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해탄/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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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동차에 실려 유리창으로 내다보던 저 건너 동산도
벌써 분홍빛 저고리를 벗어 던지고,
넓다란 푸른 이파리가 물고기처럼 흰 뱃바디를 보이면서,
제법 살았소 하는 듯이 너울거린다.
어느새 여름도 짙었는가보다.

그러기에 내가 이 절에 올 때엔,
겨우 터를 닦고 재목(材木)을 깎던 집들이
벌써 기둥이 서고 지붕이 덮이어,
영을 깔고 용마름을 펴는 일꾼이 밀짚모자를 썼지.

두드러지게 잘된 장다리밭 머리를
곱게 다린 황나적삼을 떨쳐 입고,
꽁지가 빨간 잠자리란 놈이 의젓이 날고 있다.

밭머리에 서 있는 싱거운 포플러나무가
헙수룩한 제 그림자를 동그라니 접어 안고,
산 넘어 방적회사의 목 멘 고동이
서울 온 촌 아기들을 식당으로 부를 때,
아주 소리개 모양으로 떠돌아 보고,
물을 차는 제비나 된 듯 내달으며 넘놀아도 보던,
잠자리 녀석들도 꼬리를 오그리고 죽지를 끌며,
장다리가 세로 가로 쓰러져 있는 밭 가운데로,
졸리는 듯 내려앉는다.
정말 요새 뙤약볕이란 돌도 녹일까 보다.

후끈한 바람이 진한 걸음 내를 품기며,
나무 끝을 건드리고 밭 위를 지나간다.
벌 떼가 몇 개 안 남은 무색한 보라빛 꽃수염을
물었다 놓고, 놓았다 물며,
왕 왕 날개를 울리면서 해갈을 한다.
호랑나비는 들어가면 눈이 먼다는 독한 가루를 잔득 실고 아롱거린다.

꼬리를 건드리고 머리를 만져도
저 잠자리란 녀석은 다시 일지를 않으니,
졸고 있나, 그렇지 않으면 인제 벌써 죽었나?
거미줄 채를 손에 든 선머슴 아이들이
신발을 벗어 들고 성큼 발소리를 죽여 가며,
한 걸음 두 걸음 곧 손이 그 곳에 미칠텐데,
오, 저런 망한 녀석들의 심술궂은 눈 좀 보게.

어쩌면……
고렇게 꼿꼿하고 고운 두 날개,
빨간 빛깔이 기름칠 한 것처럼 윤택 나는 날씬한 체구가
어찌 될지!
어째 맵기 당추 같은 고추짱아의 마음도 모르고 있을까?
앵두꽃 진 지가 얼마나 된다고 요만한 뙤약볕에,
쨍이야, 벌써 ‘호박’처럼 맑던 네 눈도 어두워졌니?

녹음의 짙은 물결이 들 가득 밀려오고 밀려간다.
동산은 어른처럼 말없이 잠잠하다.
아마 연연한 봄의 고운 배는 벌써 엎어졌나보다.
정말 이 따가운 뙤약볕의 소나기통에,
굳은 날개도 두터운 비름 이파리도 다 또 일수 없이 풀이 죽고 말았을까?
골짜기 속에서 낮잠을 자던 게으른 풀숲에,
젊은 꾀꼬리가 한 마리 푸드득 나뭇잎을 걷어차고,
고요한 침묵의 망사를 찢고 하늘로 날아갔다.

오오, 고마워라, 얼마나 고마울까!
문득 나는 이 조그만 괴로운 꿈을 깨어,
단장을 의지하여 허리를 펴서 뒷산을 보았다.

숲 사이에 원추리가 한 떨기 재나 넘은 보름달처럼,
음전히 머리를 쳐들고,
꾀꼬리가 남긴 노래 곡조의 여음을 듣고 있지 않은가!
나는 무거운 다리를 이끌어 산비탈을 올라가면서,
“꿈꾸지 말고 시대의 한가운데로 들어오라”는 식물들의 흔드는 손을 보았다.
“너는 아직도 죽지 않았었구나” 하고,
원추리가 다정스러이 웃는 얼굴을 보았다.
나는 잠깐 얼굴을 붉히고 머리를 숙였다가
다시 고운 나비와 무성한 식물들의 겨우살이를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때 나는 아직 살아있는 행복이 물결처럼 가슴에 복받침을 느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