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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야담 사화 전집 (차상찬)/유방 천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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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천추(遺芳千秋)

서울서 수원(水原)이 팔십리, 거기서 또 다시 팔 구십리 떡점거리(餅店[병점]) 오산(烏山)장터를 지나 진위(振威) 읍내서 다시 남으로 내려가면 평택(平澤)이라는 고을이 있으니 예전에는 충청도였지만 지금은 경기도 땅이며 삼남(三南)으로 통하는 큰 길가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앞에는 오산(烏山) 벌 넓은 들판을 끌어 안고 아래로는 능수버들이 봄마다 늘어지는 천안(天安) 삼거리로 통해 있으니 조그만 고을일 망정 무던히 긴요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곳이었다.

때는 화평하고 백성들은 성덕을 노래하며 요순 건곤이 무사 태평하던 시절에 가을 추수를 막 끝마친 뒤이라 집집마다 노적더미, 창고마다 볏섬이다.

봄 여름 가을에 애써 일을 하던 시골 농군들은 일년에 한번 한가한 때를 만났다고 따뜻한 사랑방에서 담배 연기를 퍽퍽 피우며 글을 아는 머슴을 추려 내어서 까므락 까므락 희미한 등잔밑에서 밤마다 매일밤 특청 재청으로 심청전 춘향전을 소리 높여 읽을 때, 마굿간의 여물 먹는 송아지도 잠이 들고 먼촌의 개짖는 소리도 없이 고요한 밤.

한편 과거를 보아 장원 급제를 하여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보겠다고 동리 동리마다 양반의 서당에서는 머리 꼬리를 늘여논 도령님 꼬투상투에 관 대가리를 뒤집어 쓰고 흥겨워하고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몸을 흔들며 공자왈 맹자왈하면서 장단 맞추며 목청도 드높게 외우고 있었다.

눈 깊은 겨울철 설날도 불과 며칠 남지 않았다.

철 모르는 아이들은

『엄마 아빠 설은 몇 밤이나 자면 온다지?』

하며 애타는 마음으로 손꼽아 기다린다. 펄펄 날리는 눈이 한자 또 두자 넓은 대지를 은세계로 만들고 마을마다 봉오리 마다 눈에 쌓여서 아무리 해도 평화로운 세상이라는 것을 잘 나타내었지만서도 별안간 매서운 북쪽 바람이 쌀쌀하게도 휘몰아쳐 불어와서 천지를 분간도 못하게 눈보라 치던 그 순간에는 웬일인지 지금껏 평화스럽던 곳에 무슨 난리라도 일어날듯이 고요히 잠들고 있는 평지에 무슨 풍파가 기어코 생길 것 같이 사람 사람의 머리에 생각이 떠오르게 되었다.

인조대왕 십사년(仁祖大王 十四年) 병자 십이월 구일(丙子 十二月 九日[구일])에 북쪽으로부터 십 삼만 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우리나라로 침입한 적병이 있으니 그는 만주에서 새로 몸을 일으킨 황태극(黃太極)이란 괴걸(怪傑)이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나아가 국호를 대청(大淸)이라 하고 용골대 마보대(馬保大) 두 사신을 보내어 우리 나라에 국서(國書)를 가지고 왔으나 말이 너무 오만무례한 까닭에 조정에서 그를 받지 아니하고 거절하여 버렸더니 대청나라 임금은 거기에 크게 분노하여 그와 같이 대병을 친히 거느리고 불의에 침노하여 쳐들어 왔다.

청주는 대병을 친히 거느리고 모든 장사들을 독촉하여 불과 열흘 만에 샛길로 한성을 향하여 올라오니 불의에 큰 변을 당한 만조(滿朝) 상하는 크게 놀래어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일이 몹시 다급하므로 어쩔 수 없의 모모 대신 등으로 왕자와 빈궁과 나라 사당을 모시고 강화도(江華島)로 보내고 인조께서는 적군의 선봉을 피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난하여 가셨다.

그러자 청주는 곧 선봉의 뒤를 따라서 대장 담태(譚泰)와 같이 한성에 들어와 보니 한성은 이미 함락되고 다시 한강을 건너서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압축하여 각기 대를 나누어 강화를 엄습하고 각지로 돌아다니며 약탈을 하게 되니 그때 각도 관병들은 간곡한 근왕의 조서를 받들고 응원병을 일으켰으나 한곳에서도 이기질 못하고 거의 패몰되니 적의 세력은 날로 떨치고 각지 도성(都城)이 함락하게 되어 왕자와 묘사가 사로잡히고 대관과 양민이 무수히 참살을 당하고 남한산으로 피난하신 곳도 군량이 떨어지고 병졸이 얼고 굶주림에 시달리어 목숨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게 사십 여일을 지내니 그 참혹한 현상은 귀로 차마 들을 수 없고 눈으로 차마 볼 수 없었다.

