 구미산(龜尾山)이 사흘을 계속하여 크게 울리었으며 얼굴이 관옥같이 생겨서 뼈와 살이 환하게 투명한 듯하고 특히 눈에 이상한 광채가 있어서 눈을 뜨면 번개 같이 번쩍하는 빛이 사람을 쏘으니 집안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남들이 다 이상하게 생각하여 항상 선동(仙童)이라고 별명을 짓고 또 동무들은 자기의 부형들이 하는 말을 듣고 그를 조롱하되

『너의 눈은 역적의 눈이다.』

하니 그는 싱긋 웃으며 대답 하기를

『나는 역적이 되려니와 너는 순한 백성이 되라.』

고 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도량이 크며 사리에 밝으며 무슨 일을 대하면 항상 의심을 잘하고 또 비평을 잘하되 보통 사람들의 생각하는 것과는 해석을 달리 하니 남들이 칭찬도 하는 동시에 비평도 많이 하였다.

그는 여섯 살 되던 해 불행히 모친 한씨의 상을 당하고 여덟살 때부터 그의 부친에게 한학(漢學) 공부를 하였는데 원래 재주가 비상하여 불과 사오년에 시서백가의 서를 다 떼우고 글과 시가 어른과 다름이 없게 성취되니 그의 부친이 더욱 사랑 하였다.

그러나 열여섯 살 때 그의 부친께서 또 돌아가시니 그는 가정에서 마음을 붙일 곳이 없어서 항상 고적을 느끼게 되고 또 그때 세상인심이 너무 고약한 것을 보고 일상 혼자서 개탄하되

『지금의 세상은 임금이 임금 노릇을 잘못하고 신하는 신하 노릇을 잘못하며 아비는 아비 노릇을 못하고 자식은 자식 노릇을 못하며 그외 부부형제가 모다 그러하고 또 낡은 도덕은 무너지고 옛 윤리는 끊어졌으니 내가 스스로 나서서 무슨 방법으로든지 이 추악한 세상을 깨끗이 하고 죽게된 창업 을 건지지 않으면 안 되겠다.』

고 결심하고 먼저 조상 이래로 봉승하던 유학(儒學)을 깊이 연구하여 보았으나 아무 소득이 없으므로 모든 유서를 모아다가 불에 태워 버리고 스스로 탄식하되

『이 세상은 요순(堯舜)의 정치로도 능히 건지지 못할 것이요, 공맹(孔孟)의 도덕으로도 또한 다스리지 못하리라.』

하고 또 다시 불서(佛書)을 연구한 후 이어 말하되

『유도 불도 수천 년에 운이 또한 쇠하였다.』

고 한탄하며 끝으로 다시 당시에 새로 수입된 기독교(基督敎)를 연구하여 보았으나 역시 소득이 없으므로 그 경전을 평하여 말하되

『글은 조백이 없고 말은 차제가 없으며 다만 지신을 위하는 것에 그치고 몸에 기화(氣化)하는 신(神)을 얻지 못하였다.』

하고 그 뒤부터는 동서양의 모든 것을 불만불비하게 생각하고 새로이 완전한 무엇을 독창적으로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각오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리 생각 저리 생각 궁리하던 끝에 표연히 집을 떠나 혹은 무인(武人)이 되어 볼까 하고 활쏘는 곳에 가서 활도 쏘아보고, 말 타는데 가서 장사도 하여보며, 심지어 의학 음악 복술까지 연구하여 보았으나 결국은 하나도 창생을 건지고 세상을 구할 것이 못된다고 생각하고 그 뒤부터는 세상 살림과 풍속인심 등을 보살펴 볼려고 팔도강산을 두루 두루 다니며 방방곡곡을 다 찾어 갔었다.

그 사실은 그의 시(詩)와 노래 가운데도 많이 나타났다.

『방방 곡곡 찾아 들어 인심 풍속 살펴보니 여차여차 또 여차라.』

『인심 풍속 괴상하여 매매사사 눈에 거쳐 각자 의심하는 마음 불고천명(不顧天命) 아닐든가.』

『일천하괴질운수(一天下怪疾運數) 다시 개벽 앞이 든가.』

『방방곡곡행행화(方方谷谷向向晝)
수수산산개개지(水水山山個個知)』
『방방 곡곡을 다니고 또 다니니
물과 물, 산과 산을 낱낱이 다 알겠다.』

라고 부른 시가 그 한 예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 세상에 일반 인심과 풍속을 세밀히 살펴보고 여러 가지 그릇된 원인과 또 구제책(救濟策)을 강구 하기에 힘썼다.

그런데 그때 우리 나라는 마침 순조시대(純祖時代)로 외척김씨(外戚金氏)들이 활개를 쳐서 국정이 말못할 정도로 문란하니 지방에서는 탐관오리의 무리가 백성을 함부로 학대하여 인심이 크게 이산한 까닭으로 순조 십이년 임신(純祖十二年 壬申) 바로 수운선생의 탄생하기 십이년 전에 평안도에서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서 그 영향으로 각지의 인심이 항상 불안 하던 중 해마다 나쁜 병과 홍수등 모든 재앙이 겹쳐 들어 모두 마음을 붙이고 의지할 곳이 없어서 혹은 외래의 세력을 의지하기 위하여 천주교에도 들어 가고 혹은 재래에 전해오던 정감록(鄭鑑錄) 도선비기(道詵祕記)에 있는 십승지기를 찾어도 다니고 진인(眞人)이 해도중(黃島中)에서 나오기를 기대하여 일반의 인심 상태가 참으로 가련하였고 또 동양의 형세를 살펴보면 헌종 오년(憲宗五年西紀一八三九年[서기일팔삼구년])에 중국에서는 유명한 아편전쟁(阿片戰爭)이 일어나 영국이 중국의 홍꽁(香港)을 빼앗은 이외에도 중요한 다섯 항구를 개방케 하고 배상금 이천 백만불(二千百萬弗)을 강탈하였으며 또 그후 일천팍백오십육년(哲宗六年[철종육년])에는 영불연합군(英佛聯合軍)이 천진(天津)을 점령하고 북경까지 쳐들어가서 소위 북경조약(北京條約)이란 것을 체결하고 많은 땅과 배상금을 차지하여 소위 천하의 대국(大國)이라고 자칭하던 중국이 서양인의 주먹에 눌리게 되고 또 우리 나라는 순조 삼십일년 신묘(辛卯西紀一八三一年[서기일팔삼일년])에 영국선박(英國船舶=그때에 소위 이상한 배라고 한 것)이 충청남도 홍주군 고대도(忠南洪州郡古代島)에 나타나서 상하 일반을 놀라게 하던중 헌종십일년 을사(憲宗十一年乙巳 西紀一八四五年[서기일팔사오년])에는 영국 사람이 남해 연도(南黃沿道)에 와서 측량(測量)을 하며 직접으로 통상하기를 짓궂게 청하고 그 이듬해 병오(丙午)에는 또 불란서의 군함이 홍주군 외연도(外烟島)에 와서 시위를 하며 정부에 글을 보내고 또 천주교(天主敎)는 일지기 정조 때(正祖朝)부터 잠재(潜在)한 세력을 갖었던 현종 때에 와서는 서양사람의 내왕이 빈번하여짐에 따라서 그 형세가 더욱 커져 조정에서 엄금함에도 불구하고 그 당(黨)을 짓고 교를 펴서 인심이 장차 그곳으로 다 돌아갈 염려가 있었다. 다시 말하면 동양의 형세 그중에서도 우리 나라의 형세는 내우외환(內憂外患)이 날로 절박하여 자칫하면 물질은 그만두고라도 정신까지도 남에게

