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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음악/서양의 경음악가/탱 고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아르헨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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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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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o Firpo(1884-1969) 지휘자·피아니스트·작곡가. 피르포는 부에노스아이레스주 라스플로레스에서 태어났으며, 카나로가 사망한 뒤로는 탱고 음악계에서 가장 오랜 원로 가운데 하나로서 유명하다. 소년시절에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주, 피아노를 배웠으며, 1906년에는 트리오를 구성, 탱고계에 데뷔하였다. 티피카 악기에 피아노를 채용한 사람이 피르포로서 탱고의 연주에 변화를 가져온 공적은 매우 크다. 1910년대에는 오르케스타 티피카를 조직하여 활약한 적도 있다. 1936년에 유명한 '로베르토 피르포와 4중주단'을 조직, 그 후 새로운 4중주단을 결성하였으며, 1959년 75세를 계기로 탱고계에서 은퇴하기 위한 기념으로서 클라리넷을 곁들인 복고조의 '고전적 5중주단'을 조직하여 오데온 녹음한 이후 탱고계로부터 은퇴하였다.

필리베르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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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an De Dios Filiberto(1885-1964) 지휘자·작곡가·기타 주자. 데 디오스 필리베르토는 탱고의 발상지 보카에서 태어났다. 옛날의 탱고 음악인이 가난에 시달리며 고난의 길을 걸었듯이 필리베르토도 9세 때부터 어른들 틈에 섞여 일을 해야만 했다. 그 사이에 기타를 배우고 1915년에 처녀작 <가이마지엔>을 만든 뒤부터는 탱고의 작곡 면에서 그 이름을 떨쳤다. 탱고에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주고 또한 가사를 붙여 노래를 부르도록 한 것은 그가 창시한 것으로 커다란 공헌을 했다. 연주가로서의 활동은 1930년대에 영화에 출연하기 위하여 스스로 악단을 조직한 짧은 기간이었다. 작품으로는 <카미니토>, <반도네온의 탄식>, <미론가가 울 때>, <엘 파뉴에리토> 등 수많은 걸작이 알려져 있다.

가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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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los Gardel(1887-1935) 가수이면서 작곡가. 프랑스의 투르에서 태어나 어려서 모친과 함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주하였다. 1912년에는 호세 라사노와 2중창을 만들고 민요를 불러 호평을 받았다. 1917년에 부에노스아이레스 극장에서 상연된 음악극 가운데서 <나의 슬픈 밤>을 불러 일약 탱고 가수로서의 명성을 떨쳤다. 1925년에 라사노가 목을 다쳐, 이후 독립하여 솔리스타가 되었으며 선천적인 아름다운 목소리와 창법으로 온 세계에 그 명성을 떨쳐 탱고사상 최고의 명가수로서 '탱고의 왕'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탱고의 철새'라는 애칭처럼 아르헨티나에는 별로 있지 않고 유럽이나 미국 등의 영화 및 무대에서 활약, 그 인기가 더욱 높아져 전 세계에 탱고를 보급시켰다. 그러나 파라마운트 영화에 출연하고 돌아오는 길인 1935년 6월 24일, 컬럼비아의 메데린 공항에서 일어난 비행기 사고로 그 일생을 마쳤다. 작품으로는 <나의 슬픈 밤>을 비롯하여 <마노 아 마노> 등 수많은 탱고가 있다.

카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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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isco Canara(1888-1964) 바이올린 주자·작곡자·편곡자.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에서 태어나 3세 때 양친과 함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이주하였다.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하였으며 바이올린을 습득, 1906년에 탱고 음악가에 데뷔하였다. 1910년대부터 오르케스타 티피카 및 피린초 5중주단을 결성, 언제나 대중에게 영합한 평이하고 간명한 연주 스타일로 인기를 쌓았다. 뮤지컬 쇼나 영화를 제작, 다방면에 활약이 많았으며 특히 탱고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하여 '탱고의 왕'이니 '살아있는 탱고의 역사'니 하는 말을 들으며 탱고사상 최고의 공로자로서 지금도 여전히 대중의 지지와 인기를 획득하고 있다. 탱고 생활 60년 동안, 1925년의 파리 공연을 비롯하여 수십번의 해외공연 등으로 탱고의 참다운 멋과 뜻을 널리 세계에 알린 그 공적은 매우 크다. 1964년 12월 14일, 반세기가 넘는 탱고의 생애를 마치기까지 탱고계의 왕좌에 군림하였다. 작품으로는 <라 바라 페르테>를 비롯하여 <센티미엔토 가우 초>, <아디오스 팜파 미아> 등의 명곡이 약 700곡 있다.

