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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권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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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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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의 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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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제(秦始皇帝)는 진나라 장양왕(莊襄王)의 아들이다. 장양왕이 진나라의 인질로 조(趙)나라에 가 있을 때 여불위(呂不韋)의 첩을 보고 좋아하여 그녀를 취하여 시황을 낳았다. 시황은 진나라 소왕(秦昭王) 48년 정월 한단(邯鄲)에서 태어났다(기원전 259년). 출생하자 이름을 정(政), 성을 조(趙)라 했다. 13세 때(기원전 247년) 장양왕이 죽자 정이 왕위를 이어 진왕(秦王)이 되었다.

이 무렵 진나라의 영토는 (남으로) 이미 파(巴), 촉(蜀), 한중(漢中)을 합병하고 완(宛)을 넘어 영(郢)을 차지한 뒤 남군(南郡)을 두었다. 북으로는 상군(上郡) 동쪽의 하동(河東), 태원(太原), 상당(上黨)을 거두었고, 동으로는 형양(滎陽)에 이르러 두 개의 주나라(동주와 서주)를 멸망시키고 삼천군(三川郡)을 설치했다.

여불위는 재상으로서 10만 호에 이르는 봉지로 받고 문신후(文信侯)로 불렸는데, 빈객과 유세객들을 초빙하여 천하를 아우르고자 했다. 이사(李斯)가 사인(舍人)으로 있었고, 몽오(蒙驁), 왕기(王齮), 표공(麃公) 등은 장군이 되었다. 진왕은 어린 나이로 막 즉위한 터라 국사를 대신들에게 맡겼다.

진양(晉陽)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진시황 원년 (기원전 2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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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년, 장군 몽오가 공격하여 (난을) 평정했다.

진시황 2년 (기원전 2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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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표공이 군사를 거느리고 권(卷)을 공격하여 3만 명의 목을 베었다.

진시황 3년 (기원전 24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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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에는 몽오가 한(韓)나라를 공격해 13개 성을 취했다. 왕기가 죽었다. 10월, 장군 몽오가 위(魏)나라의 창(暢), 유궤(有詭)를 공격했다. 그해에 큰 기근이 있었다.

진시황 4년 (기원전 24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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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창, 유궤를 함락시켰다. 3월에 군대를 철수시켰다. 진나라의 인질이 조나라에서 돌아왔고, 조나라의 태자도 본국으로 돌아갔다. 10월 경인일, 메뚜기 떼가 동쪽에서 날아와 하늘을 덮었다. 천하에 전염병이 나돌았다. 식량 천 섬을 바치는 백성에게는 작위를 한 등급 올려주었다.

진시황 5년 (기원전 2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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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장군 몽오가 위나라를 공격해 산조(酸棗), 연(燕), 허(虛), 장평(長平), 옹구(雍丘), 산양성(山陽城)을 평정해 모두 함락시키고 20개 성을 취하니 처음으로 동군(東郡)이 설치되었다. 겨울에 천둥이 쳤다.

진시황 6년 (기원전 24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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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한, 위, 조, 위(衛), 초나라가 함께 진나라를 공격해 수릉(壽陵)을 점령했다. 진나라 군대가 출병하자 다섯 나라 군대는 흩어졌다. 진나라가 위(衛)나라를 점령하고 동군을 압박하자 국군 각(角)이 일족을 거느리고 야왕(野王)으로 이주하여 험준한 산세에 의지한 채 위(魏)나라 하내(河內) 지역을 고수했다.

진시황 7년 (기원전 2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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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혜성이 먼저 동쪽에 나타났다가 북쪽에 나타났고, 5월에는 서쪽에 나타났다. 장군 몽오가 죽었다. 용(龍), 고(孤), 경도(慶都)를 공격하던 군대를 돌려 급(汲)을 공격했다. 혜성이 다시 서쪽에 16일 동안 출현했다. 하태후(夏太后)가 서거했다.

진시황 8년 (기원전 23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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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진왕의 동생 장안군(長安君) 성교(成蟜)가 군대를 이끌고 조나라의 공격을 격퇴하고 반란을 일으켜 둔류(屯留)에서 죽임을 당했고, 군관들도 모두 목이 잘렸다. 둔류의 백성들을 임조(臨洮)로 옮겼다. 장군이 벽에서 죽었다 반란을 일으킨 포학를 찢어 죽였다 황하가 넘쳐 물고기들이 육지로 밀려나오자 사람들은 가벼운 수레와 말을 몰아 먹을 것을 찾아 동쪽으로 갔다.

노애(嫪毐)가 장신후(長信侯)에 봉해지니 산양(山陽) 땅을 주어 그곳에 살게 하고, 집, 마차, 옷, 원유(苑囿), 사냥 등을 노애 마음대로 하게 하니, 크고 작은 모든 일을 노애가 결정했다. 또 하서 태원군을 노애의 봉국으로 바꾸었다.

진시황 9년 (기원전 23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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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혜성이 나타나서 하늘을 가로질렀다. 위(魏)나라의 원(垣)과 포양(蒲陽)을 공격했다. 4월, 주상이 옹(雍)에 머물렀다. 기유일, 왕은 관례를 치르고 검을 찼다. 장신후 노애가 반란을 일으키려다 들통이 나자 왕의 옥새와 태후의 인장을 도용하여 옹현의 군사, 진왕의 호위군사, 관의 기병, 융적(戎翟)의 우두머리 및 가신들을 동원해 기년궁(蘄年宮)을 공격하는 난을 일으켰다. 왕이 이를 알고 상국 창평군(昌平君)과 창문군(昌文君)에게 군대를 내어 노애를 공격하도록 명령하니 함양(咸陽)에서 싸워 수백 명의 머리를 베었다. 공을 세운 모두에게 작위를 주고, 싸움에 가담한 환관들에게도 작위를 한 등급씩 올려 주었다. 

노애 등은 패하여 도망쳤는데, 즉시 나라 안에 노애를 사로잡는 자에게는 1백만 냥, 죽이는 자에게는 50만 냥을 준다는 영을 내렸다. 노애 등이 모두 잡혔고, 위위(衛尉) 갈(竭), 내사(內史) 사(肆), 좌익(佐弋) 갈(竭), 중대부령(中大夫令) 제(齊) 등 20명을 모두 효수형에 처했다. (노애는) 사지를 찢는 거열형(車裂刑)에 처해 조리를 돌렸고 종족은 모두 죽였다. 가신과 죄가 가벼운 자는 (유배형에 해당하는) 귀신형(鬼薪刑)에 처했다. 작위를 박탈당하고 촉(蜀)으로 쫓겨 간 집이 4천을 넘었는데 방릉(房陵)에 살게 했다. 그 달은 추위가 심하고 얼음이 얼어 죽은 자가 있었다. 양단화(楊端和)가 연지(衍氏)를 공격했다. 혜성이 서쪽에 나타났다가 다시 북쪽에 나타났는데 북두성 남쪽에 80일간 나타났다.

진시황 10년 (기원전 23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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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상국 여불위가 노애의 반란에 연루되어 면직되고 환기(桓齮)가 장군이 되었다. 제나라와 조나라에서 사신이 와서 술자리를 열었다.

제나라 사람 모초(茅焦)가 진왕에게 “진이 바야흐로 천하를 염두에 두고 있는데 대왕께서는 모후를 유배시켰다고 합니다. 제후들이 이를 듣고 진나라를 배반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라고 말했다. 진왕이 곧 옹에서 태후를 함양으로 맞아들였다가 다시 감천궁(甘泉宮)에 살게 했다.

진왕이 진나라에 와 있는 유세객들을 대대적으로 조사하여 쫓아내라는 축객령(逐客令)을 내렸다. 이사가 글을 올려 설득하자 축객령을 취소했다. 이사가 이 참에 진왕에게 먼저 한(韓)나라를 빼앗아 다른 나라를 겁주라고 건의하자, 이사로 하여금 한라를 복속시키게 했다. 한나라 왕이 걱정이 되어 한비자(韓非子)와 진나라를 약하게 만들 방법을 꾀했다. 대량(大梁) 사람 위료(尉繚)가 와서 진왕에게 “진나라가 강대하여 제후들은 군현의 우두머리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신은 다만 제후들이 합종하여 불시에 공격하지 않을까 걱정될 뿐입니다. 이 때문에 지백(智伯), 부차(夫差), 민왕(湣王)이 망했습니다. 대왕께서는 재물을 아끼지 말고 힘깨나 있는 대신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들의 계획을 어지럽게 만드십시오. 불과 30만 금을 쓰면 제후들을 모조리 없앨 수 있습니다”라고 유세했다.

진왕은 그의 계책을 따랐다. (진왕은) 위료를 만날 때면 대등한 예의로 대했고 입고 먹는 것도 그와 같이 했다. 위료는 “진왕이란 위인은 매부리코에, 째진 눈, 사나운 짐승 같은 가슴팍, 승냥이 같은 목소리를 갖고 있다. 각박하고 호랑이나 이리 같은 마음을 갖고 있어 자기 급하면 기꺼이 다른 사람 밑에 처하지만 뜻을 이루면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잡아 먹는다. 내가 보잘 것 없는 몸인데도 나를 보면 늘 내게 몸을 낮춘다. 진왕이 천하에 대한 뜻을 이루고나면 천하가 모두 그의 노예가 될 것이다. 그와는 오래 교류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는 도망치려 했다. 진왕이 알아채고 한사코 막으면서 진나라의 국위로 삼아 끝내 그의 계책을 채용했다. 그러나 일은 이사가 맡았다.

진시황 11년 (기원전 23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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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왕전(王翦), 환기, 양단화가 업(鄴)을 공격하여 9개 성을 취했다. 왕전이 연여(閼與), 요양(橑楊)을 공격하여 하나의 군대로 통합했다. 왕전이 18일 동안 군사를 통솔하면서 녹봉이 100석 이하인 군사들 중 열에 여덟은 돌려보내고 둘만 남아 종군하게 했다. 업과 안양(安陽)을 취하여 환기가 군대를 통솔했다.

진시황 12년 (기원전 23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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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문신후 여불위가 죽자 몰래 묻었다. 그의 가신으로 장례에 참가한 사람 중 진(晉)나라 출신은 추방했고, 진(秦)나라 출신으로 녹봉이 600석 이상인 자는 관직을 박탈하여 거주지를 옮기게 했으며, 녹봉이 500석 이하에 장례에 가지 않은 자들은 거주지만 옮기고 관직은 박탈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국사를 나라 일을 처리할 때 노애나 여불위처럼 바른 길을 따르지 않는 자는 일족을 모두 노비로 삼는 것을 관례로 정했다. 가을에 촉으로 옮긴 노애의 가신들의 세금과 요역을 면제했다. 당시 천하에 큰 가뭄이 들었는데, 6월부터 시작되어 8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비가 내렸다.

진시황 13년 (기원전 2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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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환기가 조나라 평양을 공격하여 조나라 장군 호첩(扈輒)을 죽이고 10만 명의 목을 베었다. 진왕이 하남에 갔다. 정월,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10월, 환기가 조나라를 공격했다. 

진시황 14년 (기원전 23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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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평양에서 조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의안(宜安)을 빼앗고 깨부순 다음 그 장군을 죽였다. 환기가 평양, 무성(武城)을 평정했다. 한비자가 진나라에 사신으로 왔다. 진나라는 이사의 모략으로 한비자를 억류시켰고, 한비자는 운양(雲陽)에서 죽었다. 한나라 왕이 신하로 자청했다.

진시황 15년 (기원전 23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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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진왕이 대거 군대를 일으켰다. 한 군대는 업에, 또 한 군대는 태원에 도착해 낭맹(狼孟)을 취했다. 지진이 발생했다. 

진시황 16년 (기원전 23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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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9월, 군사를 일으켜서 한나라 남양 땅을 접수하고 등(騰)을 대리 태수로 삼았다. 처음으로 남자의 나이를 등록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위나라가 진나라에 땅을 바쳤고, 진나라는 역읍(麗邑)을 두었다.

진시황 17년 (기원전 2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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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내사(內史) 등(騰)이 한나라를 공격하여 한나라 왕 안(安)을 사로잡고, 그 땅을 몰수하여 군으로 삼아 영천(穎川)이라 불렀다. 지진이 있었다. 화양태후(華陽太后)가 죽었다. 인민들이 크게 굶주렸다.

진시황 18년 (기원전 22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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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 군사를 크게 내어 조나라를 공격했다. 왕전이 상지(上地)의 군사를 이끌고 정경(井陘)을 공격했고, 양단화가 하내의 군사를 거느렸다. 강외(羌瘣)가 조나라를 토벌하고 단화가 한단성을 포위했다. 

진시황 19년 (기원전 22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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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 왕전, 강외가 조나라 땅 동양(東陽)을 모조리 평정하여 취하고, 조나라 왕 천(遷)을 잡았다. 바로 군대를 이끌고 연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중산에 주둔했다. 진왕은 한단으로 가서 전에 왕이 조나라에서 태어나 자랄 때 어머니 집안과 원한을 가진 자들을 모조리 파묻었다. 진왕은 태원, 상군을 거쳐서 돌아왔다. 시황제의 어머니 태후가 세상을 떠났다. 조나라 공자 가(嘉)가 종족 수백 명을 이끌고 대(代)로 가서 스스로 왕으로 즉위하고는 동으로 연나라와 연합해 군사를 상곡(上谷)에 주둔시켰다. 큰 기근이 들었다.

진시황 20년 (기원전 22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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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연나라 태자 단(丹)은 진나라 군사들이 연나라에 들어오는 것이 두려워 형가(荊軻)에게 진왕을 찔러 죽이게 했다. 진왕이 이를 알았고, 형가의 사지를 찢어 조리를 돌린 다음 왕전, 신승(辛勝)에게 연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연나라는 대의 군대와 함께 진나라 군대를 공격했다. 진나라 군대는 연나라를 역수(易水) 서쪽에서 격파했다. 

