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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고려시대의 사상/고려시대의 불교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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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불교사상〔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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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불교의 국가적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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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佛敎-國家的性格

고려의 건국이념은 후삼국의 통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광대한 옛 강토를 회복하여 신라가 못 다한 진정한 의미의 삼국통일을 실현하려는 데에 있었다. 고려 태조는 이러한 국가적 이념을 부처의 가호력이 뒤에서 받쳐주지 않으면 실현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엄(利嚴)·경보(慶甫)·긍양(兢讓)과 같은 고승을 스승으로 모셔 섬겼으며, 개경의 10사를 비롯하여 많은 불교 사원을 세우고, 연등(燃燈)·팔관(八關)과 같은 의식을 국가적 행사로 베풀었다. 뿐만 아니라 신라의 황룡사 9층탑을 본받아 개경에 7층탑, 서경에 9층탑을 세워 삼국통일을 발원한 일도 있다. 태조의 불교신앙이 이와 같이 국가의 번영과 수호를 위한 호국(護國)신앙이 기조가 되어 있었으므로 미신적인 요소가 크게 작용하기 쉬운데, 여기에 또다시 도선(道詵)의 풍수지리설이 밀착하여 더욱 그러한 빛을 농후하게 하였다. 고려 불교는 태조의 이러한 호국신앙에 입각한 숭불책(崇佛策)으로 처음부터 국가 불교의 성격을 띠었다. 이것은 다시 그의 훈요10조(訓要十條)에 의하여 역대 왕실에 계승되어 고려 불교의 성격을 규정 지었다. 고려 일대의 불교는 이러한 성격을 바탕으로 융성하고 쇠퇴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국가의 호국신앙에 입각한 적극적인 숭불책으로 불교는 일대 융성을 가져와 사회교화의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고 문화발전의 모체를 이루었다. 그러나 반면에 그러한 불교 신앙속에 깃들여 있는 미신적 요소는 빈번한 불사(佛事), 사원의 지나친 치부(致富), 교단의 부패와 요승(妖僧)의 출현을 수반하여 국가와 사회에 적지 않은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선·교의 대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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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敎-對立

고려시대는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이 판연히 대립한 선·교 대립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대립을 지양하여 하나로 융화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이 시도된 시대였다고도 말할 수 있다. 선 불교는 신라말 선덕왕 때 도의(道義)가 6조 혜능(慧能)의 남종선(南宗禪)을 전해 오고, 이어 홍척(洪陟)이 같은 법을 전해와 실상산(實相山)에서 닦은 이래, 차례로 선종9산을 성립시켰는데, 그 마지막 제9산이 이루어지기는 이엄(利嚴) (870∼936)이 운거(雲居)로 부터 조동선(曹洞禪)을 전해와 수미산(須彌山)을 연 고려 태조 때였다. 선종은 주로 신라의 변방에서 호족(豪族)의 종교로 성장하였고, 종교적 지반도 주로 서민층에 두었다. 그리고 교리상으로도 교종이 부처님의 경전에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하는 데에 대하여, 문자보다는(不立文字) 그 뒤에 숨은 뜻(敎外別傳)을 중요시하여 사람의 마음을 직관하여 성불할 것(見性成佛)을 부르짖었다. 따라서 그것은 전통적인 교종과 자연히 대립의 상태에 있지 않을 수 없다. 선종에 9산이 있는 것과 같이 교종에는 계율·법상(法相)·열반·법성(法性)·원융(圓融)의 5교가 분립하고 있었다. 이 교종 5교가 언제 성립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대각국사 이전이라는 것만은 그의 묘지명(墓誌銘)에서 확실하므로, 선종의 9산 성립과 거의 때를 같이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 교종 5교와 선종 9산(또는 禪寂宗)을 합하여 5교 9산이라고 하는데, 이 5교 9산은 처음부터 종파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신라말 율령정치가 해이해지면서 학파적인 전통이 표면화되었다가 종파로 발전했다고 보이는데, 이러한 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은 승과제(僧科制)의 실시였을 것이다. 고려에서 승과제가 실시된 것은 제4대 광종 때이며(동왕 9년 이후), 국사(國師)·왕사(王師)제도가 생긴 것도 이때이다. 따라서 광종을 전후한 시대는 선·교의 대립이 확립된 시기로서 이때는 아직 대국적인 견지에서 민족적 통화(統和)로서, 불교를 모색할 만한 자각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무렵의 중요한 고승으로 제관(諦觀)과 균여(均如)를 들 수 있다.

