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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미술/서양미술의 흐름/현 대 미 술/대상의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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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뇽의 아가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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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작. 1907년, 유채화. 뉴욕 근대 미술관 소장. 1906년부터 1년간에 걸쳐 제작된 미완성의 대작인 <아비뇽의 아가씨들>은 작가 피카소의 화력(畵歷)에 중요한 전기(轉機)를 보여주는 것일 뿐만 아니고 20세기 회화로서도 기념비적 가치의 전환을 의미하는 의의 깊은 작품이다.

아비뇽이란 바르셀로나의 서민가에 있는 마도로스 상대의 창녀가 출몰하는 뒷거리의 명칭이며 화면에 그린 것은 이 뒷거리에 있는 창부들이다. 초기의 피카소가 즐겨 그린 인생적인 주제가 답습되어 있는 셈인데 이 작품에는 벌써 청색 시대의 정감적(情感的)인 침울함이 없고, 대상은 주제를 전혀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비정(非情) 형태의 구성으로 포착하였다 이것은 피카소가 스스로 제작에 가한 제1의 파괴인 것이다.

이 파괴의 힌트는 피카소가 고대 이베리아 조각과 아프리카의 흑인조각에서 배웠다. 이들 원시미술이 가진 분방(奔放)한 데포르메와 충실된 양감은 무엇보다도 형(形)을 만드는 것, 즉 조형의 문제로서 정감적인 피카소를 경탄하게 하였고 매혹시켰다. 자연과 예술은 전혀 별개의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감지하였다. 또 하나의 힌트는 세잔에게서 받았다. 세잔도 역시 현상과는 별개의 실재(實在)를 화가가 주체적으로 선택한 색면(色面)으로써 견고하게 구축할 것을 염원하였던 조형가였다. <아비뇽의 아가씨들>은 최초에 이 세잔의 수욕(水浴)의 구도를 모방하여 나부(裸婦)의 군상을 그리려던 목적이라 말하지만, 세잔의 주체적인 색면 배합을 진일보하여 피카소는 형태의 분해와 화가의 내적인 질서에 따르는 그 재배분(再配分)을 노렸던 것이다. 가령 정면으로 향한 얼굴일지라도 코는 높이를 가지고 있으며 뒤돌아서 있는 사람이라 하여 얼굴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일부러 그린다는 것은 단일한 시점에서 보는 대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손상시킨다는 사실은 틀림없지만, 인물의 표정과 감정은 더욱 생생하게 전하게 된다고 피카소는 확신하였던 것이다. 흑인조각의 영향을 여실히 말하여 주는 <아비뇽의 아가씨들>의 화면에서 오른편에서 둘째번의 왜곡된 얼굴은 그의 생각을 대담하게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피카소의 조형에 대한 사고는 그 그림을 그린 당시에 있어서 친한 친구에게조차 잘 이해되지 않았다. 피카소는 머리가 돌아서 그 그림 뒤에서 목을 매달 것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었다. 다만 브라크만이 알지 못하면서도 그 그림을 이해하려고 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당시 브라크도 역시 세잔의 본을 따라 풍경화 가운데에 있는 색면에 의한 양(量)의 파악과 대상의 재구성에 손을 뻗치고 있었다. 이윽고 피카소와 브라크의 공동연구에서 퀴비슴의 사조(思潮)가 탄생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연의 모방을 근저로부터 뒤집어 엎는 이지(理知)의 조형이며 20세기의 회화가 달성한 주목할 만한 혁신이다.

퀴비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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立象派 Cubisme

퀴비슴은 포비슴에 이어서 일어난 20세기 미술의 제2의 혁신운동이고 그 이념은 포비슴보다 훨씬 이지적(理知的)인 기반 위에 있으며, 기성의 것에 반역한다고 하기보다는 리얼리즘을 골격으로 하는 르네상스 이래의 미술의 전통 그 자체에 도전하는 혁명적인 성격을 지닌 운동이다. 그것은 세잔을 모범으로 하는 두 화가, 즉 피카소와 브라크가 다같이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추진하여 그동안 분석적 퀴비슴, 총합적 퀴비슴, 다이내믹 퀴비슴 등의 변용(變容)을 보이면서 많은 미술가들을 가담시켜 적극적인 운동을 전개하였다. 퀴비슴은 종래의 회화의 기법에 따르지 않고 입체적인 대상을 평면의 캔버스에 옮기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또 대상의 다각적인 관찰을 이동하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란 문제와 대결하고 있다. 종전에는 이것을 오로지 빛으로 해결하여 왔다. 가까운 물체는 밝고 크며 먼 곳 물체는 어둡고 작으며 또한 보이지 않는 부분은 그리지 않았다.