다 정복을 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것을 통찰한 최수운은 그 대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여간 고심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는

『만근 이래로 온세상 사람들이 천명과 천리를 순응치 않고 마음이 항상 송연하여 돌아갈 바를 알지 못하고 또 서양사람은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치면 반드시 얻어서 아무 일도 못하는 것이 없이 장차 천하를 정복할 우려가 있는 지라 중국이 망한다면 우리 나라도 망할 염려가 있으니 무슨 계책으로 보국안민(輔國安民)을 할까……』

하고 크게 걱정하게 되었다.

갑진년(憲宗十年 甲辰[헌종십년 갑진]) 시월이었다.

그는 여러 해 동안을 두고 각지로 돌아다니며 방랑생활을 하다가 자기의 고향인 경주(慶州)로 돌아가니 전날에 있던 부모의 유산이라는 것은 자기가 돌보지 않은 까닭으로 다 없어지고 자기의 부인 박씨(夫人朴氏)는 생활이 곤난하여 울산(蔚山)에 있는 자기 친정에가서 붙여 살었었다.

그는 할 수 없이 그 부인을 찾아서 울산에 가서 그 부인에게 여러 가지의 위안의 말을 한후 읍(邑)으로 들어 가서 어떤 여관에서 유숙하게 되니 그 집 주인은 원래 그곳 기생(妓生) 출신으로 인물도 잘 났거니와 재산도 상당하여 여관업을 하면서 항상 자기의 남편될 사람을 구하던차 최수운의 관옥 같은 얼굴과 선골 같은 풍채를 보고 스스로 흠모하여 수운에게 한방에서 같이 거처 하기를 간청하니 수운도 역시 한마디로 쾌락하였다.

그러나 삼일 동안을 한방에서 동침하면서도 마치 옛날 서화담(徐花潭)이 명기(名妓) 황진이(黃眞伊)를 대하듯이 조금도 다른 뜻이 없이 태연하게 구니 그 여자는 감탄하여 말하되

『선생은 참으로 도학국자 올시다.』

하고 다시 남매의 의를 맺었다.

그가 그곳에서 몇 달을 지내는 동안에 그 부인과 여러 사람들의 모두 권하기를

『이제부터는 방랑의 생활을 그만두고 가족과 같이 안락한 생활을 하십시요.』

하니 거절을 못하고 스스로 거주할 땅을 구하다가 울산 유곡의 여호바우골(蔚山裕谷狐岩洞)의 산수가 수려(秀麗)하고 풍경이 유수한 것을 보고 기뻐하여 그곳에다 삼간초옥(三間草屋)을 새로 건축하고 처자들을 데려다가 명색 살림살이라고 차려 놓고 나아가면 명산대천의 자연을 즐겨하며 집에 들어오면 침사묵념(沈思默念)으로 천지자연의 묘미와 우주(宇宙) 인생의 진체(眞諦)를 직감하는 것으로 스스로 위안을 삼었다.

때는 바로 을묘년(乙卯年 哲宗六年[철종육년]) 춘삼월이었다.

천지가 죽은 듯이 고요하고 뜰아래 있는 한 나무의 살구꽃이 한참 만발하였는데 그는 그 꽃구경을 하며 홀로 책을 보고 있었더니 뜻밖에 어떤 점잖은 노승(老僧)이 갈포장삼을 들쳐 입고 그의 앞에 와서 공손하게 합장배례를 하며 말하되

『소승은 금강산 유점사(金剛山楡站寺)에 있는 중이 온데 부처님께 백일 기도를 올렸더니 공부를 마치는 날 우연히 보았더니 탑(塔) 앞에 웬 책 한 권이 놓여 있으므로 그것을 펴서 읽어본즉 그 글은 불경도 아니고 유서(儒書)도 아니요 평생에 처음 보는 이상한 글인데 도저히 그 뜻을 알 수 없어 각지를 돌아다니며 글잘하고 도학이 높다는 사람은 다 찾아 보아도 한 사람도 그 뜻을 아는 사람이 없어서 퍽 가깝하게 여기던 차에 오늘 우연히 선생님을 뵈오니 크게 감동되는 바가 있어 이 책을 드리는 것이오니 부디 선생님께서는 이것을 잘 연구하여 보십시요.』

하고 책을 꺼내 주고는 어느 사이에 간곳이 없고 또 주던 책까지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책속에 있는 글자는 최수운의 머리속에 완연히 기억되어 삼일 동안을 두고 연구 하다가 홀연히 그 글뜻을 깨닫고 그 뒤부터는 더욱 더 수련(修鍊)에 힘을 쓰고 도(道)를 닦기에 온갖 힘을 다 하였다.

그 이듬해 병진(丙辰)년 여름에 이르러서는 그는 동자(童子) 한 사람을 데리고 양산 통도사 내원암(梁山通度寺 內院庵)에 들어가 사십구일을 작정하고 견성공부(見性工夫)에 힘을 쓰더니 사십칠일이 되던 날 문득 마음에 생각하기를

『지금 우리 삼촌이 돌아가셨으니 공부를 다 마칠 수가 없다…….』

하고 산을 떠나 집으로 돌아오니 과연 자기가 생각하던 바와 같이 틀림이 없이 그의 삼촌이 돌아갔었다.

자기도 스스로 이상하게 여길 뿐 아니라 동리 사람들도 모두 이상히 생각하고 혹은 찾아가서 도를 묻는 자도 있고 혹은 이술(異術)을 한다고 하여 그에 대한 세상의 물의가 높아지고 날이 갈수록 그의 이름을 여러 사람들이 알게되었으며 따라서 관리들의 주목도 받게 되었다.

