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야담 사화 전집 (차상찬)/비련의 화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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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련(悲戀)의 화석상(化石像)
이 중 한번 돌보시면
연화대로 가시리다
나무아미 타 ─ 불
관세음보살 남 ─ 남 ─ 남

석양(夕陽)때에 장백산(長白山)으로부터 쇠막대기를 끌고 중(僧) 하나가 내려오다가 장자부(張子富)의 집 앞마당에 이르자 목탁소리를 딱딱 내면서 염불을 외운다.

고깔 쓰고 장삼 입은 청초한 그 모양과, 제비가 하늘에서 우는 듯한 낭낭한 그 목소리와, 백팔염주(百八念珠)를 달그락 달그락 헤아리는 그 모양이 마치 선간(仙間)에서 내려온 것 같다.

해는 어느새 산 마루턱을 넘기 시작하여 원근산천(遠近山川)에는 어둠과 밝음이 서로 끼어있고 바다에서도 저녁 갈매기 물장구 치며 나는 소리가 완연히 들린다.

중은 마당 위에 뻗친 제 그림자를 물끄러미 보다가 갈 길이 바쁜지 다시 목탁을 치며 나무아미타불을 부른다.

그러나 소리만은 법당(法堂)에서 쇠북종을 둥둥 울리며 팔만 대장경을 외우듯 몹시 가라 앉고 위엄(威嚴)있게 들렸다.

보사이다 서역정토(西域淨土)외에
백년가는 것 있사오리까
나무아미 타 ─ 불
관세음보살 남 ─ 남 ─ 남

그러나 문전에서 이렇게 열렬히 도승(道僧)은 한줌의 보시(布施)를 구하였지마는 임자가 없는 청산(靑山)에 학(鶴)과 두루미가 우는 것 같이 안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도승은 기가 막힌 듯이 하늘만 멍하니 쳐다 보았다.

은하수(銀河水)가에는 자주빛 구름이 연화대(蓮花臺)에 핀 연꽃송이 같이 옹기 종기 피어 하계(下界)를 내려다 보고 있다.

그는 가사(架裟) 자락을 치어들어 두어 마디 묵념(默念) 하는 듯하더니 다시 막대로 땅을 치면서 입속으로 나무아미 타 ─ 불을 천번이고 만번이고 외운다.

실상 그의 입으로 벌써 몇만 마디 몇십만 마디의 염불이 불러져 팔억 팔천(八億八千)의 중생(衆生)을 건지기에 애를 썼을 것이요, 또 닳고 또 닳은 쇠막대의 끝을 보아도 얼마나 도(道)를 닦으러 천하를 돌아 다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두 번째 염불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장자부(張子富)의 집안은 쥐죽은듯이 고요하다.

원래 장의 집안으로 말하면 우리나라에서 수진방골 변진사(邊進士)와 서로 어깨를 겨눌 만큼 백만장자(百萬長者)로 세상에 둘도 없는 큰 부자로 유명하였다.

그 끝을 모를 정도로 넓고 넓은 벌판이 마치 경복궁(景福宮)터를 닦듯이 십리도 넘게 터전을 닦고서 그 위에다 청기와와 빨간 단청(丹靑)으로 여러 백간 되는 고대광실(高臺廣室)을 짓고 좌우에는 열두 창고(倉庫)를 호화스럽게 지어 놓았다.

그 열두 창고라 함은 첫째가 금을 넣는 창고, 둘째가 은 넣은 창고, 그 다음이 명주와 비단을 넣은 창고, 대추 배 감 귤 앵도등을 넣는 과일 창고, 인삼 녹용 도라지 등을 넣는 보약 창고, 오곡(五穀) 창고, 육축(六畜) 창고 등 나랏님이 계신 궁궐보다 더 웅성웅성하게 차리어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자부의 소문난 이름은 그 집이 용궁(龍宮)같이 찬란한 점보다 가진 악독한 짓을 하여 빼앗다시피한 돈이지만 구두쇠로 더 유명하였다.

