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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염사/춘천기 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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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古 (천고) 哀怨 (애원) 春妓 (춘기) 桂心 (계심)

금각(劍閣)과 같이 험준한 삼학산(三鶴山)이 하늘을 찌르는 듯이 구름 밖에 우뚝히 솟아 있고 비단껼같이 고운 소화양강(昭華兩江=昭陽, 華川(北漢山) 兩江)이 광활한 평야를 관류하여 이태백(李太白)의 옛 시 그대로 삼산반락 청천외(三山半落 靑天外)하고 이수중 분백로주(二水中 分白鷺洲)의 승경(勝景)을 형성한 춘천(春川)은 맥국(陌國)의 옛 도읍터요 관동(關東)의 수부이다. 자래로 산수가 가려하니 만큼 소양정(昭陽亭) 봉황대(鳳凰臺) 청평사(淸平寺) 등의 명소 고찰도 상당히 많거니와 재자가인의 명인물이 또한 많았었다. 그 허다한 명인물 중에 가장 많고 이름이 높았던 미인이 하나 있었으니 그는 절기 계심(節妓 桂心)이다. 이 계심은 지금으로부터 약 백오십 여년 전 이조 정조시대(李朝 正朝時代) 여자이니 본성은 전씨(全氏)였다. 그는 원래 천한 가정에 태어난 탓으로 어려서부터 일찌기 기적(妓籍)에 이름을 두게 되었으나 천성이 간결유정(簡潔幽貞)하여 다른 기생들과 같이 함부로 방탕하게 놀지를 않고 행세하는 집 처녀들이나 다름이 없이 몸을 단정하게 가지니 일향 사람들이 모두 그를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十七세 때에 낙적되어 부리 김씨(府吏 金氏)의 집으로 들어가서 몇 해 동안 살림살이를 하고 있었더니 불행히 그의 부모가 남의 꾀임을 받고 서울의 교방(敎坊)에 다시 입적을 시키었다. 그때 계심이가 자기의 사랑하는 김씨와 잠시나마 떨어지게 되는 안타까운 사정을 생각한다든지 또는 자기가 몸을 다시 더럽히고 마음에 맞지 않는 화류계의 함정으로 떨어져 들어가는 생각을 한다면 당장에 자결이라도 하였겠지마는 그 역시 부모의 시키는 일이라 마음대로 거역할 수도 없고 또 자기 뱃속에는 벌써부터 사랑하는 김씨의 씨가 들어있으므로 역서 가여운 생각이 나서 참아 죽지를 못하고 울며불며 김씨와 이별하고 행장을 수습하여 한양 성중으로 들어왔다. 그는 비록 사정에 어찌할 수 없어서 다시 화류계에 몸을 던지었으나 고결하고 유정한 성정은 전보다 조금도 다름이 없어서 항상 몸에다 칼과 약을 감추어 두고 만일의 경우에 어떤 불량한 악한배에게 강제로 정조를 빼앗기는 일을 당한다면 그 칼과 그 약으로 최후를 마치기로 결심하고 항상 자기의 신변을 경계하였다. 그러나 계심은 이미 몸이 화류계에 매여있고 얼굴이 남다르게 어여쁘니만큼 일반의 남자와 접근ㅎ지 않을 수 없었고 접근을 할 적마다 모든 남성들의 유혹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와 한 번만 대해본 남자이면 누구나 다 정신을 잃다시피 마취되어 혹은 금전으로 꼬이고 혹은 세력으로 위협하여 그의 정조를 한번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결심이 굳은 계심은 금전에나 세력에 조금도 굴요ㅎ하지 않고 모든 남성들의 요구하는 것을 거절하니 상당한 남자들은 그의 절조 있는 것을 감탄하나 불량한 악소배들은 도리어 그를 건방지고 괘씸하게 생각하고 미워하였다. 그 중에도 어떤 소년의 무리들은 그를 흠모하던 끝에 극단의 수욕을 가지고 어느 날 밤에 그의 집으로 놀러 갔다가 폭력으로 그의 정조를 유인하게 되니 계심은 비록 천한 기생의 몸이나 그러한 강제의 굴욕을 당하고 또 순결 무구한 뱃속에 있는 어린 아이까지 놀라 타태를 하게 되니 어찌 그냥 참고 살아 있을 수가 있으랴. 그때에 즉시 자살하기로 결심하고 자기의 남편이었던 김씨에게 유서를 써놓고 집안사람이 잠든 기회를 타서 자기 손으로 그 악소년에게 잡히었던 머리와 젖을 칼로 잘라버린 다음에 독약을 먹고 죽었다. 그때 그의 남편이었던 김씨는 계심을 이별한 후 항상 심회가 불편하여 밤에도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있던 중 그날 밤에 꿈을 꾼즉 비몽사몽 간에 계심이가 왔는데 전신에 유혈이 낭자하고 눈물이 비 오듯 하며 자기를 고향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였다. 김씨는 그 꿈을 깨고 하도 이상하여 그날로 즉시 서울로 와서 계심의 집을 찾은즉 계심은 과연 그렇게 불쌍히 죽었었다. 김씨는 그 사실을 들어 관청에 호소하고 즉시 시체를 수습하여 그의 고향인 춘천으로 돌아가서 그의 고향인 봉의산록(鳳儀山麓)에 장사 지내니 그때 춘천 순찰사 이모(巡察使 李某)는 그의 절개를 가상히 여겨 그 집에 정문을 해 세우고 군수(郡守)는 또 그의 무덤 앞에다 춘기계심 순절지분(春妓桂心 殉節之墳)이란 여덟 자를 새겨 석비(石碑)를 해 세웠으니 그 비명(碑銘)은 박종정(朴宗正)이 짓고 글씨는 유상륜(柳尙論)이 썼으며 때는 정조(正祖) 二十一년 병진(丙辰) 오월이었다.