그때에 그는 다시 천성산(千聖山)에 들어가 공부를 계속하고저 할 때에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가리기 위하여 천성 산록에다 무쇠점(鐵店)을 설치하고 안으로 십여리나 떨어져 있는 천성산 적명굴(寂明窟)에 들어가 기도장(祈禱場)을 설치하기로 계획 하였으나 가세가 적빈하여 돈의 융통이 어려우므로 이리 생각 저리 생각하다가 조상의 향화탑(香火沓) 여섯마지기(六斗落)를 일곱 사람에게 넘겨 팔아 그 돈으로 목적하던 철물 가개를 내고 적명굴에 드어가 사십구일 공부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다.

그러나 일토양매도 법에 범하는 것인데 일토칠매까지 하였으니 그것이 어찌 문제가 되지 않을리가 만무하였다. 여러 사람들은 서로 싸우며 관청에 고소한다고 야단 법석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걱정을 하지 않고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본래 잘못이 내게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서로 싸울 필요도 없으며 내가 먼저 관청에 자변하여 그 처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하고 자기 손으로 고소장을 지어 일읍사람에게 한장씩 나눠주고 관청에 고소케 하였더니 관청에서는 먼저 산 사람에게 토지를 주라고 판결하고 그에 대하여는 아무런 처벌도 없었다.

그중에 땅을 샀던 늙은 노파가 그의 집에 와서 발악하며 욕설을 하고 돌아간 뒤에 별안간 폭사(暴死)를 하여 죽으니 그 노파의 아들 삼형제와 두 사위가 쫓아와서 또 발악 폭행을 하며 말하되

『우리의 모친이 당신 때문에 화가 나서 돌아가셨으니 원수를 갚겠다.』

고 하였다.

그러나 최수운은 조금도 겁을 내는 빛이 없고 태연히 대답하되

『너희들은 아무 걱정도 말어라. 내가 스스로 살릴 도리가 있은즉 아무 말도 말고 같이 집으로 가자.』

하고 그자들과 같이 그집으로 가서 여러 사람을 물리치고 그 죽은 노파의 시체를 어루만지니 불과 수시간 만에 그 노파는 입에서 피를 토하고 긴 숨을 한번 쉬고는 다시 살아 났다.

이 광경을 본 여러 사람들은 본래부터 최수운을 이인(異人)으로 생각하던 끝에 더우기 그를 놀랍고 이상하게 생각하여 모두 말하기를 조화(造化)있는 사람이라고 하고 혹은 「복수리」라고도 별명을 지으니 복수리라 함은 그가 이술(異術)로 변화가 무쌍하여 항상 수리가 되어 하늘로 날아 다닌다는 뜻이었다(보통은 복술이라고도 불렀는데 그는 복술쟁이처럼 무슨 일이나 잘 아는 까닭에 그리한 말이리라.)

이와같은 소문이 원근에 퍼져서 모든 사람들이 그를 만나 보려고 날마다 몇백 몇천명씩 찾아 갔었다.

그러다가 기미(己未) 시월에 가서는 그가 혼자 생각 하되

『내가 창생(蒼生)을 건질 도를 얻기 위하여 이십년 동안이나 각지를 돌아 다녔으며 또 수련과 기도를 열심으로 계속하였으나 아직 조그만 이적(異蹟)을 얻을 뿐이요, 광제창생(廣濟蒼生)의 큰 길을 찾지 못하였은즉 내가 선조의 유업을 탕패한 본의가 어디 있으며 집안일을 돌보지 않은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내 이제부터는 고향으로 돌아가 깊이 숨어 이 세상에 다시 나오지 않으리라.』

하고 가족을 데리고 다시 자기의 고향인 경주 가정리(慶州柯亭里)로 돌아와서 구미산(龜尾山) 밑 용담(龍潭) 위에 있는 정자에서 평생의 세월을 보내기로 작정을 하니 그 용담정은 원래 그의 부친이 소요(消遙)하던 정자로 기암괴석(奇岩怪石)과 임천(臨泉) 경치가 매우 좋은 곳이었다.

그는 용담에 돌아오는 그 이튿날부터 불출문외(不出門外)라는 네 글자와

道氣長存邪不入[도기장존사불입]
世間衆人不同歸[세간중인불동귀]

하는 한 구의 시를 써서 문위에 붙이니 그 뜻은

『이곳에서 큰 도를 깨닫지 못하면 다시 살아서 세상을 보지 않기로 맹서한다.』

라는 뜻이었으며 그때에 제선(濟宣)이라는 본 이름을 고치어서 제우(濟愚)라 하였으니 그 뜻은 이 세상의 미욱한 백성을 건지리라 하는 자신을 표시한 것이었다.

철종(哲宗) 십일년 경술(庚申) 사월 초오일이었다. (西紀一八六○年[서기 일팔육십년])

그날은 마침 그의 조카 되는 최맹륜(崔孟倫)의 생일날이므로 맹륜은 집에서 생일 잔치를 하게 되어 그를 청하였다.

그는 아무리 출입을 폐지하였지만 사정상 그것만은 거절하기 어려워서 억지로 지동(芝洞)에 있는 그 조카의 집으로 갔었다.

그러나 그날은 유달리 마음이 이상스러워지고 몸이 불편하여 그곳에 오래 있지 못하고 즉시 집으로 돌아오니 때는 사시(巳時 年前十一時[연전십일시])쯤 되었는데 마루에 올라서자 몸과 마음이 같이 떨리면서 병이라 하여도 무슨 병인지 알아 낼수가 없고 말로도 형언키 어려울 황홀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홀연히 공중으로부터 이상하게 무슨 웨치는 소리가 들리었다.

수운은 깜짝 놀라면서 공중을 향하여 본즉 사람도 귀신도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고 다만 말소리만 들리는데 분명히 하는 말이

『너는 두려워하지 말고 무서워하지 말라. 세상 사람이 나를 상제(上帝)라고 하여 모두 높여주고 정성스럽게 위하여 주는데 너는 어찌하여 상제를 모르느냐.』

고 들리었다.

수운은 다시 마음을 진정하고 정신을 수습한 뒤에 다시 하늘을 향하여 서로 말을 하게 되었다.


