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한국의 종교/한국의 도교/한국도교의 역사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한국도교의 역사〔개설〕

[편집]

韓國道敎-歷史〔槪說〕

도교는 본래 민간신앙을 기반으로 하여 일어난 중국의 자연종교(自然宗敎)이다. 그것은 정령숭배를 기반으로 하여 신선사상(神仙思想)을 중심으로 삼고, 거기에 도가(道家)·역(易)·음양오행(陰陽五行)·복서(卜筮)·참위(讖緯)·점성(占星) 등의 설(說)과 무격(巫覡)신앙을 가미하고, 다시 그 위에 불교의 체제와 조직을 종합하고 불로장생(不老長生)을 주목적으로 하는 수복록(壽福祿)의 현세이익적인 자연종교이다.

이 자연종교로서의 도교는 종교 교단으로서의 체제와 조직을 갖추었다. 즉, 도교는 경(經)을 도장(道藏)이라 하고 사원(寺院)을 도관(道觀)이라 하며, 승려(僧侶)로서 도사(道士)·여도사(女道士) 체제를 갖추어 성립적(成立的) 종교가 되었다.

그리고 도사들의 추장 차이로 인해서 시대에 따라 많은 분파(分派)가 생겼다. 1910년경에는 중국에 140여 개의 도교 종파가 생겼다.

이 종파종교를 전문가들은 성립도교라 부르고 이에서 벗어난 도교 및 그 집단을 민중도교라고 부른다.

이것은 매우 강한 주술성을 드러내고 석자·공자·관음·그리스도·마호메트·관우(關羽)·토지신 등의 개인신앙을 토대로 형성된 보권류(寶卷流)의 종교이다. 무위교(無爲敎)·원돈교(圓頓敎)·홍양교(弘陽敎) 그리고 선천교(先天敎)·구궁도(九宮道)·금단팔괘도(金丹八卦道)·일관도(一貫道) 등이 바로 민중도교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현세이익적이다.

성립도교가 전래된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백제의 장군 막고해(莫古解)가 고구려 군사를 추격하던 끝에 태자(太子)에게 도가(道家)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하며,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고 한 간언(諫言)은 노자의 <도덕경>에 있는 사상이고 신앙적이라기보다는 도덕적인 것이다.

이런 도덕적 간언은 그 당시(375) 이전에 흔히 적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간언보다 산경전(山景塼)에 나타난 단계적인 세 봉(峰)의 중첩과 산 밑에 있는 암석의 돌기(突起)와 산 꼭대기에 총립(叢立)한 나무, 중앙에 있는 집 한 채와 인물의 그림이 다분히 백제에 전래된 도교를 암시하여 준다.

고구려의 영류왕(榮留王)은 즉위 7년(624)에 당나라의 도사(道士)를 맞이하여 노자의 도법을 강론하게 하고 천존상을 봉안했다. 왕과 나라 안 사람들 수천 명이 청강했다 (<삼국사기> 권제20).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寶藏王) 2년(643)에는 대신 연개소문의 권청으로 당나라 도사 숙달(叔達) 이하 여덟 명을 맞아 불사(佛寺)를 취하여 거기에 거처하게 했었는데 이것은 불교 사원을 도관(道觀)으로 삼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고구려의 이름난 중 보덕화상(普德和尙)은 나라가 도교를 숭상하고 불법을 믿지 않는다 하여 백제의 절로 옮아갔었다. 그런데 고구려 말년에 성한 도교는 <삼국유사> 보장봉로조(寶藏奉老條)의 고려본기에서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오두미교(五斗米敎)였다.

위의 기록 등으로 미루어 당시의 도교는 무엇보다도 천존상을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천존이라 하면 원시천존을 뜻하는 것이다.

이 천존은 최고의 천(天)인 대라천(大羅天)에 속하는 최고존재이고 우주를 지배하는 자로서 그 아래에 36천을 각기 지배하는 최고자를 거느리고 있다.

