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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조선전기의 사상/조선전기의 종교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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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의 종교사상 〔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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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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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敎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전대의 유습을 계승하여 불사(佛事)를 일으켰으나 그의 불교 이해는 극히 희박한 것으로 깊은 신념도 실천도 없었다. 그가 존숭(尊崇)한 승려에 자초(自超)가 있다.

그는 선가(禪家)였으나 태조가 그를 좋아한 것은 그 선가를 존중해서가 아니라 그가 지상(地相)을 볼 줄 안다는 이유에서였다. 태조에게는 물론이지만 당대의 승풍(僧風)이 불교의 본궤에서 벗어나 여전히 주술적 경향을 띠고 있었음을 우리는 여실히 볼 수 있다. 태조의 불사는 언필칭 국가를 친호하기 위한 것이라 하고 망령의 복을 빌기 위해서라 했으나 이는 고려조를 통하여 계속되어 온 망국의 폐습이었다. 태종은 이와 같은 기복불교(祈福佛敎)의 경제적·윤리적 폐습을 제거하고자 숭유배불정책을 쓰기에 이르렀다. 활자를 만들어 유서(儒書)를 간행하고 사찰 수를 줄이고 종파를 감축시키는 일을 단행하였다. 당시에는 11종(宗)이 있었다고 하는데 <태종실록(太宗實錄)>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조계종(曹溪宗)·총지종(總持宗)·천태소자종(天台疏子宗)·법사종(法事宗)·화엄종(華嚴宗)·도문종(道門宗)·자은종(慈恩宗)·중도종(中道宗)·신인종(神印宗)·남산종(南山宗)·시흥종(始興宗) 등의 이름이 보인다. 이들 종파가 과연 무슨 교리상(敎理上) 뚜렷한 분립의 이유를 가졌는지 그 주장하는 바를 잘 모르겠으나 통일신라 초기의 그 화쟁(和諍)·원융(圓融)의 정신에 비하면 이러한 종파 불교가 매우 낮은 근기(根機)의 불교 또는 사이비 불교라고 하는 것은 쉽게 이해될 것이다. <용재총화>의 말을 빌면 "우리나라에서 불교를 숭봉한 지가 오래다. 신라의 고도에서 그러하듯이 송도(松都)에도 여염집 사이에 절이 많다. 왕궁과 절이 잇달아 있다. 왕과 후궁은 절에 가서 소향(燒香)하기에 허송세월을 하고 있다. 팔관(八關)·연등(燃燈) 같은 대례(大禮)를 설하는 것도 모두 불(佛)에 의지하기 때문에 왕의 첫째 아들은 태자(太子)가 되고, 둘째 아들은 삭발하고 중이 된다. 유림의 명사도 다 이에 따라 아들을 삭발시킨다. 사찰에는 재산이나 종이 많으며 천백에 달하는 경우도 있었다. 주지가 된 자는 혹 비첩(婢妾)을 두고 그 호부(豪富)가 공경(公卿)보다도 많다……"는 실정이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는 안 믿는다 하더라도 불교의 타락은 도저히 부정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태종의 숭유배불의 충심은 이해가 가는 점이 없지 않다. 그는 11종을 고쳐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한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직도 7종(七宗)이 남아 있었던 것이 사실이고 이것은 세종대에 와서야 겨우 실현되었다. 