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대 유럽과 아시아/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오스만 제국의 쇠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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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의 쇠운〔槪說〕[편집]

17세기 말의 카를로비츠 조약에 의해서 표면화된 오스만 제국의 쇠운은 18세기가 되자 유럽 열강, 특히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압력에 의해서 한층 심해진다. 18세기 초에 즉위한 아흐메트 3세(재위 1703

1730)의 치세 전기에는 러시아 및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치렀다. 먼저 1710

1711년에는 북방(北方)전쟁에 관련되어서 표트르 대제(大帝)의 러시아와 싸웠고, 이어 오스트리아와 싸워서 1718년 파사로비츠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 의해서 오스만 투르크는 헝가리의 나머지와 소(小)왈라키아, 북세르비아를 오스트리아에 빼앗겼다. 후반엔 평화가 계속되고 프랑스의 궁정(宮廷)문화가 도입되어, 소위 ‘튤립 시대’라 불리는 화려한 태평시대를 맞았다. 그러나 1730년에 예니 체리의 반란이 일어나서 아흐메트 3세는 자리에서 쫓겨나고, 이후 술탄의 폐립(廢立)이 반복되었다.

1736

1739년, 폴란드 계승전쟁에 관련되어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투르크에 침입해 왔으나, 프랑스의 지지를 얻어 격퇴시켰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예카테리나 2세가 즉위하자 러시아의 남하(南下)정책은 한층 강화되기에 이르렀다. 1768

1774년의 러시아·투르크 전쟁은 투르크의 패배로 끝나고, 1774년 쿠츄크 카이나르지 조약이 성립되었다. 이 조약은 러시아의 투르크에 대한 내정간섭의 길을 열어주는 계기가 되어 투르크의 국제적 지위를 저하시켰다. 이어 러시아는 크림 한국(汗國)을 병합하였고, 1787

1791년의 전쟁에 의해서 도니에스트르강(江)까지 영토를 확장시켰다.

튤립시대[편집]

-時代

아흐메트 3세의 재상(宰相) 이브라힘 파샤(재위 1718

1730)는 대외 융화정책을 취하여 프랑스나 오스트리아의 궁정과 사절을 교환하여 서방 문물의 도입에 노력했다. 그 결과 호전적인 상무(尙武) 기풍은 쇠퇴하고 서구 취미의 우아한 문화가 보급되어, 당시 수입되어 크게 유행한 튤립에 비유하여 시대의 이름이 붙여졌다. 이 시대에 서구의 기술이나 학문도 왕성하게 이입(移入)되어, 신(新)지식계급의 성립을 보았다.

쿠츄크 카이나르지 조약[편집]

-條約

1774년 다뉴브강 하류 남쪽의 쿠츄크 카이나르지(Kyuchuk Kainardzh)에서 러시아·투르크간에 체결된 조약. 킨부른 요새, 기타 러시아에의 할양(割讓), 크림 한국의 흑해·에게해 통상의 자유, 투르크의 보상금 지불 등을 규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