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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염사/산유화가와 박향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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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性과 民謠—
山有花歌 (산유화가)朴香娘 (박향랑)哀話 (애화)
하늘 어이 높고 멀며, 땅은 어이 넓단 말가
하늘 땅이 크다 해도, 내 몸 하나 갈 곳 없네
차라리 못에 빠져 죽어, 고기밥이 되고저라
『天何高遠 地何曠漠
天地雖大 一身難托
寧投此淵 葬於魚腹』

금오산(金烏山)에 아지랑이 끼고 낙동강 연안(洛東江 沿岸)에 고운 풀이 파릇파릇하게 움 나오는 봄철이 되면 영남의 젊은 여자들은 바구니를 옆에 끼고 三三五五 짝을 지어 산으로 들로 나물을 뜯으러 갑니다. 여러 여자들이 나물을 뜯다가 따뜻한 봄바람에 제 흥이 절로 나기도 하고 혹은 어려운 시집살이에 부대끼는 설음과 그리운 친정어머니의 간절한 생각이 복받쳐 나오면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다가 구슬픈 목소리로 위에 씨어 있는 메나리(山有花) 노래를 부릅니다. 봄 달에 그 여자들의 메나리 소리를 들으면 아무리 길을 바쁘게 가는 행인이라도 발을 멈추고 듣다가 한 줄기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이 메나리 노래는 사설과 곡조도 구슬프거니와 노래의 그 출처를 들춰보면 참으로 눈물겨운 애화가 숨어 있읍니다.

× ×

때는 지금으로부터 이백삼십여 년 전 이조 숙종대왕 이십팔년 임오년(肅宗 二十八年 壬午年) 경입니다. 경상도 선산군(慶北 善山) 상형곡(上荊谷) 지금의 귀미면 형곡동(龜尾面 荊谷洞)이란 동리에는 박자신(朴自申)이란 사람의 딸이 하나 있었으니 그는 바로 이 노래의 주인공 되는 향낭(香娘)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성질이 정숙(貞淑)하여 비록 동무들과 놀 때에도 실없는 말 한 마디를 하지 않고 남녀 칠세 부동석이란 옛 습관을 저절로 잘 지켜서 다른 남자와는 말도 서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불행히 어려서 그의 모친이 돌아가고 계모의 몸에서 자라나게 되었는데 그의 계모는 원래 성질이 패악한 사람인 까닭에 향낭을 심히 학대하여 조그만 일에도 항상 꾸짖고 욕을 하며 때렸읍니다. 그러나 향낭은 조금도 반항을 하지 않고 그저 승순하였을 뿐이었읍니다. 방년이 열일곱 되던 해에 그 동리에 사는 임천순(林天順)의 아들 임칠봉(林七奉)에게로 출가를 하였으니 그때 칠봉의 나이는 겨우 열네 살의 아무 철없는 소년으로 그중에 성질이 괴패하여 처음부터 향낭을 원수와 같이 미워하고, 박대하였읍니다. 향낭은 친정에 있어서도 계모에게 무한한 학대를 받던 사람으로 명색 시집을 가서 백년을 의탁할 남편에게도 또 그러한 학대를 받게 되니 그의 박명한 신세는 참으로 가련하였읍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때에 벌써 이 세상을 비관하고 자결을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도망이라도 하였겠지마는 원래 천성이 양순한 향랑은 자기의 남편이 아직 연령이 유치하여 부부의 정을 모르는 탓으로 그러하려니 하고 어떠한 고생이 있더라도 다 참으며 다만 그 남편이 장성하여 지각 날 때만 기다렸읍니다. 그러나 속담에 개꼬리는 삼년을 묵어도 황모가 되지 못한다고 그 남편은 자랄쑤록 향낭에게 대한 학대가 우심하여 걸핏하면 뭉치를 들어 함부로 따리니 미약한 여자의 몸으로 어찌 그 학대를 견딜 수가 있겠읍니까? 백옥 같이 곱던 얼굴은 풀 푼 주각이 되고 삼단 같이 좋던 머리는 다 복쑥이 되어 버렸읍니다. 날마다 날마다 한숨과 눈물로 괴로운 세월을 보내다가 결국에는 구축까지 당하여 자기의 본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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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낭은 할 수 없이 친정으로 돌아왔으나 전날에도 학대를 하던 계모가 어찌 고맙게 굴이가 있겠읍니까, 오던 그 날부터 형언할 수 없는 학대를 하여 걸핏하면 시집살이도 못하고 쫓겨온 년이 무슨 낯작으로 친정으로 왔느냐고 욕을 하고 따렸읍니다. 그의 부친은 비록 향낭의 신세를 불쌍히 여기나 후처에게 혹하고 눈이 먼 까닭에 그것을 능히 억제하지 못하고 향낭을 그의 삼촌의 집으로 보냈읍니다. 향낭은 그의 삼촌 집에 가서 수삭 동안을 안심하고 지냈읍니다. 그러나 팔자 그른 향낭은 갈쑤록 곤란한 일만 생겼읍니다. 하루는 뜻밖에 그의 삼촌이 향낭을 부르더니 이러한 말을 하였읍니다.