대장경 판각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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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藏經版刻-意義

고려 불교의 초대 불사(佛事)는 대장경(大藏經) 판각(版刻)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고려 불교의 호국신앙과 문화창조의 역량이라는 두 요소가 결합하여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었던 찬란한 불교문화의 금자탑(金字塔)이었다. 고려에는 두 차례의 대장경 판각이 있었는데, 제1차는 거란의 침입으로 현종 2년(1011)에 발원(發願)하여 문종 때에 이르러 총 1,106부 5,048권의 대장경을 새긴 것(初雕藏經)이고, 제2차는 이것이 몽고의 병화에 타 버렸을 때, 다시 새길 것을 발원하여 고종 23년(1236)으로부터 38년에 이르는 16년간에 걸처 총 1,512부 6,791권(經板數 81,258)을 완성한 것(再雕藏經)이다. 이 두 차례의 대장경 판각은 모두 외적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된 최대 국난의 시기에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려는 호국신앙에 의해 발원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호국신앙적인 발원 하나만으로 그렇게 큰 문화사업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뒤에는 그보다도 더 중요한 요소로서, 대장경을 소유하려는 의욕과 세계에서 가장 완벽하고 우수한 대장경을 새기려는 거국적인 노력이 깃들여 있었다. 초조장경이 발원되기 전, 고려 조정에서는 송(宋)에 사람을 보내 계속 대장경을 구하고 있었다. 즉 성종 8년(989)에 송에 여가(如可)를 보내 대장경을 구했고, 동 10년에는 한언공(韓彦恭)이 대장경을 가져오고, 목종 7년(1,004)에도 구한 기록이 있다. 성종 8년은 송의 대장경이 이뤄진 해부터 불과 6년을 지났을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초조장경을 새기기 전 고려에서 대장경을 구하는 열의가 대단했음을 말해주고, 동시에 송의 대장경 판각이 불교국 고려에 큰 충격을 주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장경의 판각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막대한 재력과 새로운 기술진이 필요함은 물론이지만, 그러한 문화사업을 수행할 만한 불교학적 역량이 또한 문제가 된다. 따라서 당시에 대장경판각은 불사 중에서도 가장 어렵고 큰 불사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송의 대장경은 고려 초조장경의 주축을 이루었지만, 그것은 또 거란 대장경 판각(1031∼1059)의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문종 17년(1063)에는 거란 대장경이 고려에 보내지고, 고려에서도 문종 말년에 그곳에 대장경을 보냈다 한다. 당싱 대장경은 신앙의 법보(法寶)요, 호국의 신력(神力)일 뿐만 아니라, 국력을 과시하는 문화교류의 근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초조장경(初雕藏經)이 몽고의 병화에 타버렸을 때 다시 새긴 재조장경(再雕藏經)은 단순히 초조장경의 복구와 호국불사(護國佛事)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거란대장경과 정확한 대교(對校)를 행하였으며, 희린(希麟)의 <속일체경음의(續一切經音義)>, 행균(行均)의 <용감수경(龍龕手鏡)>과 같은 거란인의 저술을 포함하고 있으며, 또 오자(誤字)가 없기로도 세계적으로 유명한데, 이러한 사실은 그것이 세계에서 가장 완벽하고 우수한 대장경을 새기려는 거국적인 심혈을 기울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대장경 판각과 같은 최대의 불사가 최대의 국난에 처하여 발원되었다는 것은 고려 불교의 성격에서 볼 때 오히려 당연한 일 인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호국신앙적인 발원 하나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었고, 거기에 문화창조의 정열이 보태져 비로소 이루어진 일이었다. 거란 대장경이 산일해 버린 오늘날 고려 대장경이 지니는 학술적 가치는 실로 막대한 것이며, 그것은 또 일본의 현대 신수대장경(新修大藏經)의 주축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것의 문화사적 의의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의천의 천태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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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天-天台思想

광종 이후 선·교(禪敎)의 대립은 더욱더 심각해지고 승려의 타락은 국가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럴 때 교단을 쇄신하고 선·교의 대립을 융화하여 고려의 건국이념에 상응한 통화(統和)종단을 구현하려고 한 이는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다. 그는 송나라에 건너가 중국 불교의 제학파를 섭렵하고 많은 문헌을 수집하여 돌아와 천태종(天台宗)을 일으켜 선종의 1종파가 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장경 판각에 착수하여 4,740여 권을 간행하니 이것이 바로 유명한 <의천속장경(義天續藏經)>이다.

