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봉건제도와 이슬람 문화/카를의 대관과 서구 중세의 성립
카를의 대관과 서구 중세의 성립〔槪說〕
[편집]프랑크 국왕 카를(찰스) 시대에 게르만 민족의 대부분이 프랑크 왕국에 통합되었다. 카를의 대관식이 의미하듯이 그의 시대는 국내의 종교적 통일이 강화되었으며, 제권(帝權)과 교황권이 밀접히 결합되는 가운데 유럽은 바로 통일체로서 파악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것은 고대 로마 제국의 재래(再來)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었다.특히 당시의 유럽에서는 서유럽의 프랑크 왕국과 동방의 비잔틴 제국 및 동서(東西)에 뻗어 있는 이슬람 제국의 3국이 병립하고 있었으므로 프랑크 왕과 교황과의 결합은 이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카를 이후에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로 분열한 서구 제국은 봉건제도의 발달, 독자적인 지방 통치 양식의 전개에 있어서 프랑크를 계승하였고, 교황과의 관련도 중세 유럽을 통해 하나의 문제점이 되었다.
카를 대제 (찰스 대제)
[편집]-大帝 Karl der Grosse (742
814, 재위 768
814)
프랑크 왕국 카롤링거 왕조의 국왕. 카롤루스 대제 또는 찰스 대제라고도 하며, 프랑스에서는 샤를마뉴라 부른다. 771년 형 카를로만이 죽은 후, 전프랑크에 군림하여 전성기를 가져왔다. 그는 작센에 원정해서 이를 합병하고(804), 북이탈리아의 롬바르드 왕국을 멸망시켜 그 영지를 합병했으며(774), 아바르인 등과 싸워 국토를 넓혔다. 그는 국내 각지에 중앙집권화를 도울 수 있는 백(伯)을 두고, 한편으로는 각지에 사교(司敎)를 두어 그리스도교에 의한 통치를 강화했다. 또 수도 아헨에 궁정학교를 설립하여 고전의 부활, 라틴 문화의 진흥에 노력했다(카롤링거 르네상스). 800년 교황 레오 3세에 의한 대관식은 고대 로마 제국의 부활이라는 대업이 카를 대제에 의해 성취되었다는 사실과 교황이 비잔틴 제국에서 완전히 독립한 것에 대한 감사의 뜻을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801년 그는 국토를 양분하여 지방에는 지방관을 파견하여 모든 권한을 주어 통치하게 하고 순찰사로 하여금 정치를 감독하게 하였다. 또한 사교(신부)를 각 지방에 보내 기독교 국가 체제를 갖추게 하고 교회를 최대한으로 보호하였으며 그의 지배하에 있는 나라마다 기독교를 퍼뜨려 세계 제일의 기독교 수호자로 전해지고 있다. 그의 사후 프랑크 왕국은 분열되었으나, 로마제국의 부흥이념은 10세기에 신성 로마제국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카를의 대관
[편집]-戴冠
프랑크 국왕 카를이 로마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제관(帝冠)을 받은 사건. 카를은 교황과 대립되는 세력을 누르기 위해 800년에 로마로 향하였다. 이 해 크리스마스 산 피에트로 대사원에서 기도를 끝내고 일어나려는 카를의 머리 위에 교황이 제관을 씌워 주었다. 이 사건은 교황과 카를 중 어느 쪽의 착상에 의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양자에게는 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즉, 교황은 소(小)피핀 이래 프랑크 왕국과의 제휴를 강화하고 더욱이 황제 칭호를 줌으로써 로마가톨릭 교회가 그리스 교회에서 해방된다는 의도를 달성시킬 수가 있었다. 또 카를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교회의 보호자로서 그리스도교적인 사명에 따라 그리스도교를 정신적 지주로 받들고 서로마 제국 재건의 패업을 성취한 것으로서, 대관에 의해 명실공히 서유럽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중세 유럽에서 황제권과 교황권과의 연관관계(제휴인 동시에 대립되는)가 특히 독일·이탈리아 왕국 역사에서 밀접하여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카롤링거 르네상스
[편집]Carolingian Renaissance
카롤링거 왕조의 카를 대제와 그 아들 루이 시대의 라틴 문화를 포함하는 문화의 흥륭을 가리킨다. 일종의 고전부흥운동으로 본래 문화의 정도가 낮았던 프랑크 왕국이 점차 영토를 확대하여 로마 문화가 많이 남아 있는 지역을 포함하게 된 것이다. 원래는 성직자의 교양을 높이려는 순수한 크리스트교적 운동으로서, 그들에게 정확한 라틴어(語)의 지식을 가르치려는 데 목적이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고전의 부활, 일반 문화의 발전을 가져왔다. 카를 대제는 그리스도교의 보급과 함께 교회·수도원의 부속학교나 성직자에 의한 학문 연구에 힘썼다. 특히 그는 국내외의 많은 문화인을 초대하여 학문을 장려했다. 피사의 페테루스(신학), 롬바르디아의 파울루스 디아코누스(역사), 아킬레이아의 파우리누스(신학), 에스파냐의 테올돌프(고전·시), 잉글랜드의 알쿠인(고전·철학) 등 수많은 학자 및 문인이 카를 대제의 궁정에 모였다. 또, 궁정학교를 창시하여 귀족이나 관리의 자제를 교육시켰는데, 그 결과 프랑크인 중에서도 『카를 대제 전(傳)』을 쓴 아인하르트와 같은 학자도 배출되었다. 전반적으로 이 문화는 고대의 모방에 그치는 독창성이 없는 라틴어 문화인데, 간접적으로는 중세 성기(盛期)의 크리스트 문화 완성의 기초가 되었으며, 직접적인 영향으로는 ‘카롤링거 소문자’라는 특유의 라틴어 서체(書體)와 이에 의한 고전을 보존하는 구실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