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야담 사화 전집 (차상찬)/정열의 공주와 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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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열의 공주(公主)와 무사(武士)
이 몸이 꽃이면
부는 바람에 날려
저 담장을 안 넘으리
넘어서 길바닥에
우수수 떨어져
밟히지나 않으리
가셨다 오시는 길이나
오셨다 가시는 길에
매양 밟히지 않으리

백제(百濟)의 서울 부여성(扶餘城)의 의자왕궁(義慈王宮)은 마치 은행꽃 위에 떠있는 부성(浮城) 같이 수천폭이라는 은행나무 밭속에 둥실 솟아 있는데, 때가 마침 하사월 초순(夏四月 初旬)이 되어 쌔하얀 은행꽃들이 왕궁에서 피기 시작하여 팔백 여든이나 되는 절간과 백만장안의 가가호호(家家戶戶)에 안개가 낀 듯이 자욱히 끼어있으며 그 위에 후눅후눅한 사월 남풍(四月 南風)이 불어 넘칠 때마다 가지마다 피어 있던 꽃잎들이 눈보라 치듯 우수부 떨어져 길에나 담장에나 노새등에 아낌없이 쌓였다.

지금 이 은행나무 밑에 남색도포(藍花道布)에 관(冠)을 쓰고 허리에는 오동(梧桐)잎 모양으로 수를 놓은 긴 칼을 찬 청년 무사(武士) 한 사람이 이노래를 부르면서 높다란 왕성(王城)을 자꾸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한발 자국 떼어 놓고는 불타는 눈동자로 천길 만길 되는 성안을 바라보며 또 한발 자국 떼어 놓고는 또 바라보다가 나중에 담장에 자기 귀를 맞대고 한참 듣는 것은 제 목소리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행여나 성안으로부터 모기소리 만치라도 한 두 마디의 화답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여 그러는 것이었다.

그러나 열두 겹을 친 병풍같이 길고도 긴 궁궐 안으로부터는 기침 소리 한 마디 들리지 아니하였다.

무사는 안타까운 듯이 눈초리를 성벽(城壁)에서 돌려서 지향없이 먼 산을 우두머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 서쪽 하늘 아래로 쭉 뻗어진 반월성반(半月城畔)에는 조각달빛이 흩어져 백제산천(百濟山川)을 그림 속 같이 비치는데 나무위에는 삼월 삼짇날 찾아든 제비도 아직 둥우리를 채 못 튼 것이 있었든지 진흙을 물고 강물을 차며 날아 가는 것이 보이며 그위 고란사(皐蘭寺)에서는 초경(初更)의 바래소리 뚱 뚱하고 기운차게 울리며 들려 온다.

그는 마치, 이렇게 산천초목과 새들이 날으고 짐승들이 모두 봄과 한 마음이 되어 무르 녹아가건만 저 혼자만 웃을 줄도 울 줄도 모르는 바윗돌이 된 것 같아서 애달퍼 하면서 머리를 자꾸 긁었다.

정말이지 강남제비가 구십춘광(九十春光)을 몰고와서 보리밭에 앉으면 대맥(大麥)을 누르게 하고 장안의 가가호호에 앉으면 그 집안을 웃음 소리로 터지게 하고야 말았다.

이 좋은 봄날 밤에 눈물을 짓지 아니치 못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확실히 봄의 여신(女神)에게 쫓겨난 사람일 것이다.

무사는 이렇게 생각을 하니 갑자기 온몸이 추워 올라 오는 듯하여 전신을 옷싹 떨었다.

과연 몸에서는 쌓이고 쌓였던 꽃잎들이 마치 엄동설한에 함박눈송이 같이 어깨와 등에서 우수수 떨어진다.

그는 화가 난 듯이 발길로 떨어진 꽃을 마구 문질르더니 그래도 속이 답답한 듯이 두 손으로 가슴을 마구 헤치며 아까 부르던 노래를 부르면서 담장을 싸고서 저쪽으로 돌아가 버린다. 도포자락은 여전히 밤바람에 가볍게 휘날리며 먼 바다로 오르내리는 백구(白鷗)의 날개와 같이 운치 있게 나부끼는데 그가 부르는 애끓는 노래가락만 꽃잎과 함께 길가에 떨어져 묻힐 뿐이었다.