날마다 곳(庫)간에서는 엽전(葉錢)이 썩어 나고 곡식에도 좀이 나서 두엄밖에 쓸 것이 없게 되었건만 굶어죽는 동리 사람에게는 쌀 한되 빌려주지 않았고 천리 옥토(千里沃土)가 묵어 나지마는 한 고랑의 땅도 남에게 주지 않았다.

단오나 한가위 같은 큰 명절에도 소와 도야지를 잡고 떡을 여러섬 장만 하였어도 동리 집에 인심(人心) 한번 쓰는 일이 없었다.

여북해서 정월 대보름날 밤 함경도(咸鏡道) 색시들이 달 밟으러 그 앞을 지내다가 너무도 괘씸하기에 명태(明太) 꼬리 한개를 담장 넘어로 집어 뿌렸더니 마침 장자부(張子富)가 보고 네 것은 네가 먹고 내 것은 내가 먹는다고 도로 집어서 내어 던지므로 색시들은 기가 막혀서 일제히 그 집에 가마를 타고 안 들어가기로 일종의 혼인을 거부하는 모임을 가진 일까지 있었다. 이렇게 인색한 집인 줄 알고 찾아온 것인지 그저 높다란 다락을 보고 찾아온 것인지는 모르나 주인은 본체 만체 하고 도승은 한줌의 정재(淨財)를 구하려고 애를 쓰니 일은 대단히 딱하게 되었다.

벌써 밤은 깊어 가서 담장위에 복숭아 꽃이 머리를 숙였다.

중은 마침내 세 번째 네 번째의 염불을 외었다.

그때 돌연히 선화당(宣化堂) 같은 조용한 그 집안으로부터 쌍바라지 문이 활짝 열리더니 흰곰 같은 살기(殺氣)를 띈 주인인 장자부(張子富)가 우뚝 나섰다.

『웬 도사가 하루 송아지 같이 어디라고 뛰어드는가, 이 땅에 살면서 내 집을 모르는가, 연화대고 부처님이고 어서 가지고 가.』

『모든 중생(衆生)은 울고 있는지라 깨끗한 정재(淨財) 한 푼 비나이다.』

중의 말소리는 온화하면서도 늠름(凜凜) 하였다.

그는 다시

『지난번 비에 법당(法堂)이 무너졌기 때문에 중수(重修) 하려고 인연이 있는 팔억 팔천(八億八千)의 중생(衆生)의 가슴을 이렇게 샅샅히 찾아 다니나이다. 한줌의 쌀 한푼의 돈을 보시(布施)해 주시오면 귀댁(貴宅)의 영화(榮華)가 만년을 가오리다. 실상 듣자오니 창고에는 금은보화가 썩어 난다는데 한줌의 재미(齋米)는 한 바다의 물한 방울에 넘사오리까 나무아미 타─ 불 나무아미 타 ─ 불』

『하하하 쌀이 썩으면 쥐를 먹이지 별 상관 다하네.』

하며 중 앞에 가래 침을 탁 배앝는다.

중은 결연(決然)히 장자부를 본다. 그 눈은 불빛같이 광채가 있다. 꼭 다문 입술이나 잘도 뻗어난 콧마루나 속세(俗世)에서는 보기에도 드믄 기품있는 얼굴이며 또 노승(老僧)인 줄 알았더니 이십 남짓한 청년 도승이었다.

그러나 중은 대장경(大藏經)서 용서(容恕) 두 자를 찾은 듯이 다시 머리를 숙이고

『저의 절간으로 말하면 장백산(張白山) 마루 턱에 있는 태백사(太白寺)이온데 처음에 인심 어진 물지겟군이 물을 팔아서 모은 돈을 우물에 넣어 모은 것이 열두 해 만에 엽전(葉錢)이 우물에 가득 찼기 때문에 이제는 부처님께 바치어 인간을 건져 보겠다고 그 자리에 법당을 지은 것이오니 일천년을 내려 오다가 오늘날 관세음 앞에 향화(香火)를 끊게 되었으니 중생제도(衆生濟度)하는 넓으신 뜻만 바라 나이다.』

『허 가라니까, 고 ─ 이한 땅개 중이로군.』

하면서 분이 난 모양으로 마당에 있는 소똥을 가래로 쳐서 중의 동냥 전대에 넣어 주었다.