결국 화가는 빛의 속임수를 그리고 현상을 모사(模寫)하는 데 불과하였다. 이것을 불만으로 여겨 더욱 항구적인 자연을 그리려고 부심한 사람이 세잔이다. 퀴비슴은 이 세잔의 추구에서 큰 암시와 격려를 받고 있다. 피카소가 세잔을 본따서 흑인조각에서 자극을 받아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그린 것은 1907년의 일이다.

같은 무렵에 포비슴의 그룹에서 떨어져 나온 브라크는 세잔의 '모든 자연은 원추(圓錐)와 원통(圓筒)과 구체로 환원된다'라고 말한 내용의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1907년에 공표되었다)의 그 구절에 따라 <에스타크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1908년 이 풍경화 6점은 살롱 도톤에 출품하여 결국 낙선이 되었으나 그 때의 심사위원인 마티스가 '이 그림은 작은 퀴브(입방체)로써 그려졌다'라 평한 말이 퀴비슴의 명칭을 만든 실마리가 되었다.

브라크의 낙선작품은 화상(畵商)인 칸와이러의 화랑에서 개인전으로 발표되었는데 그 화상이 피카소와 브라크가 추구하는 공통점을 인정하여 1907년 가을에 두 사람을 만나게 하였다. 그 후부터 두 사람 사이에는 협력관계가 맺어져 1910년까지 퀴비슴은 전적으로 이 두 사람이 추진한 바가 되었다. 이 시기를 '초기 퀴비슴' 또는 '세잔풍(風) 퀴비슴'이라 한다.

1910년부터 1912년에 걸쳐 퀴비슴은 새로운 발전의 단계를 맞이한다. '분석적 퀴비슴'이라 불리는 시기로 대상의 분해가 철저하게 행하여졌다. 대상은 여러 각도에서 고쳐 보게 되며 갖가지의 모습이 동일 화면으로 재구성되어 가는 것이다. 이 시기의 피카소는 거의 색채를 쓰지 않고 '외과의사가 시체를 해부하는 것처럼'(시인 아폴리네르의 논평) 형태의 분석과 그 질서 있는 배합을 추구하였다.

다음 1913∼1914년에 이르면 '종합적 퀴비슴'의 시기에 들어간다. 이것은 주로 피카소와 환 그리스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는데 분석적 퀴비슴이 해체와 재구성의 사이에서 잃어버린 리얼리티를 되찾으려는 동향이었다. 분석적 퀴비슴은 병(甁)이란 대상에서 원통형을 추출(抽出)하지만, '나는 원통형에서 병을 만든다'라 말하는 것이 그리스의 입장이었다. 촌단(寸斷)된 색면의 통합과 기하학적 질서에 의한 장식효과의 증대를 가져 왔으며, 또한 리얼리티 회복이란 요구에 응하여 콜라주와 파피에 콜레의 수법이 개척된 것을 특기할 수 있다.

이상이 정통적 전개인데 이와 별도로 거의 1910년경부터 레제를 중심으로 개척된 방향으로 다이내믹 퀴비슴이 있다. 이것은 대상을 분해하여 재구성할 때에 화면에 역동감(力動感)을 도입하려는 것이며, 주로 정물의 분야에서 성과를 올린 정통파 퀴비슴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려고 시도하였다. 레제는 기계문명에 대한 관심을 뒤샹, 법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섹션 도르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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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tion d'or