시조 고온조(始祖 高溫祚)가 나라를 동반도에 세운 뒤 삼십대 육백 팔십년째 되는 봄철이었다.

의자왕을 맞이한 백제왕궁(百濟王城)은 산 좋고 물맑은 이 부여성(扶餘城)의 한가운데 있는 만수산(萬壽山)기슭에 우뚝 올라 솟았는데 궁궐속 다락마다 세상에서 아주 귀한 푸른 기왓장으로 지붕을 올렸고 기둥도 열 번이나 단청(丹靑)칠한 모양으로 산호(珊瑚)같이 빨갛고 주춧돌도 여러 길이나 되는 흰 대리석으로 학(鶴)의 다리 같이 가느다랗게 깎아 세워서 인세(人世)의 정화(精華)를 다 하였다하리만치 찬란한데 다섯 걸음에 일각(一閣)이요 열 발자욱에 한 대(台)라 할 만치 저 많은 누대전각(樓臺殿閣) 속에야 황금으로 만든 왕관(王冠)과 보옥(寶玉)과 강남(江南) 비단과 금비녀 은가락지 황금화로 등 산더미 같은 보물이 몇 수레로 실어 내어도 남을 만치 많었을 것이다.

아마 저 기왓장 한 개를 구어 내기 위하여는 사람 좋은 우리네 조상들은 몇 해를 발을 묶여가면서 왕명에 복종하였을 것이며 저 주춧돌 한 개를 파내기 위하여는 전국 백성이 장안에서 돌이 있는 심심 산골에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 피눈물나는 고역을 당하였을 것이며, 그것은 고사하고 왕이 저 고란사 뒤에 금강산 산봉우리 같이 수백 개를 올려 지은 저 후궁(後宮)의 삼천궁녀에게 히롱 삼아 던져 주는 금비녀 한개나 금 가락지 한 개를 갖추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고난을 겪어 가며 세금을 바쳤으랴.

장엄하고 무시무시하게 높다랗게 처올려 쌓은 저 궁궐안의 집집은 모두 돌집이요 쇠기둥이니 녹쓸 법은 없다 할지라도 어느 날에 가서는 백성의 소리가 하늘의 소리로 변하여 아방궁궐(阿房宮闕) 같은 이 궁안에 거미가 줄을 치게 되고 귀뚜라미도 밤마다 추풍감별곡(秋風感別曲)을 읊을는지 누가 알 것이랴.

지금도 밤마다 있던 연악(宴樂)소리가 담장을 새어 왕궁 밖에 있던 모든 사람의 귀에 은은히 들린다.

아래 허리에까지 실 한 오리 아니 걸친 나체무녀(裸體舞女)들이 넓고도 넓은 궁궐 안에서 춤추느라고 발자취가 공중에 솟았다 떨어졌다 하는 소리가 역시 귀 밑에서 나는 듯 분명히 들린다. 학의 고기와 공작의 염통과 소의 갈비를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황금으로 만든 술병을 기울여 맛난 술을 벌컥 벌컥 들이키는 정신(廷臣)과 왕의 모양이 눈앞에 뚜렷이 보였다.

금년은 작년보다 더 심하고 오늘은 어제보다 더 심하게 질탕하고 멋진 궁정(宮廷) 놀음이 날마다 보였다.

이것을 불행하게도 귀와 코와 눈을 가진 백성들이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날마다 이렇게 주지육림(酒池肉林) 속에서 호화찬란하게 질탕하고 음탕한 생활만 계속하니 장차 이 나라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지 앞이 뻔한 일이었다.

아까 그 눈섭이 가느다랗고 어여쁘게 잘 생긴 무사는 닐니리 쿵닥쿵하는 이 삼현육각(三絃六角)의 궁정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 소리를 듣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발길을 우뚝 멈추고 그 안을 한참 들여다 보다가 백제 산천의 우로(雨露)을 받아마시는 신하로서 차마 못 참겠다는 듯이 먼 하늘을 바라다보며 길게 허리를 굽히며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돌아섰다.