따라서 강론했다는 도법은 우주관의 설명이었을 것이다. 즉, 우주의 성립과,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만물의 근원이 되는 도(道)의 발생과 그 전개, 대라천 이하 36개 천계의 종류와 이름과 그 모양, 그리고 천계에 있는 신들이나 선인(仙人), 지옥의 모습, 북두칠성과 북극성 등에 관한 설명이다. 이것이 도교 교학에 속하는 부문인 것이다. 그리고 오두미교라고 해도 전입된 것은 장도릉(張道陵)이 창건한 최초의 오두미교가 아니라 상당수 수정되고 발전된 것이었다.

당조(唐朝)는 도교를 특별히 보고했었는데 상청파(上淸派:일명 茅山派)에 기울었다.

한편 고구려 고분(古墳:江西古墳)벽에는 세 산을 향하여 큰 새를 타고 반공(半空)을 날아가는 인물이 그려져 있다. 이것을 보면 당시 선인(仙人)으로 화해서 몸이 가벼워져 하늘로 날아 선궁(仙宮)에 들어가는 신앙이 있었음을 추측케 한다.

이 선인사상은 신라에서 더욱 성한 것 같다. 즉, 진평왕(眞平王) 때(587)에 대세(大世)와 구칠(九柒)이 "명산을 찾아 도를 닦아서 범인의 몸을 벗어나 신선(神仙)의 도를 배울 것 같으면 표연히 바람을 타고 혈료한 하늘 밖으로 날아갈 것이다(<삼국사기> 진평왕 9년조)"고 서로 주고받다가 "서로 벗이 되어 배를 타고 남해로부터 가버렸는데 그들의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同上)"고 하였다.

여기에서 선인(仙人)과 승천(昇天)과 둔갑(遁甲)의 사상을 찾아 볼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인간이 되게 하는 것을 도술(道術)이라고 한다.

선인(仙人:신선이라고 함)의 선(仙)은 한자로 인(人)과 산(山)으로 되어 있는 글자인데 산에 있는 것으로 믿어진다. 일찍이 신선의 도술을 배워 해동에 와서 지선(地仙)이 된 중국 제실의 딸 사소(娑蘇)는 서연산(西鳶山)에 살고 있다(<삼국유사> 감통제7). 이것도 선도신모(仙桃神母)의 사상인데 신모는 나라를 돕고 여러 가지 영이(靈異)를 나타내어 당시 신라 민중들의 숭배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 신앙 뒤에는 선인이 여기저기로 날아다닐 수 있다는 신앙과 날아와서 멈출 때 그 몸을 드러내는 선인현현(仙人顯現)의 신앙이 깔려 있다. 그 예를 김유신과 어머니의 설화가 보여준다. 김유신의 아버지의 꿈속에 두 별(星)이 나타났고 그의 어머니 만명(萬明)의 꿈에 금빛 갑옷을 입은 동자가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

또 김유신은 중악(中嶽)의 석굴 속에서 수도하는 도중에 난승(難勝)이란 갈의(褐衣)를 입은 노인으로부터 방술(方術) 비법(秘法)을 배웠다. 그때 산 위를 5색의 찬란한 빛이 싸돌고 있었다(<삼국사기> 권41).

통일신라 시대의 도교 상황은 <청학집(靑鶴集)>이 전하여 준다. 도교의 종교적 집단이 형성되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도교신앙 사상이 학식 있는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는 것만은 알 수 있다.

이들에 받아들여진 것은 첫째로 선인(仙人)신앙이다. 선인은 영랑(永郞)과 같이 나이가 90이 되어도 어린아이의 피부를 하고 있으며, 백로(白鷺)의 깃으로 만든 관(冠)을 쓰고 철죽(鐵竹) 단장(短杖)을 짚고 호수로 산으로 소요하며, 신녀(神女) 보덕(寶德) 또는 호공(瓠公)과 같이 바람을 제어(制御)하거나 옷으로 바람을 일으켜 비를 부르고 금수(禽獸)를 쫓거나 꾸짖는다.