섹션 도르란 본래 황금비율(黃金比率)에 대한 것인데 B:A=A+B의 관계에 있는 비례를 말한다. 이 비례관계는 시각적으로 가장 조화가 잘 취해진 것이라 하여 고대 그리스로부터 미적 프로포션의 전형이라 생각해 왔다. 이 황금분할을 위시한 기하학적 원리에 입각하여 퀴비슴을 추진한 그룹을 섹션 도르파(派)라 부른다. 이것은 쟈크 비용의 아틀리에를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멤버는 마르셀 뒤샹, 피카비아, 메찬제, 마르샹, 들로네, 로트, 뒤샹 비용, 엘방 등이었다. 이 파는 1912년에는 피카소와 브라크를 제외한 거의 모든 퀴비스트를 규합하여 제1회 전시회를 가졌고 기관지(機關誌)를 발행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되고 전후에는 1921년에 제2회전(展), 1922년에 제3회 전시회까지 그룹활동을 하였으며, 이 파가 퀴비슴에 끼친 계몽적 역할은 크다.

오르피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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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phisme

오르피슴은 1912년 로베르 들로네를 주창자로 하여 발족한 퀴비슴의 한 분파이다. 이 명칭은 그리스의 악신(樂神) 오르페우스에서 연유한 것인데, 시인 아폴리네르가 명명(命名)하였다.

전통파 퀴비슴이 엄격한 기하학적 구성에 따라 색채를 망각하고 색채를 선의 종속적인 요소로 떨어뜨리는 데에 반대하여 색채야말로 회화의 본질적인 구성요소이며 그 다이내믹한 힘을 화면구성의 기본으로 하려는 것이 이 파의 주장이다.

이로써 공간적 요소(형태)와 시간적 요소(리듬)의 동시성(同時性)을 가져 오게 하여 화면에 음악적인 해조(諧調)가 생기도록 시도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점차로 구상적(具象的) 형태를 떠나 순수한 색채 형태만으로 콤퍼지션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추상회화의 한 분야를 개척하였다.

이 파의 멤버로서 후에 들로네 부인이 된 소니아 테르크와 체코 사람인 프란시스크프카 및 미국인 모간 러셀 등이 있다.

퓌리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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純粹主義 Purisme

퓌리슴이란 일반적으로 예술작품의 미적·양식적 순화(純化)로의 노력을 가리키고 있으며, 현대미술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의 오장팡과 잔레(르 코르뷔지에)가 주장한 조형언어(造形言語)의 순화(純化)를 의도하는 사조(思潮)를 말한다.

1918년에 그 두 사람의 공저로 발간된 <퀴비슴 이후>가 그 마니페스트라 하겠으며, 퀴비슴이 해체한 대상의 조형적 요소를 엄밀한 과학적 질서와 규범에 따라 재조직하여 회화에 더욱 건축적인 구성미를 부여하려는 것이었다. 1920년부터 1925년에 걸쳐 잡지 <에스프리 누보>를 발행하여 퓌리슴의 보급을 꾀했으나, 회화 그 자체에 대해서는 본질적인 영향이 적었고 오히려 건축의 분야에서 르 코르뷔지에의 활약으로 후계자에게 다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퓌리슴이 네덜란드의 신조형주의(新造形主義)와 러시아의 구성주의(構成主義) 발전을 위하여 퀴비슴의 이념을 매개한 역할은 묵과할 수 없다.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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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Ruiz Picasso (1881∼1973)

피카소의 친구인 브라크는 퀴비슴에 의하여 자기의 양식을 확립하여 그후 이 양식의 심화(深化)에 생애를 바친 화가이나 피카소는 그렇지 않다. 그는 퀴비슴을 추진하고 있던 시기에도 때로는 리얼한 수법으로 돌아왔으며, 이 경향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퀴비슴에 사실상의 종지부가 찍혀진 무렵부터 더욱 그러하였다. 특히 1917년 피카소에게 한 전기가 닥쳐온다. 이 해에 장 콕토로부터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을 위한 무대장식의 공동작업을 권유받은 피카소는 콕토와 더불어 로마에 갔다. 그리하여 같은 그 해에 일단 파리로 돌아온 피카소는 다시금 나폴리·폼페이·피렌체 등지로 고대 및 르네상스의 미술행각을 한 후, 1920년 드디어 신고전파의 앵글을 생각하게 하는 화풍(畵風)을 택했던 것이다. 이 이후의 3년간을 피카소의 '신고전파 시대'라 한다. 아내인 오르가와 장남 폴을 모델로 한 '모자(母子)' 시리즈는 이 시기의 작품으로서 유명하다. 결국 피카소는 변모하고 예술의 길을 바꾸었던 것이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세 사람의 음악가(音樂家)>와 같은 모순된 수법의 대작도 나왔으나, 1924년에는 다시 화면구성을 주로 하는 대정물(大靜物) 시리즈에 착수하였는가 하면 다음 1925년에는 환상·기괴의 표현으로 등장한 쉬르레알리슴 운동에 관여했다. 그런가 하면 1930년에는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변신보(變身譜)>와 발자크의 <알려지지 않는 걸작>에 고전주의적 수법인 동판화(銅版畵)에 의한 삽화를 그리는 등 그의 변신은 너무나 다양하여 어지러울 정도이다.