진시황 21년 (기원전 22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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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 왕분(王賁)이 초나라(?)를 공격했다. 군사를 늘려 왕전의 군대로 보냈고, 마침내 연나라 태자의 군대를 격파했다. 연나라의 계성을 점령하고 태자 단의 목을 얻었다. 연왕은 동쪽 요동(遼東)을 수습하여 그곳의 왕이 되었다. 왕전이 나이와 병을 구실로 귀향했다. 신정(新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창평군(昌平君)을 영(郢)으로 옮겼다. 큰 눈이 내려 두 자 다섯 치나 쌓였다.

진시황 22년 (기원전 2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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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왕분이 위나라를 공격하면서 하구(河溝)의 물을 끌어다가 대량성으로 흘려보내 대량성을 허물었다. 그 왕이 항복을 청했고 그 땅을 모조리 취했다.

진시황 23년 (기원전 2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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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진왕이 다시 왕전을 다시 불러 기어코 기용한 다음 초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진(陳)의 남쪽부터 평여(平輿)에 이르는 땅을 빼앗고 형왕(荊王, 초왕)을 사로잡았다. 진왕이 (초나라 도읍인) 영(郢)과 진(陳)에 행차했다. 초나라 장수 항연(項燕)이 창평군을 옹립하여 초나라 왕으로 삼고는 회하(淮河) 남쪽에서 진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진시황 24년 (기원전 2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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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 왕전, 몽무가 초나라를 공격해 초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창평군이 죽고, 항연은 자살했다.

진시황 25년 (기원전 2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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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진왕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왕분에게 거느리게 했다. 연나라 요동을 공격하여 연나라 왕 희(喜)를 잡았다. 돌아오는 길에 대(代)를 공격하여 그 왕 가(嘉)를 포로로 잡았다. 왕전이 마침내 초나라의 강남 지역을 평정했다. 월(越)의 국군을 항복시키고 회계군(會稽郡)을 두었다. 5월, 천하에 큰 잔치를 베풀었다.

진시황 26년 (기원전 2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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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제나라 왕 전건(田建)과 그의 상국 후승(后勝)이 군사를 일으켜 서쪽 경계를 변경을 지키면서 진나라와의 왕래를 끊었다. 진왕은 장군 왕분에게 연나라 남쪽에서 제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제나라 왕 전건을 잡았다.

진왕이 막 천하를 아우른 다음 상국과 어사(御史)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 날 한나라 왕은 땅과 옥새를 바치면서 울타리와 같은 신하가 되길 청했다. 얼마 뒤 약속을 어기고 조나라, 위나라와 합종하여 진나라를 배반하였기에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고 그 왕을 포로로 잡았다. 과인은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여기서 전쟁이 끝나길 바랐다. 조나라 왕이 그 상국 이목(李牧)을 보내 맹서를 약속하기에 그 인질을 돌려보냈다. 얼마 뒤 맹서를 어기고 우리 땅 태원에서 배반하였기에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고 그 왕을 잡았다. 조나라 공자 가(嘉)가 대왕으로 자립하였기에 병사를 일으켜 쳐서 없앴다. 위나라 왕도 처음에는 진나라에 복종하기로 약속했으나 얼마 안 되어 한, 조나라와 진나라를 습격하려 하기에 진나라 군대가 토벌하여 그들을 깨부수었다. 

초나라 왕은 청양 서쪽을 바쳐놓고도 바로 약속을 어기고 우리 남군을 공격하였기에 군대로 토벌하여 그 왕을 잡고 그 땅을 마침내 평정했던 것이다. 연나라 왕이 어리석고 태자 단은 몰래 형가를 자객으로 보내 (나를 죽이려 했기에) 군대로 토벌하고 나라를 멸망시켰다. 제나라 왕은 후승의 계책을 받아들여 진나라와의 왕래를 끊고 난을 일으키려 하였기에 군대로 토벌하여 그 왕은 포로로 잡고 제나라 땅을 평정했다. 과인이 보잘 것 없는 몸으로 군사를 일으켜 포악한 혼란을 토벌하니 종묘의 혼령이 돌보심이요. 6국의 왕들이 엎드려 죄를 인정하니 천하가 크게 안정되었다. 이제 이름을 바꾸지 않고서는 성공을 일컬을 수도 후대에 전할 수도 없으니 황제의 이름에 대해 논하라.”

승상 왕관(王綰), 어사대부 풍겁(馮劫), 정위(廷尉) 이사 등이 모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날 오제(五帝) 때는 그 땅이 사방 천 리에 그 밖은 후복(侯服), 이복(夷服) 등 제후였는데 조회를 오기도 하고 오지 않기도 하여 천자가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정의로운 군대를 일으켜 잔적들을 없애고 천하를 평정하시어 해내를 군현으로 삼고 법령을 하나로 통일하시니 이는 상고 이래로 없던 일이자 오제도 따르지 못할 일입니다. 신 등이 삼가 박사들과 논의하길 ‘예날 천황(天皇)이 있고, 지황(地皇)이 있고, 태황(泰皇)이 있었는데 태황이 가장 귀하다’고 했습니다. 신 등은 죽음을 무릅쓰고 존호를 올리니 왕은 ‘태황(泰皇)’으로, 명(命)은 ‘제(制)’로, 영(令)은 ‘조(詔)’로 하시옵고, 천자가 스스로를 부를 때는 ‘짐(朕)’이라 하옵소서.”

진왕은 “태자는 떼고 황자를 취하고, 상고의 제라는 이름을 가져다 ‘황제(皇帝)’라 하고 나머지는 그대들이 논의한 바대로 하라”고 했다. 그리고는 “좋다”고 명하고는 장양왕을 태상황(太上皇)으로 추촌했다. 이어 이렇게 명했다.

“짐이 듣기에 태고에는 호만 있고 시호는 없었으며, 중고에는 호가 있고 죽은 뒤에는 행적에 따라 시호를 정했다고 한다. 그랬다면 자식이 아비를 논하고 신하가 군주를 논하는 것이니 이는 진짜 도리가 아니다. 짐은 이를 취하지 않고 지금부터 시호법을 없애겠노라. 짐을 시황제라 부르고, 그 뒤는 수를 헤아려서 2세, 3세하여 만 세에 이르기까지 무궁하게 전하라.”

시황제는 오덕(五德)이 주기적으로 반복 순환하는 순서를 살펴서 화덕(火德)의 주를 진나라가 대신했니 진나라는 화덕이 이기지 못하는 수덕(水德)을 따라야 한다고 했다. 바야흐로 이제 수덕이 시작되니 1년의 시작을 바꾸고 조정 하례도 모두 10월 초하루에 거행하게 했다. 

의복, 깃발, 부절(符節)의 색깔은 모두 검은색으로 했다. 숫자는 6을 단위로 하니, 부절과 모자의 길이는 모두 여섯 치로, 가마의 너비는 여섯 자로, 여섯 자를 1보로 하고 수레 한 대를 여섯 마리의 말이 끌게 했다. 황하를 덕수(德水)로 이름을 바꾸어 수덕(水德)의 시작을 알렸다. 강인하고 가혹하게 모든 일을 법에 따라 결정하고, 인의나 은혜 그리고 너그러움 없이 각박해야 오덕의 수와 맞는다고 여겼다. 이에 법을 가혹하게 집행하고 이를 어긴 자는 용서하지 않았다.

승상 왕관 등이 “이제 막 제후들을 평정했지만 연, 제, 초나라의 땅은 너무 멀기 때문에 왕을 두지 않으면 그들을 제압할 수 없습니다. 황자들을 왕으로 세우는 일을 허락하시길 청합니다”라 했다. 시황제가 군신들에게 이에 대해 의논하게 하자 군신들 모두가 그게 편하겠다고 생각했다. 정위 이사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냈다.

“주의 문왕과 무왕이 제후로 봉한 많은 친인척들이 성은 같았지만 갈수록 멀이지고 서로를 원수처럼 공격했고. 제후들끼리는 더더욱 서로를 공격했습니다. 주 천자는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천하가 폐하의 신령으로 통일을 이루고 모두 군현이 되었습니다. 여러 아들과 공신들에게는 공적인 세금으로 큰 상을 내리시는 것으로도 그들을 통제하기에 충분합니다. 천하가 다른 뜻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술책입니다. 제후를 두는 것은 불편합니다.”

시황이 말했다.

“전쟁이 모두 끊임없는 전쟁에 고통을 받은 것은 제후들이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종묘의 신령이 보우하사 이제 막 천하가 평정되었는데 다시 나라를 세우는 것은 화근을 심는 것이다. 그러고도 안녕과 휴식을 바라는 것은 어렵지 않겠는가? 정위의 말이 옳다.”

천하를 36개 군으로 나누고 군마다 수(守), 위(尉), 감(監)을 두었다. 민(民)을 검수(黔首)로 바꾸어 부르게 하고 전국에 큰 잔치를 베풀었다. 천하의 병기를 거두어 함양에 모은 다음 녹여서 무게 1천 석의 종거금인(鍾鐻金人)12개를 만들어 궁정에 배치했다. 법과 도량형, 수레바퀴의 폭을 통일하고 문자도 통일했다.

영토는 동으로 동해, 조선(朝鮮)에까지, 서로 임조(臨洮), 강중(羌中)에까지, 남으로 북향호(北嚮戶)에까지, 북쪽으로 황하를 의지하여 요새를 쌓아 음산(陰山)을 넘어 요동(遼東)에까지 이르렀다. 전국의 부호 12만 호를 함양으로 이주시켰다. 여러 사당, 장대(章臺), 상림원(上林苑)은 모두 위수(渭水)의 남쪽 언덕에 있었다. 진나라가 제후들을 격파할 때마다 그 궁실을 본떠 함양 북쪽 산기슭에 지었다. 남쪽으로는 위수를 바라보고, 옹문(雍門) 동쪽에서 경수(涇水)와 위수(渭水)에 이르는 사이는 구름다리오 이었다. 제후에게서 빼앗은 미녀들, 종, 북들로 이곳을 채웠다.

진시황 27년 (기원전 2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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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 시황은 농서(隴西), 북지(北地)를 순시하고 계두산(鷄頭山)을 지나서 회중(回中)을 거쳐 위수 남쪽에다 신궁(信宮)을 지었으나 얼마 뒤 극묘(極廟)로 이름을 바꾸었다. 극묘에서 여산(酈山)까지 길을 뚫고 감천궁(甘泉宮)의 전반부 건물 전(前殿)을 지었는데 용도(甬道, 양 옆으로 담장을 가진 복도)를 수축해 함양까지 통하게 했다. 이해에 작위를 한 등급씩 하사했다. 치도(馳道)를 수축했다.

진시황 28년 (기원전 2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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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년, 시황이 동쪽으로 군현을 순시하다가 추역산(鄒嶧山)에 올라 비석을 세워 옛 노나라 지역 유생들과 상의하여 진의 공덕을 노래하는 내용을 비석에 새겼다. 또 봉선(封禪, 하늘과 땅에 드리는 제사)과 여러 산천에 대한 망제(望祭) 제사의 일을 의논했다. 마침내 태산(泰山)에 올라서 비석을 세우고 제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제사를 마치고 산을) 내려오는데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쳐 한 나무 아래서 쉬었다. 이 일로 그 나무를 오대부(五大夫)에 봉했다. 양보산(梁父山)에서 땅에 제사 지내고 글을 새긴 비석을 세웠는데 그 문장은 다음과 같다.

“황제께서 제위에 임하시어 제도를 만들고 법을 밝히시니 신하들은 삼가 받들어 지킬지어다. 26년, 처음으로 천하를 아우르고 신하로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황제께서) 몸소 먼 곳의 인민들까지 순시하시어 태산에 올라 동쪽 끝까지 둘러 보셨다. 이에 수행 신하들이 지난 일을 되돌아보고, 이런 업적을 이루게 된 근원을 따져 삼가 그 공덕을 찬송드린다. 다스림의 이치가 운행되면 만물이 자연히 생장하고 모든 것이 법식을 갖추게 된다. 대의는 환히 드러나 후세에 드리워져 변치 않고 순조롭게 이어지리라. 

황제께서 몸소 천하를 평정하시고 쉼 없이 다스림에 임하시니, 일찍 일어나 늦게 주무시면서 인민의 교화에 힘을 다하셨다. 가르침으로 이끄시니 멀던 가깝던 모두 성스러운 뜻을 받아 다스림에 따랐다. 귀천이 분명해지고, 남녀가 예에 따라 따르며, (각자의) 직분을 삼가 받들었다. 밝은 빛이 안팎을 비추니 (온 세상이) 맑고 태평해지고, 베품은 후대에까지 미치고, 교화는 무궁하리라. 삼가 조서를 받들어 이 엄중한 가르침을 영원히 계승할지다.”

이어 발해(勃海)를 끼고 동으로 황현(黃縣)과 추현(腄縣)을 지나 성산(成山) 끝까지 간 다음 지부산(之罘山)에 올랐다. 비석을 새워 진의 덕을 칭송한 다음 떠났다.

남으로 낭야산(琅邪山)에 오르니 너무 기뻐 석 달을 머물렀다. 이에 검수(黔首, 백성) 3만 호를 낭야대 아래로 옮기고 12년간의 세금을 면제시켜 주었다. 낭야대를 짓고 비석을 세우고 글을 지어 진의 덕을 칭송하며 이렇게 그 뜻을 밝혔다.

