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염사/해모수와 유화의 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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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一編. 后妃·女王·公主·宮人[제1편. 후비, 여왕, 공주, 궁인]
解慕漱 (해모수)柳花 (유화)奇緣 (기연)

지금으로부터 약 이천여년 전이다. 부여(扶餘) 나라에는 해부루(解夫婁)란 임금이 있었으니 그 임금은 정치를 잘하여 국내가 태평하매 아무 걱정할 일이 없었으나 다만 나이 많도록 왕자가 없는 까닭에 그것으로 걱정을 하여 천하의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아들 낳기를 빌었다. 하루는 왕이 전과 같이 말을 타고 어떤 명산을 찾아가다가 곤연(鯤淵)이란 연못가에 이르니 말이 돌연히 발을 멈추고 그곳에 있는 큰 돌(石)에다 머리를 대고 눈물을 더벅더벅 흘리었다. 왕은 그것을 보고 크게 괴상히 여겨 신하로 하여금 그 돌을 굴리게 하고 보니 난데없는 어린아이가 하나 있는데 금색이 찬란하고 형용이 마치 개고리(蛙)같이 생기었다. 왕은 그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말하되 하느님이 나에게 아들을 점지하여 주심이라고 걷어 길으고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여 태자를 삼으니 그가 곧 뒷날 동부여(東扶餘)의 금와왕(金蛙王)이다.

그때 그 나라에 정승으로 있는 아란불(阿蘭弗)이 임금에게 여쭈우되 일전에 신이 꿈을 꾼즉 하느님이 강림하여 말씀하기를 『오라지 아니 하여 나의 아들로 너의 국도에 나라를 건설ㅎ게 할 터이니 너희들은 동햇가(東海濱)에 있는 가엽원(迦葉原)이란 땅으로 피하여 가라 그 땅은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이 잘되는 곳이니 그곳으로 천도하면 제일 좋겠다……』 하시더이다 하고 그렇게 왕을 권하여 그곳으로 천도ㅎ게 하여 나라 이름을 동부여로 고치고 그 구도에는 자칭 천제의 아들이란 해모수(自稱 天帝子 解慕漱)가 와서 도읍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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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이제부터 본문제로 들어간다. 거금 一九九四年전 임술(西紀前 五九=漢宣帝神雀三年 壬戌) 사월갑인(甲寅)이다. 북부여국 천제(北扶餘國 天帝)는 태자를 부여국 고도에 보내서 나라를 건설ㅎ게 하니 그 태자는 곧 해모수다. 해모수는 그곳으로 올 때에 오용차(五龍車)를 하고 공중으로 내려오고 종자 백여 인은 모두 백곡채운(白鵠彩雲)을 타고 공중에서 배회하니 서기가 하늘에 가득하고 선악(仙樂) 소리가 공중을 진동하였다. 그들 일행은 웅심산(熊心山)에 머물러 있다가 십여 일만에 비로소 하강하였는데 머리에는 오우관(烏羽冠)을 쓰고 허리에는 용광검(龍光劍)을 비껴 치고 아침이면 일을 하다가 저녁때에는 하늘로 올라가니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천왕랑(天王郞)이라고 불렀다.