이 때의 7종이란 천태(天台)·총남(摠南)·조계(曹溪)·화엄(華嚴)·자은(慈恩)·중신(中神)·시흥(始興)인데 이는 몇 종이 합병됨으로써 축조된 것이다. 이렇듯 배불의 기세가 등등할 때 기화(己和)가 불교를 옹호하며 종교의 정론을 폈다. 기화도 원효·의상과 마찬가지로 1승(一乘)을 천명하였다. 그는 특히 유·불·도 3교의 융통적인 이해로까지 확대 <유석질의론(儒釋質疑論)>이니 <현정론(顯正論)>이니 하는 저술을 하여 당대에 부당한 불교배척적인 논의에 대항하는 정론을 폈다. 세조는 단종과 성삼문 등의 충신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므로 언제나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또 왕세자를 잃게 되자 더욱 불교에 마음이 쏠렸다. 그래서 대(大)원각사를 창건하고 사문(沙門) 수미(守眉) 등을 맹신하였다. 그러나 그의 불교는 국태민안, 자가(自家)의 복리를 비는 데 목적을 둔 수준이 낮은 것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세조 당시에 특기할 사상사적 인물은 김시습으로 그는 세조의 횡포를 미워하고 산수에 방랑하면서 시문을 지었다. 그는 미치광이 행세를 하며, 59년간의 생애를 보냈는데 양주 수락산 수락사(水落寺), 경주의 용장사(茸長寺) 등에 즐겨 살았다. 그는 선을 알았으나 동시에 경(經)도 읽었고 법화경을 택하기도 하였다. 그후 연산군의 광포로 불교는 크게 박해를 입었고 중종도 또 사찰을 파괴하고 동불(銅佛)을 녹여 군기(軍器)를 마드는 등 불교계는 시련을 겪어야 하는 시기가 왔다. 그 동안에 벽송(碧松)·지엄(智儼) 등이 간신히 선풍(禪風)을 유지해 왔다. 명종대에 문정왕후가 섭정의 자리에 있으면서 불교를 재흥시키려고 보우(普雨)를 기용, 8도의 선교를 총괄하게 하자 불교중흥의 결실이 거두어졌다. 선조 25년 임진에 풍신수길의 대군이 우리나라 강산을 유린했다. 국가 위급 존망시에 승려를 이끌고 외적의 만행을 막고 민중의 방패가 된 청허휴정(淸虛休靜)과 송운유정(松雲惟政)이 나타났다. 휴정은 선조를 그 피난지 용언(龍諺, 의주)에서 배알하고 8도선교 16종도총섭(十六宗都摠攝)이란 이름 및에 제자들을 이끌고 나섰다. 송운유정(松雲惟政)은 관동(강원)에서 7백여 승을 이끌고 일어났고, 처영(處英)은 1천여 승을 이끌고 전라도에서 궐기하였으며, 휴정 자신은 문도(門徒)와 모승(慕僧) 5천 명을 이끌고 순안(順安)의 법흥사(法興寺)에서 일어나 평양으로 진출, 이곳을 탈환, 왜병이 전면 패퇴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휴정은 <선교석(禪敎釋)> <선교결(禪敎訣)> <운수단(雲水壇)> 각1권과 <청허당집(淸虛堂集)> 8권을 남겼다. 또 그는 고인의 어구(語句) 중 도를 배우는데 있어서 요긴한 것들을 모아 <선가귀감(禪家龜鑑)>이란 책자를 만들었다. 어떤 학자는 휴정이 지주(持呪)·예배·염불 등을 선과 같이 수(修)했다고 해서, 그리고 정토의 존재를 믿고 미타(彌陀)의 원력(願力)을 믿었다고 해서 비난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다방면의 수행 방법이 다같이 하나도 무시되지 않고 적시적소에서 활용되었다는 것은 한국적인 종교의 사유방식을 드러내는 것으로 비난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높이 평가해야 할 한 가지 특징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원융적 성격이 바로 그것이다. 유정(惟政)은 그의 수제자이다. 사명은 시를 잘해서 그 시문집이 남아 있으나 그의 체계적 사상을 표현한 글은 적다. 그러나 선학(禪學)을 제일의로 삼고 그것을 생활화한 것이 그의 특징이다.