최『하느님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시렵니까』

상제『개벽 후 오만년에 내 또한 헛수고만 하고 아무 공을 이룬 것이 없으므로 너를 세상에 낳게 하여 이 법을 가르치게 하니 의심 말고 다시 의심하여 말어라.』

최『그러면 서도(西道)로 사람을 가르치오리까』

상제『아니다, 나에게 신령한 부적(靈符)이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仙藥)이라 하고 그 형상은 활(弓)도 같고 태극(太極)도 같으니 나의 명부를 받어서 사람들의 질병을 건지고 나의 주문(呪文)을 받어 사람을 가르치되 나와 같이 되게 하면 너도 또한 장생하여 덕을 천하에 펴리라.』

이렇게 서로 문답하는 말이 끊어지자마자 수운은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고 다만 무한한 허공에 찬란하고 휘황한 빛이 가득히 차서 뛰고 동하고 번쩍거리며 우주의 한끝과 한끝이 맞다은 듯하고 하늘과 땅의 뿌리가 서로 얽히어 온 천지 만물이 그밑층으로부터 낳다가 꺼지고 꺼졌다가 다시 나는 듯하였다.

수운은 그것이 참말 영부인줄 알고 눈을 들어 자세히 보려고 한즉 그 광채가 문득 없어져저 보이지 않으며 공중을 향하여 귀를 기울리고 그 말을 다시 들으려고 하여도 들리던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수운은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기운을 차려서 본즉 영부의 광채가 땅속까지 뚫고 온갖 물건을 속까지 잘 통하게 완연히 볼 수 있으며 다시 공중으로부터 말이 들리기 시작하되

『네가 백지(白紙)를 펴서 놓은 뒤에 이 영부를 받으라.』

하였다.

수운은 그의 말대로 백지를 펴서 놓고 그 위에 영부가 비치어 약동을 하는데 그 형상이 완연히 태극형과 같고 굽은 선(曲線)의 움직이는 모양이 완연히 궁을(弓乙)과 같었다.

수운은 그것이 너무 신기하여 그 아들을 불러다 놓고 보라고 한즉 그 아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또 그 부인을 불러다가 보아라 한즉 부인의 눈에도 또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온 집안 사람들은 그가 생일집 음식을 잘못 자시고 병이 나서 정신 없는 헛소리를 한다고 모두 실색을 하는데 공중으로부터 또 말이 들리어 왔다.

『영부란 것은 사람의 병을 건지고 사람의 죽은 혼을 구하여 산 혼으로 만들며 인간사회의 모든 죄악과 폐막을 다스리는 불사약(不死藥)이니 미욱한 인간이 어찌 그것을 알겠느냐, 네 손으로 종이 위에 그리어 불에 태워서 맑은 물에 타 먹어 보아라.』

최수운은 그의 말대로 백지 위에다 그 영부를 그려 불에 태워 먹어 본즉 아무 냄새도 없고 아무 맛도 없었다.

계속하여 수백장을 써서 먹어본즉 그제야 몸이 윤택하여지고 얼굴이 환형이 되고 그전 생각과 그전 마음이 구름같이 사라지고 새로운 정신이 샘물 같이 솟아나며 하늘과 땅의 뿌리가 보이는 듯하고 온갖 물건의 본성이 눈앞에 환하게 비치었다.

수운은 그것이 정말 선약인 줄 알고 그 뒤에 일반 세상 사람에게 시험하여 본즉 효험이 있는 사람도 있고 전혀 효험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한참 그 원인을 자세히 알아본즉 정성이 지극한 사람은 꼭꼭 맞되 정성을 쓰지 않는 사람은 모두가 효력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비로소 소위 영부라 하는 것은 사람의 정성과 공경에서 나온 것인 줄 알게 되고 또 사람의 산 혼은 정정과 공경으로 하늘의 덕을 잘 순종하는 데서 나온 것인 줄을 알게 되었다. 최수운은 이와 같이 경신년 사월 오일에 하늘의 감화를 받어 그해 구월 이십일까지는 마치 정신병자가 하늘을 치어다 보듯이 날마다 하늘의 말을 듣는다고 공중을 향하여 귀를 기울이고 있더니 그 뒤에는 마음을 수련하기 위하여 또 열하루 동안을 단식(斷食)하고 있던 중에 별안간 온몸이 떨리며 새 정신이 나며 마음에 새 생각이나서 누가 시키지도 않고 자기가 하고도 싶지 않은데 마치 무당의 푸념이 나오듯이 입으로 강화(降話)가 나오기 시작하여 먼저

시천주영아장생(侍天主令我長生)
무궁무궁만사지(無窮無窮萬事知)

라는 주문(呪文)이 나오고 그 뒤에는 또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
영세불망만사지(永世不忘萬事知)

란 스물 한자로 된 주문을 지어 그 다음해 신유년(辛酉年)부터는 포덕(布德 즉 포교)을 시작하여 먼저 그 부인부터 입교를 시키니 그 부인은 처음에 최수운이 그렇게 강화(降話)로 자문자답하는 것을 보고 무슨 이상이 생긴 것으로 생각하여 자기의 신세를 비관하고 서너차례나 용담수(龍潭水)에 빠져 죽으려고 하다가 최수운이 지성으로 권하는 바람에 그의 감화를 받아서 드디어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이제 그 동학의 대의를 간단히 말한다면

『그 도는 유불선(儒彿仙) 세 도가 합한 천도로 동학이라 함은 그가 동방에서 낳았으며 교(敎)도 동방에서 받았기 때문에 그 이름을 지은 것이니, 즉 그때 세상에 서학(西學=천주교)이 유행되었기 때문에 그것과 구별을 시키고 또는 그것과 대항하기 위하여 지은 이름이었다. 그리고 주의(主義)는 인내천(人乃天)이니 재래의 모든 종교들은 하늘을 다른 곳에 있다고 하였으나 특히 동학은 하늘이 다른 곳에 있지 않고 사람이 자기 몸에 모시고 있다는 의미요 목적은 보국안민(保國安民) 광제창생 포덕천하(廣濟蒼生 布德天下)요 또 인성(人性)은 무선무악(無善無惡)이라 하고 주문(呪文)을 읽는 것은 하늘에게 마음으로 맹세하는 것이요. 또 사람은 장생불사(長生不死)하되 죽어서 천당이나 지옥 또는 극락(極樂)세계로 가는 것이 아니라 지상천국(地上天國)인 이 세상에서 영존(永存) 영생(永生)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때 그의 집안 식구부터 포덕을 한 다음에 다시 그것을 널리 세상에 펼려고 그 수도하는 절차를 정하여 여러 사람에게 권하니 각처의 사람들이 그가 하도 신통하다는 말을 듣고 찾아와서 입교를 하는데 그중에는 부인도 있고 노인도 있고 어른 아이들 별별 사람이 다 있으며 입교를 하고 며칠만 도를 잘 닦으면 무식한 사람이 문장명필이 되어 시를 지으면 귀신이 곡할 지경이고 글씨를 쓰면 용사(龍蛇)가 비등하는 것 같으며 병자는 병이 즉시 낳으며 병신은 별안간 성한 사람이되며 또 최수운이 어디를 가며는 이상한 광채가 하늘까지 뻗치고 낙동강(洛東江)을 배도 안타고 그대로 건너 다니며 비가 오는 속에서 길을 걸어가도 비를 맞지 않으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신인(神人)이라고 하여 불과 몇달 동안에 교도가 수천 수만에 달하니 따라서 허무맹랑한 유언비어가 세상에 많이 돌고 관청에서 크게 주목을 하게 되었다.