지눌의 조계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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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訥-曹溪宗旨

금(金)의 흥기로 인한 대륙의 복잡한 정세는 고려사회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의천의 천태종은 결과적으로 고려 불교의 또 하나의 종파를 보태, 5교 9산은 5교양종(兩宗)이 되었다 (肅宗 6년∼仁宗 10년). 의종(毅宗) 이후 교단의 문란은 더욱 심해져 묘청(妙淸)과 함께 요승이 나오는가 하면, 명종 때는 승려의 폭거(暴擧)가 발생할 정도였다. 이러한 때에 정혜쌍수(定慧雙修)로 승려 본연의 자세에 돌아갈 것을 호소하며, 독창적인 선사상을 제창하여 선·교를 융화하여 교단의 쇄신을 꾀한 것은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었다.지눌(1158∼1210)의 교단쇄신 운동의 거점이 된 것은 그가 승과에 합격한 뒤 동지 몇 명과 함게 조직한 정혜결사(定慧結社)였다(明宗 12년). 그 <정혜결사문>(明宗 20년 발표)에 의하면, 명리(名利)에 급급한 당시의 교계를 준엄하게 비판하고 있으며, 또 '정(禪)'과 '혜(敎)'에 치우치지 말고 정혜를 균등히 닦아야 할 까닭이 당시의 선·교 대립에 비추어 선명하게 부각되어 있다. 그는 의천의 교(敎)로서 선(禪)을 융합하려는 데 대하여 선(禪)으로써 교(敎)를 융합하고자 하여조계종지(曹溪宗旨)를 창명하니 여기서 한국 불교의 조계종이 비롯한 것이다.

보우의 9산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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普愚-九山統合

고려 사회는 다시 몽고의 침략을 받고, 이어 그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러한 사회적 불안은 교단을 타락시키기 마련이지만 오랫동안 쌓여온 기복불교(祈福佛敎)의 폐단은 마침내 배불(排佛)의 싹을 마련하고 있었다. 그러나 원(元)의 쇠퇴는 공민왕에게 정치적 자주성을 되찾을 기회를 주어, 그는 과감히 복고정치를 수행해 갔다. 보우(普愚, 1301∼1382)와 혜근(惠勤, 1320∼1376)은 이러한 세상에 출현하여 임제종(臨濟宗)의 선풍(禪風)으로 불교를 일상 현실속에 살리려고 하였다. 그중에서도 보우는 특히 이러한 사상을 강하게 나타내어 9산통합을 시도하여 그 과제를 조선대에 넘겨 주었다. 공민왕이 뒤에 요승 신돈(辛旽)을 기용하여 정치를 그르치니 배불(排佛)의 기운은 비등하여 고려로 하여금 멸망의 길을 걷게 하였다. 이에 불교도 운명을 함께 하는데, 보우와 혜근을 함께 이은 혼수(混修)의 법맥이 조선에 이어진다.

이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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利嚴 (870∼936)

나말여초(羅末麗初)의 고승. 속성은 김(金)씨. 896∼911년간에 당나라에 운거도응(雲居道膺)에게서 배우고 귀국하여 태조 왕건의 스승으로 태조 15년에 해주(海州) 수미산(須彌山) 광조사(廣照寺)에서 도화(道化)를 떨치니 그의 문하에 처광(處光) 등 수백인이 있어 뒤에 수미산파의 개조가 되었다. 이로써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선교(禪敎) 9산(九山)이 완성되었다. 시호는 진철대사(眞澈大師)이다.