피카소는 '한장의 그림은 파괴의 총계(總計)이다'라 말하지만 그의 예술적 생애도 또한 철저한 자기 부정과 꾸미지 않고 구애받지 않는 활달에 의해서 일관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파괴와 변모야말로 그의 예술의 영양제였다.

1934년 피카소는 장기간 모국에 머물렀다. 이 체재의 선물로서 그는 그 해에 많은 투우도(鬪牛圖)를 그렸다. 이 묘화(描畵)는 언제부터인지 그리스 신화의 미노타우로스 전설의 환상이 되어 이듬해에 아름다운 동판화를 제작하였다. 그러나 1937년 독일 공군이 바스크 지방의 무방비한 소도시인 게르니카를 폭격하자 그는 즉시 붓을 들어 이에 항의하는 대작을 그렸다. 이것이 그해 파리에서 열린 만국 박람회의 에스파냐관(館)을 장식한 유명한 <게르니카>이다. 퀴비슴 이래에 오로지 예술의 범위 내에서만 행하여진 듯이 보인 규문(糾問)의 자세를 피카소는 <게르니카>로써 평화와 자유를 위협하는 침략자를 향하여 규탄(糾彈)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피카소는 남프랑스에 있으면서 주로 석판화(石版畵)와 도기(陶器)의 제작에 열중하였다. 어느 것이나 당시 새로이 손을 댄 분야였으나 이 분야에서도 그는 현대미술의 마르지 않는 샘이라 평가받은 그대로 발견하고 학습을 연구하고, 개척하고, 창조하는 왕성한 의욕을 불태워 커다란 성과를 올렸다. 또 1950년대부터 최근에 걸쳐서는 벨라스케스, 들라크루아, 크라나하, 마네, 다비드 등의 명작과 대결하여 이것을 자기의 양식화(樣式化)한 독특한 모작(模作)에서 새로운 진로를 추구하고 있다. 그에게서 이어받은 현대미술의 부(富)는 그에 의해서 크게 증가하여 갔다.

브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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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s Braque (1882∼1963)

조르즈 브라크는 1882년 파리 근교의 아르장튀유에서 태어났고, 8세에 집안이 르 아브르로 이사, 브라크도 그 곳에서 성장하였다. 부친은 도장업(塗裝業)을 하였는데 그도 소년시절부터 그 직업을 견습하면서 1897년 르 아브르의 미술학교 야간부에서 그림을 공부하였다. 이윽고 장식화가를 지망하여 그 수업을 위해서 1900년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는 아카데미 운베르에 다녔는데 여기에서 로랑생과 피카비아와 사귀었다.

그러나 그는 노르망디 출신인 프리에스와 가장 절친하여 이 두 사람은 1906년에 네덜란드로, 1907년에는 남프랑스의 라 시오타로 여행을 하였다. 그동안 브라크는 포비슴에 가담하여 색채가 선명한 작품을 그렸으며, 당시의 그는 프리에스와 나란히 마티스나 드랭의 영향이 농후하였다. 시오타에서 돌아온 뒤에 브라크는 전기(轉機)를 맞이하게 된다. 그는 포비슴의 그룹을 떠나 에스타크에서 지내면서 고독한 가운데에 세잔이 시사한 자연의 양식화(樣式化) 방향을 추구했다. 그 해에 처음 알게 된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이 그의 마음에 던진 감동의 파문도 그 곳에서 조용히 반추하고 있었을 것이다.