그는 관청의 주목도 피하고 또 포덕도 겸하여 자기의 고향을 떠나 전라도(全羅道)로 가서 혹은 개인집으로 혹은 절간(寺)으로 돌아다니며 여러 가지 기적일화(奇蹟逸話)를 남기고 남원(南原)에 가서는 서공서(徐公瑞)라는 사람에게 포덕을 하고 그 사람의 주선으로 남원읍 서편 이십리 밖에 있는 보국사(輔國寺)란 절에 가서 한간방을 얻어서 은적암(隱寂庵)이라 이름을 짓고 숨어서 수도를 하니 고향의 제자들은 그의 종적도 알지 못하였다.

그는 그때에 그곳에서 검가(劍歌)란 노래를 지어 부르고 또 제자에게 가르치니 이 칼노래란 것은 천도교의 유명한 노래로서 노래도 좋거니와 거기에는 소위 조화란 것이 붙어서 그가 그 노래를 한번 부르면 공중에서 칼이 저절로 춤을 추어 일월(日月)을 희롱 하였는데 갑오동학란(甲午東學亂)때에도 소위 도통한 도인들은 평소 때 칼쓰는 법을 몰랐지만 그 노래를 부르면 검술이 자연 능하게 되어 관군(官軍)의 머리를 썩은 삼대같이 짤라 버린 일이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약 팔개월 동안이나 숨어 있다가 임술년(壬戌年) 삼월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니 여러 제자들이 여전히 모여들고 또 새로 입교하는 사람도 많았었다.

그때 경주읍에 사는 윤선달(尹先達)이라는 자는 그곳 영장(營將)에게 말하되

『최복술이란 사람이 이상한 술법을 써서 그 제자가 여러 만명이 되는데 만일 그 사람을 잡아 가둔다면 그 제자들이 필경 돈을 바치고 찾아 갈 터이니 돈 먹는데는 그만한 방법이 없다.』

하니 영장은 돈이 생긴다는 바람에 당장에 욕심이 생겨서 바로 장교를 보내어 그를 잡아오게 하니 때는 바로 구월 이십구일이었다.

그는 장교에게 잡혀서 경주읍으로 들어가니 서편 하늘에 이상한 서기(瑞氣)가 벋어 서천(西川)에서 빨래하던 여자들이 모두 놀라며 일어나 그를 바라보며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그는 영문으로 들어가니 영장은 묻되

『네가 일개 서생으로 무슨 방술이 있어서 제자를 여러 만명씩 두었느냐.』

하니 그는 태연히 서서 정색을 하고 대답하되

『나는 다른 술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동학이란 천도로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니 무엇이 잘못이냐.』

하고 눈을 쏘아서 영장을 바라보니 영장이 그의 눈 광채에 정신이 저리고 또 위의가 비범하며 언사가 정중한데 감동되어 감히 다른 말을 못하고 즉시 석방을 하니 그때 잠깐 사이에 영문밖에 와서 기다리고 있는 제자가 칠백명이나 되어 유선달이란 자는 겁을 먹고 도망질을 하고 영장은 친히 그의 주소에 찾어와서 사과를 하였다. 그리고 그날 밤에는 경주부윤 김모의 처가 별안간 졸도하여 인사불성(人事不省)하게되니 부윤이 그가 병을 잘 고친다는 말을 듣고 예리(禮吏)를 보내어 진찰하여 주기를 청하니 선생은 한참 동안 잠자코 있다가 말하되

『지금 병이 벌써 다 나아가고 있으니 염려 말고 댁으로 돌아 가십시요.』

하였다.

예리는 그의 말이 너무 허무한 것 같아서 반신반의하면서 가서 보니 과연 부윤의 처는 벌써 병이 다 낳아서 아무렇치도 않았다.

그 뒤부터는 관청사람까지도 그를 신인이라고 이름을 부르지 않고 최선생이라고 하였다.

그 다음해 계해(癸亥)년에는 그는 또 강화(降話)로 시(詩)를 지어 은근히 그의 수제자인 최해월(首弟子 崔海月)에게 도통을 전할 것을 암시하고 또 접주제도(接主制度)를 마련하여 최경상(崔慶翔)으로 북접수(北接主)를 삼아 도중의 일체 사무를 맡기니 그것은 그가 오래지 않어 당시 정부(政府)에 해를 당할 것을 미리 알고 동학의 장래 일을 예측함이었다.

철종 십사년 계해(哲宗十四年=西紀一八六三年[서기일팔육삼년]) 시월이었다.

하루는 최수운이 여러 제자들을 불러놓고 초연한 안색으로 말을 하되

『내가 며칠 전날 밤에 우연히 꿈을 꾼즉 태양(太陽)에서 무지개 같은 이상한 살기(殺氣)가 내뻗더니 그것이 내 왼편 다리에 와서 비치는 데 그 형상이 마치 사람인자 형(人字形)과 같더니 잠을 깨어 본즉 그 광선이 비치던 자리에 이상하게도 붉은 흔적이 생겨서 지금 사흘째가 되어도 없어지지 않으니 그것은 반드시 길조가 아니라 내가 미구(未久)에 필경 무슨 화(禍)를 입을지도 알 수 없으니 제군은 그것을 짐작하고 무슨 일이나 앞일에 대하여 잘 주의하라.』

하니 여러 제자들이 그의 말을 듣고 모두 죄송스럽게 여기며 아무 말도 못하고 잠자코만 있었다.

그날 마침 제자 한 사람이 경기 땅에서부터 와서 급히 말하되

『소문을 들은즉 지금 조정에서 우리 선생님을 이단자(異端者)로 몰아서 체포령(逮捕令)이 내렸다 하오니 선생님께서는 급히 몸을 피하시고 화를 면하도록 하십시오.』

하고 말씀을 올렸다.