옥(玉)을 삶아서 가지나물과 같이 먹기도 한다. 김가기(金可紀)는 수련한 끝에 매일 밤 독방에서 선관선녀(仙官仙女)들과 담소(談笑)하다가 승천하기도 하였다.

김암(金巖)은 둔갑입성법(遁甲立成法)으로 외적을 물리쳤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선인이나 방사(方士)·술사(術士)는 진인(眞人)이라 하여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것 같다.

환인(桓仁)을 동방 최초의 선조(仙祖)로서 진인(眞人)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현실적인 탁월한 인물을 선인화하여 진인으로 모시고 선인적인 온갖 요소를 부여한다. 이런 사고 속에서 어떤 수양으로써 사람들이 선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고려조의 종교다운 도교는 16대 예종(睿宗) 때 송(宋)나라 휘종(徽宗) 대관 4년에 도사 두 명을 보내온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 때에 고려인 이중약(李仲若)이 송나라에 가서 황대충(黃大忠)에게 종사(從事)하다가 득도했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천지산천에 초례(醮禮)를 올리는 풍습은 계속 이어져 왔었다. 도교는 고려 인종(仁宗:재위 1123∼1146) 때에 성하였다.

이때 도교는 앞선 시대보다 제도적이 되었다. 사상으로서는 8성(八聖)·8선(八仙)사상이 있고 술수사상(術數思想)으로서 음양오행·도참·상지(相地)가 있는 동시에 초재(醮齋)의 제법이 마련되고 궁사의 도관(道觀)이 성립되었다.

인종은 임원궁궐(林原宮闕) 안에 8성당(聖堂)을 짓고 각 당에 ① 호국백두악 태백선인 실덕문수사리보살(護國白頭嶽 太白仙人 實德文殊師利菩薩), ② 용위악 육통존자실덕 석가불(龍圍嶽 六通尊者實德 釋迦佛), ③ 월성악 천선실덕 대변천신(月城嶽 天仙實德 大變天神), ④ 구려평양 선인실덕 연등불(駒麗平壤 仙人實德 燃燈佛), ⑤ 구려목멱 선인실덕 비파시불(駒麗木覓 仙人實德 毗婆尸佛), ⑥ 송악 진주거사실덕 금강색보살(松嶽 震主居士實德 金剛索菩薩), ⑦ 증성악 신인실덕 늑차천왕(甑城嶽 神人實德 勒叉天王), ⑧ 두악 천녀실덕 부동우파이(頭嶽 天女實德 不動優婆夷)를 모셨는데 이름은 모두 화상(畵像)이었다.

또 각 산에는 선인(仙人)의 이름과 함께 불교의 불(佛)이나 보살의 이름을 덧붙인 것으로 모두 혼합적인데 산에 사람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중국도교의 습성이다.

예를 들면 원시천존은 낙정심(酪靜心)이란 이름이 붙는다. 또 8선궁이 송악산에 세워졌다는 것을 보아서 도관(道觀)이 여기저기에 설치되었고, 이와 아울러 도장이 열렸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도장은 불교와 도교의 잡용(雜用) 이었다.

그리고 고려의 여러 왕은 도교의 제례인 초재(醮齋)를 올렸다. 그 대상은 천지산천을 비롯하여 노인성(老人星)·북두성(北斗星)·태을(太乙)과 5방산해신군(五方山海神君)이었는데 모두 양재초복(穰災招福)의 영이(靈異)가 감응(感應)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초재는 복원관(福源觀)·대청관(大淸觀)·구요당(九曜堂) 등에서 집행되었는데 이 재에서 청사(靑詞)란 축문(祝文)이 송창되었다.

한편 민중의 도교는 전래된 이적(異蹟)에 중점이 두어졌다.