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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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敎

정주학이라는 혁신사상으로 불교국가인 고려를 계승한 조선왕조는 처음부터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국교로 삼았다. 새 왕조의 지배세력은 역시 정주학적인 교양을 갖춘 유학자들이었으므로 탄망(誕妄)한 좌도사설(左道邪說)로 보여지는 불교·도교와 음양도참설을 부정하는 태도를 취하였으며 이러한 태도는 갈수록 강화되어 중엽 이후에는 정주학 이외의 다른 사상이 일체 존립할 수 없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건국초 14∼15세기에는 그래도 전시대의 제도·관습·신앙이 그대로 계승되어 왕실 내에서는 불교가 때때로 일어나고, 일부 문인과 민중속에서는 도교적인 경향이 은밀하게 존속되고 있었다. 건국 직후에 고려제를 본따 왕성 안에 대청관(大淸觀)과 소격전(昭格殿)을 설치하고 각종 초례(醮禮)를 봉행하였으며 이와 같은 도교의식을 상정하는데는 역시 여말선초(麗末鮮初)의 문신 김첨(金瞻)의 공이 컸다. 그러나 개국공신을 중심으로 한 유학자들의 비판이 거세지면서 먼저 대청관(大淸觀)이 혁파되었고, 이어서 중종 때에는 조광조(趙光祖) 등의 유학자들과 왕실 사이에 소격전 혁파논쟁(昭格殿 革罷論爭)이 일어나 처음에는 전자가 승리하여 폐지되었다가 4년만에 다시 복설되는 일이 생겼다. 복설 뒤에도 유생(儒生)들의 비판은 계속되어 선조(宣祖) 때 왜란으로 파괴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또한 고려중기에 성행하던 문인들 사이의 청담(淸談)의 풍(風)이 세조(世祖)의 왕위찬탈에서 자극받아 다시 일어나니 생육신(生六臣) 등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의롭지 못하고 자기들의 뜻이 통하지 않는 정치와 현실에 크게 실망한 나머지 세상일을 개탄하고 산속에 숨어들어 자기들의 욕구불만을 환상적인 소설이나 도술(道術)로 표현하기를 즐겼고, 당시 압박받던 민중들이 이들에 동정하여 신선시(神仙視)하니, 여기에서 김시습(金時習)·홍유손(洪裕孫) 등의 선인설화(仙人說話)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풍조는 중종(中宗)때 사화(士禍)가 격화됨에 따라 중앙정계에서 밀려난 사림파(士林派) 일부에 계승되어 남추·정염·전우치(田禹治)·조여적(趙汝籍) 등이 출현하니 이들은 곧 조선 단학파(丹學派)의 대표자들이다. 국내에서 이와 같이 청담과 선비들 사이에 도교사상이 자라나 민중 속에 침투되는 사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원군(援軍)을 통하여 중국의 관왕숭배 사상이 전래되어 나중에는 민간종교에까지 침투하기에 이른다. 원칙적으로 좌도사술이라 하여 도교를 배척하던 조정에서도 국난을 당하자 명나라의 권유로 서울에 관왕묘(關王廟)를 세우는 한편, 고려시대에도 국난이 있을 적마다 국가진로를 위하여 지내던 마니산 초례(摩尼山醮禮)를 부활시켜 행하니, 이것은 민족신앙·도교·불교가 융합된 것이었다. 한편으로 양란(兩亂)을 겪으면서 크게 자각한 일부 실학자(實學者)들 사이에 도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정약용(丁若鏞)·박세당(朴世堂)·홍만종(洪萬宗) 등이 도교연구서를 내놓았고, 음양도참사상과 도교를 결합하여 각종 비결(秘訣)과 도법(道法)이 출현하니 인조(仁祖) 때의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 도가(道家)의 위서(僞書)로 보여지는 <옥추경(玉樞經)>등 많은 것들이 있다. 이미 선비들 간에 유행하던 청담의 풍은 그후에도 당쟁의 격화, 광해군의 폭정 등으로 더욱 널리 파급되어 남인(南人)계의 몰락양반들이나 서얼(庶孼)류들 사이에 차츰 현실부정의 종교로 발전하는 기미를 보였다. 즉 유·불·선 중에서는 그래도 선교가 가장 불평세력의 위안이 되었고 하층민들 사이에 큰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곧 서학(西學)의 전래라는 외부로부터의 충격 때문에 일부 세력을 그쪽에 빼앗겼고, 남은 세력은 각종 비기(秘記)를 매체로 한 신흥종교(新興宗敎) 속에 포섭되니 동학(東學)이 그중 대표적인 것이었다. 비로소 한국의 도교는 하나의 독립된 종교사상으로서의 지위를 찾기 직전에 다시 분산되어 다른 사상속에 흡수되어 버렸던 것이다.

자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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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超 (1327∼1405)

고려말·조선초의 중. 호는 무학(無學)·계월헌(溪月軒), 성은 박(朴). 18세에 출가, 혜감국사(慧鑑國師)에게 사사(師事)하고 나중에 용문산(龍門山)에서 법장(法藏)이라는 중(僧)에게 <능엄경(楞嚴經)>을 배웠고, 지공(指空)·나옹(懶翁) 등으로부터 선(禪)을 배웠다. 그후 공민왕 2년에 원나라에 유학하고, 1356년에 귀국, 1392년 조선 개국후 왕사(王師)가 되고, 묘엄존자(妙嚴尊者)의 호를 받았다. 그는 일찍이 이성계의 꿈을 해몽하여 석왕사(釋王寺)를 짓게 해준 인연으로 이성계의 우우(優遇)를 받았으며, 상지술(相地術)에 밝아서 1393년 수도를 옮기려는 태조를 따라 계룡산 및 한양을 돌아다니면서, 지상(地相)을 보고 마침내 한양 천도를 결정짓게 하였다. 태조 6년 그의 수탑(壽塔)이 회암사(檜巖寺) 북쪽에 세워지고, 태종 2년 회암사 감주(監主)가 되었으나, 이듬해 사직, 금강산 금장암(今藏庵)에 가 있다가 죽었다. 저서에는 <인공음(印空吟)>이 전하고, 후에 그에게 가탁하여 꾸며진 비기(秘記)가 있으나 근거없는 것이다.