긍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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兢讓 (878∼956)

나말여초(羅末麗初)의 고승. 속성은 왕(王)씨. 시호는 정진(靜眞). 효공왕 4년에 입당하여 도연(道緣)에게서 대오(大悟)하고, 경애왕 원년(924)에 돌아오니 경애왕이 '봉종대사(奉宗大師)'의 호를 주었다. 그 뒤 희양산(曦陽山) 봉암사(鳳巖寺)에서 선실(禪室)을 일으키고 태조·혜종·정종·광종 등 역대왕의 존신(尊信)을 받았다. 광종(光宗)이 그에게 증공대사(證空大師)라는 존호를 가하였고, 그의 제자에 향초(#超)가 있어 법을 전하였다.

연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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燃燈會

고려시대에 성행한 봄철의 불교행사. 고려에 이르러 국가의 중요 의식으로 왕도(王都)는 물론 전국 각지에서 거행되었다. 태조 훈요10조에서도 강조하여 2월에 행하던 것이 의종(毅宗) 때부터는 정월 보름날 행하였다. 성종 때 유학자들의 반대로 일시 중단된 일도 있고 현종(顯宗) 원년에는 다시 2월에 거행하였으며 공민왕 때에는 4월 8일 궁중에서 연등하였다고 한다.

팔관회(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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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關會(高麗)

고려 때의 불교의식. 신라 진흥왕 때 시작되었으나 고려 건국 후에는 연등회와 함께 국가의 2대 의식의 하나가 되었다. 처음에는 11월 15일에 개경에서, 10월에 서경에서만 행하였는데 차츰 토속신(土俗神)에게 지내는 의식으로 바뀌어졌다. 현종 이후에 점차 쇠퇴하기는 하였지만 고려 말까지 국가의 최고 의식으로 계속되었다.

선종 9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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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宗九山 통일신라 때부터 시작되어 고려 태조 때 완성된 불교 선종(禪宗)의 9산문. 즉 중국에서 성행한 달마(達摩)의 선법(禪法)을 이어받아 한국 선종의 종풍(宗風)을 일으킨 것이니, (1) 나말(羅末) 홍척(洪陟) 국사의 실상산문(實相山門), (2) 도의(道義) 국사의 가지산문(迦智山門), (3) 범일(梵日) 국사의 도굴산문, (4) 혜철(惠哲) 국사의 동리산문(桐裡山門), (5) 무염(無染) 국사의 성주산문(聖住山門), (6) 도윤(道允) 국사의 사자산문(獅子山門), (7) 도헌(道憲) 국사의 희양산문(曦陽山門), (8) 현욱(玄昱) 국사의 봉림산문(鳳林山門), (9) 태조 때 이엄(利嚴) 대사의 수미산문(須彌山門) 등이다. 이후 이들 9산문은 선종 선적종(禪寂宗)에 속하게 되며 의천(義天)이 만든 선종 천태종(天台宗)에 대립하였다가 조계종(曹溪宗)으로 개칭되어 선종 2종파 중의 하나가 되었다.

승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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僧科制

고려 때 승려를 대상으로 한 과거제. 광종(光宗) 때 과거제 실시와 동시에 생겨났고, 선종(宣宗) 이후로는 3년마다 시행했다. 여기에는 교종(敎宗)의 교종선(敎宗選)과, 선종의 선종선(禪宗選)의 양파로 나뉘어 전자는 개경 삼륜사(三輪寺)에서, 후자는 개경 광명사(廣明寺)에서 실시하였다. 합격한 자는 다 같이 대선(大選)·대덕(大德)·대사(大師)·중대사(重大師)·삼중대사(三重大師)의 법계를 따라 승진하였고, 그 다음은 선·교에 따라 분리되어 전자는 선사(禪師)·대선사(大禪師)의 호를, 후자는 수좌(首座)·승통(僧統)의 호를 받았다.

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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諦觀 ( ? ∼970)

고려 광종(光宗) 때의 고승. 중국 천태종(天台宗)파 의적(義寂)의 법을 이어받고 귀국하였다. 960년 오월(五越)왕 전숙의 요청으로 천태학의 논소제문(論疏諸文)을 가지고 송나라에 가서 중국 천태학 부흥에 기여하였고, 그의 저서 <천태사교의(天台四敎義)>는 후에 학계의 중보(重寶)가 되었다.

