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염사/혜경궁 홍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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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慶宮 洪氏 (李朝 莊祖后)

이조 력대 후비 중에 지덕의행(至德懿行)을 가지신 이가 많지만은 여러 가지의 변고를 많이 치르면서도 정숙화온하야 백세의 귀감(龜鑑)이 될 만치 자도(子道) 처도(妻道) 모도(母道)의 모든 부덕을 결행한 이는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였다.

그는 풍산 홍씨(豊山 洪氏)로 영풍부원군 홍봉한(永豊府院君 洪鳳漢)의 따님이니 영조 갑자(英祖 甲子)에 일즉이 장헌세자비(莊獻世子妃)로 책봉되었었다. 그때에 영조는 년로하신 까닭으로 세자를 대리로 하야 만기를 청정케 하였으나 여러 간세배가 모함을 하매 필경 영조 三十八년 임오 윤오월에 이르러 숫자의 위를 폐하고 니여서 세자를 역죄로 몰아 만고에 없는 참변을 이르키니 (세자를 뒤주 속에 넣어서 죽였다) 때에 홍비의 나이는 二十八 세의 장년으로 한 아드님과 두 따님을 다리고 (아드님은 곧 뒷날에 정조대왕(正祖大王)이였다) 궁천 극지의 애통을 하며 궁원의 조고마한 집 속에 유폐의 몸이 되었었다. 그 뒤에 영조는 자긔의 잘못을 깨닫고 후회하야 세자의 위호를 다시 복위시키고 사도(思悼)의 시호(諡號)를 나리며 정조(正祖)로 세손(世孫)을 삼어 효장세자(孝章世子=眞宗)의 양자를 삼었었다. 그 뒤 영조가 승하한 후 정조가 즉위하였으나 그는 이미 백부에게 출계하였음으로 자기 소생모인 홍씨는 추숭치 못하고 그냥 혜경궁이라 칭하야 존양하게 될 뿐이였다. 임오 참변 이후로 당화(黨禍)는 그의 본집에까지 다급하야 일반 족친이 모두 주육을 당하고 또한 족이 되니 그는 항상 극도로 비통하야 자결할 생각이 많었으나 오직 정조 한 분이 있음으로 모든 것을 다 참고 있었다. 그 뒤 정조가 승하한 뒤에는 흉도(凶徒)의 발호가 더욱 심하야 홍비의 신변에는 여러 가지의 말할 수 없는 위난을 당하였으나 일호의 원망과 한탄하는 일이 없이 六十여 년 동안에 오직 무참하게 돌아간 세자와 선왕의 저세상 복을 빌고 외척의 정권 참례하는 것을 부당하게 생각하야 거기에 조금도 고려치 않고 일생에 피눈물 흐르는 회포를 친필로 기록하야 한 책을 만들었으니 그것은 곧 한중만록(閒中漫錄)이라는 것으로 읽는 사람이 누구나 한 글자에 한 줄기의 눈물을 흘리지 않게 못하게 되었다. 그는 부인으로 너희귀한 상수를 하다가 승하하고 고종 기해(高宗 己亥)에 와서 부군과 함께 제후(帝后)로 추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