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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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和 (1376∼1433)

조선전기의 중. 호는 득통(得通), 거실(居室)은 함허당(涵虛堂), 구명은 수이(守伊), 구호는 무준(無準), 속성은 유(劉)씨, 충주 사람이다. 어려서 경사문장(經史文章)을 배우고 11세에 관악산(冠岳山) 의상암(義湘庵)에서 출가, 그후 자초(自超)에게 배우고 회암사에서 고행을 하였다. 그후 공덕산(功德山)의 대승사(大乘寺), 천마산(天磨山)의 관음굴(觀音窟)과 불희사(佛禧寺) 등에서 강설하고, 자모산(慈母山) 연봉사(烟峰寺) 등에서 3년간 수도, 세종 2년 오대산에 가서 공양, 여러 산을 편력하다가 세종 13년 희양산(曦陽山) 봉암사(鳳巖寺)를 중수하고 그곳에서 58세로 입적하였다. 그의 저서에 <유석질의론(儒釋質疑論)> <현정론(顯正論)> <원각경소(圓覺經疏)> <금강경오가 설의(說誼)> <함허당어록(涵虛堂語錄)> 등이 있다. 그의 사상은 다음과 같다. 우선 그는 <오도송(悟道頌)>에서 "그 자리에 가 눈을 드니 10방(十方)에 푸른 하늘이요, 무(無)속에 길이 있으니 서방극락이로다(臨行擧目 十方碧落 無中有路 西方極樂"라고 하였고, 또 "감연공적(湛然空寂)하니 본래는 1물(一物)도 없고, 신령한 빛이 빛나니 10방을 환히 통한다. 다시 몸과 마음이 있어 저 생사(生死)를 받을리 없으니, 거래왕복함에 마음에 거리낌이 없도다(湛然空寂 本無一物 靈光赫之 洞撤十方 更無身心 受彼生死 去來往復 心無墨)"라고 읊어 자기의 선풍(禪風)을 드러낸 시문을 여러 편 남겼다. 한편 조선왕조의 숭유억불책(崇儒抑佛策)을 이론적으로 비판한 <현정론(顯正論)>속에, "불교인이 목표로 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情)을 버리고 성(性)을 빛나게 할 뿐이니, 정(情)이 성(性)에서 나옴은 마치 구름이 장공(長空)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고 정을 버리고 성을 빛냄은 마치 구름이 걷혀 청명한 하늘이 나타남과 같다" 라고 말하여 불교는 청풍(淸風)과 같아 감정의 구름을 깨끗이 제거하고 맑은 심성(心性)의 하늘을 나타내게 한다고 하였다. 또한 억불책을 개탄하되 "불교는 비유컨대 청풍이 뜬 구름을 쓸어 버리는 것과 같다. 또렷하게 보기를 소망하면서도 청풍을 싫어함은 이상한 일이다"고 하였다. 나아가서 그는 불교의 윤리와 유교의 윤리를 조화시키려 하여 유가(儒家)에서는 5상(五常)을 가지고 도추(道樞)로 삼지만, 불가(佛家)의 5계(五戒)가 바로 그 5상(五常)이라고 말하고, 유가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불교에 의해서 수도해야만 된다고 강조하였다. 또 유가에서 불교의 윤회전생설(輪廻轉生說)을 비난하는데 대하여 천당(天堂)과 지옥이 설사 없다 하더라도 사람이 그 말을 듣고 천당을 흠모하여 선(善)을 행하고 지옥을 싫어하여 악을 멈추면 천당지옥설은 민중을 교화하는데 큰 이익이 있다고 대답하고 있다. 그는 결론적으로 유·불·선 3교는 근본은 같은 것이니 서로 배척 대립하기보다는 상호보충 종합됨으로써 화합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여 "유·불·선 3가의 말한 바는 은연중에 서로 맞춰져 하나가 되는 관계에 있으니 한 입에서 나온 것과 같다" 라고 하였다.