도승은 그제야 분연(奮然)히

『천벌(天罰)을 받을 지어다. 그대 하나가 있기 때문에 함경도엔 인촌(人村)이 절반은 줄었도다. 빼앗은 것은 도루 주고 속혀 먹은 것은 도루 내다 주지 않으면 열두 창고에 피가 차리라.』

장자부는 그 입을 똥가래로 막으며 그냥 쫓아 대문 밖에 내보내었다.

중은 두팔을 들어 무슨 주문(呪文)을 외우더니 돌아섰다.

그 앞은 바로 연못이라 도승은 절간으로 돌아가느라고 쪽배에 올라 노를 저으려고 할 때 젊은 여자가 황망히 뒤에 따라 오며

『대사(大師)님, 용서합소서. 저의 아버지 죄는 세상에 둘도 없을 터이오나 자비(慈悲)로 용서하옵소서. 이것은 제가 방아를 찧을 때마다 모아둔 성미(誠米)이오니 반드시 하루 아침의 재미(齋米)로 써 주옵소서.』

그러면서 보얗게 쓸은 한 되 쌀을 내어 놓았다.

중은 그 지성이 넘치는 말에 감격이 되어 색시를 치어다 보았다.

정말 키만 조금만 적었으면 강가에 핀 한떨기 꽃이라 할 수 있을만큼 어여쁘기가 한이 없었다.

수집어서 치마 자락을 뜯는 모양이 백두산 천지 속에서 선녀가 뛰어 나온 것 같이 아름다웠다.

중은 황홀하여 어쩔 줄 모르다가 색시 앞에 수없이 합장(合掌)하고 정미(精米)를 받은 뒤에 그 곳을 떠났다.

색시도 배가 안 보일 때까지 그 뒷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강 위에 떨어진 달은 더욱 밝았다.

그 이튿날도 젊은 중은 장자부(張子富)의 집안을 찾았다.

또 그 이튿날도 또 이튿날도 그럴 때마다 똥가래로 쫓기고 쫓기면 호숫(湖水)가에 와서 그 딸 되는 낭자(娘子)에게 성미(誠米)를 받아 가지고 절로 돌아 갔다.

그러나 아무리 깊은 산중에 들어 앉아 불도(佛道)만 닦는 중이라 할지라도 그도 사람이라 어느 사이에 나비 같은 그 색시에게 연모(戀慕)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전에는 절을 중수할 보시를 받으러 인가(人家)로 내려 왔건마는 동냥전대를 채우는 것보다 장자부의 딸을 만나 보는 것이 더 긴요한 일이 되었다.

부처님을 속이고 젊은 색시와 만나는 일 ─ 어찌 두렵지 않은 일이랴. 이럭 저럭 열흘 후에 또 만나게 되었다.

그날도 뱃전에서 성미(誠米)를 받을 때 그만 타는 가슴에 쌀을 주는 색시의 두 손까지 꼭 쥐고

『낭자(娘子)여 ─.』

하고 애끓는 듯이 불렀다.

불리우는 이나 불르는 이나 처음 건너보는 말이라 얼굴은 주홍(朱紅) 빛이 되고 가슴은 콩이 튀듯 하였다.

중은 사르르 어여쁘고 가냘픈 색시의 손을 다시 한번 꼭 쥐고

『낭자(娘子)여! 낭자(娘子)여!』

하고 곧 돌려 불렀다. 그 밖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두 청춘이 탈대로 타려 할 때 갑자기 청년 중은 무엇을 깨달은 듯이 껴안으려고 하던 두 손을 홱 집어 뿌리치고 「앗」하면서 달려 나와서 급히 배를 저어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그 중은 수도승(修道僧)이었다.