『이 애 향낭아— 너의 남편이 너를 한 번 버렸은즉 다시 찾을 이도 만무하고 우리 집이 또한 빈한하여 너를 장구하게 먹여줄 수가 없을 뿐 아니라 너역 청춘에 아까운 세월을 헛되히 보낼 필요가 없은즉 내 말을 들어서 마땅한 곳으로 다시 시집을 가거라………』

원래에 정결하기 짝이 없는 향낭은 천만뜻밖에 그러한 말을 들으니 어찌 분하고 가슴이 아프지 안했겠읍니까. 한참 동안 기가 막혀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앉았다가 다시 머리를 들며 엄격한 어조로

『여봅쇼 아버님! 제가 아무리 상놈의 집 딸이기로 한 번 남에게 시집을 갔다가 어린 남편이 불량하다고 개가를 하겠읍니까. 저는 차라리 죽을 찌라도 그러한 말씀은 듣지 못하겠읍』 하고 단번에 거절하였읍니다. 자기의 삼촌은 그때까지 향상을 동정하여 불쌍히 여기더니 이 말을 거절한 뒤부터는 또한 향낭을 냉대하니 향낭은 몸과 마음을 부칠 곳이 없어서 할 수 없이 다시 시집으로 갔었읍니다. 그러나 자기의 남편은 전보다 더욱 학대를 하니 향낭은 잠시도 견딜 수가 없었읍니다. 향낭의 시부는 향낭을 불쌍히 여겨서 다른 곳으로 개가하기를 권유하고 이혼 승낙서까지 하여 주었읍니다. 그러나 향낭은 절대로 듣지 않고 그 시부에게 다시 청하기를 일간의 초옥이라도 좋으니 집 한 간만 그 근처에다 장만하여 주면 어떠한 고생을 할 찌라도 정조를 지키고 잘 살겠다고 하였읍니다. 그의 시부는 그 말을 듣지 않을 뿐 아니라 항상 향낭에게 가문을 더럽히지 말라고 말을 하였읍니다. 그것은 물론 향낭에게 자결하여 죽으란 것을 암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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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낭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그대로 살아갈 도리가 없었읍니다. 최후에 물에 빠져 죽기로 결심을 하고 오태산(吳泰山=洛東江 下流에 있는 山입니다) 밑을 향하여 갔었으니 때는 바로 초구월 초육일이었읍니다. 만산의 단풍잎은 서리로 물을 들여 향낭의 피눈물과 빛을 전주우고 청천에 뜬 기럭은 소리소리 짝을 불러 향낭의 슬픈 간장을 끊어냈읍니다. 향낭은 그곳에서 바루 빠져 죽으려고 하다가 다시 돌이켜 생각하기를 『내가 죽더라도 남이 모르게 죽는다면 내 양심에는 아무리 정결하여 아무 허물이 없더라도 시부모나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디로 개가하여 간 줄로 알기 쉬울 것이니 어찌 억울하지 아니하랴』 하고 길가에 주저앉아서 땅을 치며 통곡을 하다가 나무하러 온 이웃집 소녀(그 소녀는 그때 열두 살 된 여자입니다)를 만나 자기의 진정을 말하고 그 소녀와 같이 지주못((砥柱淵)이니 옛날 길야은(吉治隱) 선생의 비각이 있는 곳입니다) 가에 가서 자기의 다리꼭지(月子)와 치마 짚신짝 등을 묶어서 소녀를 주며 『이애 미안하지마는 이것을 갖다가 우리 시부모에게 드려서 내가 죽은 것을 알게 하고 또 내 시체를 찾게 하여다구 내가 이렇게 죽는 것은 부모에게 죄인이니 죽은들 무슨 면목으로 부모를 또 보겠느냐? 내가 비록 죽더라도 시부모는 보지 않고 장차 지하에 가서 우리 친어머니를 만나고 이런 원통한 사정이나 말하겠다』 하고 여광여취하여 혹은 통곡도 하고 혹은 노래도 하다가 물로 뛰어 들어 가려 하니 그 광경을 보던 소녀는 그만 놀라서 도망을 하였읍니다. 향낭은 그 소녀를 쫓아가서 손목을 잡고 다시 못 위(淵上)로 와서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내가 너에게 노래 한 곡조를 가르쳐줄 터이니 네가 부대 잘 기억하였다가 이 다음에 이곳으로 나물을 뜯으러 오든지 나무를 하러 오거든 나를 위하여 이 노래를 불러다구 그러면 나의 죽은 고혼이라도 너 온 줄을 알 것이고 그때에 만일 물속에서 파도가 일어나거든 나의 고혼이 그 노래를 기뻐하여 노는 줄로 알아다고』 하였읍니다. 그때 향상이 그녀에게 가르쳐 준 노래가 바로 위에 이야기한 유명한 산유화(山有花) 노래입니다. 이 말을 마친 다음에 향낭은 또 물로 뛰어 들어 가려다가 다시 소녀의 손을 잡고 또 이런 말을 하였읍니다.