유석질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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儒釋質疑論

조선전기의 중. 기화(己和)가 유·불·도 3교중 특히 유교와 불교의 차이점 및 불교의 진리를 설명한 책. 그는 첫머리에서 "3교의 도는 모두 마음을 근본으로 하나 유자(儒者)는 그 적(迹), 곧 발자취를 파들어가고, 불자(佛者)는 그 진(眞)에 일치해 가고 그 둘 사이에 접하며, 이들 둘을 결합시키는 것이 노씨지도(老氏之道:도교)이다" 라고 하였다. 사상사적인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 문헌이다.

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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普雨 (1515∼1565)

조선전기의 중. 호는 허응당(虛應堂)·나암(懶庵). 중종 25년 금강산 마하연암(摩訶衍庵)에 입산, 참선과 경학 연구에 전심하다가 하산, 다시 설악산 백담사(白潭寺)의 중으로 있던 중, 문정왕후(文定王侯)가 선·교(禪敎) 양과를 부활시키자 판선종사도대선사봉은사 주지(判禪宗寺都大禪師奉恩寺住持)가 되고 봉선사(奉先寺) 주지로서 교종(敎宗)을 맡았던 수진(守眞)과 더불어 선·교 양 면에서 그 위세가 빛나기 시작하였다. 나중 유신(儒臣)들의 배척을 받아 제주(濟州)로 유배되고, 거기서 죽으니, 그의 힘으로 재흥했던 선교양종의 과(科)도 폐지되고 말았으나 그때에 들어온 승려들 가운데 임진왜란 때에 근왕호국(勤王護國)의 충성을 다한 휴정(休靜), 유정(惟政) 등이 배출된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보우는 <허응집(虛應集)> <선게잡저(禪偈雜著> <불사문답(佛事問答)> 등의 저서를 남기고 있다. 그의 선(禪) 이해는 틀리지 않았지만 크게 독창적인 점은 없고 약간 소극적인 공(空)의 편견에 치우쳐 심경불이(心境不二)의 묘제(妙諸)는 언급이 부족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일정설(一正說)은 그 표현의 묘(妙)를 얻은 것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일정설을 설명하여 "하나라는 것은 둘도 아니고 셋도 아니며, 성실하여 망녕됨이 없는 것을 말하니 하늘의 이치이다. 그 이치(理)가 공막(空漠)하여 아무런 조짐이 없지만 만상(萬象)이 울창하여서 물(物)의 어느것 하나 그 이치를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그것의 체(體)를 말하면 하나(一)일 따름이니 처음부터 물(物)이 둘이나 셋 있는 것은 아니다.…… 바르다(正)는 것은 치우치지 않고 그릇됨이 없고 순수하며 잡되지 않는 것은 이르는 것이니 곧 사람의 마음이다. 그 마음이 안정되어 딴 생각이 없고, 천지만물의 이치가 어디 한 군데 해당되지 않는 곳이 없으며 영통(靈通)하여 어리석지 않으니, 천지만물의 모든 일에 어느것 하나 응하지 않는 것이 없고, 일찍이 한 생각도 사사로이 치우치거나 그릇된 적이 없다"라고 하였다. 즉 하나(一)를 가지고 하늘의 이치를, 바른 것(正)을 가지고 사람의 마음을 이야기 한 그 취지는 우리 민족 사상의 한 전통을 이루는 것 같다.

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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休靜 (1520∼1604)