십년을 작정하고 태백사(太白寺)에 입산한 뒤 혹은 마을에 내려가서 동냥을 빌고 혹은 초암(草菴)에 파묻혀서 대장경 불서(佛書)를 읽고 혹은 법당에 이르러 재수(齋水)도 올리고 하여 九[구]년 동안을 순진하고 착실하게 지낸 뒤 이제 백 날 밖에 남지 아니하여 백 날만 지나면 그는 성불(成佛)이 되듯이 입도(立道)하는 것이다.

귀중한 목적을 깨닫고서 한낱 처자(處子) 때문에 그르칠가 하여 십년공부 나무아미 타 ─ 불을 면하고저 이와 같이 갑자기 뿌리치고 도망친 것이었다.

그때부터는 다시 젊은 중의 그림자는 장의 집 문간에 나타나지 않았다.

처녀는 애끓는 듯이 슬퍼했다. 마치 달속에 누가 심은 모양으로 계수나무가 나서 자라서 꽃이 피고 지듯이 이팔(二八)의 젊은 인생의 가슴에도 사랑의 꽃이 염통(心臟[심장])에 피어나서 자라서 벌써 꽃이 피려고 하는 것이었다. 색시는 그때부터 울기만 하였다.

혹은 애욕(愛慾)에 못이겨 뱃전에 나와서 꽃 두 송이를 얽매어 물에 띄워 보기도 하고 참대를 꺾어 그 속에 조그맣게 그 중에게 편지를 써서 호수에 띄우기도 하였다.

꽃은 흐르는 물결에 갈아 앉으면 만나리라 하는 애처러운 희망에서 나온 것이요, 참대는 행여나 절간 앞 그의 암자(菴子)에 전하여 주었으면 하는 막연한 희망과 기대에서 나온 것이었다.

청년 수도승은 그때 무서운 현세(現世)의 유혹(誘惑)을 물리치고 그날부터는 처자에게 일체 발을 끊고서 암자에 들어 앉아서 목탁을 치면서 염불 외우기에 오로지 전심전력을 다하였다.

세월은 흘러 이제는 내일이면 십년 성도(成道) 하는 날 저녁을 당하였다.

그는 이제는 도를 이루어 중생(衆生)을 건질 생각을 하면서 불경(佛經)을 외우고 있으려니까 기쁘기 한이 없었다.

밖에서는 가을 달밤에 기러기가 날아간다. 멀리선 송풍(松風)이 은은히 울고 태백사(太白寺)의 여덟개의 종이 한시에 웅 ── 웅 ── 울어 장백산의 넓고도 넓은 산 속을 뒤집으면서 뜻있는 이 하루 밤을 거룩하게 새어 주려고 하는 듯 하였다.

그때 불시에 밖에서 급히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 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

밤의 소리가 되어서 그런지 그 목소리는 한껏 처창(凄愴)하였다.

처음에는 가랑잎을 지나가는 다람쥐 소리거니 하고 중은 다시 경서(經書)를 대하려고 할 때에 이번에는 더 급하고 더 애처럽게

『여보세요 여보세요.』

한다. 그 소리는 분명히 여자의 목소리였다.

『깊은 밤중에 이런 깊고 험한 산속에 있는 절에 요귀(妖鬼)가 아니면 들어 올 사람이 없을터인데.』

하고 놀라면서 문을 열어 젖히니 앗! 거기에는 머리를 산산히 풀어헤친 장자부의 따님이 천만 뜻밖에 서 있었다.

그는 돌부처 같이 온몸이 빳빳하게 굳어 지는 것을 깨달았다.

낭자(娘子)는 그뒤부터 참대 밭에 들어가 참대를 꺾어다가 배를 만들어 가지고 밤이 되기를 기다려 집을 빠져 나와 꿈 같이 다녀간 그 젊은 도승의 뒤를 찾기에 애를 썼다.

염불소리 들리는 곳마다, 법당의 범종(梵鐘)이 울리는 곳 마다, 암자를 찾고 절간을 찾아서 동으로 번쩍 서으로 번쩍 가진 고생을 다 하다가 오늘 저녁에야 이 아랫절 여승(女僧)에게서 태백사(太白寺)에 있다는 말을 듣고 밤늦게 이렇게 찾아온 것이었다.