아마 성상(聖上)께서 좀더 정신을 가다듬어야 되겠다는 뜻을 나타낸것 같었다.

꽃은 점점 바람에 더 휘날리고 밤은 또한 깊어갔다.

멀리 교방(敎坊) 있는 골목에서도 향화촌(杏花村)을 찾던 장안 미소년(長安美少年)들이 얼근히 취하여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파란 헌등(獻燈) 불이 새벽별 같이 하나 둘 꺼져간다.

무사는 켰다 꺼졌다하는 서울 장안의 밤의 불빛을 한참 바라보다가 무슨 결심을 하고난 모양으로 담장가에 바싹 달려 가드니 금방 명주실을 꺼내 가지고 한끝을 은행나무 뿌리에 단단히 매고 또한 꼬리를 담장안에 집어 넣더니 다시 어순라졸(御巡羅卒)이 있나 없나 주위를 보살피고는 재빨리 몸을 날려서 넘어 갔다.

조금 있다가 쿵 ── 하고 저쪽에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궁궐 안에는 이 소리가 안들렸는지 아무 기색도 보이지 않고 다만 풍악(風樂) 소리만 더 요란하게 날뿐이었다.

무사는 마침내 궁궐아래 월정교(月精橋) 다리 아래의 난초 밭 속에 숨었다.

여기는 어정수(御井水)가 있는 부근인 듯하여 조금 있다가 동녀(童女) 하나가 물을 떠서 받처 들고 그 앞을 지나는 것이 보였다.

그는 숨도 크게 못 쉬며 파묻쳐 있으면서도 달빛을 통하여 그 앞을 내다보았다.

바로 서쪽으로 용마루가 없는 푸른 기와집이 있는 것은 아마 임금 위에는 하늘도 없다하여 용마루를 떼어버린 나라님 계신 다락인 듯 꿈에나 본 듯한 호화로운 집이 있고 그것과 이어서 구름 속으로 솟아 있는 이층 다락은 나라의 살림을 맡아 보시는 명정전, 그 아래 넓은 뜰은 조하(朝賀) 드리던 곳인 모양으로 정일품(正一品) 종일위(從一位) 등의 석패(石牌)가 인사나 하는 듯이 두 줄로 쭉 갈라져 서 있고 다리 동쪽으로 버드나무가 우거진 속에 총총총 올려민 집은 후궁(後宮)인 듯이 회랑(廻廊)을 연결한 이웃집은 노릿터인 모양으로 풍악소리가 거기에서 흘러나온다.

그 앞은 잘 만들어진 안압지(雁鴨池)라 돌로 만든 풍선(風船)이 절반이나 이 못 위에 떠있고, 연(蓮)꽃 잎이 그득히 피어 있는데 밤 이슬이 잎사귀마다 달달 굴르는 것이 보였다.

무사는 속으로 「좋구나」 하였다.

이 세상에 임금 자리같이 호화스럽고 제일 좋은 팔자가 없구나 하면서 안개가 끼어 잘 보이지 않는 저 앞을 쳐다 보려고 고개를 난초위로 쑥 올려 밀었다.

그때 저쪽으로 동녀(童女) 한 쌍이 지촉(紙燭)을 들고 앞에 서서 이리 저리로 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무사는 깜짝 놀라면서 칼자루를 꼭 붙잡고 숨을 죽이며 풀밭에 다시 엎드렸다.

먼지조차 날리지 아니하는 그야말로 느린걸음으로 사쁜사쁜 걸어오며 등불 빛이 눈앞에 그물그물 하더니 불시에

『달도 밝구나 ─』

하는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린다.

좌우에 서 있던 시녀들은 입을 마추어

『그렇소이다. 공주님, 봄날이 되어 더욱 밝아 보입니다.』

무사는 두려워 하면서도 소리나는 곳을 향하여 보았다.

과연 다리 한 가운데는 등불과 파초선(芭蕉扇)을 든 동녀들이 죽 늘어선 가운데 달에서 떨어진 월정(月精)이 아닌가 의심하리만치 눈부시게 어여쁜 여자 한분이 단정하게 발을 멈추고 달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공주였다.

