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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해탄/옛 책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무더운 여름 한밤의 깊은 어둠이
모색의 힘든 노동에 오래 시달린
내 노력의 전신을 지그시 누른다.

꺼칠한 눈썹 아래 푹 꺼진 두 눈,
한 끝이 먼 희망의 항구로 닿아 있어,
아이 때 쫓던 범나비 자취처럼
잡힐 듯 말 듯 젊은 날의 긴 동안을 고달피던
꿈길 아득한 옛 기억의 맵고 쓴 나머지를
다시 그러모아 마음의 헌 누각을 중수하려
몇 번 힘을 내고 눈알을 굴려 방안에 좁은 하늘로 헤매었는가?

그러나
검은 눈썹은 또다시 피로에 떨면서,
길게 눈알을 덮고,
주검의 억센 품안에서 몸을 떨쳐 휘어나려
오늘도 어제와 같이 고된 격투(格鬪)에 시달린 육신은
푸근히 식은 땀의 생을 터치며
쪽 자리 위에 네 활개를 내어 던진다.

그러면 벌써 나의 배는 파선하고 마는 것일까?
한 조각의 썩은 널조차 나를 돌보지 않고,
그것 없이는, 정말로 그것 없이는,
평탄한 물에서도 온전히 그 길을 찾을 수 없는
진리에로 향한 한 오리 가는 생명의 줄까지도
인제는 정말로 끊어져,
손을 들어 최후의 인사를 고하려는가?
오오, 한 줌의 초라한 내 머리를 실어 오랫동안,
한마디 군소리도 없이 오직 나를 위하여 충실하던 내 조그만 베개
반딧불만한 희망의 빛깔에도 불길처럼 타오르고,
풀잎 하나 그 앞을 가리어도 천오 리 머리털이 활줄 같이 울던
청년의 마음을 실은 내 탐탁한 거루인 네가
이제는 저무는 가을의 지는 잎 되어 거친 파도 가운데 엎드려지면서,
그 최후의 인사에 공손히 대답하려는가?

나는 다시 한 번 온몸의 격렬한 전율을 느끼며,
춥고 바람 부는 삼동(三冬)의 긴 겨울밤,
그렇게도 잘 새벽 나루로 나를 나르던,
내 착하고 충성되니 거루의 긴 항행(航行)을 회상한다.
굴욕의 분함이 나를 땅바닥에 메다쳤을 제도,
너는 보복의 뜨거운 불길을 가지고 나를 일으키었고,
패퇴의 매운 바람결이
내 마음의 엷은 피부를 찢어,
절망의 깊은 골짝 아래 풀잎 같이 쓰러뜨렸을 그때에도,
너는 어머니와 같이 나를 달래어 용기의 귀한 젖꼭지를 빨리면서,
아침 해가 동쪽 산머리에 벙긋이 웃을 때,
일지도 않게 늦지도 않게 새벽 항구로 나를 날랐었다.

지금
우리들 청년의 세대의 괴롭고 긴 역사의 밤,
검은 구름이 비바람 몰고 노한 물결은 산더미 되어,
비극의 검은 바다 위를 달리는 오늘
그 미덥던 너도 돛을 버리고 닷줄을 끊어,
오직 하늘과 땅으로 소리도 없는 절망의 슬픈 노래를 뜯어,
가만히 내 귓전을 울린다.

오오, 이것이 청년인 내 주검의 자장가인가?

나는 참을 수 없는 침묵에서 몸을 빼어 뒤척일 때,
거칫 손에 닿는 조그만 옛 책자를 머리맡에서 집었다.

책장은 예와 같이 활자의 종대(縱隊)를 이끌고,
비스듬히 내 손에서 땅을 향하여 넘어간다.

이 곳 저 곳에 굵게 내리 그은 붉은 줄,
틈틈이 빈 곳을 메운 낯익은 내 서투른 글씨,
나는 방안 그득히 나를 사로잡은 침묵의 성돌을 빼는,
그 귀여운 옛 책의 날개 소리에 가만히 감사하면서,
푸르륵 최후의 한 장을 헛되이 닫칠 때,
나는 천지를 흔드는 포성(砲聲)에 귓전을 맞은 듯,
꽉 가슴에 놓인 빙낭(氷囊)을 부여잡고 베개의 깊은 가슴에 머리를 파묻었다.

N․L 저(著) 「1905년의 의의」

1905년!
1905년!

베개는 노래의 속삭임이 아니라, 위대한 진군의 발자국 소리를,
어둠은 별빛의 실이 아니라, 태양의 타는 열과 눈부신 광채를,
고요한 내 병실에 허덕이는 내 가슴 속에 들이붓고 있다.

저 긴, 긴 북국의 어두운 밤,
얼마나 더럽고 편하게 그 자들은 살고,
얼마나 깨끗하고 괴롭게 그들은 죽었는가?
밝은 것까지도 밤의 질서로 운행되어가는
이 괴롭고 긴 밤,
주검까지도 사는 즐거움으로 부둥켜안은 청년의 아픈 행복을,
나는 두 눈을 감아 아직도 손바닥 밑에 고요히 뛰고 있는,
내 정열의 옛 집에서 똑똑히 엿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