그러나 수운은 조금도 겁을 내는 기색이 없이 태연히 대답하되

『우리의 도(道)가 원래 나에게서 나온 것인즉 내 자신이 마땅히 그 일을 당할 것이지 어찌 구구하게 몸을 피하여 제군에게 해를 끼치겠느냐.』

하였다.

그때 여러 제자들 중에 강수(姜洙)란 사람이 다시 말하되

『전날에 선생께서 은적암(隱寂庵)으로 피신하신 것도 또한 일시적으로 몸을 피하기 위하여 나오신 것인즉 지금도 그때와 같이 몸을 피하시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하였다.

최수운은 또 말하되

『그때와 지금은 형편이 다른 것이다. 그대로 말하면 여러 제자들이 아직 우리의 도가 무엇인지 잘 모를 뿐 아니라 우리 도의 후계자를 얻지 못한 까닭에 내가 구구하나마 일시적으로 피신을 하였지만 지금은 여러 제자들이 모두 도를 깨닫게 되고 또 후계자를 이미 해월(海月)로 정하였으니 내가 무엇을 꺼릴 것이 있어서 피신을 할려고 하겠느냐.』

하고 태연한 안색으로 이미 결심한 바가 있는 것을 나타내니 그의 제자들도 다시 말을 못하였다.

그해 십이월 구일 아침이었다.

최해월(崔海月)이 그의 집으로 찾어와서 말하되

『금년에는 특별히 선생님을 모시고 환세(換歲)를 하고 싶어 왔읍니다.』

고 하였다.

수운은 그의 말을 듣고 놀라며 말하되

『내가 그대에게 특별히 부탁할 말이 있어서 할려고 하던 차에 왔으니 마침 잘 왔네.』

하고 이어서 말하되

『그대는 이 시간으로부터 곧 우리 집을 떠나되 다시는 우리 문전에 한발자취도 들여놓지 말게, 그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전달하여 주게.』

하면서 간곡히 부탁하였다.

최해월은 그것이 무슨 까닭인지를 알지 못하여 한참 주저하고 있었더니 수운은 또 재촉하여 말하되

『어서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바로 이 시간에 우리 집을 떠나가고 다시는 오지를 말어주게. 만사가 다 천명이니 조금도 어기지 말고 속히 가게.』

하였다.

해월은 할 수 없이 그에게 인사를 하고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바로 그날 밤 그는 여러 사람을 모두 저리 가 있어라 해 놓고 방안을 정결하게 치운 다음에 촛불을 밝히고 정숙히 혼자 앉아서 밤을 밝히며 특별히 친한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듯이 있더니 밤중 오경(五更)이나 되어 서울에서 온 포졸 오륙십명이 풍우같이 달려 들어 그가 있는 용담정을 철통과 같이 에워 쌓고 선전관 정구룡(宣傳官鄭龜龍)이 앞장을 서서 어명(御命)으로 잡으러 왔다는 령(令)을 내리고 즉시 최수운을 재촉하여 행장을 수습하여 가지고 길을 떠나게 하니 당대 조화군이니 신인이니 하고 여러 사람에게 천신(天神)같이 존경을 받던 최수운도 할 수 없이 잡혀가는 죄인의 몸이 되어 그가 평생 살고 있던 용담정의 산수를 등지고 서울로 향하여 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이미 각오한 일이라 아무런 기색도 없이 태연하게 갔지만 그의 가족과 친한 동리 사람들은 선생도 모르는 중에 비참한 눈물을 흘리지 아니치 못하였다.

그는 나졸에게 호위되어 영천(永川)땅까지 이르니 원래 행악무쌍한 나졸들은 그에게 여러 가지 행패를 하며 혹은 주채(소위 차사례채 ─ 差使例債)도 청하고 혹은 불경한 언사도 하니 그의 타고 가던 말발굽이 땅에 딱 붙어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선전관 이하 일반 나졸들은 그 광경을 보고 크게 놀라면서 선생에게 사과를 하며 용서하여 달라고 하니 그제야 땅에 붙었던 말굽이 떨어져서 가기를 시작하고 그 뒤부터는 불경한 언사는 고사하고 그의 앞에서 감히 담배도 못 먹었으며 선생님 선생님 하고 허리를 굽혔다.

그때 선전관 일행은 중도에서 수운의 제자들이 수운을 빼앗어 갈가 봐 염려하고 감히 삼남대로인 샛재(鳥嶺)로 넘어오지 못하고 남모르는 샛길을 쫓아 충청도 보은(忠淸道報恩)을 거쳐 밤낮으로 경기도 과천(京畿道果川)까지 오니 과천은 서울에서 겨우 삼십리 밖에 안될 뿐만 아니라 그 근처에는 동학의 교도가 없으므로 아주 안심하고 한편으로는 자기네가 성공한 것을 축하할 겸 또는 자기네가 여러 날 피곤한 것을 쉬일 겸 하여 사흘 동안이나 그곳에서 머무르며 소를 잡는다 도야지를 잡는다 하며 술을 마음대로 마시며 질탕 놀았다.

사흘째 되는 날 최수운은 문밖에 나와서 북쪽을 향하여 크게 절을 세 번 하며 통곡하니 선전관의 일행이 그 까닭을 알지 못하여 선생님께 물었더니 그는 아무 대답이 없이 한참 있다가 간단한 말로

『조금만 기다려 보아라.』

하였더니 과연 그날 저녁 때가 되어 서울로부터 선전관 한 사람이 달려와서 정구룡에게 영을 전하되

『금상(哲宗)께서 승하하셨으니 동학 괴수 최제우는 서울로 잡아오지 말고 대구 감옥(大邱監獄)으로 이수(移囚)시켜라.』

하였다.

정구룡은 선생에게 먼저 그 사실을 알아낸 것을 칭찬 하였으며, 나졸들도 모두 말하기를 과연 신인이라 하고 더욱 감탄하며 대구로 호송하게 되었다.

그의 일행이 조령(鳥嶺)에 이르니 그때 그의 제자 수천 명이 그 소식을 듣고 산위에 결진하여 선전관 일행을 단숨에 박멸하고 선생을 구해 내려고 계획하였다.

선전관 일행은 그 사실을 알고 모두 겁이 나서 수운을 그대로 보내고 도망을 치려고 하니 수운은 도리어 선전관 일행을 만류하고 위안시키며 또 여러 제자들에게 명령하되

『나의 이 길은 벌써 하느님이 시킨 것이니 제군은 부디 안심하고 다른 생각은 꿈에도 두지 말고 다 집으로 돌아가라.』

하니 그의 제자들은 할 수 없이 그냥 길가에 무릎을 꿇고 앉어서 눈물로써 선생을 이별하였다.