1908년 퀴비슴 명칭의 유래가 된 <에스타크 풍경>이 살롱 도톤에서 거부당하여 칸와이러의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이것으로 피카소와의 친교가 깊어지고 세잔풍(風) 퀴비슴에서 점차로 풍경을 제거한 분석적 퀴비슴으로 나갔다.

이 시기에 브라크와 피카소는 서로를 가려 볼 수 없을 만큼 그림이 비슷하였다. 1911년경부터 두 사람의 화면에는 현실 회복의 징조가 나타나 숫자와 알파벳이 구성 요소로 취급되고, 이듬해에는 이것이 파피에 콜레로 발전하여 총합적 퀴비슴에 옮겨 갔다. 화사한 피카소와 대조적인 성격의 탓도 있지만 브라크는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 마담 피카소란 별명으로 불려진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으나 머리에 부상을 입어 1917년에 제대한 후 회화의 길에 복귀하여 예의 총합적 퀴비슴을 완성하였다. 화면에 색채와 대상성을 회복하고 나체와 풍경의모티프도 받아들여서 피카소와 별도의 길을 걷는 독자적 양식에 도달하였다. 1920년 피카소가 고전주의로 전환하였을 때에 브라크는 최초로 조각에 손을 대어 형태애 관한 사고를 더욱 연마해 나갔다. 1930년대 재차 피카소와 가까워졌으나 브라크의 모뉴멘털한 장식성(裝飾性)의 추구는 벌써 피카소와 질적으로 다른 침정(沈靜)과 세련을 구하는 것이었다. 1939년에 시작한 <아틀리에>의 연작(連作)과 1944년에 시작한 <당구대(臺)>의 연작 및 1952년 루브르 미술관의 새를 모티프로 한 대천장화(大天障畵) 등은 브라크가 도달한 지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걸작이다. 브라크는 퀴비슴의 원칙을 생애를 걸고 이지와 질서를 존중하는 프랑스 회화의 전통에 결부시키려던 화가였다.

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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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an Gris (1887∼1927)

본명은 호세 빅토리아노 곤살레스이며 1887년 마드리드에서 출생했다. 그곳 미술공예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중도에서 학업을 버리고 동향(同鄕)의 선배인 피카소를 따라 1906년 파리에 나왔다. 처음에는 캐리커처를 그렸으나 1911년에 회화로 전환하여 퀴비슴 운동에 참가하였다. 1912년 앙데팡당에 첫 출품, 이후부터 퀴비슴의 궤도를 달리는 역작을 계속 발표하여 퀴비슴의 기수(旗手)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그의 색채는 그 이름(그리스=灰色)이 표시하는 바와 같이 결코 다채롭지 않았으나 형태를 대범하게 파악하는 기하학적 평면을 향하는 전개에는 비범한 재능을 보여주었고, 총합적 퀴비슴의 양식을 확립하기 위하여 다대한 공헌을 하였다. 퀴비슴이 2차원의 회화로서 장식성에 자각한 것은 그리스의 시사가 크다. 그는 섹션 도르의 그룹과도 교류하였는데 1927년 요독증(尿毒症)으로 요절하였다.

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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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es Fernand Leger (1881∼1955)

프랑스 화가. 페르낭 레제는 1881년 아르장탕에서 출생하였다. 16세부터 4년간을 어느 건축사무소에서 데생을 수업하였고 1900년에 파리로 나왔다. 1902년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고전파의 화가이며 조각가인 장 레옹 제롬의 가르침을 받았다. 1909년까지 초기의 제작은 주로 후기 인상파 및 포비슴의 영향을 볼 수 있지만 이 해에 브라크 및 퀴비슴과 접촉하게 되자 초기의 제작방법을 버리고 퀴비슴의 기하학적 체계에 적응하면서, 이에 역동감을 부여하는 다이내믹 퀴비슴의 방향을 개척해 나갔다. 이 추구는 제1차 세계대전의 종군으로 중단되었으나 전후 1925년까지의 사이에 레제의 양식으로 확립되었다. 크고 작은 톱니바퀴와 각종의 연동(連動) 장치가 동적으로 단속(斷續)하는 화면 공간에 메커니컬한 인간상이 배합되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 때에 그의 밝고 선명한 채색은 이 기계와 인간과의 공존(共存)을 대범하게 긍정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것은 기계문명에 대한 그의 적극적인 관심을 뒷받침하는 것이라 하겠다. 1925년 이후 그의 화면에는 추상적인 구성을 목표로 하는 형태가 점점 강화되어 간다. 르 코르뷔지에, 몬드리안과의 교우에서의 시사도 있어서 그의 건축·디자인·인쇄 등 현대문명이 제공하는 것과 회화와의 결합에 지대한 흥미를 가지고 이것을 추진하였다.