천추의 한사요 백세의 수치로되 국가의 위난이 조석에 있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참상이 극도에 달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인조께서 청주와 강화(講和)를 하고 겨우 큰 화를 면하게 되니 참혹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한 임진란과 더불어 큰 치욕적인 수난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섣달 정월 반가운 때를 이와 같이 소란하고 참혹하게 지내니 반도강산의 그때 정상이야 어찌 옛 일이라고 우리 기억에 사라질 리가 있으랴.

즐거워야 할 때 우리 조상들은 울음의 바다 눈물의 바다에서 헤매이게 되었으니 그 중에서 한마디 간단하고 애처러운 미담을 여기 소개하고자 한다.

병자호란이 막 일어나기 전 평택 땅에 한 선비가 있었으니 성은 신씨(申氏)요 이름은 광철(光徹)이라고 불렀다.

볼 일이 있어 황해도 평산(平山) 그의 고향에 갔다가 미처 돌아오지 못하여 불의에 난리가 일어나 사납고 무지한 호병(胡兵)이 연로(沿路) 각지에 충만하게 되었으니 어찌 필부단신으로 그곳을 빠져 나올 수가 있으랴

그 아내 심씨(沈氏)─

홀로 집을 지키면서 멀리 간 남편이 돌아오기만 밤낮으로 기다리고 있었으나 가신 님의 소식은 묘연하고 난리의 소문만 소란하게 들려 왔다.

그때 마침 심씨의 친정 어머니 되는 송씨(宋氏)는 다만 외아들 하나를 데리고 있다가 그 아들이 나라의 부르심을 받고 남한산성에 가서 있게 되니 의탁할 곳이 없으므로 부득이 그 딸의 집에 와서 외로운 몸을 의지하고 있을 때 적군의 무리들이 사면 팔방으로 침범하여 민간에 들어가 닥치는 대로 약탈을 하였다.

심씨 스스로 생각하기를 먼곳에 가신 남편이 돌아오기도 전에 되놈들이 만일 졸지에 대들으면 나의 한몸은 주검으로써 만족하지만 늙으신 어머님을 장차 어떻게 하여 드리면 좋을가 하고 두 가지 걱정에 마음이 조리어 날마다 하늘을 우러러보며 지성껏 기도를 올리며 남편이 안전히 돌아오며 온 집안 식구들이 무사하기만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남편의 소식은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묘연하고 울며불며 피난하는 백성은 이웃집에도 날로 늘어 가기 때문에 심씨의 형되는 성부인(成夫人)이 역시 그 집에 와 있다가 일이 날로 위급해 옴을 보고 쫓아서 홍주(洪州)로 피난을 갈 때 가만이 그 동생을 불러 말하되

『아저씨(동생의 남편)께서 멀리 가시어 돌아오시지 아니하니 남자의 몸도 아니요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혼자 이곳에 있다가는 필연코 되놈들에게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니 나와 같이 가서 어린 것 들의 목숨이나 보존여 후일을 기다리는 것이 옳지 않느냐.』

하고 위로 겸 간곡한 권고를 하니 심씨는 그 말을 듣고 울면서

『형님─ 형님의 말씀이 또한 옳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마는 평산(平山)은 되놈이 들어오는 요로이기 때문에 남편의 생사를 알길 조차 없으니 저 혼자 살겠다고 그의 소식도 듣기 전에 피난을 가겠읍니까. 그것은 내 몸이 죽고 내 뼈가 갈릴지언정 차마 인정상 하지못할 노릇 입니다.』

하니 성부인이 재삼 권유하여 그렇지 아니 하다는 것을 말하였으나 종시 듣지 아니하므로 성부인은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자네의 뜻이 그와 같이 굳으니 어찌 할 수 없네. 자네 아들이나 하나 나를 주고 신씨 집안의 혈육이나 보존하게 하세.』

하니 심씨는 마지 못하여 그 큰 아들을 내어 주니 그 아들의 나이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

그는 이모와 외조모를 따라서 홍주로 가게 되었다.

적군이 팔도에 흩어져 있는 이때에 멀리 간 남편의 소식은 알 길이 없고 사랑하는 어린 자식을 다시 먼 땅으로 떼어 보낼 때 그의 안부를 또한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의 가슴은 찢어질 것만 같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죽을지 살지 앞일을 예측 못하는 심씨는 어머니와 형에게 어린 아들을 딸리어 보내고 텅 비인 집안에 혼자서 남편 오기를 기다리며 일행이 무사하기를 주야로 물을 떠다 놓고 북두칠성께 축원하고 있었다.

동지 섣달 설한풍이라야 송백의 절개가 놓은 줄을 알고, 위급하고 험난한 죽을 고비에서 만인정의 지극한 것을 아는 것이다.