조선시대에 와서도 개성(開城)에 대청관을 세우고 한성(漢城)에 천도하여 소격전(昭格殿)을 두어 3청(三淸)의 초재를 올렸는데, 3청은 옥청(玉淸)·상청(上淸)·태청(太淸)을 가리키는 것으로 도교의 우주관에 연유한 사상이다.

그에 따르면 처음에 1기(一氣)가 있었는데 이것이 3기(三氣)로 나누어지고 3천(三天)이 되었다. 1기가 대라천이고 3기는 청휘천(淸徽天)·우여천(禹餘天)·태적천(太赤天)인데 이것이 곧 위에서 말한 3청(三淸)이고 3경(三境)이다. 태원(太元)에 앞서 원시천존(元始天尊)이 생겼는데 그는 불멸이다. 이는 천황태일(天皇太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들을 모두 삼청전(三淸殿)에 봉안하였다. 이 삼청전에는 그들 외에 수백에 달하는 신위(神位)들이 안치되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으로 자연히 이것들이 없어졌으나 민간에 관우(關羽) 숭배가 전래되었다. 난이 끝난 뒤에는 남대문과 동대문 바깥에 관우묘를 세웠고 지방에도 여러 곳에 세워졌다.

일제(日帝)시대에는 신종교(新宗敎)가 발생하였는데 그 중에 묘련사(妙蓮社)와 법련사(法蓮社)가 도교 계열에 속한다.

법련사는 100여 명이 결집한 단체로서 처음에는 불교적이었으나 나중에는 관성제군(關聖帝君)·문창제군(文昌帝君)·부우제군(孚佑帝君)을 받들어 모셨다. 이 부우제군은 중국 여순양(呂純陽)의 선화(仙化)인데 이는 <천둔(天遁)의 검법(劍法)>이란 악귀를 물리치는 비법과 <용호금단(龍虎金丹)의 비문(秘文)>이란 불로장생약을 만드는 오전(奧傳)을 받고 둔갑할 수 있었다. 12세기 중엽에 성립한 중국의 전진교는 여순양을 종조(宗祖)로 모시는데 이것의 전래가 부우제군신앙이다. 이 선인신앙은 수선(水仙)·지선(地仙)신앙으로 확대되기도 했다. 해방 이후 1950년대에 도교의 한 파가 한국에 전래되었다. 한편 국내에서도 도교적인 집단이 몇 개 생겨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에는 중국 계열을 잇는 도교 집단과 국내에서 발생한 도교 집단의 두 종류가 있게 되었다. 전자는 중국식 의례·교리에 치우치고 후자는 불교·유교·고유민간신앙이 혼합된 교리에 유교식 의례를 중심으로 삼고 있다. 집단으로서의 도교는 역사적으로나 오늘날에 있어서나 다른 종교집단과 같이 사회의 표면에 뚜렷하게 부각되지는 않고 있으나 민간신앙에서의 도교적 요소는 매우 짙다. 조선의 세시(歲時) 풍속에서 몇 가지 예를 인용하여 그 농도를 알아보면 설날에 신다(神茶)·울루(鬱壘)의 모습을 도부(桃符)에 그려서 문에 걸어 흉악한 귀신을 쫓았다는 풍습은 도교의 황제(黃帝)가 악귀를 막기 위해 대문에 세웠다는 데서 유래하며, 유두날에 창포를 사용한다는 것도 도교에서 단오날에 창포술을 마시고 악귀를 방어한다는 신앙에 근거를 둔 것이다. 또 태산5악(泰山五嶽)이나 3신(三神)신앙도 모두 도교에서는 주요한 신들이다. 한편 도교 교학의 한 부문인 벽곡 신앙은 오늘날 민간신앙에서의 생식(生食)·장생(長生)신앙에 통하고, 전자의 복이(服餌)신앙도 오늘날 우리의 신흥종교에서의 단사(丹砂)를 청수(淸水)로 음복하는 것과 일치한다. 죽지 않고 화천(化天)한다는 신앙도 다분히 도교적이다. <張 秉 吉>