이 사실은 春川에서 傳해 오는 이야기인데 下記한 그 碑銘과는 多少 差異가 있으므로 後日의 參考를 爲하여 그 碑銘 全文을 記錄한다.

春妓桂心殉節墳碑銘

節妓全姓桂心名, 少仍母賤籍教坊, 簡潔之姿幽貞性, 持身無異處閏房, 十七于歸府吏家, 與子成說許不更, 退來自守粉黛中, 不學他人嬌笑呈, 尙方移屬被誰囑, 收拾嫁衣入漢京, 長安挾斜惡少多, 料得行路遭暴强, 裙帶秋蓮囊儲藥, 鴻毛一擲矢自壯, 臨別殷勤托所天, 弱息猶關鐵肝腸 腹中有物添身屢 忍能割愛手墮傷, 垢身毀容便自沒, 會須一死心深剛, 月明人靜中元夜, 從容飲毒如飴糖, 傍人驚救已無急, 奄奄僅辦猶聞聲, 賣髢備柩屬後事, 肌膚勿露收歛精, 三度家書繫腰間, 面面訣語哀其鳴, 夫婿抱櫬歸篙里, 一靈難掩夢感場, 玉碎珠沈等綠珠, 節義方知逾秋霜, 巡相李公開其事 錦水瓊娘變表旌, 〇我伐石瞥棹樑, 工備辨給出上營, 新莅明府且捐捧, 墳前標立三尺盈, 春川旅客〇〇〇, (三字未詳) 掇取餘意述此銘

嘉慶元年丙辰五月 日
錦城 朴宗正 銘
文化 柳尙綸 書

—嘉慶元年은 正祖 二十一年이다. 桂心의 墳墓는 只今 春川邑에서 昭陽江으로 가는 街道邊에 尙存하니 前날 春川某人 詩에 桂心孤塚落花多라 한 것이 卽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