그의 하얀 버선은 나무 뿌리에 걸켜서 산산히 찢어지고 옥색치마도 군데군데 진흙이 묻었다.

그는 젊은 중을 보더니 미칠듯이 기뻐하다가 다시 문을 닫는 바람에 땅 바닥에 주저 앉아 긴긴 밤을 애처럽게 울며 지냈다.

그때 중도 마음이 가랑잎같이 흔들리었다.

성불(成佛)하면 무얼 하나 석가(釋迦)의 높은 제자가 되면 무얼 하나 서역정토(西域淨土)로 가면 무얼 하나, 이 몸을 찾아 이렇게 수 십리를 온 사랑하는 이를 물리쳐야 참말로 불도(佛道)에 맞는 것인가, 아, 어떻게 하면 좋을가

전세(前世)의 악연(惡緣)을 저주(咀呪)나 하고 말가, 그의 가슴은 사랑의 불길과 법도(法道)의 불길에 타고 타고 또 탔다.

그는 마침내 낭자가 문을 뚝뚝 두들기는 애처러운 주먹 소리에 앞뒤를 생각할 사이도 없이 문을 다시 열고 안아 들이려고 하다가 멀리서 웅웅 울리는 새벽 종소리에 다시 걸음을 멈추고 다시 결심을 하고 경(經)을 높게 외웠다.

넓으나 넓은 공산(空山)에는 달이 외로이 걸렸는데 이 초암(草菴)에선는 마치 극락(極樂)과 지옥(地獄)으로 서로 상극(相克) 되는 길을 걷는 두 생령(生靈)이 마주친 모양으로 하나는 문밖에서 문을 뚜드리며 슬피 울고 하나는 안에서 석가여래(釋迦如來)를 찾고 미륵 보살을 찾으며 기나긴 밤을 보냈다.

이 어찌된 인연인지 모르겠다.

이튿날 아침이었다. 오래간만에 장자부의 집 앞 마당에는 또 다시 중 하나가 나타나 목탁을 치며 보시(布施)를 구하였다.

그러나 역시 나무아미 타 ─ 불 낫자를 부르기 전에 주인 장자부는 똥가래를 가지고 나와서 중을 쫓았다.

중은 이번은 아무 말도 없이 문간으로 나왔다. 그는 다 나오자 길게 한숨을 쉬며

『슬프다, 네 영( )가 오늘로 끝을 맺단 말이냐.』

하고 돌아서 뽕나무 밭이 있는 곳으로 나갔다.

그는 십년 동안을 수도하여 끝끝내 성도(成道) 하고만 어제 저녁의 그 젊은 중이었다.

그가 아까운 듯이 장자부의 집안을 돌아다 보며 한 걸음 두 걸음 나갈 때에 불시에 장삼(長衫) 소매를 잡는 이가 있었다.

그는 자부(子富)의 외딸 낭자(娘子)였다. 낭자는 그를 기다린지가 오래였다.

두 사람들은 어제 밤 악몽(惡夢)을 다 깨지 못한 듯이 한참 동안 서로 얼싸 안고 아무 말도 없었다.

실로 이때만은 천지가 뚜껑을 덮고 자는 듯 고요하였다. 그러다가 중의 단 입술이 색시의 뜨거운 뺨 위에 떨어졌다. 아 ─ 불 붙는 정열(情熱)이여, 노아의 홍수였더라면 이 불을 끌 수 있었을가 두 몸은 한 점(點)에 불탔었다.

하늘은 사나이가 되고 땅은 여자가 되어 다시 우주(宇宙)를 창조하는듯이 신비(神秘)하고 거룩한 순간이 지나갔다. 중은 여자의 얼굴을 두손으로 받들어 보며

『날 따라 오시겠읍니까?』

『어디로?』

『먼 곳으로 다시는 못올 머나먼 곳으로 ─.』

『아버지는 어떻게 하고?』

『천벌을 받게 내 버려두고 가시오. 세상 사람의 재판을 오늘 하늘이 대신하여 하게 되었으니깐 ─.』

처녀는 슬픈 듯이 자기 집을 돌아다 보고 천리 옥토를 내다보며 한참 무엇인가를 생각을 하더니

『가겠읍니다.』

하고 결연히 대답을 하고 청년은 앞장을 서고 색시는 뒤에 서서 장백산 장태를 향하여 올라갔다.