카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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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an Canaro(생몰연도 불명) 지휘자·반도네온 주자로 활동하였다. 탱고의 거장이라는 프란시스코 카나로의 동생으로서 반도네온 주자이다. 형 프란시스코의 악단에서 활약, 1925년에는 형과 함께 파리에 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 독립하여 자기의 악단을 조직하거나 막내동생과 함께 카나로 형제 6중주단 등을 구성한 적도 있다. 널리 세계적으로 탱고의 본고장 아르헨티나의 오르케스타 티피카를 소개, 보급시킨 공로는 크다고 하겠다.

프레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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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valdo Fresed(1892- ? ) 지휘자·반도네온 주자·작곡가. 프레세드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심부 라바제가(街)에 태어나 로도리게스 페니야 초등학교에 입학, 이어 파가노 상업학교에 들어갔으나 소년시절부터 이미 반도네온 주자로서 알려져 '파테르나르의 도련님'이란 애칭으로 불렸다. 1913년에 프로로서 탱고계에 데뷔한 그는 1922년에 독립, 자기 악단을 조직하여 활약했다. 1920년의 후반에는 유럽과 미국으로 가서 활약,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귀국 후인 1930년대에는 세련된 앙상블을 주체로 소프트하고 무디한 연주 스타일을 확립하여 탱고 연주에 새로운 국면을 개척하였다. 그는 반도네온의 바리에이션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며 작품에는 <엘 온세>, <엘 에스피안테>, <비다 미이아> 등의 걸작이 많다.

로무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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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isco Lomuto(1893-1950) 지휘자·피아노 주자·작곡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양친이 모두 음악가로서 피아노를 모친에게서 배웠다. 1908년에 탱고계에 들어가 1923년에 자기 악단을 결성하였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에 걸쳐 프란시스코 카나로와 함께 당시의 인기를 다투었으며 그 때 로서는 모던한 감각의 연주로 명연(名演)을 많이 남겼다. 작곡 면에서도 <시 소이 아시>, <눈카 마스>, <추라스카> 등은 잘 알려진 작품을 남겼다.

델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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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rique Delfino(1895-1967) 지휘자·피아노 주자·작곡가. 델피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이탈리아에서 보냈으며 음악교육도 이탈리아식으로 받았다. 귀국 후 15세부터 피아니스트로서 데뷔하였다. 그러나 그는 피아니스트라기보다 작곡가로서 유명하다. 1912년에 처녀작 <엘 아파치에 오리엔탈>을 발표한 이후로 수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 가운데에서도 <레 파 시>, <미론기타>, <라코파 데 올비도> 등이 유명하다.

도나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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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ardo Donato(1897-1963) 지휘자·바이올린 주자·작곡가. 도나토는 부에노스아이레스시의 피에도라스가(街)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양친과 함께 우루과이로 이주하였다. 프란츠 리스트 음악원에서 바이올린을 배운 뒤 14세 때 프로가 되었다. 귀국 후에는 로베르토 세리지오와 사귀어 '도나토 세리지오'라는 악단을 조직, 일약 유명해졌다. 훗날 세리지오와 헤어져 자기 악단을 조직, 1930년대에는 산뜻하고 서민적인 연주로 인기를 굳혔다. 1950년부터는 연주 스타일을 바꿔 더욱 유명해졌으며 <희미한 빛>, <엘 우라칸>, <프리안> 등의 걸작이 많이 알려져 있다.

데 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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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io De Caro(1899- ? ) 지휘자·바이올린 주자. 데 카로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음악교사이며 형제가 모두 탱고계에서 활약하였다. 1916년에 바이올린 주자로서 에드아르도 아로라스의 악단에 참가하였다. 1922년에 환 카를로스 코비안의 악단을 계승하여 데 카로가 지휘자로 됐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에 걸쳐 그는 황금시대를 이룩하고 자신의 개성적인 바이올린을 중심으로 당시로서는 모던한 연주 스타일로 이름을 떨쳐 현대 탱고의 선구를 이룩하였다. 작품에는 독특한 새 감각의 곡이 많으며, 그 가운데서도 <티에라 케리다>, <미라 푼타>, <보에도>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다리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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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an Darienzo(1900-1976) 지휘자·바이올린 주자·작곡가. 다리엔소는 1900년 12월 14일에 태어나 '리듬의 왕'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인기연예인이다. 8세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한 뒤 마스카니에게 사사, 13세 때는 이미 바이올린 주자로서 데뷔할 정도였다. 그 후 재즈 밴드 등에서 일한 적도 있으나 1925년에 다시 탱고계로 전향하였다. 1928년에는 자기 악단을 결성, 독특한 리듬을 강조한 산뜻한 연주 스타일로 인기를 높였다. '피아노의 마술사'라는 애칭을 듣는 로돌포 비아히를 피아노 주자로 맞은 뒤부터 이 악단의 명성은 급상승하여 제1급의 악단이 되었다. 이후 피아노에 플르비오 사라만카를 맞아 1956년에 악단의 대개혁을 꾀하였고 다시 피아노에 판 포리토를 맞아들이기도 하였다. 고전적인 곡을 레퍼토리로 삼았으나 만년에는 유행곡도 많이 연주하였으며 이것 역시 세대의 변화와 함께 탱고의 변천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다. 작품으로는 <엘 비노 토리스 테>,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얻은 <파시엔시아> 등이 있다.