무사는 그 순간 온 신경이 찌르륵하고 울리는 것을 깨달았다.

실로 그가 아까 은행나무 밭속에서 미칠듯이 애를 태우며 꽃이 못되어 담장을 못넘는 것을 한(恨)하여 노래 부른 것과 또 이렇게 풀밭에 파묻쳐 이슬을 맞으며 기다리던 그 임자는 공주였다. 그 공주를 기다리는데는 다음 같은 간절한 곡절이 있었다.

바로 며칠 전 사월 초파일 날이었다. 고란사 절간에는 의자왕(義慈王)과 왕후마마와 공주께서 모두 나오셔서 수십만 장안 백성과 함께 즐기셨다.

불식(佛式)으로 석가여래 앞에서 절을 드릴때에도 주상(主上)께서는 백성들이 하던 모양으로 법당에 올라가서 동라고(銅羅鼓)를 세 번 울리고 절하였으며 그다음에 아마도 공주님과 대신(大臣) 승려, 장군 학사(學士)의 순서로 모두 절하였고 또 그뒤 백마강가에서 헌등례(獻燈禮)를 할때에도, 또 사자수(泗泚水)가에서 물놀이 할때에도 더구나 절간 뒤 잔디밭 위에서 춤추고 피리를 불며 무슨 만수성절(萬壽聖節) 같이 단오(端午)때나 가위 때와 같이 백성들이 어울려서 놀 때에도 주상(主上)은 계시었고 공주께서도 참열하셨다.

그때 이 이름조차 없는(無名) 무사는 공주의 어여쁜 모습에 취하여 은근히 아침부터 밤까지 그 곁을 떠나지 못하였다.

그날도 그는 주상의 앞에서 여러 무사들과 같이 칼춤을 추다가 저쪽 화산(花傘) 밑에 앉어 칼춤을 열심히 구경하고 있는 공주를 보고 그만 정신이 아찔하여지며, 칼을 땅에 떨어뜨렸다.

그때 공주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며 곁에 시녀를 시켜서 얼른 달려가서 칼을 집어 주게 하였다.

이 일에는 왕도 놀랐고 모여 있던 여러 백성들도 놀랬으나 별 뜻이 없으리라고 그만 웃고 말았다.

그러나 그 청년무사로서는 다시 없는 큰 영광이었다.

그날부터 집에 돌아와서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빙그레 웃으며 칼을 집어 주게 하던 그 공주님이 그리워 병이 들 지경이었다.

철 없는 짝사랑 이라고 할까, 일개 평민으로, 무명(無名)의 무사로 공주를 사랑할 도리가 있을리 만무하였다. 차라리 별따기가 용이할 것이다.

그뒤부터는 무사는 매일 밤 같이 짝사랑에 가슴이 타다 타다 못하여 왕궁 근방에 와서 지는 꽃에 하염없는 눈물을 흘려가며 공주를 사모하는 애끓는 노래를 부르다가 닭이 울때야 집에 돌아가군 하였다.

그러다가 불붙는 마음에 다시 한번 공주나 뵙고 죽는다고 오늘 밤은 대담하게 궁궐안으로 뛰어들어 밤 이슬에 온 몸을 적셔가면서 행여나 공주께서 지나가지나 않나 하고 기다렸다. 공주는 또 한번 달을 쳐다 보며

『둥근 달은 꺼져간다. 채 둥글기전 초생달이 나는 좋드라. 얘들아 나는 혼자 달 구경이나 하련다. 너의들은 먼저 들어 가거라.』

『밤도 깊었아오니 일찍 들어가사이다, 공주님.』

하는 것은 늙은 시녀의 말인 듯하였다.

『아니다, 나는 고요히 난간(欄干)에 혼자 기대어 슬픈 달 구경을 하련다. 지난번 초파일 날 밤도 참 좋더라. 어서 들어 가거라.』

시녀들은 더 거역을 못하여 모두 내전(內殿)으로 흩어져 들어 갔다.

사방은 고요하다.

이따금 다리 밑에는 금붕어들이 꽃살을 딸려고 입을 짝짝 벌리며 쌍쌍이 뛰어 노는 것이 보일 뿐이었다. 공주는 외로이 월정교(月精橋) 돌다리 위에 서 있었다.