“28년에 황제께서 모든 것을 시작하셨으니 법도를 공평하게 하여 만물의 기강을 잡으셨다. 인륜을 밝혀 아비와 아들의 화목을 꾀하시고, 성스러운 지혜와 인의로 도리를 밝히셨도다. 동으로 동쪽 땅을 다독이시고 병사들을 살피셨다. 큰일을 다 마치시고 바닷가에 임하셨다. 황제의 공적은 근본에 힘을 쓰신 것이다. 농업을 장려하고 상공업을 억제하시니 검수가 부유해졌다. 하늘 아래 모두가 한 마음으로 자기 일에 힘을 쓰게 되었다. 도량형을 통일하고 글자도 통일했다. 해와 달이 비추고 배와 수레가 다니는 어디라도 그 명을 끝까지 받드니 뜻을 얻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시세에 따라 일을 하는 것이 황제의 일이다. 서로 다른 풍속을 바로잡으려고 산과 물을 건너셨다. 검수를 가엾게 여기시어 조석으로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의심스러운 법령을 없애고 정확한 법조문을 정하시니 어떤 일을 해서는 안 되는가를 모두가 알게 되었다. 지방장관의 직무가 구분되어 모든 업무가 쉬워졌다. 일의 처리가 타당해지니 바로잡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황제의 영명함으로 사방을 두루 살피시니 귀천을 불문하고 분수를 넘지 않게 되었다. 간사함을 용납하지 않으니 모두 바르고 착해지는데 힘을 썼다. 작고 크고를 막론하고 온 힘을 다하니 감히 게으름을 피거나 소홀히 하는 일이 없었다. 멀던 가깝던 구석지던 엄숙하고 반듯해지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정직하고 충성을 다하니 모든 일에 변치 않는 규칙이 생겼다.

황제의 덕으로 사방 끝까지 안정을 찾았다. 난을 토벌하고 해악을 제거하여 복과 이익을 이루었다. 농사철에는 일을 줄이니 모든 생산이 크게 늘었다. 검수가 안녕을 찾으니 군대를 동원하지 않아도 되었다. 육친이 서로를 돌보니 마침내 도적이 없어졌다. 교화를 기꺼이 받들며 법령과 제도를 모두 알게 되었다. 천지사방이 모두 황제의 땅이다. 서로는 유사(流沙)를 건너고, 남으로는 북호(北戶)에 이르며, 동으로는 동해를 포함하고, 북으로는 대하(大夏)를 넘는다. 사람의 발이 미칠 수 있다면 신하 아닌 곳이 없었다. 그 공은 오제를 덮고, 은택은 소와 말에 미쳤다. 그 덕을 입지 않는 자 없으니 각자 안녕을 누렸다.”

진왕이 천하를 아우르고 황제라는 이름을 세웠다. 이에 동쪽 땅을 순시하여 낭야에 이르렀다. 무성후(武城侯) 왕리(王離), 통무후(通武侯) 왕분(王賁), 윤후(倫侯) 건성후(建成侯) 조해(趙亥), 창무후(昌武侯) 성(成), 무신후(武信侯) 풍무택(馮毋擇) 등 여러 후와 승상 외림(隗林), 승상 왕관(王綰), 경 이사(李斯), 경 왕무(王戊), 오대부 조영(趙嬰), 오대부 양규(楊樛)가 황제를 수행하며 바다 위에서 의논했다.

“고대의 제왕들은 그 땅이 천리 넘지 않았고, 제후는 각자 자기 봉토를 지키며 조회를 하거나 않거나 하면서 서로를 난폭하게 침략하고 끊임없이 죽고 죽였다. 그런데도 금석에 이를 새겨 스스로 기록으로 남겼다. 고대 오제와 삼왕은 지식과 교화가 다 다르고 법도가 분명치 않으며 귀신의 힘으로 먼 지방을 속였으니 실제와 명분이 달라 오래 가지 못했다. 그 몸이 죽기도 전에 제후가 배반하고 법령은 실행되지 않았다. 지금 황제께서 천하를 하나로 아우르고 군현으로 삼으니 천하가 화평했다. 종묘를 빛나게 하시고, 몸소 도를 행하고 덕을 베푸니 존귀한 호칭이 크게 갖추어졌다. 이에 신하들이 함께 황제의 공덕을 칭송하고 이를 금석에 새겨 본보기로 삼고자 한다.”

일이 끝나자 제나라 사람 서불(徐市) 등이 글을 올려 “바다에 봉래(蓬山), 방장(方丈), 영주(瀛洲)라는 삼신산에 신선이 살고 있습니다. 청컨대 목욕재계하시고, 어린 남녀 아이를 데리고 신선을 찾게 해주십시오”라고 했다. 이에 서불을 보내 어린 남녀 아이 수천 명을 선발하여 바다로 나가 신선을 찾게 했다.

시황이 돌아오는 길에 팽성(彭城)을 지나면서 목욕재계하고 사당에서 기도한 후 사수(泗水)에 빠진 주나라 세발솥 정(鼎)을 꺼내고자 천여 명을 물속으로 보냈으나 찾지 못했다. 이어 서남쪽으로 회수를 건너 형산과 남군으로 갔다. 장강에서 배를 타고 상산사(湘山祠)에 이르렀을 때 큰 바람을 만나서 자칫 강을 못 건널 뻔했다. 시황이 박사들에게 “상군(湘君)이 어떤 신인가”라고 물었다. 박사들이 “듣기에 요 임금의 딸로 순의 아내가 되었다가 이곳에 묻혔다고 합니다”라 대답했다. 

시황에 이 말에 크게 성을 내며 죄수 3천을 보내 상산의 나무를 모두 베게 하여 산을 벌거숭이로 만들었다. 남군에서 무관(武關)을 거쳐 돌아왔다.

진시황 29년 (기원전 2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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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년에 시황이 동쪽에 행차했다. 양무현(陽武縣)의 박랑사(博狼沙)에 이르렀을 때 강도를 만나 놀랐다. (강도를) 잡으려 했으나 잡지 못하자 열흘 동안 대대적인 수색령을 전국에 내렸다.

지부(之罘)에 올라 비석에 글을 새겼는데 비문은 이랬다.

“29년 음력 2월 봄, 바야흐로 봄기운이 일어나던 때 황제께서 동쪽으로 행차하여 지부산에 올라 바다의 일출을 보셨다. 수행하던 신하들이 눈앞의 아름다운 경관을 보면서 황제의 빛나는 업적을 되돌아보고 칭송한다. 위대한 성군께서 다스림의 도를 만드시고, 법도를 제정하여 기강을 밝히셨다. 밖으로는 제후들을 교화하고, 널리 문치의 은혜를 베풀어 의리를 밝히셨다. 사악하고 탐욕스러운 6국이 만족하지 않고 학살을 멈추지 않았다. 황제께서 백성들을 어여삐 여기시어 마침내 군대를 내어 토벌하시어 무공을 크게 떨치셨다. 의로운 토벌로 믿을 행하여 그 위세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고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포악함을 없애고 검수를 구제하시어 온 천하를 두루 안정시키셨다. 분명한 법을 베풀어 천하를 다스리니 영원한 원칙이 되었도다. 위대하다! 천하가 성스러운 뜻을 받들어 따르는구나. 이에 여러 신하들이 공을 칭송하며 비석에 새겨 영원한 본보기로 남기길 청하노라.”

그 동관(東觀)의 비문은 이렇다.

“29년, 황제께서 봄에 행차하시어 먼 지방까지 돌아 보셨다. 바다에 이르러 지부산에 올라 떠오르는 해를 보셨다. 광활한 대해를 바라보며 수행한 신하들 모두가 황제의 큰 도가 지극히 밝았음을 되돌아보았다. 성스러운 법을 처음 시행하여 나라 안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밖으로는 포악한 자들을 없앴다. 무력의 위엄을 떨치시어 사방을 떨게 하고 6국의 군주를 사로잡아 없앴다. 천하를 아울러 해악을 모조리 없애고 전쟁을 영원히 잠재우셨다. 황제의 밝은 덕으로 천하를 다스림에 쉬지 않고 보고 들으셨다. 대의를 세우시고 각종 기물을 제대로 갖추었으며, 등급에 따른 모든 표지들이 갖추어졌다. 신하들은 직분을 준수하며 각자 할 일을 행하니, 일에 의혹이 사라졌다. 검수들은 개화되어 멀건 가깝건 모두 같은 법도를 따르니 전에 없던 일이었다. 일상 업무가 정해지니 후손은 선조의 업을 잘 지키며 이 성스러운 다스림을 영원히 계승할지어다. 군신들은 황제의 공덕을 칭송하고 성스러운 업적을 노래하여 이를 비석에 새기기를 청하노라.”

이어 낭야로 갔다가 상당을 거쳐서 돌아왔다.

진시황 30년 (기원전 2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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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별다른 일이 없었다.

진시황 31년 (기원전 2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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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년 12월, 납월(臘月, 12월)을 가평(嘉平)으로 개명했다. 향리마다 검수들에게 여섯 섬의 쌀과 두 마리의 양을 내렸다. 시황이 함양을 미행하려고 무사 넷과 밤중에 나왔다가 난지(蘭池)에서 도적을 만나서 위험에 처했으나 무사들이 도적을 죽였다. 이 일로 20일 넘게 관중(關中)을 대대적으로 수색했다. 쌀값이 한 섬에 1,600전이 나갔다.

진시황 32년 (기원전 2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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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년, 시황이 갈석산(碣石山)에 가서 연나라 사람 노생(盧生)을 시켜서 선문(羨門)과 고서(高誓)를 찾게 했다. 갈석의 문에다 비문을 새겼다. 성곽을 허물고 제방을 텄다. 그 비문의 내용은 이랬다.

“마침내 군대를 일으켜 무도한 자를 죽이고 반역을 잠재웠다. 무력으로 포악하고 반역하는 자를 섬멸하고, 문치(文治)로 죄 없는 자들을 보호하니 백성들이 마음으로 모두 복종했다. 공을 헤아려 상을 내리니 소와 말에까지 미치고, 땅도 은혜를 입어 비옥해졌다. 황제께서 위엄을 떨치시고 덕으로 제후들을 병합해 처음으로 통일을 이루고 태평을 얻었다. 성곽을 허물고 하천의 제방을 터서 험함을 모두 고르게 하셨다. 땅의 형세가 평탄해지니 백성들의 요역이 사라지고 천하가 두루 편해졌다. 남자는 즐거이 농사짓고, 여자는 집안일에 힘쓰니 각자의 일에 순서가 생겼다. 모든 생산에 은혜가 두루 미치고, 떠돌던 사람들은 전원으로 돌아와 안락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이에 신하들은 이 덕과 성스러운 업적을 칭송하며 비석에 새겨 영원한 본보기로 삼기를 청하노라.”

이에 한종(韓終), 후공(侯公), 석생(石生)을 시켜 신선의 장생불사 약을 구해오도록 했다. 시황이 북쪽 변방을 순시하면서 상군을 지나 돌아왔다. 연나라 사람 노생이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와서 귀신에 관한 일로 보고했는데 ‘진을 망하게 할 자는 호(胡)다’라고 쓰여 있는 참위서를 올렸다. 시황은 장군 몽염(蒙恬)에게 군사 30만 명을 내서 북방의 호를 공격하게 하여 하남 땅을 취했다.

진시황 33년 (기원전 2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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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병역이나 노역을 피해서 도망간 사람, 가난하여 데릴사위가 된 사람, 장사꾼들을 징발하여 육량(陸梁) 지역을 공격하여 계림군(桂林郡), 상군(象郡), 남해(南海郡)을 설치하고 죄인들을 보내 지키도록 했다. 서북쪽의 흉노를 쫓아버리니 유중(楡中)에서 황하 동쪽 음산(陰山)에 이르기까지 44개의 현을 설치하고, 황하 가장자리를 따라 장성을 쌓아 요새로 삼았다. 또 몽염에게 황하를 건너 고궐(高闕), 양산(陽山), 북가(北假) 일대를 빼앗고 요새를 쌓아서 융인(戎人)을 몰아내게 했다. 유배된 사람들을 이주시켜 새로 설치한 현을 충실하게 하되 제사는 금지시켰다. 혜성이 서쪽에 나타났다.

진시황 34년 (기원전 2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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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 부정한 관리들을 장성을 쌓거나 남월로 내쫓는 벌을 내렸다.

시황이 함양궁에서 술자리를 베풀었다. 박사 70명이 나와서 장수를 기원했다. 복야(僕射) 주청신(周靑臣)이 나와 “이전에 진의 땅은 천리에 지나지 않았으나 폐하의 신령과 밝은 덕에 힘입어 천하를 평정하고 오랑캐를 내쫓으니, 해와 달이 비추는 곳이라면 복종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제후의 나라를 군현으로 만드니 모두가 안락함을 누리고 전쟁의 걱정하지 않게 되어 만세까지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상고 시대 이래 그 어떤 것도 폐하의 위엄과 덕에 미칠 수는 없을 것입니다”라는 말로 칭송했다.

시황이 기뻐했다. 제나라 사람 박사 순우월(淳于越)이 나와 이렇게 말했다.

“신이 듣기에 은, 주 두 왕조가 천년 넘게 이어진 것은 자제와 공신을 제후에 봉하여 왕실을 떠받치고 돕게 했습니다. 이제 폐하께서 천하를 소유하셨지만 자제들은 여전히 평민으로 있습니다. 만약 (제나라의) 전상(田常)이나 진(晉)나라의 육경(六卿) 같은 신하들이 갑자기 나타났는데 보필할 사람이 없다면 무슨 수로 구합니까? 무슨 일이든 옛날을 본받지 않고 오래 갔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지금 주청신은 폐하의 면전에서 아부하는 말로 폐하의 잘못을 더 무겁게 만들고 있으니 충신이 아닙니다.”

시황이 의논하게 하자 승상 이사가 이렇게 말했다.