균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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均如 (923∼973)

속성은 변(邊)씨. 영통사(靈通寺) 의순(義順)에게서 배우고 화엄종지(華嚴宗旨)를 천명하고, 당시 남악(南岳)·북악(北岳) 양파로 분열된 화엄학을 통일시키려고 하였다. 광종(光宗)이 지어준 귀법사(歸法寺)에서 법화(法化)를 떨치면서 많은 이적(異蹟)을 남겼고, 저술에 <수현방궤기(搜玄方軌記)> 10권, <삼보장기(三寶章記)> 2권, <법계도기(法界圖記)> 2권, <십구장기(十句章記)> 1권, <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抄記)> 1권 등이 있다. 그밖에 그가 <보현보살십종대원(普賢菩薩十種大願)>을 노래한 향가(鄕歌) 11수가 전하여 고어(古語)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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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天 (1055∼1101)

고려 문종(文宗) 때의 고승. 천태종(天台宗) 중흥의 시조, 이름은 후(煦), 시호는 대각국사(大覺國師), 문종의 넷째 아들. 왕사 난원(爛圓)에 의하여 중이 되어 13세에 우세(祐世)의 호를 받고 승통(僧統)이 되었다. 왕족인 의천에게는 국가가 항상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가 뒤에 숙종(肅宗)에게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하여 주전(鑄錢) 사용을 건의한 것도 그러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의천은 처음에 그가 출가한 영통사(靈通寺)에서 신라의 원효·의상 이래 한국 불교사상의 주류를 이뤄온 화엄(華嚴)을 연구하였다. 그러나 당시 서로 대립하고 있던 5교9산의 모든 교리를 연구해 보고 그들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어 국민의 사상통일을 저해할 만큼 배타적일 아무런 이유가 없음을 알았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구사(俱舍)·유식(唯識)·기신(起信)·화엄을 계통적으로 겸학(兼學)하지 않고는 5교의 궁극에 이를 수 없으며 (<刊定成唯識論學科序>), 마음으로 마음을 전한다(以心傳心)는 선종의 뜻은 높은 지적 수준의 사람에게나 해당할 일이지, 그렇지 못한 자는 경전에서 먼저 배울 것을 권하였다(靈通寺碑). 당시의 뿌리 깊은 종파적 대립은 이론만으로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종파간의 대립·알력을 지양하여 국민의 불교사상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불교운동이 과감히 수행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의천은 자기 마음 속의 이러한 불교운동의 이론적 근거를 모색하면서 대장경은 물론, 동서고금의 장소(章疏)를 섭렵하기 시작했다. 그는 뒷날 20여 년에 걸친 꾸준한 노력으로 4천여 권의 장소를 수집하여 속장경(續藏經)을 간행하게 되는데, 이러한 대 수집도 그가 이렇게 불교학을 닦던 시기에 비롯되었던 것이다. 5교9산의 종파적 대립을 지양할 새로운 불교운동의 이론적 근거를 의천은 마침내 천태(天台)의 교·관겸수(敎觀兼修)에서 발견하였다. 교·관겸수의 '교'는 천태의 교상(敎相) 즉 이론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그 5시 8교(五時八敎)는 화엄을 비롯한 5교의 모든 교리를 포섭하였으며, '관'은 지관(止觀) 즉 실천으로서, 선종이 이에 포섭된다. 따라서 교와 관이 불교 교리상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천태의 교관겸수는 5교9산을 통합한 최상의 이론이다. 더구나 천태의 회삼귀일(會三歸一) 사상은 신라 때부터 삼국통일의 이념과 합치된다고 생각했다. 학자적인 풍모와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였던 의천은 그의 뜻을 실천에 옮기기 전에 송에 건너가(선종 3년), 그곳의 학자들과 화엄·천태·계율·염불·선 등을 논해 보았다. 그러는 한편 그곳의 문헌도 수집하고 돌아왔는데, 오는 길에 천태산에 들러 지자(智者)대사의 탑을 보고, 고국에 돌아가 천태종을 세울 뜻을 아뢰었다. 14개월만에 귀국하게 된 의천은 먼저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고 그간 국내는 물론 요·송·일본 등에서 수집한 총 1,010부 4,740여 권의 장소를 정리하여 목록(<(新編諸宗敎藏總錄)>)을 만들고(선종 7년, 1090), 곧 판각에 착수하였다. 이 사업은 그가 입적하기까지(숙종 6년) 10여년에 걸쳐 진행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것이 유명한 의천의 속장경이다. 숙종 2년(1097) 국청사(國淸寺)가 낙성되자, 의천은 여기에서 마침내 오랜 숙원이던 천태종을 세워, 5교9산을 통합할 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선종을 흡수할 목적으로 선종임을 표방하며, 법계(法階)도 선종식으로 하니 선종의 승려 6·7할이 그곳에 몰려, 고려 불교사상(史上) 처음으로 선·교의 대립이 타개된 듯한장관이었다. 의천의 천태사상은 종파적인 대립·분쟁을 융화하여 민족적인 통화(統和) 정신을 구현한 점에서, 신라 삼국통일의 이념적인 뒷받침이 되었던 원효의 화엄사상과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그가 원효를 존경하여 화쟁(和諍)국사라는 시호(諡號)를 올리게 한 것과 같이, 그는 실로 원효의 발견자이며 고려가 낳은 제2의 원효였다.

