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해탄/주리라 네 탐내는 모든 것을
젊었을 그 때엔 저렇듯 아름다운 꽃 이파리도,
이곳엔 꿈인 듯 흩어져 버리고,
천년의 긴 목숨을 하늘 높이 자랑하든
저 아름드리 솔 잣나무의 높고 큰 줄기도
역시 이곳에는 허리를 꺾고 넘어지나니,
이 모든 것의 위에를 마음대로 오르고 내리는
온갖 새의 임금인 독수리여!
너도 역시 마지막엔 그 크고 넓은
두 날갯죽지를 흐늘어뜨리고,
저무는 가을 날 초라한 나뭇잎새 바람에 나부껴 흩날리듯
옛 그날이 있는 듯 만 듯 덧없이
한줌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가?
노한 구름이 비바람 뿌리며 소리치던
그 험한 날 천리 먼 길에도,
일찍이 날개를 접어 굴욕(屈辱)의 숲속에서
부끄러운 눈알을 한번도
두려움에 굴려본 기억이 없는
오오! 하늘의 영웅이여! 너도
주검이 한번 네 큰 몸을 번쩍 들어 땅 위에 메다치면
비록 어지러운 가슴을
누를 수 없는 노함과 원한에 깨칠지언정,
날개를 펼쳐 다시 한 번
이곳에서 하늘을 향하여
화살처럼 내닫지는 못했는가?
오오! 말 없는 악령(惡靈)이여!
모든 것의 무덤인 대지여!
너는 말하지 못하겠는가?
정말로 너는 목숨 있는 모든 것을
주검으로 거두는,
살아있고 살아가는 모든 것의 최후의 원수인지……
너는 대답지 못하겠는가?
천고의 옛날과 같이 지금도
또 끝없을 먼 미래에까지
너는 역시 말 없는 짐승이 되어
이곳에 엎뎌져 있겠는가?
높은 산악이여! 굳은 암석이여!
끝없는 바다까지도 네 품에 안고 있는
무한한 담묵과 암흑의 군주여!
만일 네 넓고 푸른 대양이나 호수의 눈과 같이
언제나 뜨고서도 보지를 못한다면,
이 한 몸 둥그런 돌멩이 만들어
영원히 감지 않는 네 속에 풍덩 뛰어 들리라.
만일 네 누르고 푸른 가죽이나 검고 굳은 바위처럼
아무것도 감지할 수 없다면은,
사랑하는 어머님 젖가슴 뜯으며 어리광 부리던,
이 두 손으로 네 위에 더운 피 흐르도록 두드리리라.
만일 네 아늑한 산맥의 귓전이
하늘을 찢는 우뢰(雨雷)소리조차 들을 수 없다면,
못 잊을 임 볼 밑에서 뜨거운 마음을 하소연 하던,
이 다문 입을 열어
입술이 불되도록 절규하리라.
만일 네 깊은 심장이
어둠과 침묵 밖에는
아무것도 알기를 싫어한다면,
두 손과 다리를 가슴에 한데 모아
운석(隕石)이 되어
네 위에 떨어지리라.
그래도 만일
네 영원히 침묵의 제왕으로
주검밖에 아무것도 알지를 못한다면,
주리라! 오오, 네 탐내는 모든 것을……
너의 멀고 넓은 태평양 바다의 한옆
아늑한 내해 가운데
한 오리 내어민 반도 동쪽 가,
성천강(城川江) 물줄기 맑게 흐르는 남쪽 기슭인
네 한길 품속에 영원히 잠든
내 사랑하는 벗 그가
네게 내어준 그것과 같이
심장 두 팔 두 다리,
도 그 위를 뛰고 달리며
일찍이 어떠한 두려움에도
허리를 굽히지 않았던
청년의 이 온몸을……
너는 탐내는가? 말해보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으로도 아직
네 탐욕의 목마름은 나을 수가 없겠는가?
오오! 주리라!
그러면 살아있는 이 위의 모든 것을,
사랑하고 미워하며 울고 웃는 모든 것과,
흐르는 세월의 물결 이외의
아무런 권위 앞에서도
일찍이 머리를 숙여보지 않았던,
부라는 정열과 살아있는 생각의 모두를……
암흑의 심장이여! 주검의 악령이여!
네 이 가운데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를 탐낸다면,
소리 높여 대답하라.
그러나 만일,
오오! 그래도 만일,
네 악마의 검은 배가
그것으로도 아직 찰 수가 없다면,
주리라! 그의 벗 되는 이 몸과 나머지 모든 것을……
그리고―
그가 안고 울고 웃고 즐기고 노하며
마지막 그의 목숨을 내놓으면서도,
오히려 무서운 매발톱이
어린 목숨을 탐내어 하늘을 감돌 제,
철모르는 어린것을 두 깃으로 얼싸안는
어미새의 가슴처럼,
그것을 그것을 지키려고
온 몸을 흥분에 떨던,
그의 평생의 요람이었고
그의 모든 벗의 성곽이었던
청년의 정열과 진리의 무대까지도……
그러나 또 만일, 또, 또 만일,
탐욕의 열병에 썩어가는 네 오장이
그것으로도 아직 찰 수가 없다면,
그의 자라나던 성곽과 노래의 대오
살림의 진실과 진리의 길을
꽃 위에 수놓던 군대의 모두가,
열 몇 해 오랫동안 그 배 위에서,
산 같은 풍랑의 두려움에도
신기루의 달큼한 유혹에도,
오직 검은 하늘 저쪽
밝은 별 이끄는 만리 뱃길에
키 자루를 어지럽히지 않았던,
이 검은 쇠로 굳게 무장한
전함 돛대 끝 높이 빛나는 우리들
‘××××’의 깃발까지도,
네 그칠 바 모르는 오장의 밑바닥을 메우려고
검은 두 손을 벌린다면,
벌레의 구물대는 그 위에
내놓기를 아끼지 않으리라!