“오제의 통치가 서로 다르고 삼대(하,상,주)가 같은 것을 계승하지 않고 각자 다스린 것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이 아니라 시대가 바뀌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폐하께서 대업을 창시하시고 만세의 공을 세우신 일은 참으로 어리석은 유생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하물며 순우월은 삼대의 일을 말하고 있으니 어찌 본받을 수 있겠습니까? 전에는 제후들이 싸웠기 때문에 후한 대접으로 이런저런 인물들을 불러들인 것입니다. 지금 천하는 안정되었고 법은 통령은 통일되습니다. 백성들은 집에서 농사와 공업에 힘을 쓰고, 선비는 법령과 규정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서생들이 현재는 배우지 않고 옛날만 배워 그것으로 현재를 비난하며 검수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신 승상 이사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옛날에는 천하가 어지러워 하나로 통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후들이 서로 일어나 말을 했다 하면 옛날 것으로 지금을 해치고 꾸민 허황된 말로 현실을 어지럽힙니다. 저마다 사사로이 배운 것을 좋다고 하며 나라에서 만든 것을 비방합니다. 이제 황제께서 천하를 아우르시고 흑백을 가려 하나의 존엄함을 정하셨습니다. 사사로이 배운 것으로 서로 법과 교화를 비난하고, 명을 듣고도 각자 배운 것을 가지고 의론하려 합니다. (조정에) 들어와서는 속으로 비방하고, 나가면 골목에서 숙덕거립니다. 군주에게 과시하는 것으로 명성을 구걸하고 이사한 말로 자신을 높이려 하며, 무리들을 몰아 비방을 만들어냅니다. 이런 것들을 금지하지 않으면 위로는 군주의 위세가 떨어지고 아래로는 당파가 형성될 것입니다. 금지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신이 청하오니 사관에게 진의 책이 아닌 것은 모두 태우고, 박사관의 것을 제외하고 천하에 감히 보관하고 있는 『시(詩)』, 『서(書)』, 제자백가의 글들은 지방관에게 보내 모두 태우게 하십시오. 또 두 사람 이상이 모여 감히 『시』,『서』를 이야기하면 저잣거리에서 사형시켜 조리를 돌리고, 옛날을 가지고 지금을 비판하는 자는 멸족시키십시오. 또 이런 자를 보고 알고도 잡아들이지 않는 관리 역시 같은 죄에 처하십시오. 명령이 떨어지고 30일이 지났는데도 서적을 태우지 않는 자는 경형(黥刑)을 가한 다음 장성 쌓는 곳으로 보내십시오. 불태우지 않을 책으로는 의약, 점복, 나무 심는 것에 관계된 서적입니다. 법령을 배우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관리를 스승으로 삼게 하옵소서.”

“좋다”는 명령이 내렸다.

진시황 35년 (기원전 2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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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도로를 닦았는데 구원(九原)을 지나 운양(雲陽)까지 산을 깎고 골짜기를 메워 곧장 통하게 했다. 이때 시황은 함양에는 사람이 많지만 선왕의 궁전이 작다고 여겨서 “내가 듣기에 주 문왕은 풍(豐)에, 무왕은 호(鎬)에 도읍했다고 하니, 풍과 호 사이가 제왕의 도읍이다”라고 했다.

이에 위수 남쪽 상림원(上林苑)에 궁전을 지었다. 먼저 아방(阿房)에 전반부 건축물인 전전(前殿)을 지었는데, 동서 너비 5백 보에 남북 길이가 50장이었다. 그 위로는 1만 명이 앉을 수 있고 아래로는 5장 길이의 깃발을 꽂을 수 있었다. 그 둘레로 전각을 둘러 궁전 아래에서 남산까지 통하게 했다. 남산 꼭대기에는 궐루를 세워 표지로 삼았다. 구름다리 모양의 복도를 만들었는데 아방에서 위수를 건너 함양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북극성과 각도성(閣道星)이 은하수를 건너 영실성(營室星)까지 이르는 모양을 나타냈다. 아방의 궁전이 완성되지 못했다. 완성된 다음에 좋은 이름을 지으려 하였으나 아방에 궁전을 지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아방궁이라고 불렀다. 궁형과 유배형을 받은 죄수 70여 만 명을 나누어 아방궁을 짓게 하거나 여산의 무덤을 조성하게 했다. 북산에서 석재를 캐내고 촉과 형(초) 지역에서 목재를 모두 이곳으로 날랐다. 

관중에다 3백 채, 함곡관 동쪽에다 4백여 채의 궁전을 지었다. 그리고 동해군 구현(朐縣)에 비석을 세우고 진의 동쪽 문으로 삼았다. 동시에 3만 가구를 역읍으로, 5만 가구를 운양(雲陽)으로 이주시켜 10년간 세금과 요역을 면제해주었다.

노생(盧生)이 시황에게 이렇게 유세했다.

“신 등이 영지, 선약, 신선을 구하러 다녔으나 늘 만나지 못했습니다. 방해물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희 쪽에서는 주상께서 종종 미행을 나가시어 악귀를 물리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악귀를 물리치면 진인(眞人)이 올 것입니다. 주상께서 머무르시는 곳을 신하들이 알게 하면 신선의 강림이 방해를 받을 것입니다. 진인은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으며,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습니다. 구름을 타고 다니며 천지와 더불어 영원히 존재합니다. 지금 주상께서 천하를 다스리시지만 욕심없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셨습니다. 바라옵건대 주상께서 머무시는 궁을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불사약을 구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이에 시황은 “짐이 진인을 흠모해왔다. 이제부터 짐이라 하지 않고 ‘진인’이라 부르겠다”라고 했다. 바로 명을 내려 함양 부근 200리 안에 있는 궁관 207곳을 구름다리와 회랑으로 연결하고, 휘장, 종, 북, 미인들로 채우되 모두 등록된 각자의 부서에서 함부로 옮기지 못하게 했다. 황제가 행차하여 거처하는 곳을 발설하는 자는 사형에 처했다.

시황제가 양산궁(梁山宮)에 행차했는데, 산 위에서 보니 승상의 마차가 많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궁중의 누군가가 승상에게 알리니 승상이 바로 수레를 줄였다. 시황이 노하여 “이는 궁중의 누군가가 내 말을 누설한 것이다”며 심문했으나 자백하는 자가 없자 당시 옆에 있었던 자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라고 명령했다. 이후 황제가 행차하여 머무는 곳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정사를 처리하고 신하들이 결정된 일을 수행하는 등 모든 것이 다 함양에서 이루어졌다.

후생(侯生)과 노생이 서로 일을 꾸미며 이렇게 말했다.

“시황이란 위인이 천성이 고집이 세고 자기 멋대로이며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 제후로 일어나 천하를 합병했으니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고금을 막론하고 자신을 따를 사람이 없다고 여긴다. 오로지 옥리만을 기용하고 총애한다. 박사가 70명이지만 그저 수만 채우고 쓰질 않는다. 승상과 대신들은 다 된 일만 명령을 받고 모든 것을 주상에 의존하여 처리할 뿐이다. 주상은 형벌과 살육으로 위엄을 세우길 즐기니 천하는 죄를 지을까 겁을 내고 녹봉 지키기에 급급하여 충성을 다하지 않는다. 

주상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들으려 하지 않고 날로 교만해지고, 아래는 두려움에 바짝 엎드려 기만하고 비위만 맞추고 있다. 진의 법에 둘 이상의 방술을 겸할 수 없고, 그 방술에 효험이 없으면 바로 죽음이다. 별자리와 기상을 관측하는 자가 300에 이르고 모두 뛰어난 자들인데 겁을 내고 기피하고 아부만 일삼을 뿐 감히 잘못에 대해 직언하지 못한다. 천하의 대소사가 모두 주상에 의해 결정나니 주상은 읽어야 할 문서를 저울로 달아 낮밤없이 살펴야 한다. 양을 채우지 못하면 쉬지도 않는다. 권세를 탐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선약을 구해주어서는 안 된다.”

그러고는 바로 도망쳤다. 시황이 도망 소식을 듣고는 대노하여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전에 천하의 쓸모없는 책들을 거두어 모두 불태우게 하고, 학자와 방사들을 아주 많이 모조리 불러 모아 태평을 이루려 했더니 방사들이 단약을 구워 기이한 약을 만들자고 했다. 지금 듣자하니 한중(韓衆, 한종)은 가더니 소식이 없고, 서불 등은 거금을 쓰고도 끝내 약을 구하지 못했다. 간사한 놈들이 서로 이익을 챙기고 고발한다는 말만 날마다 듣고 있다. 노생 등을 내가 존중해서 잘 대했거늘 지금 나를 비방하며 나의 부덕을 무겁게 하고 있다. 함양에 있는 이런 방사들을 조사해 보았더니 요망한 말로 검수를 어지럽히는 자들도 있었다.”

이에 어사에게 이런 부류들을 모조리 심문하게 하니 이자들은 서로를 끌어들이며 고발했다. 이렇게 법을 어긴 자들 460여 명을 골라내서 함양에다 파묻은 다음 천하에 알려서 후세에 경계로 삼게 했다. 또 유배된 자들을 더 징발해서 변경으로 옮겼다. 시황의 맏아들 부소(扶蘇)가 다음과 같이 직언했다.

“천하가 비로소 평정되었으나 먼 지방의 검수들은 아직 다 모이지 않았으며, 유생들은 모두 공자를 칭송하며 본받고 있습니다. 지금 주상께서 엄한 법으로 그들을 묶으니 신은 천하가 불안해질까 두렵습니다. 주상께서 부디 잘 헤아려 주십시오.”

시황이 노하여 부소를 북쪽 상군의 몽염을 감시하도록 보냈다.

진시황 36년 (기원전 2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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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 화성이 심성(心星)을 침범했다. 유성이 동군에 떨어졌는데 땅에 닿자 돌이 되었다. 검수들 중 누군가가 그 돌에 “시황제가 죽고 땅이 나뉜다”라고 새겼다. 시황이 이를 듣고 어사를 보내 심문하게 했으나 자백하는 자가 없자 돌을 주운 주변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돌은 불태웠다. 시황이 기분이 좋지 않아 박사에게 ‘선진인시(仙眞人詩)’를 짓게 하여 천하를 순시하며 가는 곳마다 악사들에게 연주하고 노래하게 했다.

가을, 사자가 관동에서 밤중에 화음(華陰), 평서(平舒) 길을 지나는데 벽옥을 쥔 누군가가 사자를 가로막으며 “나를 대신해 호지군(滈池君)에게 갖다 주시오”라고 했다. 이어 “금년에 조룡(祖龍)이 죽을 것이오”라고 말했다. 사자가 그 까닭을 묻자 그 벽옥을 남겨 놓고는 사라져버렸다. 사자가 벽옥을 갖고 와서 이를 전부 다 보고하니 시황은 말없이 한 참을 있다가 “산 귀신은 한 해의 일만 알 뿐이다”라 했다. 사람을 물린 뒤 “조룡도 사람의 조상이다”라 하고는 어부(御府)에게 벽옥을 조사하게 하니 28년에 순시하다가 장강을 건너면서 빠뜨린 그 벽옥이었다. 이에 시황은 점을 치게 했고, 이동하는 것이 길하다는 점괘가 나와 북하, 유중의 3만 가구를 이주시키고 작위를 한 등급씩 올려주었다.

진시황 37년 (기원전 2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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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년 10월 계축일, 시황이 순시를 나섰다. 좌승상 이사가 수행하고 우승상 풍거질이 도성을 지켰다. 막내아들 호해(胡亥)가 부러워 함께 가기를 간청해서 주상이 허락했다. 11월, 운몽(雲夢)에 이르러 구의산(九疑山)에서 우(虞, 요), 순(舜)에 제사를 드렸다. 장강에서 배를 타고 내려가며 적가(籍柯)를 보고, 해저(海渚)를 건너서 단양(丹陽)을 지나 전당(錢唐)에 이르러 절강(浙江)을 바로보니 물결이 거세져 120리 서쪽강폭이 좁은 곳으로 가서 건넜다. 회계산(會稽山)에 올라 대우(大禹)에게 제사를 드리고 남해를 바라보며 비석을 세워 진의 공덕을 칭송했다. 

그 비문은 이랬다.

“황제의 뛰어난 공덕으로 천하를 평정하시니 그 덕과 은혜가 길이길이 미치도다. 37년에 몸소 천하를 순시하시어 먼 지방까지 두루 살피시었다. 마침내 회계산에 올라 풍습과 습속을 두루 살피시니 검수가 삼가 반듯하게 공경했다. 이에 신하들은 그 공덕을 칭송하며 근원을 더듬어 그 사적을 더듬고 그 높고 영명하심을 되돌아 보았다. 진의 성스러움이 나라에 임하시니 처음으로 형벌을 제정하시고 과거의 전장 제도를 뚜렷하게 밝히셨다. 처음으로 법식을 공평하게 하시고 맡은 직책을 잘 살펴 구별함으로써 변치 않는 원칙을 세우셨다. 

육국의 왕들이 배신을 일삼으며 탐욕스럽고 포악하게 굴고, 힘만 믿고 오만하게 여러 차례 군을 동원했다. 은밀히 첩자를 통해 합종을 꾀하며 그 행동이 방자하기 그지 없었다. 안으로는 사악한 모략을 꾸미고, 밖으로는 변방을 침략하여 마침내 큰 재앙을 일으켰다. 이에 의로운 위세로 이를 토벌하고 포악함을 잠재우니 난적들이 멸망했다. 성스러운 덕이 널리 곳곳에 미쳐 천하가 그 은택을 무궁하게 입었도다. 황제께서 천하를 합병하시고 만사를 다스리시니 멀든 가깝든 모두 깨끗해졌다. 만물을 나르고 관리하며, 사실을 살펴 검증하여 각각 그 이름을 기록하여 올렸다. 귀천없이 모두에게 의견을 진술하게 하니 좋던 아니던 숨길 것이 없게 되었다. 

허물을 가리는 것은 의로움을 더럽히는 것이고, 자식이 있는데도 재가하는 것은 죽은 지아비를 배신하는 부정(不貞)이다. 내외를 구별하여 음탕한 짓을 금하니 남녀가 순결해졌다. 처가 있는 남편이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으면 죽여도 죄가 되지 않게 하니 남자는 지켜야 도의를 지켰고, 남편을 버리고 달아나 재가한 여자는 자식들이 어미로 인정하지 않아도 되니 모두 교화되어 정숙해졌다. 큰 통치로 낡은 습속을 씻어내니 천하가 그 기풍을 타고 혜택을 입게 되었도다. 모두가 법가 규정을 지키고 화목하고 편안하게 서로를 격려하니 명에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검수는 깨끗하게 모두가 함께 원칙을 지키며 즐겁게 태평을 영위했다. 후손들은 경건히 법을 받들면 수레와 배가 기울지 않듯이 항상 끝없이 다스려질 것이다. 이에 수행 신하들은 그 공덕을 칭송하며 이를 이 돌에 새겨 영원히 전해지길 청하노라.