들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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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Delauney (1885∼1941)

프랑스 화가. 로베르 들로네는 1885년 파리 태생이며 그림은 독학으로 최초 쇠라 및 포비슴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신인상파의 색채 분할에 큰 관심을 가지고 이를 연구하였다고 한다. 1909년 피카소와 브라크의 퀴비슴에 기울어졌으나 그들이 추구하는 것에 동화(同化)되지 않고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그것은 퀴비슴의 구성에 포비슴의 강렬한 색채를 도입하려는 시도이며 색채를 잃어버린 분석적 퀴비슴에 대한 하나의 반증(反證)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1912년경 그의 양식으로서 어떤 총합에 도달한 것이며, 아폴리네르가 명명(命名)한 오르피슴이 그것이다.

들로네는 한편 독일적인 사고에 관심이 깊어 예술과 과학의 결합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이것이 다른 제예술(諸藝術)과 폭넓은 통합을 의도하는 '블라우에 라이터' 그룹과 교류하는 실마리가 되었다. 1912년 '블라우에 라이터' 전에는 출품자로 참가하였고 이 파의 마케, 마르크 및 클레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은 점을 볼 수 있다. 또 칸딘스키와의 접촉이 점차로 시각적 대상에서 멀어져서 리드미컬한 색채 구성으로 향하여 가려던 들로네에게 1912년 처음으로 비구상(非具象)의 작품을 그리도록 하였던 것이다.

1914년부터 1920년까지 그는 대부분의 기간을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에서 보냈으며 그 동안에 한때 다다이슴과 교섭도 있었다. 파리에 돌아온 후 나이가 더할수록 그의 작품은 더욱더 추상으로 기울어졌다. 퀴비슴에 색채를 도입한 점 및 색채의 리듬에 입각하여 퀴비슴에서 추상으로 향한 길을 열었다고 하는 점으로 그가 추상화에 끼친 선구적인 공적은 칸딘스키와 더불어 실로 크다 하겠다. 작품 <에펠탑>(1911)은 초기에 있어서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졌고 그의 아내 소니아도 오르피스트로 활약한 화가이다.

아폴리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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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

프랑스 시인, 평론가. 본명은 윌헬름 아폴리나리스 코스트로위츠키라 하여 1880년 폴란드인을 양친으로 로마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파리에 나와서 막스 자콥 등과 더불어 전위시인(前衛詩人)으로 활약하는 한편, 앙리 루소와 포비슴 회화를 통하여 미술에 접근하여 전위미술운동을 문필로써 추진하여 큰 공헌을 하였다. 특히 퀴비슴의 발전은 그의 주장과 평가의 도움이 컸고 피카소와 브라크도 그의 열성적인 격려와 지지를 받고 있다. '퀴비슴을 종래의 그림과 엄격하게 구별하는 것은 그것이 모방의 예술이 아니고 창조에까지 도달하고자 하는 예술이다'라고 재빨리 예견한 사람도 그였다. 또 들로네가 추구하는 퀴비슴의 한 분파를 시인하여 이것에 오르피슴이라는 명칭을 부여하였던 것이다.

1912년 이후 그는 미래파(未來派)의 추구에 공감하여 여기에 접근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이 그룹과 갈라지고 키리코의 환상적인 형이상회화(形而上繪畵)에로 관심을 바꾸었고 이는 뒤의 쉬르레알리슴의 길을 열어 주는 것이다. 1951년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파리의 상 제르맹 데프레 사원(寺院) 근처에 그의 필명을 딴 '아폴리네르 거리'가 생겼다. 시집에 <알코올>(1913), <칼리그람>(1918)이 있고 평론집에 <퀴비슴의 화가들>(1913) 등이 있다.