스륵스륵 스치는 비단 치맛 자락의 한 꼬리가 공작(孔雀)의 날개같이 다리의 돌난간 위에 걸쳐 있는데 무심한 은행꽃만 담장 밖으로 기어 넘어와 치마폭 위에 우수수 떨어진다.

그는 마치 꽃 가루를 날리듯이 학(鶴)의 깃으로 만든 부채로 너울너울 부치면서 하늘에 떠있는 십육야월(十六夜月)에 만취한듯이 보고 있었다.

구슬로 깎아서 만든 듯한 왼손가락 두개를 난간에 기대고 청산(靑山)을 그린 듯한 아미를 들어서 하늘을 쳐다보는 그 모양 ── 실로 이 나라의 온갖 아름다운 산천의 정령(精靈)들이 모아 입도 되고 코도 되고 눈도 된듯 스스로 온 천지를 정화(淨化)케 성화(聖化)케, 미화(美化)케 하는듯이 공주는 춘흥(春興)에 못이기는 듯이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봄날 밤의 운치를 한껏 북돋아 주었다.

『달이 오르면 하늘이 넓어 질것이다. 아아 이 몸은 달 되고저 ─』

『수천개 별속에 달뜨면 더욱 뚜렸할 것이다.』

아아 이 몸도 별속에 뜬 그달 되고저 이 노래는 길게 꼬리를 저어서 왕궁의 골목골목을 돌아다녔다.

목석(木石)이 아닌 무사가 이에 참을 재주가 있을리가 만무하였다.

『달이 달이 하니 웬 달인가
하늘 뒤에 둥실 솟은 저 달이다.
달도 하늘에 있고 뜨는 것을
아아 이 몸은 그 하늘 되고저 ─』

소리와 함께 무사는 뛰어나왔다. 뛰어 나와서는 놀래서 어쩔 줄을 모르는 공주 앞에 두 손길을 맛잡고 공손히 인사를 하면서 머리를 푹 수그렸다.

『사월 초파일 날 고란사의 칼춤터에서 뵙던 무명의 소인(小人)이로소이다.』

『나를 보러 오셨던가.』

『생명을 바치고 그리하였사옵니다.』

『무슨 일로?』

무슨 말을 할가 말가 하면서 그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일으키더니 두 볼이 빨개지면서

『사모하는 마음으로 ─ 사모하는 마음으로 ─』

『사모하는 마음으로 ─』

하고 공주도 앵무새 같이 외우고 나더니

『얼마나 크고 열열한지요.』

『백두산에 오는 눈을 하나씩 헤어 보자고 하며는 헤어 보겠나이다. 천만 번 밀려왔다 가는 동해 바다의 물결을 헤어보라고 하시면 헤어보겠나이다. 백발이 되기까지 사모하다 죽으면 한이 없겠나이다.』

『백두산 눈은 녹지 않는가. 동해 바다 물결은 왔다 가지 않는가요. 그대의 사랑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눈뿐만 아니라 세상 만물이 다 녹아도 저의 가슴 속에 불붙은 사랑의 불길만은 영원토록 무궁합니다. 물은 왔다 가지만 이 몸은 온 곳이 마지막 길이올시다. 너무 괴롭히지 마시옵소서』

하며 대담하게 두어 걸음 앞에 다가섰다.

『진정이시겠지요. 사랑에도 안팎이 있겠읍니까마는 저도 고란사에서 일이 있은 뒤에는 늘 뵙고저 하였읍니다.』

하며 마치 공주도 사랑 앞에는 노예올시다 하는 듯이 얼굴을 붉히면서 저도 한 걸음 다가서고는 차마 똑바로 바라다 보지를 못하고 옆으로 비켜섰다.

『해와 달이 왜 그립더냐, 빛이 있어 그립더라. 공주님이 왜 그립더냐, 불타는 사랑에 그리운 것이로다.』

두 사람은 왕궁 안인지 어디인지를 분간 못하고 얼싸 안았다.