돌아올 때는 오현(吳縣)을 지나 강승(江乘)에서 강을 건넜다. 이어 해안을 따라 북쪽 낭야에 이르렀다. 방사 서불 등은 바다로 가서 선약을 구하길 몇 해가 지나도록 구하지 못하고 비용만 허비하자 문책 받을 것을 두려워해 거짓으로 “봉래의 선약은 구할 수는 있으나 커다란 상어 때문에 늘 어려움을 당하다보니 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활 잘 쏘는 사람을 함께 보내 상어를 보는 즉시 연속 발사되는 석궁을 쏘면 됩니다”라고 했다.

시황이 해신과 싸우는 꿈을 꾸었는데 마치 사람 모양이었다. 꿈을 해몽하는 자에게 물으니 박사가 “수신은 볼 수 없지만 큰물고기나 교룡(蛟龍)으로 징후를 나타냅니다. 지금 주상께서 모든 것을 제대로 갖추어 제사를 올렸음에도 이른 악한 신이 나타났으니 없애야 선한 신이 이를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바다로 나가는 자들에게 큰물고기를 잡는 기구를 가지고 가게 하고, 몸소 석궁을 들고 대어를 쏘기 위해 기다렸다. 낭야를 따라 북으로 영성산(榮成山)까지 갔지만 큰물고기는 보이지 않았다. 지부에 이르자 거대한 물고기가 보여 쏘아 한 마리를 죽이고 마침내 바다를 따라 서쪽으로 갔다.

(진시황이) 평원진(平原津)에 이르렀을 때 병이 났다. 시황은 죽음이란 말을 싫어해서 신하들도 감히 죽음을 입에 올리지 못했다. 주상이 병이 점점 심해지자 공자 부소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돌아와서 장례를 치르고 함양에 안장하라”라 한 뒤 봉인하고 옥새와 부절을 관장하는 중거부령 조고에게 보관하게 하고는 사신에게 넘기지 않았다.

7월 병인일, 시황이 사구(沙丘) 평대(平臺)에서 세상을 떠났다. 승상 이사는 주상이 바깥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모든 공자와 천하가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이를 비밀에 붙이고 상을 알리지 않았다. 관을 온량거(轀涼車)에 싣고 전부터 총애를 받아온 환관을 수레에 태워 가는 곳마다 식사를 올리게 했다. 백관들도 전과 같이 보고를 올리게 했는데 환관이 온량거 안에서 보고된 일을 바로 바로 처리했다. 오직 호해와 조고 및 총애 받던 환관 5,6명만 주상의 죽음을 알고 있었을 뿐이다. 조고는 전에 호해에게 글과 법률 등을 가르친 바 있어 호해가 개인적으로 조고를 좋아했다.

조고는 공자 호해, 승상 이사와 음모를 꾸며, 시황이 공자 부소에게 보낸 편지를 뜯고 이를 승상 이사가 사구에서 시황의 유언을 받은 것처럼 가짜를 만들어 호해를 태자로 세웠다. 이와 함께 공자 부소와 몽염에게 보내는 편지도 만들어서 죄목을 지적하며 죽음을 내렸다. 이 일은 「이사열전(李斯列傳)」에 갖추어져 있다. 일행이 마침내 정경(井陘)을 지나 구원(久原)에 이를 무렵 때는 여름이라 주상의 온량거에서 (시체가 썩는) 냄새가 났다. 이에 시종관들에게 말린 고기 1석을 채워 그 냄새를 구분 못하게 했다.

일행은 직도를 따라 함양에 도착한 뒤 상을 알렸다. 태자 호해가 제위를 이어받아 2세 황제가 되었다. 9월, 시황을 여산(酈山)에 안장했다.

시황이 즉위하자 바로 여산에 무덤을 축조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천하를 합병한 다음에는 천하에 노역을 위해 70여 만 명을 투입하여 우물 셋 깊이만큼 파고 곽에 이르도록 구리 녹인 쇳물을 붓고 궁궐의 모습, 백관 기이하고 진귀한 기물들을 옮겨 가득 채웠다. 장인에게는 화살이 발사되는 기관을 만들게 하여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바로 발사되게 했다. 수은으로는 수많은 하천과 강 그리고 바다를 만들어 기계장치로 계속 흐르도록 했다. 위에는 천문도를 갖추고 바닥에는 지도를 갖추었다. 인어 기름으로 초를 만들어 오래도록 꺼지지 않게 했다. 2세는 “선제의 후궁 가운데 자식이 없는 자들은 내보내는 것은 옳지 않다”며 모두 따라 죽게 명령하니 죽은 자가 아주 많았다. 장례가 끝나자 누군가 장인들이 기관을 만들고 기물을 옮긴 자들도 이를 다 알고 있으니 귀한 기물들이 빠져 나갈 수 있다고 했다. 큰일이 끝나고 기물들을 다 넣자 가운데 문을 폐쇄하고 바깥문도 내려 장인과 기물을 운반한 자들을 모두 나오지 못하게 했다. (무덤은) 풀과 나무를 심어 산처럼 만들었다.

이세황제 원년 (기원전 2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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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 황제 원년(기원전 209년), 나이는 스물한 살이었다. 조고를 낭중령으로 삼아 국사를 맡겼다. 2세가 조서를 내려 시황의 무덤 사당에 바치는 희생과 산천에 올리는 모든 제사의 예물을 늘리게 했다. 신하들에게는 시황의 사당을 높이는 문제를 상의하게 하니 신하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천자는 7묘, 제후는 5묘, 대부는 3묘를 두어 만세토록 훼손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지금의 시황의 사당은 (가장 높은) 극묘(極廟)로 사해에서 공물을 바치고 희생을 늘리고 모든 예를 다 갖추게 하여 더는 보탤 것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선왕의 사당은 서옹(西雍)에도 있고 함양에도 있습니다. 천자는 시황의 사당에만 직접 술을 올리고, 양공 이후는 그 수를 줄여 일곱 개만 남기고, 신하들이 가서 예에 따라 제사를 올리게 하십시오. 그렇게 해서 시황의 사당을 황제의 시조묘로 높이십시오. 황제께서는 다시 스스로를 ‘짐’이라 하십시오.”

2세가 조고와 의논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짐이 나이가 어리고 막 즉위한 지라 검수들이 따르지 않는다. 선제께서는 군현을 순시하며 강함을 보이시어 천하를 모두 복종시키셨다. 지금 순시도 않고 편안하게 지내는 것은 약함을 내보이는 것이니 이로는 천하를 통치할 수 없다.”

봄에 2세가 동쪽 군현을 순행하러 나섰고 이사가 따랐다. 갈석산에서 바다를 따라 남쪽 회계에 이르러 시황이 세운 비석에 글자를 모두 새기고 비석 옆면에는 수행 대신들의 이름을 적어서 선제의 공덕을 밝혔다.

황제가 말했다.

“금석에 새긴 것은 모두 시황께서 하신 일들이다. 지금 그 호칭을 이어받고도 금석에다 시황제가 새기지 않고 오랫동안 방치한다면 마치 후세가 한 것처첨 되어 그 공덕을 밝힐 수 없게 될 것이다.”

승상 이사와 풍거질, 어사대부 덕(德)이 죽음을 무릅쓰며 “신들은 조서를 비석에다 일일이 새겨 분명히 알 수 있도록 하길 청하옵니다”라고 아뢰었다. 2세는 “좋다”며 허락한 다음 요동으로 갔다고 돌아왔다.

이 무렵 2세는 조고를 더욱 중용하여 법령을 만들고는 은밀히 조고와 “대신들은 복종하지 않고, 관리들은 아직 세력이 강하고, 여러 공자들은 기어이 나와 다투려 하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라는 상의를 했다. 조고는 이렇게 말했다.

“신이 본디 말씀을 올리고자 했으나 감히 못했습니다. 선제 때의 대신들은 모두 천하에 대대로 명성을 남긴 귀하신 몸들로 그 쌓은 공이 대대로 전해져 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조고는 본디 비천한 몸이었으나 폐하께서 어여삐 여겨 높이 써 주신 덕에 궁중 일을 관장하게 되었습니다. 대신들은 불만에 가득 차 단지 겉으로 따르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진짜 복종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주상께서는 순시하는 때를 기회로 삼아 군현의 우두머리들 중 죄를 지은 자들을 가려내어 처벌하시어 위로는 천하에 위엄을 보이시고 아래로는 주상께서 평소 아니다 싶은 자들을 제거하십시오. 지금 시기는 문치가 아니라 무력으로 결정해야 하니 원하옵건대 폐하께서는 의심하시지 말고 시세를 따르십시오. 그러면 신하들도 미처 모의할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현명한 군주는 버려진 인재를 모아 천한 자는 귀하게 만들고 가난한 자는 부유하게 만들며 멀리 있는 자들도 가까이 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위아래가 모이고 나라는 편안해집니다.”

2세는 “좋다”라고는 바로 대신과 여러 공자들을 처형하였는데 그 죄목이 심지어 (황제) 가까이 있는 시위나 삼랑(三郎) 같은 자리에까지 연루되어 벗어날 수가 없었다. 공자 여섯은 두현(杜縣)에서 살육당했고, 공자 장려(將閭)의 세 형제는 내궁에 갇혔다가 맨 나중에 죄를 다스렸다. 2세는 사신을 보내 장려에게 “공자가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않았다. 그 죄가 사형에 해당하니 법에 따라 형을 집행한다”고 했다.

장려가 “궁중의 의례에서 나는 여태껏 예를 담당하는 관리의 지시에 따르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조정에서도 지금까지 감히 예에 어긋나는 행동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명령을 받아 응대할 때도 감히 말을 실수한 적이 없는데 어째서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않았다고 합니까? 무슨 죄인지 알고나 죽길 원합니다”라고 했다. 사신은 “나는 그 문제에 대해 뭐라 할 수 없소. 명을 받들어 일을 처리할 뿐”라고 했다. 장려는 하늘을 우르러 큰 소리로 “하늘이여! 나는 죄가 없소이다”를 세 번이나 외쳤다. 형제 세 사람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검을 뽑아 자살했다. 종실은 공포에 떨었고, 신하들 중 직언하면 비방으로 간주되었다. 고관들은 녹봉과 자리를 지키려고 아부했고, 검수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4월, 2세가 함양으로 돌아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선제께서 함양의 조정이 좁다고 여기셨기 때문에 아방궁을 경영하셨다. 궁실이 완성되기 전에 주상께서 세상을 떠나시는 통에 공사를 그만두고 여산에 흙을 덮어 봉분을 만들었다. 여산의 일이 모두 끝났는데 아방궁 공사를 하지 않고 그냥 두는 것은 선제께서 벌이신 일을 잘못이라고 알리는 것이 된다.”

다시 아방궁을 짓기 시작했다. 밖으로 사방의 외국들을 다독거리는 일은 시황의 계획과 같았다. 건장한 병사 5만을 징집하여 함양에 주둔시켜 지키게 하고, 활쏘기와 개․말․금수를 훈련시키게 했다. 먹어야 할 사람은 많은데 부족하여 군현에다 식량과 사료를 운송하도록 하되 먹을 식량은 각자 알아서 휴대하고 함양 밖 300리 이내에서 나는 곡식은 먹지 못하게 했다. 법의 집행이 갈수록 각박해졌다.

7월, 수자리에 가던 진승(陳勝) 등이 옛 형(荊) 지역서 반란을 일으켜서 (나라 이름을) ‘장초(張楚)’라 했다. 진승은 초왕으로 자립하여 진현(陳縣)에 머물면서 장수들을 보내 각지를 공략하게 했다. 산동 군현의 젊은이들이 진의 관리들에게 고초를 당하다가 군수, 군위, 현령, 현승을 죽이고 진섭(진승)과 호응하고는 서로 제후니 왕이 되어 합종해서는 서쪽으로 진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동방에 사신으로 나갔던 알자가 돌아와 반란을 2세에게 전하자 2세는 노하여 법관에게 넘겼다. 그 후 다시 사신이 돌아와서 주상이 물으니 “도적떼들입니다. 군수와 군위가 추적하여 지금 다 잡아들였으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라고 했다. 주상이 기뻐했다. 무신(武臣)이 조왕으로 자립했고, 위구(魏咎)는 위왕이 되았으며, 전담(田儋)은 제왕이 되었다. 패공(沛公)이 패(沛)에서 기의했고, 항량(項梁)은 회계군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이세황제 2년 (기원전 2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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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겨울, 진섭이 파견한 주장(周章) 등은 서쪽으로 진격해 희수(戲水)에 이르렀을 때 병력 수가 10만에 이르렀다. 2세는 크게 놀라서 신하들과 상의하면서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라고 물었다. 소부(少府) 장한(章邯)이 이렇게 말했다.

“도적이 이미 여기까지 이른데다 수도 많고 강합니다. 이제 가까운 현에서 징발하기에는 늦었으니 여산에서 일하는 많은 죄수들을 사면시키고 무기를 주어 공격하게 하게 하시지요”라고 했다.

2세는 곧 천하에 대사면을 내리고 장한에게 그들을 통솔하여 주장의 군대를 격파하게 하여 마침내 주장을 조양(曹陽)에서 죽였다. 2세는 여기에다 장사 사마흔(司馬欣)과 동예(董翳)를 보내 장한이 도적을 공격하는 것을 돕게 하여 진승을 성보(城父)에서 죽이고, 항량을 정도(定陶)에서 격파했다. 위구는 임제(臨濟)에서 없앴다. 초지역 도적의 명장들이 죽자 장한은 곧 북으로 황하를 건너 조왕 헐(歇)을 거록(巨鹿)에서 공격했다.

