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염사/배정승과 국기 설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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裵政丞 (배정승)嘲殺 (조살)國妓 (국기) 雪梅 (설매)

이조 국초(李朝國初) 때에 설매(雪梅)란 기생은 얼굴이 어여쁘기로도 당대에 제일이요 노래 잘하고 시(詩) 잘하기로도 또 유명한 데다가 말이 역시 천하의 호변이어서 아무러한 풍류남자라도 그 설매의 앞에서는 제법 뽐내는 오입장이 노릇을 잘 하지 못하였다. 고려 말년에 신우(辛禍) 왕이 기생을 좋아하여 천하의 명기는 궁중에 다 모아 놓고 전후향락을 마음대로 할 때에 설매(雪梅)는 역시 국기(國妓)로 뽑히어서 당시에 유명하던 기생 연쌍비(鷰雙飛) 봉가이(鳳加伊) 등과 같이 신우 왕의 갖은 총애를 다 받다가 고려가 망하고 이태조(李太祖)가 등극을 하게 되니 조선의 천하가 모두 이씨의 수중으로 돌아오는 동시에 고려 궁중에 있던 기생들까지도 역시 이씨를 섬기지 아니ㅎ지 못하게 되었다. 이 설매도 다른 기생들과 같이 역시 이씨의 궁중에 있어서 신왕을 전날 고려왕 섬기던 예와 같이 섬기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으나 마음에는 항상 불평한 생각이 있어서 달밝고 꽃피는 조용한 밤이면 옛날의 고려 왕조의 생각을 하고 혼자 가엾은 눈물을 흘리었다. 더구나 전날 왕씨 조에서 고관대작으로 국은을 후이 입던 무리들이 의리도 염체도 도무지 불고하고 다만 공명과 부귀에 눈이 팔리어서 날마다 세월을 만난듯이 의기양양하게 돌아다니는 꼴을 보면 아무리 노류장화의 몸이 된 설매라도 눈꼴이 틀리어서 보기를 싫여 하고 언제나 기회만 있으면 조롱이라도 한번 하려고 하였다.

이태조 원년(李太祖 元年) 임신년(壬申年) 七月 十六日이었다. 이태조는 고려의 왕업을 빼앗아 자기가 스사로 왕위에 오르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며 만조백관을 궁중에 모으고 등극(登極)한 축하연을 하게 되었다. 그 연회에는 물론 당시 개국공신으로 명성과 세력이 당당한 정도전(鄭道傳) 하륜(河崙) 남연(南誾) 배극렴(裵克廉) 조영규(趙英珪) 같은 여러 인물들이 다 모이고 궁중의 명기명창(名妓名唱)이며 갖은 풍악이 다 갖추워서 구신 상하가 질탕하게 놀았다. 설매도 또한 여러 기생들과 같이 그 연회에 참여하여 노래며 춤 갖은 재조를 다하여 그 연회를 축하하는 동시에 여러 사람들의 취흥을 돋아 주었다. 그 여러 사람 중에 배극이란 정승은 원래 풍류남자로 설매의 자색과 가무에 심취하여 해가 지도록 그 곁을 떠나지 못하고 같은 동료와 같이 맘껏 술을 먹고 취흥이 도도하여 최후에 설매의 손을 잡고 희롱하되 너 같은 기생은 노류장화와 같아서 오늘에 이가의 계집이 되였다가 내일에 장가의 계집이 되어도 무방한 터이니 오늘 밤에 나에게 몸을 허락함이 어떠냐고 하였다. 보통의 기생 같으면 일국의 정승으로 그런 말을 하는것이 너무도 황송하고 고마워서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머리를 숙이고 고맙다는 말밖에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설매는 조금도 어려운 기색이 없이 응구첩대로 대답하되 녜— 황송한 말씀이올시다마는 고려의 왕씨를 섬기시다가 조선의 이씨를 섬기시는 정승께서 장랑처 이랑부(張郞妻 李郞婦) 되는 저 같은 천인를 사랑하신다 한들 무슨 거리낌이 있겠읍니까 하니 만좌가 모두 빛을 잃고 배정승도 얼굴이 딸기 빛보다 더 빨개져서 아무 말도 다시 못하고 그저 돌아갔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비록 주석에서 농으로 하는 말이지마는 이 설매의 말은 칼보다 더 무섭고 날카롭지 않습니까? 뒷 세상에도 만일 설매 같은 기생이 있다면 배극렴과 같이 무안을 볼 인물이 그 얼마나 많을지 알겠읍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