두근두근하고 심장에서 뛰는 피와 사백여든개의 뼈마디(骨節)에서 울리는 정열의 불길이 한 몸이 된 두 육신을 태워 버릴 듯이 붙었다.

밤은 점점 새어 간다. 오래지 않아서 서울 닭이 첫회를 울것이다.

그 기쁨이야 우화등선(羽化登仙)이라 할가 왕궁은 두 청춘의 사랑으로 더욱 빛났다.

『갈길이언만 떨어지지 않는 발길
발길에 무슨 죄가 있으랴
이 마을에 오도 가도 못하네.』

하고 무사가 노래하면

『무엇을 못 놓으랴, 궁궐이나 보옥을 왜 못놓으랴,』

『나도 굳센 사람이건만 어느 한분만은 차마 못 놓겠노라.』

공주는 연연(戀戀)한 마음에 무사의 흩어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하늘은 피리 불고 땅은 춤추어라. 사랑에 무르녹은 청춘남녀를 보면 그대인들 천지창조(天地創造)한 보람이 있지 않느냐.

그러나 고란사 절간 종이 두 번 울릴 때는 두 사람은 이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 발자욱 두 발자욱 가다가는 뒤를 바라다 보면서 견우 직녀가 칠월칠석날 오작교에서 헤어지듯이 서로가 애처럽게 헤어졌다.

둥근 달은 꺼지고야 말고 물든 단풍잎은 지고야 마는 것이 자연의 원리인 것이다.

백제의 전성시대는 밤마다 왕궁의 풍악소리에 쫓기어 가고 말었다.

삼십 일대(三十一代) 의자왕도 마침내 심판을 받고야 말 때가 왔다.

웅진(熊津)에서 부여로 서울을 옮긴 저 이십육대의 성명왕(聖明王)도 음탕하고 호사스러운 일에는 역대군주에 못지 않았으나 이십 구대 무왕(武王)에 이르러서는 새로운 주걸(紂桀)이 나왔으며 의자왕에 이르러서는 불란서(佛蘭西)의 왕업을 떠엎던 루이 십육세만치나 호화찬란한 생활과 음탕한 짓을 하였다.

그것은 오히려 낳은 편이었으니 불쌍한 백성을 시켜서 밤낮 신라를 정복하려고 일을 꾸미다가 패하였으며 더구나 고구려와 결탁하여 가지고 당 나라의 고종과 교제하는 그 신라의 길을 무턱대로 막게 되자 백제의 산천은 전운(戰雲)이 감돌고 진달래 피고 종달새 울던 하늘 땅에 때아닌 말의 발굽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게 되었다,

만년을 갈 줄 알았던 백제의 사직도 칼 끝에서 오락가락 하였다.

백제의 백성으로서 활을 안 쏜 사람이 없고 창자루를 쥐고 나가 싸우지 않은 사람이 없건만 가엾게도 최후의 백마강 싸움에서도 무참하게 패하여 왕궁은 사흘 동안 불 붓고 왕은 항서(降書)를 쓰고 백성은 목자 잃은 양떼 모양으로 사방으로 흩어지니 나라없는 백성의 슬픔과 말로는 이로 헤아릴 수 없는 비참한 모습이었다. 아아 저 왕궁이 탄다.

타는 불꽃이 하늘과 땅에 날려서 백제의 나무 하나 돌기둥 하나 남기지 않고 다 타버렸다.

명정전도 타고 월정교도 타고 내전도 탔다.

천고(千古)의 왕궁애사(王宮哀史)로 깃든 낙화암(落花巖)의 비극도 여기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나당(羅唐) 연합군은 홍수와 같이 밀려와 왕궁을 점령(占領)하였다. 이제는 왕관(王冠)이나 옥좌(玉座)나 금은보화나 공주나 후궁 삼천궁녀나 다 그 손안에 들게 되었다.

그때 마지막까지 왕궁의 성문을 지키고 있던 그 젊은 무사도 이미 기울어질 대세에는 어찌 할수가 없었다.