조고는 2세를 이렇게 설득했다. 

“선제께서는 천하에 임하시어 오래 통치하셨기에 신하들이 감히 잘못된 짓을 하거나 사악한 말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아직 젊으신데다가 이제 막 즉위한 터라 공경들과 더불어 나라 일을 결정할 까닭이 없습니다. 일에 잘못이 있으면 신하들에게 단점만 보이게 됩니다. 천자가 짐이라 하는 것은 실로 (천자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에 2세는 늘 깊은 궁중에 거처하면서 조고와 모든 일을 결정했다. 그로부터 공경들이 (황제를) 볼 기회는 줄고 도적은 더욱 많아지니 관중의 병졸을 징발하여 동쪽 도적들을 쳐야 하는 일이 끊이질 않았다.

우승상 풍거질, 좌승상 이사, 장군 풍겁이 나아가 이렇게 간언했다.

“관동지방에서 도적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 진은 병사를 징발하여 토벌하여 아주 많은 수를 죽였습니다만 아직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도적이 많은 것은 수자리, 수상운송, 토목건축 등 노역이 너무 힘들고 세금이 많기 때문입니다. 청하옵건대 아방궁 축조를 멈추고 사방 변경의 수자리와 물자 수송을 줄이십시오.”

2세는 말했다.

“내가 듣자하니 한비자가 말하길 ‘요․순은 나무를 베어 제대로 깎지도 않고 서깨래를 만들고, 짚으로 지붕을 이어 처마 끝도 잘라내지 않았으며, 질그릇에 밥과 물을 담아 먹고 마셨으니 문지기의 삶도 그보다는 못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는 용문(龍門)을 뚫어 대하(大夏)를 통하게 하고, 막힌 황하의 물길을 터서 바다로 흐르게 했는데, 몸소 가래를 들고 일하느나 정강이 털이 다 닳아 없어졌다. 노예의 노고도 이보다 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했다. 무릇 천하를 소유한 귀한 사람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하는 것이다. 군주는 엄하게 법령을 밝혀 아랫사람이 감히 나쁜 짓을 못하게 함으로써 천하를 통치하는 것이다.

순과 우 임금처럼 귀한 천자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곤궁한 삶에 힘든 노동을 하면서 백성을 감쌌으니 법령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짐은 만승을 가진 존귀한 사람이지만 실속이 없다. 그러니 천 승의 친위대와 만 승의 군대를 만들어 내 호칭과 어울리게 하려고 한다. 하물며 선제께서는 제후의 신분으로 천하를 합병하지 않았던가. 천하를 평정하신 다음에는 밖으로 사방의 외족들을 물리쳐 변방을 안정시키셨고, 궁실을 지어 그 뜻을 나타내셨다. 그대들도 선제의 공업을 낱낱이 보지 않았던가. 지금 짐이 즉위한 후 2년 사이 도적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데도 그대들은 막지 못했다. 또 선제께서 하신 일을 없애려 하니 이는 무엇보다 선제에 대한 보답이 아니며, 다음으로는 짐에 대한 충성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니 어째서 그 자리에 있단 말인가?”

풍거질, 이사, 풍겁을 옥리에게 넘겨 그들의 죄를 따지고 나무랐다. 풍거질과 풍겁은 “장수와 재상은 욕보일 수 없다”며 자살했고, 이사는 옥에 갇혔다가 오형을 받았다.

이세황제 3년 (기원전 2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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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장한 등이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거록을 포위했다. 초의 상장군 항우(項羽)가 초의 병졸을 거느리고 거록으로 가서 구원했다. 겨울, 조고가 승상이 되어 끝내 사건을 꾸며 이사를 죽였다. 여름, 장한 등이 전투에서 거듭 물러나자 2세는 사신을 보내 장한을 꾸짖었다. 장한이 두려워 장사 사마흔을 보내 보고를 청했으나 조고는 만나주지 않았고 또 믿지도 않았다. 사마흔이 겁이 나서 도망쳤다. 조고가 사람을 시켜 쫓아가 체포하게 했으나 잡지 못했다. 사마흔은 장한을 만나 “조고가 궁중의 일을 마음대로 하고 있으니 장군은 공이 있어도 죽임이요, 공이 없어도 죽음입니다”라고 했다. 항우가 진의 군대를 습격하여 왕리(王離)를 포로로 잡으니 장한 등이 마침내 병사를 이끌고 제후 편에 투항했다.

8월 기해일, 조고는 난을 일으키고자 했으나 신하들이 듣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먼저 시험을 해보려고 사슴 한 마리를 2세에게 바치면서 “말입니다”라고 했다. 2세가 웃으며 “승상이 잘못 본 것 아니오? 사슴을 말이라니”라고 했다. 좌우에 물으니 입을 다문 자도 있고, 말이라며 조고에게 아부하는 자도 있었으며, 사슴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었다. 조고는 사슴이라고 말한 사람들에게 몰래 죄를 씌워 모함했다. 이후로 신하들이 모두 조고를 두려워했다.

앞서 조고는 여러 차례 “관동의 도적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항우가 진의 장수 왕리 등을 거록에서 사로잡고 진격해오자, 장한 등은 군을 몇 차례 물리면서 글을 올려 구원을 청했다. 연․조․제․초․한․위는 모두 자립하여 왕을 세웠다. 함곡관 동쪽은 대부분 진의 관리를 배반하고 제후들에 호응했다. 제후들은 모두 자신들의 무리를 이끌고 서쪽으로 향했다. 패공은 수만 명을 이끌고 무관(武關)을 함락시킨 다음 사람을 조고에게 보내 사사로이 비밀 접촉을 시도했다. 조고는 2세가 노하여 자신을 처벌하지 않을까 두려워 병을 핑계로 조회에 나가지 않았다. 2세는 흰호랑이가 수레 왼쪽 말을 물어뜯어 죽이는 꿈을 꾸고는 기분이 안 좋아 해몽을 하게 했더니 “경수(涇水)의 신이 괴상한 일을 일으킨다”는 점괘가 나왔다. 2세는 곧 망이궁(望夷宮)에서 목욕재계하고 흰말 네 마리를 경수에 빠뜨려 경수의 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사람을 조고에게 보내 도적과 관련한 일을 나무라자 조고가 겁이 나서 사위인 함양령(咸陽令) 염락(閻樂), 아우 조성(趙成)과 은밀히 의논했다.

“주상이 말을 듣지 않더니만 이제 일이 급해지니까 그 화를 우리 집안에 돌리려 한다. 내가 주상의 자리를 바꾸어 공자 영(嬰)을 다시 세우고자 한다. 공자 영은 인자아고 검소하여 백성들이 모두 그의 말을 따를 것이다.”

낭중령을 시켜 궁 안에서 내응하게 한 다음 큰 도적이 들었다는 거짓말로 염락에게 관리와 병졸을 불러 모르게 했다. 그리고는 염락의 어미를 겁박하여 조고가 있는 곳에 가두었다. 염락에게 병졸 천 명을 주고는 망이궁의 대전 문 쪽으로 보내 위령복야(衛令僕射)를 포박하게 하고는 “도적이 여기까지 침입했거늘 어찌 막지 않았느냐”라고 했다. 위령이 “사방으로 병졸을 배치하여 삼엄하게 지키게 했는데 어떻게 도적이 궁에 침입할 수 있단 말이오”라고 하자 염락이 위령의 목을 베고는 바로 쳐들어가 마구 활을 쏘며 다녔다. 낭관과 환관들은 크게 놀라 어떤 자는 도망치고, 어떤 자는 맞서 싸웠으나 맞선 자는 다 죽으니 죽은 자가 수십 명에 이르렀다. 낭중령이 염락과 함께 들어가서 앉는 자리의 휘장을 화살을 쏘았다. 2세가 노하여 좌우를 불렀으나 좌우는 모두 겁을 먹고 싸우질 못했다. 곁에 있던 환관 하나가 감히 달아나지 못하고 2세를 모셨는데 2세가 방안으로 들어가 “너는 어째서 내게 말해주지 않았느냐? 일에 여기에 이르도록”라고 했다.

환관은 “신이 감히 말씀드리지 않았기에 (목숨을) 보전한 것입니다. 신이 진작 말씀드렸더라면 벌써 죽임을 당했을 것이니 어찌 지금까지 무사했겠습니까”라고 했다. 염락이 2세 앞으로 다가가 “족하는 교만방자하여 아무렇게나 사람을 죽여 천하가 모두 족하에 반기를 들었으니 족하는 스스로 생각해보시오”라고 (그 죄상을) 꼽았다. 2세가 “승상을 볼 수 없겠는가”라고 하자 염락은 “안 되오”라고 했다. 2세가 다시 “내가 한 군의 왕이 되면 안 되겠는가”라고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만호의 후가 되길 원한다”고 했으나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다른 공자들처럼 처자식과 함께 검수가 되길 바란다”라고 했다. 염락은 “신은 승상의 명령을 받들어 천하를 위해 족하를 죽이려는데 것이오, 족하가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신은 감히 보고드릴 수 없소”라 하고는 병졸들에게 안으로 들어가라고 지시하자 2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영 (기원전 2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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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락이 돌아가 조고에게 보고했다. 조고는 여러 대신과 공자들을 모조리 불러 모아 2세를 죽인 상황을 말했다.

“진이 본래 왕국이었으나 시황이 천하에 군림했기에 ‘제’라 불렀던 것이오. 지금 6국이 다시 자립하고 진의 땅은 더욱 좁아졌으니 이제 빈 이름이나 마찬가지인 ‘제’라 부르는 것은 안 되겠소. 전처럼 왕이라 부르는 것이 마따할 것이오.”

2세의 형의 아들인 공자 자영을 진왕으로 삼고, 검수의 예로 2세를 두현(杜縣) 남쪽의 의춘원(宜春苑)에 묻었다. 자영에게 목욕재계하고 조상의 사당에서 제사를 드리게 하는 한편 신하들을 접견하여 옥새를 받들도록 했다. 목욕재계 닷새째 자영은 두 아들과 이렇게 의논했다.

“승상 조고가 망이궁에서 2세를 죽이고는 신하들이 자신을 죽이지 않을까 겁이 나서 대의를 거짓으로 빙자하여 나를 왕으로 세운 것이다. 내가 들자 하니 조고가 초와 약속하길 진의 종실을 없애고 관중의 왕이 되려고 한다. 지금 내게 종묘에 제사를 드리게 하는 것은 이를 기회로 사당 안에서 나를 죽이려는 것이다. 내가 병을 구실로 가지 않으면 승상이 틀림없이 스스로 찾아 올 테니 오는 즉시 죽여라.”

조고가 사람을 보내 자영을 여러 차례 청했으나 자영이 가지 않자 조고는 과연 자기가 가서는 “종묘의 일은 중대사인데 왕께서 어찌하여 가지 않습니까”라고 했다. 자영이 마침내 조고를 재궁에서 찔러 죽이고 (조)고의 집안 삼족을 멸한 다음 함양 저자거리에 조리를 돌렸다. 

자영이 진왕이 된 지 46일째, 초의 장수 패공이 진군을 격파하고 무관에 입관하여 마침내 패상(覇上)에 이르러 자영에게 사람을 보내 투항을 약속받았다. 자영은 즉시 (죄인처럼) 목에 끈을 매고 흰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나와 천자의 옥새와 부절을 받들고 지도(軹道) 부근에서 항복했다. 패공이 마침내 함양에 입성하여 궁실의 창고를 봉쇄하고 군대를 다시 패상으로 물렸다. 한 달 여가 지나자 제후들의 병력이 이르렀다. 항적(항우)은 종장(從長, 맹주)이 되어 자영과 진의 공자들 및 종족들을 죽이고 함양성을 도륙했다. 궁실을 불태우고 자녀를 포로로 잡았으며 진기한 보물과 재물들을 거두어 제후들과 나누었다. 

진을 멸망시킨 후 그 땅을 셋으로 나누어 옹왕(雍王), 새왕(塞王), 적왕(翟王)이라 하고 ‘삼진(三秦)’이라 불렀다. 항우가 서초패왕(西楚覇王)이 되어 천하 왕제후들을 나누는 일을 주도하니 진이 결국 멸망했다. 그 뒤 5년, 천하는 한에 의해 평정되었다.

사마천의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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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진의 선조 백예(伯翳)는 일찍이 당우(唐虞, 요순)의 시대에 공을 세워 땅과 성을 하사 받았으나 하와 은에 이르러 흩어졌다, 주가 쇠퇴할 무렵 다시 진은 다시 일어나 서쪽 변방에 도읍을 정했다. 목공 이래 차츰 제후들을 잠식했고, 마침내 시황이 나왔다. 시황은 스스로 공적은 오제를 뛰어넘고 땅은 삼왕보다 넓다며 이들과 함께 비교된 것조차 수치스러워했다.