최수운은 선전관에게 호송되어 갑자년 정월(甲子年正月) 육일에 대구(大邱) 감영에 도착하였다.

그때 대구 감사는 서헌순(徐憲淳)이라 하는 사람인데 이 최수운은 특히 어명죄인(御命罪人)인 중대 범인인 까닭에 그를 취급하는데 여간한 고심을 하지 않았다.

그 뒤에 공판이 열리었다.

대구감사 서헌순은 수석재판장이 되고 상주목사 조용화(尙州牧使 趙永和), 지례현감 정기화(知禮縣監 鄭箕和), 산청현감 이근재(山淸縣監 李根在) 등이 배석이 된 후 명사관(明査官)을 시켜서 죄상(罪狀) 심문을 하게 되었다.

정각(正刻) 전에 죄수로 잡혀온 최수운은 항쇄(項鎻) 족쇄(足鎻) 오사실 수갑 등 가진 악형구에 몸이 구속되어 출두하고 소위 법정에는 형틀 곤장 무푸레 옷나무 등으로 만든 볼기채며 육모방맹이 달근질 하는 무쇠꼬챙이 등 별별 형구가 다 벌려있고, 옥사장 형방사령 군로 장교 등의 무리가 몇십명씩 느러서서

『예이 ─ 죄인 잡아 대령 하였소!』

하고 긴대답 소리를 하며 그야말로 염라국의 지옥 이상으로 무시 무시하였다.

얼마 아니되어 여러 관헌들이 나와서 좌정(坐定)하고 감사 서현순이 직접으로 심문을 시작하였다.


서『죄수의 성명은 최제우고 자호는 수운이라니 분명하냐.』

최『녜 그렀읍니다.』

서『본적과 주소는 어디며 나이는 몇 살인고.』

최『원적은 경주군 가정리요, 주소는 같사오며, 나이는 갑신생(甲申生)인데, 금년 마흔한 살이올시다.』

서『가족은 누구누구 있노.』

최『부모님은 일찌기 돌아가시고 처(妻) 박씨와 아들 하나와 수양딸 하나가 있읍니다.』

서『동학은 언제부터 하고 누구한테서 배웠는고.』

최『동학을 처음으로 득도 하기는 경신년 사월 오일옵고 받기는 하느님에게 직접 받았읍니다.』

서『(소리를 좀 높이며) 하느님이라니 하늘이 어디 있단 말이냐』

최『하늘이 어디 있어요, 내 몸에 모셨지요.』

서『네 미친 소리를 다 하는구나. 하늘을 네 몸에 모시다니』

최『(웃으면서) 내가 왜 미첬읍니까, 그것을 모르는 세상 사람이 미첬지요.』

서『너는 그런 이단(異端)의 도(道)를 가지고 애매한 사람들을 이끌고 이 나라의 백성들을 꼬여서 어지럽게 하니 장차 무슨 일을 할 작정이냐』

최『(이때 정색을 하고 소리를 높이며) 나는 천도(天道)로 사람을 가르쳐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리고 기울러져가는 나라를 돕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 도가 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은 전혀 천명으로 나온 것이지 결코 나 개인 의사로 나온 것은 아니며 또 나의 교화는 천성에서 나온 것이지 절대로 인위로 조작한 것은 아닙니다.』

서『너의 도야 천명으로 그리 되었든지 인위로 그리 되었든지 하여간 국법을 범한 것은 사실이니, 지금이라도 그것을 다 버리고 다시 회개하여 그냥 가만이 글 공부나 하거나 농사를 짓는다면 죄를 다소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니 너의 생각이 어떠하냐?』

최『(소리를 더 높이어) 아니요, 아니요, 그런 마음은 결코 없사옵니다. 나는 본래에 이 육신(肉身)을 도에다 다 바쳐서 덕을 후천 오만년까지 전할려고 결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일로 죽는 것도 역시 천명인즉 여러 말을 더 물을 것이 없이 당신의 마음대로 또는 법지 법대로 속히 처벌하여 주시오.』

서헌순은 그가 절대로 굴복할 뜻이 없는 것을 알고 다시 하옥시켰다가 그 뒤에 여러 가지 말로 달래도 보고 혹은 유혹도하여 도합 이십 일회를 심문하였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의 의사를 조금도 변치 않고 회개의 빛이 없었다.

서헌순도 처음에는 그의 인물이 잘난 것과 언어 행동이 보다 특의한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어 될수 있는대로 관대한 처분을 내리려고 하였더니 그가 그렇게 강경하게 나아가고 보니 그도 그만 도리어 노여움이 나서 그 시대의 관리의 근성을 여실히 폭로하여 그제부터는 형리에게 명하여 수운을 형틀에 올려매고 맹장질을 하게 되었다.

불과 서너 번 매질을 치니 별안간 벽력같은 소리가 나며 마치 지진하듯이 관사 집이 울리고 형틀이 너머지며 형장사령이 놀라 엎어지며 혼도를 하니 원래부터 최수운을 이인으로 생각하던 감사 이하 여러 관헌들은 놀라서 혼비백산하여 그만 그 형을 중지시키고 도로 하옥 시켰다.

그런데 더욱 신기한 것은 그를 다시 하옥 시킬 때 몸을 검사하여 본즉 형장(刑杖) 맞은 경골(脛骨)이 아주 부러져서 걸어가지를 못하고 형리가 업고 가더니 아침에 본즉 아주 부러졌던 경골이 아무렇지도 않고 신색은 전보다 더 좋아졌었다.

그리하여 감사도 그 사건을 처결(處決)하기가 어려우므로 그를 그냥 옥에만 가두어 두고 사실대로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때의 최해월은 그의 선생이 대구에 이수(移囚)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변장을 하고 옥사장의 집을 찾아가서 돈으로 매수하고 의형제를 맺은 뒤에 수운 선생을 만나뵈려고 옥사장의 계책대로 변장을 하고 밤을 타서 밥상을 손에 들고 옥중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두분 사제간의 최종의 면회였다.

보통 사람 같으면 물론 반가워하기도 하고 무슨 이야기라도 하였겠지만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담뱃대 한개를 주며 급히 돌아가라는 눈치를 보였다.