대각국사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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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覺國師文集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시문집. 원집 20권, 외집 13권, 도합 33권 2책으로 불교연구에 귀중한 문헌이다.

신편제종교총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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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編諸宗敎藏總錄

의천의 저서로 속장(續藏)(중국·한국 승려들의 저술) 1,085부 4,858권을 적은 목록. 이 책을 통하여 우리나라 고승들의 저술을 엿볼 수 있고, 의천은 다음에 속편을 내려다 완성 못하고 죽었다.

원종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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圓宗文類

의천이 편찬한 책. 화엄원종(華嚴圓宗)에 관한 고승 학덕의 저술 또는 그의 요약문을 유취하여 편집한 것으로 본래 22권이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권, 14권, 22권의 3책 뿐이다.

지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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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訥 (1158∼1210)

고려 신종 때의 고승. 호는 목우자(牧牛子), 시호는 불일보조국가(佛日普照國師). 속성은 정(鄭)씨. 지눌은 1182년 선과(禪科)에 합격하고 청원사(淸願寺)에 이르러 혜능(慧能)의 <6조단경(六祖壇經)>에서 홀연히 깨치고, 이통현(李通玄) 거사의 화엄론(華嚴論)에서 선·교가 다르지 않음을 알았고, 대혜(大慧) 선사의 어록(語錄)에서 최후의 의혹을 씻었다 한다. 이것은 그대로 그의 독창적인 선사상의 형성과정이었다. 그는 사람을 대할 때 ①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②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③ 경절문(經截門)의 3문으로 하였는데, 이 3문은 각각 위의 6조단경·화엄론·대혜어록에서 나온 것이다. 지눌은 선·교의 배타성이 교리적으로 있을 수 없음을 논하여 돈오점수(頓悟漸修)를 강조하였는데, 돈오는 중생의 본성이 본래 깨끗하여 부처와 조금도 다름이 없음을 문득 깨치는 것이고, 점수는 그렇게 깨쳤다 하더라도 번뇌는 쉽게 없어지지 않으므로 '정'과 '혜'를 꾸준히 닦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용이다. 위에서 말한 3문 중에서 <원돈신해문>은 돈오점수의 '돈오'의 내용과 같고, <성적등지문>은 '점수'의 내용과 같다. 그러나 이러한 돈오점수는 학문적인 해석(知解)의 자취를 아직 가시지 못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선의 화두(話頭)를 공부하라는 것이 <경절문>이다. 지눌의 이러한 선사상의 체계는 조계(曹溪) 혜능의 선 속에 화엄을 흡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눌의 조계선(曹溪禪)이 이와 같이 독창적인 데서, 그 이전의 한국 선은 단지 중국 선의 연장에 불과하였다고 평가받는 것이다. 지눌의 정혜결사는 송광산(松廣山) 길상사(吉祥寺)에 터를 잡고(신종 3년), 끝까지 왕실불교에 오염되지 않는 조계선을 선양하는 거점이 되었는데, 왕족·귀족으로서 여기에 가입하는 자만도 수백인에 달했다 한다. 의천의 천태사상이 '교'로써 '선'을 융합하려는 것이었다면, 지눌의 조계종지(宗旨)는 '선'으로써 '교'를 융합하려는 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정혜결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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定慧結社文 고려의 고승 지눌(知訥)이 송광사(松廣寺)에서 수선사(修禪社)를 차릴 적에 그 취지를 적은 글. 이 글에 의하면 지눌은 고려 명종 12년에 서울 보제사(普濟寺)의 담선법회(談禪法會) 자리에서 동학 10여인과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위한 결사(結社)를 거론하였다가 실패하였고, 동왕 18년(1188)에 다시 정혜사(定慧社)를 발기하여 2년 뒤에 뜻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 글 속에서 저자는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는 것이 어째서 불도의 요체인가를 밝혀 자기의 소신을 명백히 하였다.