삼신재해동설

[편집]

三神在海東說

3신이란 진시황제(秦始皇帝)가 불사약(不死藥)을 구하러 사람을 보냈다는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州)의 세 신산(神山)을 말하는데, 그 산들이 발해(渤海)의 동쪽으로 몇 억만리나 떨어진 곳에, 밑바닥이 없는 골짜기(歸墟라고 부름)의 개울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 산들은 주위가 3만리이고 꼭대기는 너비가 사방 9천리이며, 산과 산 사이가 7만리나 떨어져 있다.

그 정상에 선인(仙人)들이 살고 있는 어전(御殿)이 있고 주변에 불로불사(不老不死)의 과일나무가 있다. 그리고 선인들은 산과 산 사이를 하루 몇 번씩이나 날아다닌다.

이런 산이 조선(朝鮮)에 있다고 믿는 신앙이 일찍부터 우리나라에 있었다. 조선은 3방(三方)이 모두 밑이 없는 깊은 바다이며 그 땅에 장백산(長白山)의 천지(天池)가 있고 그 산정의 대(臺)가 넓다는 것이다.

또 그런 산이 셋 있는데 금강산이 봉래산, 지리산이 방장산, 한라산이 영주산이라는 것이다. 이 산들 위에는 때때로 신의 이적(異蹟)이 있다고 믿었다.

신라사선

[편집]

新羅四仙

<청학집(淸鶴集)>에 의하면 환인(桓仁)이 동방의 최초 선조(仙祖)이고 맥이 문박(文朴)에 대가 이어지며 다시 영랑(永郞)에 전해져서 마한(馬韓) 때 보덕신녀(寶德神女)가 영랑의 도(永郞之道)를 이어받았다고 한다.

신라의 화랑을 국선(國仙)이라고도 칭하는데 영랑·술랑(述郞)·남랑(南郞)·안상(安詳)을 사선(四仙)이라고 부른다. 이 사선은 모두 영남 사람이라는 것이고 고성(高城) 삼일포(三日浦) 남쪽에 있는 조그마한 산봉의 돌벽에 영랑도남석행(永郞徒南石行)이란 여섯 글자가 쓰여 있으며 그 조그마한 섬에 후세인이 사선정(四仙亭)을 세웠다고 한다.

통천(通川)에 사선들이 소요하였다는 사선봉이 있고 간성(杆城)에 선유담(仙遊潭)·영랑호(永郞湖)가 있다. 금강산에 영랑봉이 있는데 선도(仙徒)들이 놀았던 곳이라 한다.

장연(長淵)에 아랑포(阿郞浦)가 있고, 강릉(江陵)의 한송정(寒松亭)이 있는데 사선들이 노닐던 곳이다.

<청학집>은 이외에도 선가(仙家)를 열거하고 있다. 선가로서는 호공(瓠公), 물계자(勿稽子), 대세(大世)·구칠(仇柒), 옥보고(玉寶高), 우륵(于勒), 장미선녀(薔微仙女:連珠), 김가기(金可紀), 최승우(崔承祐), 자혜(慈惠), 최고운(崔孤雲), 이청(李淸), 명법(明法), 권청(權淸) 등이다. 이 선파는 고려·조선조의 단학파로 이어졌다.

천존상

[편집]

天尊像

당고조(唐高祖)가 천존상을 주어 도사를 고구려에 보내어 도덕경을 강의하게 하였더니 영류왕(榮留王)과 국인(國人)들이 들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있다. 당나라의 천존상은 높이 3자 5치로서, 운관(雲冠)을 쓰고 안개와 같은 옷을 몸에 걸쳤으며 손에는 손잡이가 달린 향로와 향을 들고 있다. 관(冠)에는 새가 앉아 있고 발에는 방두리(方頭履)란 앞이 사각으로 되어 있는 신발을 신고 신발 밑에 연꽃(蓮花)을 밟고 있으며 천존 뒤에는 잎이 보인다.