미래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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未來派 futurism

미래파란 1909년 시인 마리네티가 잡지 <르 피가로>에 발표한 '미래파 선언'을 실마리로 전개된 이탈리아의 전위운동 및 그 그룹을 말한다.

원래 이 운동은 미술이라는 한 장르에만 관계된 것이 아니고 문학·음악·건축·연극·영화 등 다방면에 걸친 예술혁신운동이었고 르네상스 이래 이 나라에 삽체(澁滯)하고 있던 무거운 전통의 멍에를 한꺼번에 타파하려는 운동이었다. 더욱 이러한 운동에 독일 및 오스트리아에 추종하는 당시의 미온적인 정치와 사회 상황을 개혁하려던 젊은 세대의 의욕이 합쳐져 상당히 과격한 성격을 지녔다. 계속해서 선언이 발표되어 실작(實作)보다도 논의가 선행되는 감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통속적으로 '태워 버리는 선언'이라 일컫는 마리네티의 선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우리들의 혐오와 모멸을 가지고 세상의 속물 근성에 현학적이고 아카데믹한 것이 아닌 주의에 일격을 가하자. ……권하건대 모든 미술관을 태워 버리자."

이 마리네티의 선언에 대하여 미술의 분야에서 호응한 화가는 밀라노에 있던 움베르토 보초니, 루이지 루솔로, 카를로 카라 들과 로마에 있던 자코모 발라 및 파리의 지노 세베리니 들이었다. 그리하여 1910년에는 '미래파 회화선언'이 발표되었다. 이 분야에서는 보초니가 중심이 되어 활약하였는데 그는 미래파 회화의 당면한 과제를 '우리들은 색채분석(色彩分析:쇠라, 시냐크의 분할주의)과 형태분석(形態分析:피카소나 브라크의 분할주의)을 결합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하였다. 즉 미래파는 새로운 회화의 입장으로 분석적 퀴비슴의 흐름을 따른 것이지만 그 정적인 화면 공간에 만족하지 않고 여기에 속력·동감·소란 등 현대문명이 노출해 내는 다이너미즘을 첨가하여 '관객을 사로잡고 흡수하여 보는 자를 화면의 중심에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보초니)고 하였다. 퀴비슴이 행한 실재의 해부도(解剖圖)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운동의 전개도를 그리려는 데에 착안점의 현저한 차이를 볼 수 있다. 화면은 심한 진폭을 나타내어 움직이는 공간을 현출(現出)시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질주하는 말에 스무 개의 다리가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 이리하여 '어떤 스포츠카도 사모트라케의 니케 이상으로 장려하다. 오늘날에 있어서 요구되는 것은 최고의 스피드에 지나지 않는다.'(마리네트) 라는 현대문명의 소산에 대한 긍정과 그 소산을 조형요소로서 만들려는 새로운 태도를 표명하고 있다. 조각의 분야에서도 미래파는 종래의 돌(石)이나 브론즈 등 단일한 소재로 표현하는 것에 강력히 반대하고 시멘트·유리·철사 및 전광(電光)에 의한 복합적인 조형의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소음을 음악에 받아들여 오늘날의 뮤직 콘크리트의 선구가 된 루솔로의 '음향예술의 선언'(1913)도 같은 관점에 서 있다고 하겠다.

미래파는 전통과 기술에 대한 혁명적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제정(帝政) 말기 러시아의 전위미술(前衛美術)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또 기계와 스피드에 대한 현대인의 감수성을 계발하는 데 전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현대에 대한 낙천적 인식으로 그 예술이념은 오래도록 명맥을 지속할 수가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현대문명이 최초의 모순과 참화(慘畵)에 직면하였을 때에 이 운동은 소멸하였다.

보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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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mberto 1882∼1916)

이탈리아의 화가, 조각가. 그는 1882년 이탈리아 칼라브리아의 레지오에서 출생하였고, 1900년경에 로마로 나와 발라에게 사사(師事), 이어서 밀라노에 가서 브레라 미술학교에서 공부했다. 그가 로마에서 사사하였던 자코모 발라(Giacomo Balla)는 1871년 출생으로 젊었을 때부터 아카데믹한 화풍(畵風)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러나 발라는 후에 프랑스로 가서 신인상파를 연구하고 색과 빛을 저 스스로가 추구하는 과제로 삼게 되면서 아카데믹한 명성을 돌보지 않고 미래파의 운동에 참가한 화가이다.