조선중기의 중·승군장(僧軍將). 자는 현응(玄應), 호는 청허(淸虛)·서산(西山), 별호는 백화도인(白華道人)·풍악산인(楓岳山人)·두류산인(頭流山人)·묘향산인(妙香山人)·조계퇴은(曹溪退隱)·병로(病老), 아명은 여신(汝信), 성은 최(崔), 안주(安州) 출신. 일찍이 부모를 읽고, 읍졸(邑卒) 이사증(李思曾)의 양육으로 서울에서 유학을 배우고 난 후에 두류산에 가 숭인(崇仁) 지구(志邱)로부터 계를 받고 각처를 다니며 수행하고 선·교양종의 판사(判事)까지 되었던 고승으로 그 시재(詩才)로 인하여 선조(宣祖)와 친교를 갖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구(老軀)를 무릅쓰고 의병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전국에 격문을 돌려 유정(惟政)·처영(處英)·뇌묵(雷默)·기허(騎虛)·영규(靈圭) 등이 승병을 거느려 참전케 하였으며, 스스로 5천 명의 승병단을 조직, 서울 수복 등에 공을 세워,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 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가 되었으나, 노쇠하여 1594년 제자 유정에게 병사(兵事)를 맡기고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의 학풍은 선을 중심으로 하면서 교를 버리지 않았던 벽송(碧松)파로 출발하였으나, 불법의 골자는 교(敎)밖에 없다고 설파한 스승 부용(芙容)의 사상을 이어받아, 선·교겸수(禪敎兼修)하고 견성성불(見性成佛)로서 최종목표를 삼았는데, 그의 제자는 천여 명에 이르렀다. 시에 능해 지금도 그의 시는 애송되고 있으며, 저서로 <청허당집(淸虛堂集)>, 편저(編著)로 <선교석(禪敎釋)> <선가귀감(禪家龜鑑)> 등이 있다.

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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惟政 (1544∼1610)

조선중기의 중·승병장. 호는 사명당(泗溟堂)·송운(松雲)·종봉(鍾峯). 성은 임(任), 자는 이환(離幻), 유정은 법명. 경남 밀양 출신으로 어려서 유학을 배우고 나서 불가(佛家)로 넘어왔다. 직지사(直持寺)에서 신묵(信默)에게 출가, <전등록(傳燈錄)>을 배웠다. 1561년에 선과(禪科)에 합격하고 후에 묘향산으로 가 휴정(休靜)의 제자가 되었다. 왜병을 맞아 그가 발휘한 도력(道力)은 왜장들까지도 불법에 귀의하게

하는 위력을 발휘했으며, 단신 일본에 건너가 포로로 잡혀갔던 우리나라 사람 3,500명을 석방하는 일까지 성취하였다. 스승 휴정이 죽은 이듬해 치악산(雉岳山)을 거쳐서 해인사(海印寺)에 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시(詩)에 능하여 시문집 <사명집(泗溟集)>을 남겼고, 초서(草書)도 잘 썼다고 한다. 그의 사상을 요약하면 (1) 중생은 누구나 본각불(本覺佛)을 구유하고 있으므로 기회만 만나면 본각불이 될 수가 있다. (2) 깨닫는 방법으로 자력문(自力門)과 타력문(他力門) 또는 성도문(聖道門)과 정토문(淨土門), 난행도(難行道)와 이행도(易行道)의 두 길이 있다. (3) 법(法)을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격화 하여 중생도 법의 무진한 연기상(緣起相)을 알면 비로자나불이 된다고 하였다. (4) 제자들에게 호국보민(護國保民) 사상을 가르치고, 국난에 처하여 의병투쟁을 벌이면서도 세속정치의 유혹을 물리쳤다. (5) 선조에게 "전략을 갱신·재정비해서 왜적을 물리치고 백성을 보호하며, 종사(宗社)를 중흥시켜 국권을 회복하자"고 상소했다. (6) <을미상소언사(乙未上疏言事)>에서 ① 탐관오리 단속 ② 강화협상 중의 변경수비 강화, ③ 정부기강의 확립, ④ 소 도살금지와 축우(蓄牛)정책, ⑤ 산성수비강화 등을 건의하였다. (7) 그는 기도불교의 폐습에 대하여 "때에 백해(百害)의 재앙이 없고, 날(日)에 천상(千祥)의 경사가 있다. 천재지변은 저절로 가라앉고 저절로 없어져서 요순(堯舜) 때와 같은 복된 바람이나 해도 저절로 불고 저절로 밝아진 것이다. "라고 그 황당무계함을 통박하였다.

소격서 혁파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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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格署革罷論爭

조선 중종 때 있었던 소격서 혁파와 복설(復說)에 관한 논쟁. 조광조(趙光祖)의 건의에 못이겨 1518년에 소격서를 혁파했던 중종(中宗)은 모후(母后) 윤씨의 병환과 거듭되는 재난을 막기 위하여 소격서를 복설시키려고 하였으나 조정 대신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 4년 뒤인 1522년에야 복설되었다. 이때 모후 윤씨를 중심으로 전개된 혁파반대론은 선대에서 만든 제도를 신진학자들의 주장만 듣고 철폐한 것은 부당하며, 재난의 극복을 위해서도 초례를 다시 지내야 한다는 것이고, 조광조 등을 비롯한 혁파론의 근거는 노자(老子)를 받드는 도교자체가 좌도(左道)이며 주자학적인 기풍을 해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논쟁은 복설 후에도 계속되어 중종 25년까지 계속되었고, 임진왜란 때 전화(戰禍)로 불탄 다음에도 도교는 좌도(左道)라고 해서 재건되지 않고 완전히 철폐되어 버렸다.