잎 위에 거북이 업드렸으며 왼쪽 팔굽에 구름 모양이 있고 빛이 등에 있다. 빛 속에서 청룡(靑龍)이 목을 쳐들고 있으며 오른쪽 어깨 앞에 범이 왼쪽을 향하고 있다. 몸 주변에 부동(不動)과 같이 화염이 둘러싸고, 눈썹·수염·머리카락은 그림붓으로 그린 듯이 가늘다. 구름이 전신을 둘러싸고 군데군데에 천화(天花)가 붙어 있다. 머리 위에 있는 빛 위에 큰 꽃이 우산(雨傘) 모양으로 덮고 있다. 이 신상(神像)이 도교영험기(道敎靈驗記) 권4 목문천존험(木文天尊驗)에 기록되어 있는 원시천존상(元始天尊像)이다. 고려 예종(睿宗) 2년(1107)에 처음으로 천존상을 옥촉정(玉觸亭)에 안치하고 월초(月醮)를 올렸다. 그 옥촉정은 연경궁후원(延慶宮後苑:開城)에 있었다.

복원궁

[편집]

福源宮

도교의 사원이다. 고구려 보장왕은 불사(佛寺)를 도관으로 삼고 당나라에서 온 도사 숙달(叔達)의 8명을 맞이하여 도덕경을 강의하였다. 고려조 예종(睿宗)은 복원궁(福源宮)을 마련하고 송나라 도사 두 명을 맞아들여서 제자를 뽑아 도서(道書)를 배우게 하였다. 복원궁은 왕부(王府:首都)의 북쪽에 있으며 대화문(大和門) 안에 정화문(政和門)을 세웠는데 대화문 방(榜)에는 부석지문(敷錫之門), 정화문 방에는 복원지관(福源之觀)이라고 쓰여 있었다. 궁내에 삼청상(三淸像)과 혼원황제(混元皇帝:老子)의 화상(畵像)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10여 명의 우류(羽流:道人)가 있었다.

이 궁 외에도 도관으로서 옥촉정(玉觸亭)·회경전(會慶殿)이 있었고 수춘궁(壽春宮)·여구궁(麗丘宮)·문덕전(文德殿)·태청관(太淸觀)·태일전(太一殿)·구요당(九曜堂)·청계배성소(淸溪拜星所)·정사색(淨事色)·소전색(燒錢色) 등이 있었는데 호천오방제(昊天五方帝)·태일(太一:太乙)이 봉안되어 왕이 여기에 행차하여 초재(醮齋)를 올렸다. 이런 고려시대의 도관이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소격전(昭格殿)에 합일(合一)되었다.

소격전은 소격서(昭格署)와 그 의미를 달리하므로 구별되어야 한다. 세조(世祖) 12년에 소격전을 없애고 소격서로 갱정(更定)하여 관제(官制)로 하였다. 그러나 소격서의 관제에 관한 존폐가 여러 왕에 의해서 문제되었다. 소격전에는 삼청전·태일전·직숙전(直宿殿)과 십일요전(十一曜殿)이 있었다.

소격전은 소격서로 대치됨으로써 없어지고 또 소격서가 임진왜란으로 자연히 없어졌으나 임진왜란 때 중국에서 나와 있던 명군(明軍)에 의하여 관왕(關王)숭배가 전래되어 난후 서울 남대문과 동대문 밖에 관왕묘(關王廟)가 설립되었다. 지방에서는 강진·남원·성주(星州)·안동에 각각 관왕묘를 세웠으며, 성주와 안동의 것은 선조(宣祖) 31년에 창건되었다. 이것들이 도교의 명맥을 유지하였다.

소격서

[편집]

昭格署

조선조 세조가 즉위 12년에 도류(道流)의 사원격인 소격전(昭格殿)을 소격서로 개칭하고 관서의 하나로 하였다. 중종(中宗) 13년에 조광조(趙光祖)의 상소에 의해서 폐지되었다.