그때에 청하백(淸河伯=淸河는 今 鴨綠江)은 세 딸이 있었으니 맏딸은 유화(柳花)요 둘째 딸은 훤화(萱花)요 세째 딸은 위화(葦花)였다. 그 세 여자는 일란풍화한 어느 날에 웅심산(能心山) 밑 연못가로 산보하러 나아가니 그 어여쁜 태도가 마치 삼라의 연화와 같고 환패소리 쟁쟁하여 여러 사람의 이목을 격동하였다. 왕은 그들을 한번 바라보고 정신이 황홀하여 좌우 신하더러 말하기를 내가 만일에 저런 여자를 얻어서 왕비를 삼는다면 평생에 소원을 이루겠고 또한 귀한 왕자를 낳겠다고 하니 좌우 신하들이 모두 왕을 위하여 그 여자를 다려 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여자들은 왕의 일행을 보고 먼저 피하여 물속으로 들어가니 여러 좌우는 다시 왕께 여쭈우되 대왕께서는 마땅히 궁전을 치어서 그 여자들을 그곳으로 꾀어들이고 문을 막으시라 하니 왕이 그럴 듯이 생각하고 말채찍(馬鞭)을 둘러 땅을 그으니 별안간에 화려장대한 구리집(銅室)이 이루었다. 왕은 그 집에다 세 자리와 술을 베풀어놓고 세 여자를 불러서 각각 자리에 앉히우고 서로 술을 권하여 술이 크게 취한 다음에 급히 문을 잠그려고 하니 세 여자가 모두 놀라 달아나다가 그중 큰 여자 유화가 왕에게 잡히었다. 하백(河伯)은 그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사신을 보내 책망하되 너는 어떠한 사람이건대 감히 나의 딸을 잡아두고 보내지 않느냐 하니 왕은 사실대로 대답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로서 당신의 딸과 혼인을 하려고 그리했다고 대답하였다. 하백은 그 말을 듣고 더욱 노하여 다시 사신을 보내 말하되 네가 만일 천제의 아들이요 나의 딸과 혼인을 하고 싶으면 마땅히 중매를 놓고 예절을 갖추어서 할 일이지 그렇게 무례하게 남의 처녀를 강제로 잡아두는 법이 어디 있느냐 하니 왕이 대답할 말이 없으매 크게 부끄러워하여 장차 하백을 찾아보고 사죄를 하려 하니 하백의 집 문이 굳게 닫히어서 들어갈 수도 없고 도 그 여자를 놓아 보내려 하나 그 여자는 벌써 왕께 정을 두어 가기를 싫여하니 왕은 진퇴양난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곤난 중에 있었다. 유화는 왕의 그러한 기색을 보고 왕께 말하되 만일 용차(龍車)만 있다면 능히 하백의 집을 갈 수 있다 하니 왕이 기뻐하고 이에 하늘을 향하여 축원하니 별안간에 오룡차가 공중으로부터 내려왔다. 왕은 유화와 같이 그 차를 타고 풍운을 좇아서 잠깐 새에 하백의 궁에 이르니 하백은 예절을 갖추어 맞아 드리었다. 그러나 하백은 그때까지도 왕이 자기의 딸을 사사로히 잡아둔 것을 분하게 생각하고 좌정하며 즉시로 책하여 혼인은 인간의 대사요 천하 통규가 있는 것이라 어찌 예법을 좇지 않고 강제로 하여 우리 가문을 욕뵈느냐 하고 또 말하되 네가 언필칭 천제의 아들이라고 자랑을 하니 천제의 아들이면 무슨 신통한 일이 있느냐. 내가 이제 큰 시험을 한 번 하여 보겠다 하고 크게 소리 한 번을 치더니 하백이 그 집 뜰 앞 물속으로 들어가서 잉어(鯉魚)가 되어 물결을 쫓아다니며 활발하게 뛰노니 왕은 수달(水獺)이가 되어 그 고기를 잡고 하백이 또 산으로 뛰어가서 사슴(鹿)으로 변하니 왕은 또 승냥이(豹)가 되어 쫓아가고 하백이 공중으로 날아서 꿩(雉)이 되니 왕은 다시 매(鷹)가 되어 꿩을 드리쳤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시험을 하여도 하백이 항상 이기지를 못하니 그제야 하백은 왕을 천제의 아들로 믿고 다시 예절을 갖추어 혼인을 하고 그 뒤에는 하백이 도리어 왕이 자기의 딸을 박대할까 염려하여 음식과 풍류를 크게 베풀어 잔치를 하고 왕을 권하여 술을 대취ㅎ게 한 다음에 자기의 딸과 같이 적은 가죽 주머니 속에다 넣고 용차에 실어서 하늘로 올려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용차가 미처 물속에서 나오기 전에 왕은 벌써 술이 다 깨어 여자의 황금비녀로 그 가죽 주머니를 짤라 메어뜨리고 그 구멍으로 뛰어 나아가 홀로 하늘로 올라가니 하백이 크게 노하여 그 딸을 꾸짖어 말하되 네가 나의 말을 듣지 않다가 마침내 가문을 욕뵈었다 하고 좌우를 명하여 그 딸의 입을 얽어 잡아다리니 그의 입술이 석자 길이나 되게 빠져나왔다. 