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염사/강남 연자루와 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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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五編. 名妓[제5편. 명기]
江南 (강남) 鷰子樓 (연자루)名妓 (명기) 好好 (호호)

강남이라면 세상 사람들은 으례히 중국의 양자강 이남(中國 楊子江 以南) 소위 강남 가려지 금릉 제왕주(江南佳麗地, 金陵帝王州)라는 금릉등지로만 알 것이다. 그러나 강남은 중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조선에도 있다. 전라남도 순천군(全南 順天郡)은 자래로 산수가 가려하고 기후가 따뜻하여 여러 가지가 중국의 강남과 비슷하므로 자래로 조선의 강남이라고 하였다. 그 성남(城南)에는 벽옥과 같이 푸른 냇물이 동을 향하여 굽이굽이 흐르고 그 물을 임하여는 몇 해 전까지 고색창연한 이층의 누각이 반공에 우뚝히 솟아 있으니 이것은 곧 전남의 명루인 연자루(鷰子樓)다.

漢水東西碧玉流 七分明月古徐州
酒醒今夜知何處 腸斷城鷰子樓
동쪽 서쪽 개천물이
벽옥같이 흘러가니
칠분의 밝은 달이
옛 서주와 비슷하다.
오늘 밤 술이 깨면
어디메로 간단 말가
성남의 연자루가
애만 끊어 줄 뿐일세

이 다락(樓)의 이름을 연자루라고 한 것은 물론 중국의 강남 연자루를 모방하여 지은 것이어니와 그 루의 경치가 어떠한 것과 정한(情恨)이 많은 것은 위에 기록한 옛날 사람의 시(上記한 詩는 松京詩人 韓在廉이 順天예 謫居할 때에 지은 것이다)를 보아도 짐작할 것이다.

이 연자루는 옛날 고려 때에 손억(高麗 孫億)이라는 사람이 순천부사로 있을 때에 순천의 명기 호호(名妓 好好)와 놀던 곳이니 전설에 들으면 손억은 본래 풍류남자로 젊었을 때에 그곳에 있는 명기 호호와 사랑을 하게 되어 날마다 연자루에서 정답게 놀다가 만기가 되어 돌아가게 되매 두 사람은 피차에 연연한 정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뒷날을 기약하고 이별하였더니 그 뒤에 손씨가 다시 순천부사를 하여 전날 같이 좋아하던 호호를 불러본즉 사람은 비록 전날의 사람이나 벌써 백발이 흩날려서 춘화노골이 다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 반가워하는 일방으로 또한 그동안 세월의 빠른 것과 인생의 허무한 것을 한탄하게 되며 좌객들도 그 사실을 알고 역시 감개무량하였다. 그때 통판(通判)으로 있던 장일(張鎰)은 시 한 편을 지어 그 사실을 노래하였으니

霜月凄凉鷰子樓 郎官一去豪悠悠
時當旅客休嫌老 樓上佳人亦白頭
서리 찬 연자루에
달빛만 처량한데
임 가고 아니 오니
밤마다 꿈뿐일세
당시의 손님들은
늙었다 한탄 마오
꽃 같던 미인도
지금 역시 백발일세

이 시는 짓기도 잘 지었거니와 사실이 재자 가인의 정화(情話)를 그려낸 것이기 때문에 그 뒤의 사람들이 모두 회자하여 전하고 그곳을 지나는 사람마다 또한 그 시를 화작(和作)하며 따라서 연자루의 이름이 높아졌다. 경남 김해의 연자루(金海 鷰子樓)와 경북 안동의 연자루(慶北 安東 鷰子樓)가 경치의 좋은 것과 건축의 웅려한 것은 도리어 이 연자루를 압두할 만하지마는 그보다도 이 연자루의 이름이 더 높고 여러 사람에게 인상을 많이 주게 된 것은 경치와 건축물보다도 재자 가인의 자미 있는 정화가 있는 까닭이다. 나는 몇 해 전 그곳을 한번 지냈는데 비록 손억(孫億) 모양으로 호호와 같은 미인과 놀아본 일은 없으나 이지봉 선생(李芝峰 粹光)의 편술한 승주지(昇州誌—昇州는 順天 古號니 李芝修이 順天府使로 있을 때에 그州誌를 編述하였다)에서 그 사실을 기록한 것과 역대 시인들의 연자루를 많이 읽어 본 까닭에 그 누의 인상이 항상 깊어서 순천이라 하면 으례히 먼저 연자루 생각을 하게 되고 그 누 앞으로 옥같은 시냇물이 서출 동류로 권권이 흐르는 것과 그 누 앞 다리 건너 있는 옛날 고려의 청백리 최석의 팔마비(崔碩 八馬碑)와 남으로 멀리 보이는 벽파만경의 여자만(汝自灣)이며 서남으로 일망무제한 순천 락안(順天 樂安)의 평야가 안전에 완전히 뵈는 것 같아서 언제나 동경을 하게 된다.

그러나 시대 변천의 결과로 도로 확장을 하는 바람에 그 재자 가인의 정화를 실은 연자루도 몇 해 전에 파괴의 비운을 당하고 말았다. 가려한 강남 땅에 춘三月이 돌아오면 연자는 의구히 날아들겠지마는 이 연자루는 언제나 다시 재흥할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