훌륭하도다 가생의 말씀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진은 제후들을 합병하고 산동에 30여 군을 설치하여 포구와 관문을 수리하고 험준한 요새를 거점으로 군대를 정돈하여 지켰다. 그러나 진섭이 수졸로서 흩어져 있는 무리 수백을 모아 팔을 걷어붙이고 고함을 지르며, 활과 창 같은 무기 대신 호미, 서까래, 몽둥이 따위를 들고 식량도 없이 싸운 곳에서 먹을 것을 구해 먹으며 천하를 누볐다. 진은 험준한 요새를 갖고도 지키지 않고 관문과 교량은 닫지도 않았다. 긴 창을 찌르지도 않았고, 강력한 활을 쏘지도 않았다. 초의 군대가 깊숙이 홍문까지 들어와 싸웠지만 장애물조차 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산동이 크게 소란스러웠고, 제후와 호걸들이 서로 들고 일어났다. 진은 장한에게 군대를 끌고 동방을 정벌하게 했으나 장한은 그 기회에 삼군의 무리로 외부와 거래하여 그 주상을 도모하려 했다. 신하들의 불신은 여기에서도 충분히 볼 수 있다. 자영이 즉위했으나 끝내 깨닫지 못했다. 자영이 평범한 군주의 재능에 중간 정도의 재능을 자의 도움을 받았더라면 산동이 혼란에 빠졌더라도 진은 땅을 보전하고 종묘 제사 또한 끊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진의 땅은 산과 강으로 단단히 둘러싸여 사방이 요새와 같은 나라이다. 목공 이래 진왕(진시황)에 이르기까지 20여 명의 군주들은 늘 제후의 우두머리였다. 이것이 어찌 대대로 유능했기 때문이겠는가? 그 형세가 그랬기 때문이다. 게다가 천하가 한 마음으로 힘을 모아 진을 공격했는데, 그 당시 유능하고 지혜로운 자들이 즐비하여 뛰어난 장수들은 군사를 움직이고, 유능한 재상들은 그 모략을 서로 나누었지만 험준한 지세에 막혀 나아갈 수 없었다. 진이 이를 끌어들여 싸우려고 관문을 열자 백 만 무리는 북으로 도주하고 결국은 무너졌다. 어찌 용기와 힘 그리고 지혜가 부족해서였겠는가? 

지형이 불리하고 형세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진은 작은 읍을 큰 성과 합치고 험준한 요새를 지키며 보루를 높이 쌓고 싸우지 않으면서 관문을 닫고 요새를 차지하고는 긴 창을 둘러메고 수비해야만 했다. 제후들은 필부에서 일어나 이익으로 합쳐진 자들이지 제왕의 자격을 갖춘 자도 없었다. 친하지도 않았고, 부하들은 따르지 않았다. 명분이 진의 멸망이었지 사실은 이익 때문이었다. 저들이 진의 험준함은 범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았더라면 틀림없이 군대를 물렸을 것이다. (진은) 땅과 인민을 편히 쉬게 하면서 그들이 피폐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약자를 거두어 부축하여 대국의 군주를 호령했더라면 천하에 뜻을 얻지 못함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귀한 천자로서 천하를 누리면서도 그 몸이 붙잡힌 것은 실패를 만회하려는 방법이 그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진시황은 자신에게 만족하여 남에게 묻지도 않고 잘못을 범해도 고치지 않았다. 2세는 그것을 물려받아 고치지 않고 포악하게 굴어 화를 키웠다. 자영은 고립무원이라 약하고 돕는 자도 없었다. 세 군주가 잘못에 빠져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했으니 멸망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 당시 세상에 깊게 생각하여 변화를 아는 선비가 없지는 않았으나 감히 나서 충성으로 잘못을 바로 잡으려 하지 못했던 것은 진의 습속에 꺼리고 기피하는 금기가 많아 충정어린 말이 입에서 나오기도 전에 몸이 죽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하의 선비들은 귀를 기울여 듣기만 하고, 다리를 겹친 채 서서는 입을 닫고 아무 말 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세 군주가 도를 잃어도 충신은 감히 직언하지 않고 지혜로운 선비는 감히 계책을 내지 않으니 천하가 어지러워도 나쁜 일이 위로 알려지지 못했던 것이다. 이 어찌 슬프지 않으리!

선왕은 위아래 언로가 막히면 나라가 상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공․경․대부․사를 두어 법을 다듬고 형벌을 만들어 천하를 다스렸던 것이다. 그 힘이 강했을 때는 포악함을 막고 난을 토벌하여 천하를 복종시켰다. 그 힘이 약했을 때는 오백(五伯, 춘추오패)이 정벌하여 제후를 따르게 했다. 쇠약해졌을 때는 안으로 지키고 밖으로 의지하여 사직을 보존했다. 그러므로 진이 강성했을 때는 법을 번잡하게 만들고 형벌을 엄격하여 천하를 떨게 했다. 그러나 쇠약해지자 백성이 원망하고 천하가 배반했다. 

그래서 주는 그 제도가 바른 길을 걸었기에 천 년이 넘게 나라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았다. 진은 본말을 모두 잃었기 때문에 오래가지 못했다. 이렇게 볼 때 안정과 위기의 실마리에는 서로 큰 차이가 있다. 속담에 ‘지난 일을 잊지 않는 것이 뒷일의 스승이다’는 말이 있다. 이로써 군자가 나라를 다스리면 상고 시대를 살피고 당대를 시험해 보는 것이다. 또 인간사를 참고하여 성쇠의 이치를 관찰하며, 권세가 적합한지를 살펴서 거취에 순서를 두고 변화에 때를 맞추었다. 그래서 오래도록 지속되고 사직이 안정되었던 것이다.

진 효공은 험준한 효산과 함곡관에 둥지를 틀고 옹주의 땅을 품고는 군주와 신하가 굳게 지키면서 주 왕실을 엿보았다. 천하를 손아귀에 쥐고, 보자기로 싸고, 주머니에 넣고, 입으로 삼킬 마음이 있었다. 이 때 상군(공손앙=상앙)이 그를 보좌하여 안으로 법도를 세워 농사와 베짜기에 힘을 쓰게 하면서 싸울 준비를 갖추었다. 밖으로는 연횡책으로 제후들을 싸우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진은 손을 모은 채 서하 바깥을 취했다.

효공이 죽고 혜왕과 무왕이 유업과 정책을 이어받아 남쪽으로는 한중을, 서로는 파촉을, 동으로는 기름진 땅을, (북으로는) 요충지의 여러 군을 차지했다. 제후들은 두려움에 동맹을 맺고 진을 약화시킬 방법을 꾀했다. 진기한 기물과 귀중한 보물, 생산이 많은 기름진 땅을 아끼지 않고 천하의 인재들을 불러들여 합종으로 서로 하나가 되었다. 당시 제에는 맹상군이, 조에는 평원군, 초에는 춘신군이, 위에는 신릉군이 있었다. 이 4군은 모두 지혜롭고 충성스러우며 믿을 만했다. 너그럽고 사람을 사랑하며 어진 인재를 존중했다. 연횡책을 버리고 합종을 약속하여 한, 위, 연, 초, 제, 조, 송, 위(衛), 중산의 군대를 하나로 모았다. 이에 6국의 인재들 영월(寧越), 서상(徐尙), 소진(蘇秦), 두혁(杜赫) 등이 서로 모의했고, 제명(齊明), 주최(周最), 진진(陳軫), 소활(召滑), 누완(樓緩), 책경(翟景), 소려(蘇?), 악의(樂毅) 등이 서로의 뜻을 전했고, 오기(吳起), 손빈(孫臏), 대타(帶佗), 아량(兒良), 왕료(王廖), 전기(田忌), 염파(廉頗), 조사(趙奢) 등은 군대를 이끌었다. 열 배가 되는 땅과 백만 대군으로 함곡관을 두드려 진을 공격하자 진은 관문을 열고 적을 끌어들이니 9국의 군대는 허둥대다가 도망치며 감히 진격하지 못했다.

진은 화살 하나, 화살촉 하나 허비하지 않고 천하 제후들을 곤경에 몰았다. 이리하여 합종의 약속은 와해되고 앞을 다투어 땅을 떼어 진에 바쳤다. 진은 남은 힘으로 피폐해진 세력을 제압하고 패배하여 도망간 자들을 추격하여 죽이니 엎어진 시신이 백만을 헤아리고 흐르는 피에 방패를 떠다녔다. 이에 이익과 편리대로 천하를 마음대로 자르고 산하를 쪼개니 강국은 복종을 청하고 약국은 조회했다. 이어 효문왕과 장양왕에 와서는 나라를 누린 재위 기간이 짧았고 나라에 일도 없었다.

진왕에 이르러서는 효공, 혜문왕, 무왕, 소양왕, 효문왕, 장양왕의 6대의 유업을 이어 긴 채찍을 휘둘러 말을 몰듯 천하를 몰았다.  동주와 서주를 삼키고 제후를 멸망시켜 지존의 자리에 올라 천하를 통제했는데, 짧은 회초리와 몽둥이로 천하를 매질하니 그 위세가 사해를 떨게 했다. 남으로 백월(百越)의 땅을 취해 계림군(桂林郡)과 상군(象郡)을 만들었다. 백월의 군주는 고개를 숙이고 목에 줄을 걸고 나와 관리에게 목숨을 맡겼다. 이어 몽염에게는 북쪽에 장성을 쌓아 변방을 지키게 하여 흉노를 7백여 리 밖으로 몰아내니 오랑캐가 감히 남쪽으로 내려와서 말을 방목하지 못했고, 병사들은 감히 활을 당겨 원한을 갚으려 들지 못했다.

마침내 선왕들의 방법을 버리고 백가의 말씀을 불태워 검수들을 아둔하게 만들었다. 이름난 성읍들 헐고 호걸과 준재들을 죽이고, 천하의 병기를 함양에 모아놓고 이를 녹여서 종과 금인 12개를 주조하여 검수들을 약화시켰다. 그런 다음 화산(華山)을 깎아 성곽을 만들었으며, 황하를 해자로 삼았다. 억 장이나 되는 성에 의지하여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골짜기를 굽어보며 단단히 지켰다. 좋은 장수와 강력한 쇠뇌로 요충지를 지키고, 믿을 만한 신하와 정예병이 날카로운 무기를 들고 누구든 검문했다. 천하가 평정되자 진왕은 마음으로 스스로 관중의 견고함은 천리에 이르는 철옹성 같아 제왕의 업이 자손만대로 전해질 것이라 여겼다.

진왕이 죽고서도 그 남은 위세가 풍속이 다른 곳까지 미쳤다. 진섭은 깨진 항아리 주둥이를 칼로 삼고 새끼줄을 엮어 문으로 삼는 가난한 집 자식이었다. 미천한 사람으로 수자리에 징발된 무리였고, 재능은 보통에도 못 미쳤다. 공자나 묵자의 어짐은 말할 것 없고, 도주(陶朱, 범려)나 의돈(猗頓)처럼 부유한 것도 아니었으나 보잘 것 없는 노역자 대오에서 갑자기 일어나 피곤에 지쳐 흩어져 있던 병사들과 수백의 무리를 통솔하여 방향을 바꾸어 진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나무를 베어 무기로 삼고, 장대를 높이 세워 깃대로 삼으니 천하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어 호응하여 양식을 짊어진 채 그림자처럼 따랐다. 산동의 호걸들이 함께 들고 일어나 진을 멸망시키기에 이르렀다.

무릇 (진의) 천하는 작지도 약하지도 않았다. 옹주의 땅도 효산과 함곡관의 견고함도 전과 같았다. 진섭의 위상은 제, 초, 연, 조, 한, 위, 송, 위, 중산의 군주들보다 존귀하지 않았고, 호미와 고무래, 창과 창자루는 갈고리 창이나 긴 창보다 날카롭지 못했다. 수자리에 나갔던 무리들은 9국의 군대에 맞설 수 없었다. 깊은 모략도, 군을 움직이는 용병술도 과거 모사들에는 미칠 수 없었다. 그러나 성패는 이변이었고, 공업은 서로 반대로 나타났다. 산동의 나라들과 진섭의 땅 크기를 비교하고 권력을 잰다면 함께 논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진은 작은 땅과 천 승의 권력을 가지고도 동등한 8주의 제후들을 조회하게 한 지 100년이 넘었다. 그런 다음 천하를 한 집으로 만들고 효산과 함곡관을 궁으로 삼았는데 한낱 사내 하나가 난을 일으키자 종묘가 무너지고 황제가 남의 손에 죽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어째서인가? 인의를 베풀지 않았고, 공격과 수비의 형세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진이 해내를 병합하고 제후를 아울러 남면하여 황제를 칭하며 사해를 다스리자 천하의 인재들이 고향이 바람을 맞이하듯 귀순했으니 왜 그런가? 근래에 왕 같은 왕이 없은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주 왕실은 미미해졌고, 오패가 다 사라진 뒤로는 명령이 천하에 행해지지 않았다. 이로써 제후들은 힘으로 정벌하니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침략하는 전쟁이 쉴 날이 없어 병사와 인민이 모두 지쳐버렸다. 지금 진이 남면하여 천하의 왕 노릇을 하니 위로 천자가 생겼다. 목숨의 안전을 바라던 인민들이 누군들 마음을 비우고 위를 바라보지 않겠는가? 바로 이 때 위엄을 지키고 공을 확정해야 할 것이니, 안위의 근본이 바로 이에 달려 있다.

진왕은 욕심많고 비루한 마음을 가지고 자기만 지혜롭다고 공신들을 믿지 않고 이재와 인민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왕도를 폐지하고 사사로운 권위를 세워 문서를 금지하고 형법을 가혹하게 했다. 기만을 앞세우고 인의는 뒤로 밀쳐둔 채 포악함을 통치의 출발로 여겼다. 대개 합병 때는 힘과 속임수를 높게 여기지만, 안정되었을 때는 균형에 따르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이는 취하고 지키는 술책이 다르다는 말이다. 진은 전국을 거쳐 천하의 왕이 되었음에도 그 방법을 바꾸지 않았고 정치도 고치지 않았다. 이는 취하고 지키는 바가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홀로 고립된 채 천하를 소유하려 했기에 그 멸망이 서서 기다릴 정도였던 것이다. 만약에 진왕이 지난 세대의 일을 따져보고 은주의 자취를 참고하여 그 정치를 통제했다면 위기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삼왕이 세운 천하를 아름답다 하고 그 공업이 오래간 것이다.