김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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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瞻 (1354∼1418)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초명은 구이(九二), 자는 자구(子具), 호는 연계(蓮溪). 학문에 전심하여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하였다. 그는 음률(音律)·의례(儀禮)에도 밝아 태종 4년에 왕명을 받아 <성수초례(星宿醮禮)>를 만들어 올리고 조정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에게 도교를 받들라고 권하였다. 그는 동왕 15년에 <성수경(星宿經)>을 지어 바쳤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뒤에 외척과 가까이 하여 왕족 간의 이간을 꾀했다는 죄목으로 파직당했다. 뒤에 죄는 용서받았으나 불교를 좋아하고 도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복관되지 못하고 죽었다.

홍유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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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裕孫 (1431∼1529)

조선전기의 학자. 자는 여경(餘慶), 호는 조총·광진자(狂眞子). 세조(世祖)의 찬위(纂位)에 분개하여 세속적 영화를 버리고 남효온(南孝溫) 등 6인과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자처, 노장(老莊)의 학문을 토론하고 시주(詩酒)로 세월을 보냈다. 뒤의 성혼(成渾)이 쓴 <묵암잡기(默庵雜記)>에 의하면 그의 시화(詩話)를 통해 신선의 경지에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남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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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종 때의 무인. 자는 계응(季應), 호는 서계(西溪)·선은(仙隱). 1519년의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추방당하자 영광(靈光)에서 시작(詩作)에 전심하였으며 그의 시 <촉영부(燭影賦)>는 간신 남곤(南袞)을 비꼰 것으로 유명하다. <지봉유설(芝峯類說)>등 기록에 의하면 그가 장자(長子)를 만나 지리산 청학동(靑鶴洞)에 이르러 도인(道人)을 만나니 바로 최치원이었다는 <도담(道談)>이 있다.

정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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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

중종 때의 도사. 자는 사결(士潔), 호는 북창(北窓). 나면서 청수(淸秀)하고 통하지 않은 데가 없었으며 천문·지리·음악·의약·산술·중국어에 능통하여 중국을 방문하여 봉천전(奉天殿) 도사와 도담을 나누었고, <용호비결(龍虎秘訣)>이라는 저서가 전한다.

전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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田禹治

조선 중종 때의 도술가(道術家). 서울에서 미관말직을 지내다가 그만두고 송도에 은거하여 신광한(申光漢)·송인수(宋麟壽) 등과 가까이 지내면서 도술을 연마, 여러 가지 이적을 낳았다. 백성을 현혹시켰다는 죄로 신천(信川) 옥에 갇혀 옥사하였다.

조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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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汝籍

조선 명종 때의 도사. 호는 용잠거사(龍岑居士) 혹은 청학산인(靑鶴山人), 위한조(魏漢祚)의 도통을 이어받은 제자로 <청학집(靑鶴集)>을 지어 한국 도교의 내력을 자기나름대로 밝혔다.

청학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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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鶴集

조선 명종 때의 도사 조여적(趙汝籍)이 찬한 책. 일명 <운학집(雲鶴集)>. 자신이 만나서 선술(仙術)을 배운 운학선생의 사적을 기록하는 형식으로 우리나라 도교의 연원과 역사를 기술하였다. 이 책의 특징은 한국 도교의 연원을 단군신화(檀君神話)에 두고 단군신화를 다시 중국 고대의 선인(仙人)에게 연결시킨 점과, 최치원을 신선시하여 해동도교의 비조로 한 점이다.

해동전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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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東傳道錄

조선 인조 때 전하는 저작자 미상의 도교서. 관동에서 체포된 괴승에게서 발견하여 이직(李稙)에게 보냈다고 한다. 이책 속에는 신라말의 최승우(崔承祐)·김가기(金可紀)·자혜(慈惠)의 신선 설화로부터 도교가 전수된 경과를 적고, 각종 도법(道法)·비문(秘文)·비결(秘訣)·도교경서의 전래를 최치원에게 의탁하여 그를 동방단학(東方丹學)의 비조로 적고 있다. 다음 단학의 전수자를 정염(鄭 )·이지함·곽재우(郭再祐)·권극중(權克中) 등으로 보고 있다.