하백은 그 딸을 생전에 다시 아니 보기로 결심하고 다만 노비(奴婢) 두 사람만을 주어서 멀리 우발수중(優勃水中)으로 귀양을 보내니 우발은 백산(太白山) 남쪽에 있는 연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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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연못가에는 강력수추(强力洙鄒)란 사람이 있어서 항상 고기 잡기로 업을 삼고 있더니 그 여자가 그곳으로 간 뒤부터는 이상하게도 고기가 전에처럼 잘 잡히지 않을 뿐 아니라 고기의 구경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 어부는 물론 그 여자의 간 것을 알지 못하였다) 어부는 그것이 하도 이상하여 동부여 금와왕(東扶餘 金蛙王)을 찾아보고 여쭈우되 근래에 우발(優勃) 못 속에 고기가 절종이 되다시피 하였으니 의심건대 무슨 짐승이 못 속에 있는 듯 하다고 하였다. 왕도 그 말을 듣고 또한 이상히 여겨 어부로 하여금 못에 그물(網)질을 하게 하니 그 그물이 다 찢어지고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왕은 다시 쇠그물(鐵網)을 만들어서 훌치질을 하니 그제야 한 여자가 끌려 나오는데 돌 위에 앉은 그대로 나오고 혀가 길어서 아무 말도 잘 하지를 못하는지라 왕은 어부를 명하여 그 혀를 세 차례나 자르니 그제야 말을 하고 또 그 여자가 하백의 딸인 것과 천제자의 비(妃)인 것도 알게 되었다. 왕은 그를 후하게 대접하여 으슥한 별궁에 거처하게 하니 아까까지 어둑하던 방에 별안간 해가 명랑하게 비치었다. 그 여자는 해를 피하여 다른 곳으로 간즉 가는 곳마다 해가 쫓아 비치고 인하여 태기가 있더니 얼마 뒤에 왼편 겨드랑이(左腋)에서 알을(卵) 한 개 낳았는데 크기가 약 댓 되가량은 되었다. 금와왕은 그것을 보고 괴이하게 생각하여 말하되 사람이 새알을 낳는 것은 상스럽지 못한 일이라고 마구간(馬廏)에 버리니 우마가 밟지를 않고 개와 도야지를 주니 그것들도 또한 먹지를 않으며 깊은 산에 갖다 두니 여러 짐승들이 또한 보호하였다. 금와왕은 더욱 신기하게 생각하고 자기가 그것을 깨뜨려 보려 하니 칼이고 도끼고 다 들지를 않으며 찬란한 일광이 항상 그 위에 비치었다. 왕은 그것을 어찌하지 못하고 최후에 다시 그 어머니에게 보냈더니 얼마 아니하여 그 알이 탁 터지고 그 알 속으로부터 일개 기남자가 뛰어 나오는데 골표가 비범하고 성음이 홍대하니 때는 한선제 신작 사년 계해 사월(漢宣帝 神雀 四年 癸亥 四月)이었다. 그는 일곱 살 때에 자기 손으로 능히 활을 만들어서 백발백중으로 활을 잘 쏘니 그때 그곳 시속 말에 활 잘쏘는 것을 주몽(朱蒙)이라 함으로 인하여 이름을 주몽이라고 지었다. 그는 금와왕에께서 자라매 금와의 여러 아들들이 항상 시기하여 그를 해치려고 하므로 몰래 도망하여 엄호수(淹淲水)에까지 이르니 물에 다리도 없고 선척도 없으며 뒤에 추병은 급히 쫓아와서 참으로 위기일발에 임하였다. 주몽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암축하여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으로 난을 피하여 여기까지 왔는데 뒤에 추병은 급히 오고 건너갈 길은 없사오니 천우 신조하시와 이 생명을 구하여 주십시오 하고 있었더니 난데없는 어별(魚鼈)들이 모여와서 다리를 놓아주어 무사히 그 물을 잘 건넜다. 그는 그 길로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니 부여왕은 특히 그를 사랑하여 딸을 주어 사위를 삼고 그 왕은 또 아들이 없으므로 죽을 때에 그 나라까지 맡기니 주몽은 드디어 그 나라의 왕이 되어 비류국(沸流國)과 그 부근의 여러 나라를 정복하여 대고구려국(大高句麗)을 건설하였으니 그가 곧 유명한 고구려 시조 주몽왕이다.

—東國 李相國集 東明王篇序 參照[동국 이상국집 동명왕편 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