문에서 쫓기어 전(殿)으로 들어가고 전(殿)에서 쫓기어 내실에까지 들어갔다. 가면서도 이 몸이 일백 번 죽어 진토가 되어도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하는 가장 자기가 사랑하던 애인인 공주를 옹호해 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공주를 모시고 빈녀(嬪女)들이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면서 뒷문으로 도망치던 때였다.

호화롭던 전각(殿閣)에는 불이 붙고 병풍은 넘어지고 화분은 깨어지고 나라의 전위가 말의 발굽아래 속절없이 티끌같이 날아가고 말았다.

궁의 안팎에서 살륙(殺戮)을 받는 백성과 궁녀와 왕의 족속이 부르짖는 애원의 소리가 구천(九天)에까지 솟았다. 다시 땅속에까지 길이 파묻혔다.

그런 중에도 귀한 몸인 공주는 사인교(四人轎)를 얻어 타고 부왕과 황후들과 헤어져서 수백의 빈녀들에게 싸여서 몸을 피하여 사자숫가까지 왔다.

강물은 유유히 흐르는데 강 언덕에 핀 달래꽃은 인세(人世)의 영화를 자랑하는 듯이 줄을 지어 피고 웃고 있었다.

사자숫가에 오니 인생(人生)이 차마 그리웠다. 사람 사는 이 세상에는 실로 마음을 끄는 향기가 있으며 향화(香火)가 늘 타고 있다. 더구나 젊은 무사를 가진 공주의 몸에는 ─

그는 돌에 채어서 발이 붓고 피가 나오는 맨발바닥으로 강가의 바위를 두들기면서 통곡을 하였다.

수백의 궁녀들도 아까까지 내 집이었던 왕궁이 천지일색(天地一色)으로 불길 속에 잠겼을 때 애닲고 비통한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 공주를 한가운데 모시고 슬피 울었다.

야반삼경(夜半三更)에 천지가 고요히 잠들때 꽃같은 공주와 수백명의 궁녀들이 강가에서 목을 놓아서 울때에 달인들 차마 볼수 없었던지 검은 구름으로 스르르 달빛을 감추었다.

저 물소리 저 공주의 울음소리 저 궁녀의 애달퍼 하는 소리 목석(木石)인들 비참한 이 말로를 보고 울지 않을 리가 있으랴.

끝끝내 최후의 운명은 닥쳐 왔다.

왕궁에 불을 지른 신라군사는 다시 말굽을 몰아 한패는 의자왕을 찾으려고 나섰고 한패는 궁녀의 뒤를 따라서 사자숫가로 쳐들어 왔다.

툭툭툭 구르며 달려드는 저 말발굽소리 저 안개가 낀듯이 먼지가 보얗게 일어나며 달려오는 저 대군의 자취…… 최후의 운명은 시시각각으로 달려든다. 공주는 말발굽 소리가 자기 가슴 위를 디디고 넘는 것같이 소름을 오싹 오싹 치면서 목숨이 끊어질 때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죽는 것에는 원한이 없으나 청춘의 영화는 못 누려도 사랑하는 그 무사만은 눈감기 전에 한번 보고 싶었다. 가슴에 팔락팔락 치는 이 염통이 끊어지기 전에 그의 품안에 다시 한번 안기고 싶었다.

한편 무사는 애인을 구하기 위하여 몇몇 왕궁 수위병(守衛兵)과 같이 적을 막으면서 사자숫가로 자꾸만 후퇴하여 왔다. 점점 형세는 급박하여 온다.

무주고혼(無主孤魂)같이 궁녀의 우는 소리는 더 한층 처량하게 났다.

손마다 창을 든 기병(騎兵)들이 구름같이 사자수 앞으로 달려든다.

위기일발(危機一髮)이란 그때, 이 공주의 눈앞에는 한번 마지막 보기를 원하던 그 무사가 번쩍 비치었다. 그러나 무사의 이름을 채 부르기도 전에 적병은 이미 치맛자락을 잡을수 있을 정도로 바싹 달려 들었다.

백설이 만건곤(滿乾坤)할 때 홀로 푸른 저 참대와 같이 절개(節介) 절개하지만 나라의 흥망이 백척간두에 있을 때의 절개처럼 가까운 것이 있으랴.