그러나 네 높고 큰 산악의 귓전을 기울여보라!
네 잠잠히 넓은 대양과 호수의 푸른 눈알을 굴려보아라!
벗 ‘김’이 누워있는 불룩한 무덤위에
조는 듯 피어있는 머리 숙인 할미꽃이라든가,
아침 햇빛에 잠자던 머리를 들어
아득히 먼 저 끝까지
날마다 푸른 물결 밀려가는
이 아름다운 봄철의 들판이라든가,
그 위에 우뚝 허리를 펴
지나간 시절에게 패전한 흉터가 메일랑 말둥한
움 터오는 나뭇가지들의 누런 새 순이라든가,
저 버들가지 흩날리는 언덕 아래
텀벙 엎더져 눈[雪]을 털고
동해바다 넓은 어구로 흘러내리는
성천강의 얼음조각이라든가를……
으오, 유빙(流氷)이다!
보는가! 저 얼음장 뒹구는 위대한 물결을!
진실로 미운 것이여!
다시 두 번 어깨를 겨누어 하늘 아래 설 수 없는
정말로 정말로 미운 것이여!
아는가?
세월은 네 품이 아닌
먼 저쪽에서 흐르면서
죽어가는 것 대신에 영구히 새로운 것을 낳고있다.
어제도, 지난해에도, 태고의 옛날에도,
그리고 끝 모를 먼 미래에까지도……
정말로
가을에 아프고 쓰라린 기억은 한번도
누런 풀숲에서,
가만히 머리를 숙이고 얼굴을 붉히는
할미꽃의 용기를 꺾지는 못했었고,
거센 동해의 산 같은 격랑도
삼동(三冬) 긴 겨울
길 넘게 얼어붙은 빙하를 녹여
하구로 내려 미는
한 오리 성천강의 가냘픈 힘을
막아본 적은 없었다.
하물며 이른 봄의 엷은 바람으로
어찌 새싹 푸르러
손뼉같은 큰 잎새 피어,
태양과 함께 청공 아래 허덕이는
여름철의 기름진 성장의 힘을
누를 수 있겠는가?
모진 바람 지동 치는 암흑한 언덕 위에
죽은 듯 엎더진 살아있는 모든 것의
수없는 슬픔을
영구히 벗지 못할 겉옷 속에
장사지내려던 눈 덮인 들
너와 함께 태초로부터
불타던 태양까지가 그의 힘을 잃고
헛되이 긴 동안을 글러가던
그 끝없이 차고 흰 벌판 위에
일제히 생탄의 마당으로 잡아 일으킬
이 세월의 영원한 흐름을,
철수의 위대한 힘을,
닥쳐오는 봄을!
살아있는 모든 것의 원수여! 말해보라!
막을 수 있겠는가?
주리라! 주검의 악령이여! 네 탐내는 모든 것을……
가을의 산야가 네 위에 살아있는 모든 것을
눈 속 깊이 내어 맡기듯……
그러나 종달새 우는 오월
푸른 하늘 아래 나팔을 불며
군호 소리 높이 두 발을 구르고
잠자는 모든 것을 일으키고,
침묵한 온갖 것의 입을 열어
절규의 들로 불러 내이며,
죽어진 그 시절의 모든 목숨을
무덤으로부터 두손을 잡아 일으킬,
저 열길 얼음 속에서도 아직
산 것을 자랑하는 어린 물고기의 마음이,
한 줄기 빛깔도 엿볼 수 없는
이 어두운 땅속에서,
두 주먹을 고쳐쥐며 높이고 있는
‘한니발’의 굳은 맹서를……
암흑이여! 주검의 어머니인 대지여!
말해보라! 꽉 그 목을 눌러
영구히 숨줄을 끊을 수 있겠는가?
자거라!
이제는 두번 살아 우리 앞에 나서지 못할
사랑하는 옛 벗 ‘××’아! 고이 자거라!
지금 살아서 죽는 우리들과 함께.
누가 감히 네가
영구히 죽었다고 말하겠는가?
불길은 타서 숯등걸 되고
그것은 일어날 새 불의 어머니 되나니,
벗아! 저 컴컴한 골짝 속에서도
오히려 머지않아 닥쳐올 대양의 큰 파도 소리를 자랑하며,
묵묵히 흐르는 실낱 냇물이 속삭이는
옅은 콧노래 가운데,
오는 날의 모든 것을 들으면서
고이 두 손을 가슴에 얹어라!
이 아래 한길 되는 어둔 땅 속에
지금 대양의 절규 대신에 잠잠한 침묵에 내가 잠자고 있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