1909년 보초니는 미래파 운동의 주창자인 시인 마리네티와 사귀어 그 선언의 서명자의 한 사람이 되었고 그 후에 그의 활동은 회화·조각 및 이론의 각 분야에 눈부셔 미래파 운동을 추진하는 큰 힘이 되었다. 1910년의 '미래파 회화 선언', 1912년의 '미래파 조각 선언'은 그가 기초하였던 것이다. 원래 보초니는 화가로서보다 조각가로서의 자질이 많아서 운동의 형태를 공간적으로 어떻게 조형하여가는가에 대하여 하나의 새로운 기축(機軸)을 열었다. 소재에 대해서도 기성의 개념을 타파하는 자유롭고 현대적인 사고를 품어 행여나 회화와 조각의 장르를 구별하는 것을 철폐할는지 모를 새로운 조형이 그에게 기대되었으나 1916년 뜻밖의 낙마(落馬) 사고로 요절하여, 움직이는 대상을 즐겼던 그에게는 퍽 아이러니컬한 일이었다.

형이상화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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形而上畵派 Pittura Metafisica

이탈리아의 키리코가 주창하여 칼라, 모란디 들이 추진한 유파(流派)를 일컫는다. 주창자 조르조 드 키리코(Giorgio de Chirico)는 1888년에 그리스에서 태어난 이탈리아 사람인데 최초에는 기술자가 되기 위한 길을 걷다가 회화로 전향, 1906년부터 1909년까지 뮌헨에 머물면서 뵈클린과 클링거의 화풍(畵風)을 배웠다. 그후 이탈리아 각지로 여행하여 르네상스 미술을 연구하고 더욱 1911년에서 1915년까지는 파리에서 퀴비슴에 접(接)하였다. 형이상화파의 제창은 파리체재 이후의 일이다.

키리코의 사상적 근저에는 독일 낭만파와 니체, 쇼펜하우어 등 독일 철학에 깊이 기울어 있고, 이것이 그를 독특한 환상과신비에 넘친 화풍으로 유도해 갔다. 그는 미래파가 가진 다이너미즘을 부정하여 진공(眞空)을 생각나게 하는 정적한 화면 공간을 그리고, 더욱 퀴비슴이 버린 원근법(遠近法)을 이용하여 흉상(胸像)과 인체 모형과 기하학적 물체의 단편 등을 거기에 배치하였다. 그 화면은 키리코가 말하듯이 '사물의 형이상학적인 심리'를 묘출(描出)하려는 것이었다.

그의 정감의 영역을 뚫어버린 환상은 가끔 쉬르레알리슴의 선구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1924년 쉬르레알리슴의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키리코는 아카데믹한 작품으로 바꾸어 전위적인 활약 무대에서 물러나와 있었다.

아모리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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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mory Show

병기고(兵器庫) 전람회를 말한다. 1913년 2월 뉴욕의 제69연대의 병기고에서 유럽 현대미술을 소개하는 큰 규모의 전람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전람회를 개최장소로 한 연유로 아모리 쇼라고 부른다. 세잔·고흐에서 포비슴·표현주의·퀴비슴에 이르는 현대미술이 처음으로 미국에서 공개된 획기적인 전람회였다. 회장은 분노와 조소로 싸였다고 하는데 당시 유럽에 이식(利植)된 구미술(舊美術)에 안일하게 젖어 있던 미국 미술계에 준 충격은 대단히 컸다. 특히 퀴비슴이 전시된 화실은 '공포의 방'이라 불리어 마르셀 뒤샹의 작품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 등은 이것을 이해하려는 사람도 없어 스캔들의 일종이 되었다. 그러나 뉴욕에서 8만명, 시카고 및 보스턴의 순회 전람회에서 18만명의 관중이 모인 이 전람회의 성과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미국의 젊은 세대는 싸우는 무기를 여기에서 얻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