수백 명의 궁녀들은 제 목숨을 살리자면 적병을 웃음으로 맞이하여야 하며 맞이하며는 원수의 아들 딸을 낳아서 이 강산에 퍼지게 할 것이니 차마 할 짓이 아니었다.

자기 한 몸의 정조(貞操)는 왕의 이름을 높이며 백제 사직을 높게 하고, 백제라는 이름을 만고에 빛낼 것이어늘 어찌 허술하게 적군에게 몸을 더럽히고 망신을 당할 수가 있으랴.

모든 것을 체념하고 난 뒤에 최후의 애끓는 울음 소리를 길게 빼더니 궁녀들은 님주신 비단치맛자락을 거꾸로 쓰고 바위에서 강물로 몸을 던지고 말었다.

공주도 한 번 더 볼려고 눈을 휘둥둥 하면서 무사를 찾았으나 그때는 이미 무사는 가슴에 창을 맞고 붉은 피를 흘리며 나가 자빠져 있었다.

공주는 눈이 앗뜩하여 그만 천길 만길되는 물결 속에 떨어지고 말었다.

꿈인가 생시인가 이 광경을 본 무사는 더 소리를 지를 힘도 없이 다시 일어나 바위에 쓰러져 양양히 흘러가는 사자수를 보았다.

물거품이 일어날 때 한번 솟은 공주의 손길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부르듯 너울너울 하더니 이내 사라지고, 또 얼마 아니하여 창백한 그 꽃같은 얼굴이 강물위에 번쩍 나부끼다가 힌 물결 속에 그만 살아지더니 다시는 그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달이 밝으니 떴다 잠겼다 하며 흘러 내려가는 궁녀들의 모양이 더욱 애처러웠다.

바위도 아침저녁 백제 맛에
울고 웃고 하였네
백제 갈 때는 산천인들 잊으랴
내일부터는 강 언덕에 핀 진달래 꽃도
벌써 백제 꽃 아니고 신라 꽃일세
꽃도 그렇거든 피가 뛰는 이 백성들아
내일부터는 어떤 일월(日月)을 맞이하여
울 것인가

아 낙화암 가에 공주는 천재(千載)의 한(恨)을 품고 물과 같이 흘러 갔다.

그러나 그 사랑이야 흐를 수가 있으랴.

이왕 죽을 바에야 원수의 손에 잡혀서 죽느니 보다는 스스로 죽는 것이 옳다 하여 무사도 즉시 강속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백제의 유민(遺民)들은 신라 혹은 고려 또는 이씨조선으로 길이 길이 전해 내려오건만 사랑에 울고 불고 하던 공주와 무사는 씨 한 알도 안 떨어뜨리고 저 세상에 간 것이었다.

의자왕궁에는 주춧돌 네 개가 남아서 전설을 전하고 있으며 반월성(半月城)에도 그 이름과 같이 천년 전에 떴던 그 반달이 여전히 떠 있고 고란사에서도 아직껏 깨어진 종이 아침 저녁 뗑뗑 울려서 부여산곡(扶餘山谷)을 살찌게 한다.

그러면 결국 두루미가 지나간 가을 하늘 같이 이 세상에 아무 흔적을 끼치지 못한 것은 넓고 넓은 백제 속에 오직 공주와 무사의 넋뿐일 것이다.

그러나 천년이 지나도 만년이 지나도 비바람에 낙화암이 흔적이 없어질 날까지는 또 인류세계에 역사가 깃터있는 동안까지는 또 사자수가 까치가 목욕 하리 만치 물이 말라 들 때까지 두 사람의 사랑의 자취는 영원토록 남을 것이다.

두 영혼을 찾아서 사자숫가에 가면 당장 소정방(唐將蘇定方)이가 백제를 평정하였다는 기념의 평제탑(平濟塔)이 우뚝 솟아 있고 마치 궁녀 하나하나가 한 폭의 진달래꽃이 되어 산수(山水)를 곱게 꾸민 듯이 낙화암가에 진달래꽃이 피어있다. 아무 것이나 두 송이만 따서

『공주(公主)야 무사(武士)야 잘 있느냐』

하고 우리는 그 영혼이나 해마다 잊지 말고 불러 주었으면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