20년에 다시 설치되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폐지되었다가 소격서의 요원인 도류(道流)는 취재(取材)로써 선발하였다. 과목에는 송(誦)에 금단(禁壇), 독(讀)에 영보경(靈寶經), 과의(科義)에는 연생경(延生經)·태일경(太一經)·옥추경·진무경(眞武經)·용왕경(龍王經) 가운데에서 3경(三經)을 택하게 되었다. 이곳 도류는 백의(白衣)와 오건(烏巾)을 착용하고 치성을 드리며 푸른 종이(靑詞:일종의 祝文)에 축원하는 글을 써서 이를 불사르는 등 절차가 매우 복잡하였다.

이 관청 곁에 우물이 있었는데 제사를 지낼 때에 썼으므로 우물 이름을 성제정(星祭亭)이라 했다. 물맛이 몹시 좋아서 권근(權近)·강희맹(姜希孟) 등이 이 물을 읊은 시가 전해 온다. 이곳에 소속된 관리는 영(令:종5품) 1명, 별제(別提:종6품) 2명, 참봉(參奉:종9품) 2명이었다. 잡식으로서는 도류가 15명, 상도(尙道:종8품) 1명, 지도(志道:종9품) 1명이었다.

초재

[편집]

醮齋

도류(道流)가 드리는 제를 초재라고 하였다. 소격서에서 집행된 초재를 본다면 그 종류는 이렇다. 성숙(星宿)초, 태양성 및 화성(火星)초, 북두, 금성, 태음, 직성(直星), 혜성(彗星) 등의 초재가 있는데 조선조에서는 소격전에서 집행되었다. 이 초재들은 양재(禳災)에 목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소격전에서는 주로 성신(星辰)에게 기원하였다.

초제청사

[편집]

醮祭靑詞

도류(道流)들이 초제 때에 쓰는 축원문을 청사라고 한다. 초례문이나 도장문(道場文)이 모두 이 청사의 종류로서 여러 가지이다. 청사는 푸른 종이에 축원문을 쓴 것인데 제가 끝나면 불로 태워버렸다.

종규

[편집]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궁가(宮家)나 여염집에서 정월이 되면 액과 병을 물리치기 위해 종규가 귀신을 몰아내는 형상이 그려진 그림을 문에 붙이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요즘에도 붉은 먹으로 귀신을 그린 부적이 방이나 변소에 붙어 있는 것을 본다.

그런데 그 종규는 당(唐) 현종(玄宗) 때에 사람에게 근심을 안겨주고 기뻐하던 허모(虛耗)가 양귀비(楊貴妃)를 괴롭히고 궁중을 뛰어다니며 기뻐하고 있는 것을 붙잡아서 눈알을 빼고 머리부터 그냥 먹어버린 자이다.

그런데 종규는 과거에 떨어져 궁중의 계단에 머리를 들이받고 자살한 종남현(終南縣) 출신의 진사(進士)로서, 왕이 죽은 그를 후하게 장사지내 주자 종규는 그 은혜를 갚으려고 천하 귀신을 평정하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현종(玄宗)은 유명한 화가 오도자(吳道子)에게 종규의 모습을 그리게 했다. 그리고 신하에 명하여 제야의 밤에 집집마다 그 그림을 붙이도록 명하였다. 이런 전설의 인물이 종규이다.

바로 이 종규는 도교에서 쓰이는 벽사 부적이다. 신다(神茶)·울루(鬱壘)를 그린 도부(桃符)와 '신다·울루' 4자를 쓴 첩자(朔子)의 두 주인공도 도교에서 귀신들이 있는 도삭산(度朔山)을 감독하는 두 신이다. 입춘에 액막이로 쓰였다는 벽사문 중의 열두 신명(神名)도 도교적인 것이다. 도교신앙과 관련된 풍속은 복서(卜筮)·부적 등에 잠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