사랑이란 위대한 것이었다.

부모도 애인에 비하면 가벼운 것이었다.

둘이 산 아래에 이르자 별안간 그렇게 맑게 개었던 날씨가 까맣게 흐려지더니 주먹같은 빗방울이 줄기차게 내리었다.

중은 엄숙한 얼굴빛으로

『어떤 일이 있드라도 장태를 넘기 까지는 결코 뒤를 돌아 보지 마십시오. 만일 그러면 큰 화변이 날것입니다.』

색시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그 뒤를 따라서 타박타박 걸어 올라간다. 그는 무슨 신비하고 거룩한 일을 예기(豫期)하는 듯이 전신이 광명에 찼었다.

가을 바람에 두 청춘의 장삼(長衫) 자락과 치마자락을 가지런히 장백산 장태 위에서 펄럭펄럭 운치있게 나부꼈다.

얼마를 걸은 뒤에 거지반 산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 그때 색시는 아무리 애인을 따라서 좋은 곳을 간다고 하여도 내 부모가 저 곳에 살고 계시지 않느냐! 세상 사람은 다 침을 뱉아도 나에게는 소중한 부모가 아니냐, 더 가기 전에 잠깐 마지막으로 돌아서 보자 하고 머리를 들리니 앗! 용궁(龍宮)같이 솟아 있던 자기 집은 금시에 천둥 소리와 번개불이 나면서 자취도 없이 쓰러지고 그 뒤는 양양한 물결이 구비쳐 흘러 들어와 순식간에 망망한 큰 바다를 만들고 말았다.

놀라면서 애인을 부르려고 할때에 이게 또 웬일인지 모르게 자기 입이 굳어지고 사지(四肢)까지 무거워지며 점점 자기 몸이 바윗돌로 변하고 말았다.

앞에 가던 젊은 중은 그 꼴을 보고 그만 막대를 집어 던지면서 돌로 변해 버린 애인신상(愛人身像)을 안고

『끝내 이렇게 되었구나, 에라 불도를 닦아서 내가 무엇을 할 것이냐, 사랑하는 이와 영생(永生) 하리라 ──.』

하면서 팔 소매로 눈물을 씻고 무엇이라고 두어마디 외우더니 자기도 곧 자기 몸과 같은 크기의 석상(石像) 일기(一基)로 화하여 그 곁에 나란히 섰다.

장자부의 옛날 옥토와 대하고루(大厦高樓)에 들어 찼던 물결은 장연호(長淵湖)가 되어 지금도 아침 저녁 파도가 세고, 호수(湖水)의 서편에 있는 장백산맥 아래에 있는 등(藤) 넝쿨이 뻗어 진 곳에는 장삼을 입고 고깔쓴 돌부처 하나와 치마를 쥐고 있는 색시의 석상(石像)이 가지런히 놓인 것이 있으니 그는 사랑의 나라를 찾던 두 젊은이들이었다. 호수가 만년을 간다면 두 청춘남녀의 화석상(化石像)도 만년을 갈 것이다.

아니 호수는 마를 지라도 인간 세상에 이야기가 남아 있고 하늘과 땅이 있는 동안에는 두 사람의 사랑은 꺼지지 않으리라!

일전에 그 곳을 지나 가려고 하니 두 화석상 옆에는 진달래꽃이 즐비하게 피었고 두견새까지 울고 있었다.

장연호는 함경남도 경성군(鏡城郡) 어랑면(漁郞面) 지방동(池坊洞)에 있는 것으로 호수의 굽이가 구십구곡(九十九曲)이라고 하여 유명하며 지금도 이 지방 사람들은 이따금 못물이 넘어 날 때에 장자부가 쓰던 식기(食器)와 금은 수저 등을 줏는 일이 있다고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