『이애 인생이란 참으로 불쌍하고 더러운 것이로구나 내가 암만 죽기를 결심하였지마는 실상 물을 드려다 보니 무서워서 참아 들어갈 수가 없구나 나는 참 가련한 인생이다. 더러운 목숨을 그렇게 애끼는구나……』 하고 말을 마주 마치자마자 자기의 적삼을 벗어서 눈을 가리우고 뛰어서 물로 들어갔읍니다. 이 가련한 향낭은 방년 二十을 일기로 하고 비참한 최후를 마치고 그만 어복의 고혼이 되었읍니다. 그 얼마나 불쌍하고 가련합니까. 이 향낭이 죽을 때에 소녀에게 하던 말은 비록 몇백 년 후 오늘에 있어서도 누구나 한 줄기의 눈물을 금할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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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소녀는 그 비참한 광경을 보고 동리로 급히 돌아가서 향낭의 부친에게 그 사실을 말하였읍니다. 향낭의 부친은 그 시체를 찾으려고 강가로 다니며 무릇 열나흘 동안을 두고 애를 썼으나 종시 그 거처를 알지 못하고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갔더니 그 부친이 간 뒤에야 비로소 시체가 물 위로 떠오르고 그때까지 적삼이 그의 얼굴을 가리운 채로 그대로 있었더랍니다. 그것은 그가 죽기 전에 소녀에게 하던 말과 같이 죽은 고혼이라도 자기 아버지를 보지 않으려고 그러한지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때에 선산 부사 조귀상(善山 府使 趙龜祥)은 그 사실을 듯고 조정에 보고하여 그 무덤에 비석을 해 세워 주고 향낭전(香娘傳)과 의렬도(義烈圖)를 만들어서 그의 정열을 표창하였읍니다. 향낭의 죽은 곳은 지금까지 향낭연(香娘淵)이라 하고 그의 지은 노래 산유화(山有花)는 몇백 년 후 지금까지 전하여 부릅니다. 그 뒤 영종대왕(英宗大王) 때에 최두기 선생 성대(崔社機 先生 成大, 字는 士集이니 全州 崔氏로 大司諫 벼슬까지 하였읍니다)는 산유화곡(山有花曲) 한 편을 지어 그 사실을 자세히 서술하고 신청 천유한(申靑 泉維翰) 선생은 한나라 악부(漢樂符)의 미무펀 장(蘼蕪篇 九章)을 모방하여 산유화곡 구편을 지었읍니다. 나는 몇해 전에 선산을 갔을 때에 향낭의 빠져 죽었다는 향낭연(香娘淵)을 보고 또 그곳 사람들의 산유화 노래(지금 그 노래의 사설은 물론 말이 변하고 곡조만 남은 것입니다)를 듣고 감동된 바가 있어서 변변ㅎ지 못한 것이나마 한시 두 수를 지었읍니다. 이 글을 쓰는 끝에 문뜩 그 시 생각이 나서 기념 삼아 여기 기록합니다.