원돈성불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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圓頓成佛論

지눌의 저서로 화엄의 대의를 밝힌 책. 당시 불교계가 선·교(禪敎) 양종으로 서로 반목함을 개탄하고 선종에 대한 교종의 오해를 해명하기 위하여 보조국사 지눌이 지은 것이다. 원돈(圓頓)이라 함은 원돈교의 준말로 곧 화엄도리에 의한 성불론이므로 일명 성불론(成佛論)이라고도 한다. 즉 이 책은 그의 제자 혜심(慧諶)의 발문에 있듯이 선·교 양종이 서로 원수처럼 싸우는 잘못을 시정하고자 지은 것이다.

간화결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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看話決疑論

지눌이 지은 불교교리를 해설한 책. 선·교 양종이 한 가지로 쟁론(爭論)이 없는 경지에 들어감을 강조하고, 선문(禪門)에 10가지 병(病)이 있음을 지적, 화두(話頭)를 볼 때 일어나는 의심을 해결해 주는 책이다.

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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普愚 (1301∼1382)

고려말의 중. 호는 태고(太古)·보허(普虛), 속성은 홍(洪)씨. 시호는 원증(圓證). 26세에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하고 감로사(甘露寺)에서 수도하였다. 보우는 일찍이 만법귀일(萬法歸一)·무자(無字)와 같은 화두를 참선하여 크게 깨친 바가 있었지만, 다시 중국에 건너가(충목왕 2년), 임제(臨濟)의 17대 법손 석옥(石屋)으로부터 법을 받고 돌아왔다(同 4년). 그러나 그는 절에 머물지 않고 광주(廣州) 소설산(小雪山)에서 경작에 힘썼다. 공민왕이 그를 불러 법을 물었을때, 보우는 임금의 길은 불교신앙(信佛)에 있지 않고 밝은 정치에 있다고 하였다(<高麗史>권 38). 그리고 선종 9산을 통합하여 임제종의 백장청규(百丈淸規)로써 기강을 바로잡고, 개경은 왕기(王氣)가 다했으니 복고정치가 어려우므로 한양(漢陽)으로 천도할 것을 아뢰었다<(維昌撰圖證國師行狀)>(공민왕 5년). 공민왕은 보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곧 광명사(廣明寺)에 원융부(圓融府)를 두고 9산통합에 착수하였고, 한양에 궁절을 짓게 하였다. 그러나 한양천도는 일부 신하가 묘청의 예를 들어 반대하므로 좌절되고, 이와 함께 원융부도 불과 10개월만에 해체되고 말았다. 9산통합과 한양천도 계획은 실패에 돌아갔지만, 이러한 보우의 행장(行狀)에서 그가 얼마나 현실적인 사상가였던가를 알 수 있다. 한양천도는 인심을 일변하고 정·교(政敎)를 쇄신하려는 것이었으며, 천도의 이유로 든 풍수지리설은 당시의 풍조를 현실적으로 이용하려 한 것이었다.

혜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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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勤 (1320∼1376) 고려말의 승려. 일명 원혜(元慧), 호는 나옹(懶翁), 거실은 강월헌(江月軒), 속성은 아(牙)씨이다. 20세에 출가하여 묘적암(妙寂庵) 요연(了然)에게 득도하고, 충목왕(忠穆王) 3년에 연경에 들어가 지공(指空)을 만나는 등 각지를 돌아보고 공민왕 7년에 귀국하였다. 공민왕의 존신을 받고 보제존자(普濟尊者)의 법호를 받았다. 그의 문하에는 자초(自超) 등 백여인이 있었고 혼수(混修)를 만나 믿음을 표하여 법맥을 잇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