해월선생은 옥에서 나오는 즉시에 그 담뱃대를 깨뜨리고 보니 그 속에는 종이로 비빈 심지가 있고 그 심지에는 등명수상무혐격(灯明水上無嫌隙) 주사고형력유여(柱似枯形力有餘)란 시 한구와 또 나는 순수천명 할터이니 너는 고비원주(高飛遠走)하라는 말이었다.

다시 뒤의 시구의 뜻을 말한다면 등명수상무혐극(灯明水上無嫌隙)은 물 위에 등불이 밝으면 아무 가림이 없이 서로 환히 비친다는 뜻이니 곧 내 마음과 네 마음이 같다는 의미요, 주사고형력유여(柱似枯形力有餘)는 기둥이 비록 마른 것 같어도 힘은 넉넉하다는 뜻이니 곧 내가 비록 죽더라도 영(靈)의 힘이 있어서 천도를 잘 지지하겠다는 의미요, 고비원주(高飛遠走)는 해월더러 멀리 피해 가라는 뜻이었다.

그 글을 본 해월은 정으로는 차마 그곳을 떠나 갈수 없으나 천도교의 모든 일과 또는 선생님의 명교(明敎)가 소중한 것을 생각하고 그 길로 바로 피신하여 태백산(太白山)으로 들어갔었다.

이월 이십 구일이었다.

서울에서 조령이 나리되

『최수운을 즉시 참형에 처하라.』

하니 대구 감사 서헌순은 그 조령을 받고 갑자 삼월 초열흘날을 택하여 최수운을 대구장대(大邱將台)로 끌어 내서 참형을 집행하니 처음에 형졸이 그의 목을 베이려고 여러번 사납고 매섭게 시퍼런 칼로 내려쳤으나 조금도 칼의 흔적은 나타나지 아니 하니 감사 이하 모든 관속들이 대경실색(大驚失色)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윽고 최수운은 형졸에게

『정수(淨水) 한 그릇을 가저 오너라.』

하고 그 정수를 향하여 한참 동안 무엇을 묵도하더니 태연히 형졸에 향하여 말하되

『이제는 아무 일도 없을 터이니 안심하고 내 목을 베어라.』

하고 또 마지막으로 감사 서헌순에게 말하되

『감사가 오늘 비록 나를 죽이나 당신의 손자(孫子) 대에 가서는 우리 도를 배반하고는 잘 살 수 없을 터이니 그리 알라.』

하며 종용(從容)하게 형을 받으니, 슬프다, 당대 신인(神人)이요, 장래 오만년 동안 장생불사(長生不死) 한다 하며 만인간의 경모(敬慕)를 받던 최수운도 무궁한 도의 무궁한 한을 품고 사십일세(四十一歲)를 일기로 사나운 칼 아래 이슬이 되고 말었다.

그는 인물이 남보다 특이하니만치 돌아갈 때에도 이적(異蹟)이 많았으니 즉 그날은 아침부터 온화하고 맑은 날씨가 별안간 변하여 광풍이 크게 일어나고 뇌우(雷雨)가 폭주하여 참형을 할 때에는 동남으로 오색의 무지개가 한참동안 뻗쳐서 일반이 모두 이상히 여겼다.

그리고 그가 돌아 갈때에 감사에게 하던 말은 이상하게도 맞아서 그 손자 서병훈(徐丙勳)씨 대에 와서 천도교가 크게 왕성하고 여러 사업을 하던 중 서씨는 특히 천도교에 입교(入敎)를 하고 또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모여 학교에서 교원생활을 하며 그 교회의 돈으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서헌순은 그뒤 자손에게 유언하기를 천도교는 보통의 교가 아니며 최수운은 국법에 어찌 할 수 없어 자기 손으로 참형을 하였으나 천하에 신기하고 도통한 사람인즉 우리 자손은 부디 천도교를 배척하지 말라고 하였다 한다.

최수운이 돌아간 후 삼일만에 그의 제자 중 김경필(金敬弼) 김경숙(金敬淑) 정용서(鄭龍瑞) 곽덕원(郭德元)등은 그의 시체를 거두어 가지고 자인현서후연점(慈仁縣西後淵店)에 이르니 그때까지도 그의 시체는 아직도 혈기가 있고 몸과 머리가 붙은 곳에 홍백의 선(線)이 있으므로 그들은 그가 행여나 다시 회생할가 하고 그의 시체를 안고 사흘 동안이나 기다리고 있었더니 사흘째 되는날 아침에 채색 무지개가 연못가에서 일어나며 이상한 구름이 떠돌더니 한참 있다가 그것이 모두 없어지고 시체에서 또한 시즙(屍汁)이 나오기 시작하니 그들도 아주 낙망을 하고 울음 소리도 못내고 밤중에 그의 시체를 운반하여 그의 고향인 구미산(龜尾山)밑 용담 앞산에 장사 지냈다.

나는 몇해 전에 대구에 갔다가 봉산동(鳳山洞)에 있는 그의 참형당하던 장대(將台)의 옛터를 순례하고 감회가 나서 한시(漢詩)를 두 수(二首) 지었다. 시는 비록 변변치 못하나마 기념 삼아 이 끝에 기록한다.

과대구장대(過大邱將台)

대구 장대는 대구부 남쪽 봉산동 대로변에 있으니, 전에 형을 집행하던 자리다. 그옛날 철종 갑자년 삼월에 동학 제일세 최수운 선생이 여기서 순교하셨다. 늙은이들이 말하기를 그때 한줄기 무지개가 동쪽으로 뻗쳤다 한다.

그 땅은 지금 천도교 소유가 되어 있다.(大邱將台 在府南鳳山洞大路邊) 前日行刑處也往在哲宗甲子三月東學第一世先生崔水雲殉敎於此父老云其時有一文彩虹起于東邊基地今爲天道敎所有)

포산일락모운횡(苞山日落暮雲橫)
한망장대일로평(恨望將台一路平)
수식선소당일혈(誰識先所當日血)
화위감로욕창생(化爲甘露浴蒼生)
야로유전갑자년(野老猶傳甲子年)
채홍백척기동변(彩虹百尺起東邊)
금래일편장대지(今來一片將台地)
편입선생우로천(便入先生雨路天)
포산(대구 남쪽)에 해가 지고 검은 구름 떠도는데
장대를 바라보니 한길만 편하구나
그날에 흐른 피 단 이슬로 변하여서
여러 창생 살려 줄줄 그 누가 알었느냐
촌간(村間) 늙은이 아직까지 갑자년 이야기 하되
백자 되는 무지개가 동편에 뻗쳤다 하네
옛날의 그 장대 지금에 변천되어
선생의 은덕 속에 들어와 있게 되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