香娘淵

  巖花落盡水空流 萬古蛾眉怨恨悠.
  唱斷哀歌人不見 春山黯黯暮雲愁.

聞山有花歌

  江籬漠漠渚雲多 何處佳人唱怨歌.
  一曲未終先下淚 洛東春水欲生波.

(申靑泉 山有花歌 有江籬草不可茹之句故로 初句引用)

追記

위에 기록한 바와 같이 경상도 지방에서는 이 산유화 노래의 출처를 대개 향낭의 사실에서 나온 것으로 믿지마는 충청도 지방에서는 백제(百濟)가 망한 뒤로 그 유민들이 그것을 슬퍼하여 지은 것이라고 전하는 데 그곳에서 유행하는 소위 신유화 노래는 이러합니다.

山有花歌

  山有花兮 山有花야
  저 꽃 피어 농사일 시작하여
  저 꽃 지더라 필역 하세
     얼얼널널 상사뒤
     어여뒤여 상사뒤
             ×
  山有花兮 山有花야
  저 꽃 피어 번화함을 자랑 마라
  구십소광 잠간 간다
     얼얼널널 상사뒤
     어여뒤여 상사뒤
             ×
  충영봉에 날 뜨고
  사자강에 달 진다
  저 달 떠서 들에 나가
  저 달 저서 집에 돌아온다
     얼얼널널 상사뒤
     어여뒤여 상사뒤
             ×
  농사것는 일이 바쁘건만
  부모 처자 구제하기
  뉘 손을 기다릴고
     얼얼널널 상사뒤
     어여뒤여 상사뒤
             ×
  부소산이 높아 있고
  구룡포가 깊어 있다
  부소산도 평지 되고
  구룡포도 평원 되니
  세상 일 누가 알고
     얼얼널널 상사뒤
     어여뒤여 상사뒤

蒲菴 李師命(李白江 後孫)의 山有花歌吟에도 「遊女行歌滿水田」, 「江上吳兒踏歌行」 等의 句가 있고 일찍이 知縣 尹昶山의 山有花歌에는

  山有花歌百濟歌 百濟之國擅佳麗
  當時歌舞矜豪奢 一年三百六十日
  强半君主不在闕 黃金飾輦七寶車
  東風出遊無時歇 鐵馬聲來岩花翻
  繁華到此那可論 潭波驚沸毒龍死
  扶風王氣冷如水 興廢悠悠奈若何
  遺民但唱山有花 山有花使人涕漣
  嘆息宮墟一千年 ○○○○○○○

이라 하였고 또 蒱菴 李師命의 山有花歌吟에는 이러한 것이 있다.

  聞昔樓臺橫復斜 三千羅穀擅繁華
  生前富貴露唏草 身後悲歌山有歌
  山花落盡子規啼 千古思歸路己迷
  灞上遊魂招不得 王孫芳草目萋萋

—追記한 것은 朴魯哲氏의 開闢誌에 發表한 泗沘古都 覲叅記에서 抄出—[1]
  1. 《개벽》 신간 제3호(1935.1)에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