지금 진 2세가 즉위하자 모든 천하가 목을 길게 빼고 그 정치를 지보았다. 추위에 떠는 사람에게는 누더기 옷도 보탬이 되고, 굶주린 사람에게는 술지게미도 달콤하기 마련이다. 천하의 이런저런 소리가 그래서 새로운 군주의 밑천인 것이다. 이 말은 힘든 인민들에게는 어짊을 베풀기 쉽다는 것이다. 만약 2세가 그저 평범한 임금의 덕행으로 충직하고 현명한 사람을 임용하여 신하와 군주가 한 마음으로 천하의 걱정을 염려하고, 소복을 입고 선제의 잘못을 바로 잡고, 땅과 인민을 나누어 공신의 후손들에게 주고, 나라를 세워 군주를 세워 천하를 다스리고, 감옥을 열어 형벌을 사면하고, 죄인의 처자를 노비로 삼는 나쁜 죄를 폐지하여 각자의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창고와 곳간을 열어 재물과 돈으로 오갈 데 없는 곤궁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세금을 가볍게 하고 노역을 줄여 딱하고 흡한 백성을 돕고, 법령을 간소화시키고 형벌을 줄여 살 길을 마련해주고, 천하 사람들이 모두 새롭게 고치고 각자 삼가게 하고, 만민의 바람을 충족시키고 위엄과 덕으로 천하에 임했더라면 천하는 하나로 모여들었을 것이다. 

그런 즉 사해가 모두 기꺼이 각자의 생업에 안주하며 그저 변란만 없기를 걱정하는 정도라면, 교활한 인민이 있더라도 군주를 떠나려는 마음은 먹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나쁜 일을 꾀하는 자들이 그 꾀를 부릴 수 없을 것이니 갑작스러운 난리와 같은 나쁜 일도 그칠 것이다. 2세는 이러한 방법을 통치술을 행하지 않고 무도한 짓을 거듭하면서 종묘와 인민을 해치고, 아방궁을 다시 짓고, 형벌을 번잡하게 만들어 엄하게 다스리고, 관리의 통치는 각박하기 짝이 없고, 상벌은 부당하고, 세금은 한도가 없었으니 천하에 일은 많으나 관리들이 감당할 수 없었고 백성은 곤궁한데 주강은 거두어 돌보지 않았다.

그러자 간사한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나고, 위아래가 서로 책임을 미루고, 죄를 덮어쓰는 사람이 많아져 길거리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대할 정도로 넘쳐나니 천하가 고통을 당했다. 군경 이하 보통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스스로 위험하다는 마음을 품게 되니 모두들 자리에 불안을 느끼고 쉽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진섭이 탕왕이나 무왕과 같은 어짊도 없고 제후와 같은 존귀한 신분이 아닌데도 대택(大澤)에서 팔을 걷어붙이고 일어서니 천하가 이에 호응했던 것은 그 인민들이 위태로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왕은 일의 처음과 끝의 변화를 보고 존망의 낌새를 살펴서 인민을 다스리는 길은 인민을 안정시키는데 힘을 써야 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천하에 역행하는 자가 있어도 그에 호응하여 돕는 자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안정된 인민과는 의로움을 함께 행할 수 있지만 위기에 처한 인민은 나쁜 짓을 하기 쉽다’고 하는 하는 말이 그 말이다. 귀한 천자로서 천하를 누리면서도 그 몸이 죽음을 면치 못한 것은 기울진 것을 바로잡으려는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2세의 잘못이다.”

진나라 역대 세계

[편집]

양공(襄公)이 즉위하여 12년간 재위했다. 처음으로 서치(西畤)를 만들었고, 서수(西垂)에 묻혔다. 양공은 문공(文公)을 낳았다.

문공이 즉위해 서수궁(西垂宮)에 거처했다. 50년 만에 죽자 서수에 묻혔다. 정공(靜公)을 낳았다.

정공은 즉위하지 못한 채 죽었고, 헌공(獻公)을 낳았다.

헌공은 22년간 재위하며 서신읍(西新邑)에 거처했다. 죽어서 아(衙)에 묻혔고, 무공(武公), 덕공(德公), 출자(出子)를 낳았다.

출자는 6년간 재위하면서 서릉(西陵)에 거처했다. 서장(庶長) 불기(弗忌), 위루(威累), 삼보(參父) 세 사람이 역적을 이끌고 비연(鄙衍)에서 출자를 시해하니 아(衙)에 묻고 무공(武公)을 세웠다.

무공은 12년간 재위하면서 평양(平陽)의 봉궁(封宮)에 거처했다. 선양취(宣陽聚) 동남쪽에 묻혔다. 세 명의 서장이 처벌되었다. 덕공(德公)이 즉위했다.

덕공은 2년간 재위하면서 옹읍(雍邑)의 대정궁(大鄭宮)에 거처했다. 선공(宣公), 성공(成公), 목공(繆公)을 낳았다. 양(陽)에 장사지냈다. 처음으로 복날을 정해 독기(毒氣)를 다스렸다.

선공은 12년간 재위하면서 양궁(陽宮)에 거처했다. 양(陽)에 묻혔고, 처음으로 윤달을 사용했다.

성공은 4년간 재위하면서 옹읍의 궁에 거처했다. 양(陽)에 묻혔다. 제가 산융(山戎)과 고죽(孤竹)을 정벌했다.

목공은 39년간 재위했는데 천자가 패주로 인정했다. 옹(雍)에 묻혔다. 목공은 시종에게도 배웠다. 강공(康公)을 낳았다.

강공은 12년간 재위하면서 옹읍의 고침(高寢)에 거처했다. 구사(竘社)에 묻혔고, 공공(共公)을 낳았다.

공공은 5년간 재위하면서 옹읍의 고침에 거처했다. 강공이 무덤의 남쪽에 묻혔다. 환공(桓公)을 낳았다. 

환공은 27년간 재위하면서 옹읍의 태침(太寢)에 거처했다. 의리(義里) 언덕 북쪽에 묻혔고, 경공(景公)을 낳았다.

경공은 40년간 재위하면서 옹읍의 고침에 거처했다. 구리(丘里) 남쪽에 묻혔고, 필공(畢公)을 낳았다.

필공은 36년간 재위했으며 거리(車里) 북쪽에 묻혔다. 이공(夷公)을 낳았다.

이공은 즉위하지 못한 채 좌궁(左宮)에 묻혔다. 혜공(惠公)을 낳았다.

혜공은 10년간 재위했으며 거리(車里)에 묻혔다. 도공(悼公)을 낳았다.

도공은 15년 재위했다. 희공(僖公)의 서쪽에 묻혔다. 옹읍에 성을 축조했다. 자공공(刺龔公)을 낳았다.

자공공은 34년간 재위했고 입리(入里)에 묻혔다. 조공(躁公), 회공(懷公)을 낳았다. 10년째 되던 해에 혜성(彗星)이 나타났다.

조공(躁公)은 14년간 재위했고 수침(受寢)에 거했다. 도공의 남쪽에 묻혔다. 원년에 혜성이 나타났다.

회공은 진(晉)에서 돌아왔다. 4년간 재위했고, 역(櫟)의 어지(圉氏)에 묻혔다. 영공(靈公)을 낳았다. 여러 신하들이 회공을 포위하자 회공은 자살했다.

숙령공(肅靈公)은 소자(昭子)의 아들이다. 경양(涇陽)에 거처했다. 10년간 재위했고, 도공의 서쪽에 묻혔다. 간공(簡公)을 낳았다.

간공은 진(晉)에서 돌아왔다. 15년간 재위했고, 희공의 서쪽에 묻혔다. 혜공(惠公)을 낳았다. 즉위한 지 7년째 백관들이 처음으로 검을 찼다.

혜공은 13년간 재위했고, 능어(陵圉)에 묻혔다. 출공(出公)을 낳았다.

출공은 재위 2년 만에 자살하여 옹읍에 묻혔다.

헌공(獻公)은 23년간 재위했고, 효어(囂圉)에 묻혔다. 효공(孝公)을 낳았다.

효공은 24년간 재위했고, 제어(弟圉)에 묻혔다. 혜문왕(惠文王)을 낳았다. 즉위 13년, 처음으로 함양(咸陽)에 도읍했다.

혜문왕은 27년간 재위했고, 공릉(公陵)에 묻혔다. 도무왕(悼武王)을 낳았다.

도무왕은 4년간 재위했고, 영릉(永陵)에 묻혔다.

소양왕(昭襄王)은 56년간 재위했고, 채양(茝陽)에 묻혔다. 효문왕(孝文王)을 낳았다.

효문왕은 1년간 재위했고, 수릉(壽陵)에 묻혔다. 장양왕(莊襄王)을 낳았다.

장양왕은 3년간 재위했고, 채양에 묻혔다. 시황제를 낳았다. 여불위(呂不韋)가 상국이 되었다.

헌공 7년, 처음으로 시장을 열었다. 10년, 호구를 등록하고, 다섯 호를 한 단위로 삼았다.

효공 16년, 도리(桃李)가 겨울에 꽃을 피웠다.

혜문왕은 19세에 즉위했다. 즉위 2년, 처음으로 동전을 발행했다. 갓난아기가 “진이 장차 왕 노릇을 하리라”라고 말했다.

도무왕은 19세에 즉위했다. 즉위 3년, 위수의 물빛이 사흘 동안 붉게 변했다.

소양왕은 19세에 즉위했다. 즉위 4년, 처음으로 논밭 사이의 경계를 텄다.

효문왕은 53세에 즉위했다.

장양왕은 32세에 즉위했다. 즉위 2년, 태원을 취했다. 장양왕 원년, 대사면령을 내리고 선왕의 공신을 표창했다. 덕을 베풀어 골육을 우대하고 인민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동주가 제후와 진을 도모하려 하자 진이 상국 여불위에게 토벌하게 하고 그 나라를 편입시켜 버렸다. 진은 제사는 끊지 않고 양인(陽人)의 땅을 주의 국군에게 주어 제사를 받들게 했다.

시황제는 37년간 재위했고, 여읍(酈邑)에 묻혔다. 2세 황제를 낳았다. 시황제는 13세에 즉위했다.

2세 황제는 3년간 재위했고, 의춘(宜春)에 묻혔다. 조고가 승상이 되어 안무후(安武侯)에 봉해졌다. 2세는 12세에 즉위했다.

이상은 진 양공에서 2세에 이르기까지 610년간의 일들이었다.

(서한) 효명황제(孝明皇帝) 17년 10월 15일 을축일에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주의 달력이 이미 옮겨갔으나 (한의) 인덕으로 어미(주)를 대신할 수 없어 진이 마침 그 자리를 차지한 곳이다. 여정(시황)은 잔인하고 포악한 통치를 했다. 그러나 13세 제후의 몸으로 천하를 아우르고 마음대로 종친들을 길러냈다. 37년 동안 가는 곳마다 무력을 동원하지 않은 적이 없고, 정령을 만들어 후대 왕들에게 전했다. 대개 성인의 위엄을 얻어 물의 신으로부터 도록을 받고, 낭성(狼星)과 호성(狐星)의 별자리에 의존하고 참성(參星)과 벌성(伐星) 별자리의 신령스러움이 여정(시황)을 도우사 제후들을 제거하고 시황이라 일컫게 된 것 같다.

시황이 죽고 호해가 너무 어리석어 여산의 일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다시 아방궁을 지어 이전의 계획을 마쳤다. 그리고는 “천하를 차지한 고귀한 사람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어야 하거늘 대신들이 선군의 이룬 바를 없애려 하다니”라며 이사와 풍거질을 죽이고 조고를 기용했다. 참으로 가슴 아프게 “사람의 머리를 가지고 짐승 소리를 내는 꼴이구나! 권위가 없었더라면 나쁜 짓을 범하지도 못하였을 것이고, 죄악이 깊지 않았다면 그렇게 허망하게 파멸하지도 않았을 것이다”라고 했다. 자리를 지키지도 못하고 잔인하고 포악한 통치로 목숨을 재촉했으니, 지세가 아무리 유리한 나라를 가지고 있었어도 보존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영은 순서를 넘어 뒤를 이어 옥으로 된 관을 쓰고 예복을 걸치고 제왕의 수레에 타서는 백관을 거느리고 종묘를 참배했다. 소인배라면 감당못할 자리에 앉아 당황하다가 구차하게 하루하루를 일없이 지나가길 원했을 것이다. 자영은 홀로 깊이 생각하고 과감하게 결정을 내려 아들과 함께 상황을 잘 따져서 마침내 가까운 자기 집에서 교활한 간신 조고를 죽이니 선군을 위한 적을 토벌한 것이었다. 조고가 죽은 뒤 빈객과 친지들이 서로의 노고를 미처 위로하지도 못하고, 잔칫상의 음식이 미처 목구멍을 내려가지도 못하고, 술이 미처 입술을 적시기도 전에, 초의 군대가 관중을 도륙하고 고조(유방)께서 패상으로 들이닥치니 자영은 흰 수레에 천을 목에 감은 채 황제의 부절과 옥새를 새 천자에게 되돌려 주었다. 정백(鄭伯)이 두 손에 종묘의 제기를 받들어 투장하자 초 장왕이 군사를 물린 것과 같았다. 강물이 터지며 다시 막을 수 없고, 물고기는 썩어버리면 다시 살릴 수 없다. 

가의와 사마천은 ‘자영이 평범한 군주의 재능에 중간 정도의 능력을 가진 자의 도움을 받았더라면 산동이 혼란이 일어났어도 진은 땅을 보전하고 종묘 제사 또한 끊어지지 않았을 것이다’라 했다. 진의 쇠락은 오래 쌓여온 터라 천하는 흙더미가 무너지고 기왓장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주공 단의 재주가 있다 해도 더는 그 능력을 펼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걸로 혼자였던 자영을 나무라는 것은 잘못이다! 세간에서 “진시황이 죄악을 짓고 호해 때 극에 달했다”고 하는데 일리가 있다. 어린 아이(자영)을 나무라며 진의 땅을 보전할 수 있다느니 하는 것은 이른바 시세의 변화을 통찰하지 못한 말이다. 기(紀)의 기계(紀季)가 휴읍(酅邑)을 제에 바친 일을 『춘추(春秋)』는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다. 내가 「진시황본기」를 읽다가 자영이 조고를 거열형에 처하는 단락에 이르면 그 결단을 칭찬하며 그의 의지에 감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자영은 생사의 대의를 갖추었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