평상시에 웃음을 웃어 남편의 환심을 사는 것만이 부부의 사랑이 아니며 포근 포근한 비단 이불 속에서 아내의 몸을 얼싸안는 것만이 부부의 지성이 아니라 죽을 땅 죽을 고비에서도 오직 심만씨은 그 남편을 버리지 아니하고 혼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나마도 이웃 고을 이웃 동리 이웃 집에서는 부모를 버리고 자식을 버리고 남편을 버리고 아내를 버리고 형을 버리고 아우를 버리고 허덕지덕 사면팔방으로 정처도 없이 제각기 살길을 찾아 피난을 가는 판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심씨가 성부인에게 늙은 어머니와 어린 아들을 딸리어 홍주로 가게 한 후 바로 며칠이 아니 되어 다만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그의 남편 신광철은 무사히 적군의 틈을 타서 샛길로 자기 고향을 찾아 돌아왔다.

심씨의 반가움은 이로 비길 바가 없었으며 광철의 감격한 눈물 또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두 사람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러나 난리는 위급하고 약한 여자 늙으신 부모 어린 자식의 안부가 인제는 궁금하고 염려되어 잠시라도 머무를 수가 없으므로 광철이 돌아오던 그 날 바로 홍주로 간 일행을 허둥지둥 뒤쫓아 길을 재촉하였다. 아산(牙山) 땅을 지나게 되자 별안간 도중에서 적군이 달려 들면서 앞을 막으니 일행은 풍지박산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 하게 되었다.

이때 심씨는 젖먹이 아이를 안고 계집종 한사람과 수풀 사이에 몸을 웅크리고 숨어 있으면서도 일행을 잊어 버릴까 바 염려하여 머리를 들면서 사면 팔방으로 망을 엿보고 있던 차에 그때 마침 그의 어머니 도씨가 불행하게도 되놈에게 붙잡혀서 늙은 몸으로 능히 저항하지도 못하고 무참하게도 그의 목숨이 경각에 달여 있으므로 그것을 본 찰나에 심씨의 눈에서는 아지 못하는 무슨 빛이 번쩍거렸다.

심씨의 귀에는 아지 못하는 무슨 소리가 들리었다.

빛은 분노의 빛

소리는 구원의 소리

심씨는 급히 안었던 아이를 같이 숨었던 계집 종에게 내어 주면서

『애─ 일이 급하다. 시각을 머무를 수가 없구나.』

하고 몸을 나는 듯이 번쩍이면서 적군에게 붙잡힌 그 어머니를 얼싸 안고 통곡하며 적을 향해

『우리 어머니를 죽일려거든 너희들은 나를 죽여라. 그리고 그 대신 우리 어머니를 살려 다오.』

하니 적군이 크게 놀래어 마침내 그 어머니를 놓아주고 억지로 심씨를 붙들어 말에 태워 가지고 가니 심씨는 이미 각오한 바가 있기 때문에 조금도 무지스러운 되놈들에게 깨끗한 절개를 짓밟힐 리가 만무하였다.

말 위에서 대성통곡하며 적군을 막 꾸짖기 시작하니 호병이 마침내 어쩔 줄를 모르고 있다가 최후의 발악하는 모습이 좀 갈아 앉은 다음에 심씨를 칼로 난자하여 죽이니 심씨는 마상(馬上)에서 그만 송장이 되고 말았다.

호병이 물러간 뒤에 숨었던 일행은 다시 나와서 각기 행방을 찾았으나 심씨는 이미 노상 고혼이 되고 말았다.

울어 보았대야 소용이 없으며 한탄한들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남편을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던 심씨는 어머니를 위하여 위급한 자리에서 자기 몸을 희생하여 죽고 말았다.

죽는 것이 쉽다고 하면 노끈 한발에도 칼날 한 개에도 목숨을 끊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심씨의 죽엄은 그렇게 쉬운 죽엄이 아니었다.

충효(忠孝)로운 죽음 거기에 어려운 것이 있었던 것이다.

그의 남편 광철은 슬픔을 참지 못하여 심씨의 시체를 거두어 행구(行具) 속에 넣은 의복과 이불로 싸서 동리 옆에 초빈을 하여 두었다가 난리가 평정된 후 아산(牙山) 선영(先瑩)하에 안장하니 그때 심씨 나이는 아주 갖 젊은 설흔한 살이었다.

인생의 한참 꽃다운 청춘시절에 그만 이생을 하직하고 만 것이었다.

그 젖먹이 아이는 낳은지 열흘도 못되어 또한 죽고 말으니 세상에 비참한 꼴이란 이루 형용할 수가 없었다.

그 후 이 일이 나라에 전하여 들리니 특히 그 절개와 효성을 표창하고 정문을 세우니 그문 현판에는

『열녀 가선대부 신광철지처 심씨지려(烈女嘉善大夫 申光徹之妻 沈氏之閭)』

라 씌어 있었다.

이것은 헛된 전설도 아니요 만들어 쓴 이야기도 아니다.

역역(歷歷)히 실제로 있던 참된 사실 이야기이다.

내 말이 거짓이라 하거던 평택을 지나는 사람은 그의 정문을 정식으로 한 번 찾아보면 나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