관왕숭배의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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關王崇拜-傳來

중국 송대(宋代)에 형성된 관우(關羽)숭배 사상이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명군(明軍)에 의해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 촉한(蜀漢)의 명장 관우를 도교의 신으로 받들어 그를 신봉하면 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신앙을 펴고자 이여송(李如松)·진인(陳璘) 등 명장(明將)들이 강진(康津)·남원(南原)·성주(星州)·안동(安東) 등지에 관왕묘 등을 세웠고, 1602년에는 명제(明齊) 신종(神宗)의 권유로 서울에도 관왕묘를 세우니 지금의 동묘(東廟)이다.

해동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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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東異蹟

인조 때의 학자 홍만종(洪萬宗)이 지은 책. 홍만종이 우리나라 도교사상 큰 이적을 베푼 사람의 20인중에 9인을 뽑아 수록한 것이다. 여기에 수록된 사람으로는 (1) 권진인(權眞人)과 남궁두(南宮斗) (2) 김시습(金時習) (3) 홍유손(洪裕孫) (4) 남추 (5) 정염 (6) 전우치(田禹治) (7) 윤군평(尹君平) (8) 곽재우(郭再祐) (9) 권극중(權克中) 등이다.

옥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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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樞經

조선 때 점복·제사에 쓰이던 도가(道家)의 위서(僞書). 일명 <옥추보경(玉樞寶經)>이라 함. 조선 때 맹인(盲人)·박수(혹은 복술이)들이 점을 치거나 제사·기도를 드릴 적에 흔히 도·불혼합의 주문을 외었는데 그 중에 도교에 가탁하여 꾸며낸 <옥추경>이 있었다. 이것은 중국 본래의 도교경전에는 없는 것으로 소위 <뇌성보화천존법어(雷聲普化天尊法語)>를 칭하여 후인이 조작한 것이라고 한다.

마니산의 초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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摩尼山-醮禮

고려·조선대에 꾸준히 계속된 강화도 마니산의 초제.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塹星壇)과 전등산(傳燈山) 3랑성(三郞城)은 단군신화에 관련된 단군제천단(檀君祭天壇)과 단군의 세 아들이 쌓은 성터로 알려져 고려 때의 강화천도 시대부터 더욱 신성시되었고 고려 원종(元宗)·우왕 때에는 여기서 초제를 지낸 적이 있었다. 특히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마다 국조(國朝)로서의 단군에 대한 숭모열은 더욱 강해져 단군을 신격화하고 천제(天帝) 혹은 신선으로 받들어 왔다. 이러한 민족 고유의 신도(神道)사상에다 풍수지리설과 도교(道敎)신앙이 혼합되니 단군은 도교의 옥황상제(玉皇上帝)와 동일시되기까지 하였고 초례의식도 도·불혼합에서 점점 도교적인 색채가 강해진 듯하다. 조선대에 개국초, 선조(宣祖), 인조(仁祖) 등 국난시에는 역시 이곳에서 초례가 올려진 기록이 있고, 완고한 유학자들이 틈 있을 때마다 이 마니산 초례에 반기를 들기도 하였다.

홍희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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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羲福 (1794∼1859)

순조(純祖) 때의 문인. 자는 수서(綏瑞), 호는 취운(醉雲)·청허산인(淸虛山人). 그의 아버지 홍의호(洪義浩)를 따라서 사신으로 수차 연경(燕京)에 왕래하면서 많은 기행문을 남겼으나 뒤에 불운하여 원주(原州)에 낙향하여 시문(詩文)과 방랑, 선담(仙談)으로 일생을 보냈다. 그 자신 10여명의 제자들을 이끌고 암벽에 올라 선시(仙詩)를 읊어 선도(仙道)를 자부한 <선암제선록(僊巖題僊錄)>등 수백 편의 시문과, 그 자신 편집한 중국 도교(道敎)의 연원(淵源)에 대한 사략(史略)인 <청허진결(淸虛眞訣)>과 중국의 도교사적(道敎史籍)을 요약한 <백팔화병(百八畵屛)> <양불록(兩不錄)>등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