디스세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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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rique Santos Disc polo(1901-1951) 지휘자·작곡가·시인 디스세폴로는 부에노스아이레스시의 중심부인 파소가(街)에서 태어났다. 사범학교를 중퇴하여 극작가가 되었다. 1919년에 배우로서 데뷔, 작곡을 시작한 것은 1926년경이며 독특한 곡상(曲想)의 탱고를 많이 발표하여 탱고계의 귀재라는 말을 듣기도 하였다. 또한 그의 작시는 당시의 사회를 풍자, 비판한 독특한 시가 많다. 1930년대에는 악단을 지휘했으나 주로 타니아의 노래에 반주를 담당했다. 작품으로는 <지라 지라>, <고백>, <오늘밤에 나는 취하도다> 등 걸작이 많다.

디 사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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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los Di Sarli(1903-1960) 지휘자·작곡가·피아노 주자. 디 사를리는 1903년에 부에노스아이레스주(州)의 피서지 바이아블랑카시(市)에서 태어나 '탱고의 신사'라는 애칭을 들었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습득하였으며, 1923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주하였다. 그 후 1925년에 자기의 6중주단을 조직하여 활약하였으며, 1936년에는 악단을 재편성하여 가수에 로베르토 르피노를 맞아 인기를 높였다. 그 자신의 호쾌하면서도 센티멘털한 피아노를 중심으로 날카로운 스타카토를 아름다운 레가토의 대비로 연주하는 고전곡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훌륭하며, 1950년대에는 명실공히 제1급의 악단이 되었다. 작품으로는 <미론게로 비에호>, <바이아 블랑카> 등이 있으며, 특히 죽기 직전에 작곡한 <바이아 블랑카>가 유명하다.

푸글리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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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valdo Pedro Pugliese(1905- ? ) 피아노 주자·지휘자·작곡가. 푸글리에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시(市)의 크레스포 지구(地區)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피아노를 익혀 탱고계에 나섰다. 로베르토 피르포, 페드로 마피아의 악단을 거쳐 1929년에 엘비노 바르다로와 함께 오르케스타 티피카를 결성, 탱고 다방인 '헤르미나'에 데뷔하였으나 그 후 악단을 해산하였다. 1931년에 다시 로베르토 피르포, 미겔 카로, 페드로 라우렌스의 악단에 참가, 활약하였으며 1938년에 독립, 자기 악단을 결성하였다. 1940년대부터는 차차 연주력이 충실해졌으며 완벽한 앙상블에 의한 날카로운 리듬과 뛰어난 표현력은 당시에서는 유일한 것으로 손꼽혔다. 작품으로는 <레크에르도>, <라 준바바>, <코라소네안도> 등이 있다.

비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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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dorfo Biagi(생몰연도 불명) 지휘자·피아노 주자·작곡가. 비아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산테르모 지구에서 태어나 15세 때 프로 피아니스트로서 데뷔하였다. 후안 마그리오, 후안 키도 등의 악단을 거쳐 1931년에 자기 악단을 조직, 활약하였다. 1934년에는 악단을 해산, 후안 다리엔소 악단에 참가해 다리엔소 스타일의 확립에 힘을 다했다. 1938년에는 다리엔소와 결별하여 다시 악단을 조직, 그의 독특하고 예리한 스타카토를 구사하여 '매혹의 피아노'로 불리는 아름다운 터치의 피아노로 고전곡을 연주, 인기를 얻었다. 작품에는 경쾌한 <캄포 아펠라>, <골고타>, <인디페렌시아> 등이 유명하다.

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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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guel Calo(생몰연도 불명) 편곡자·반도네온 주자·작곡가·지휘자. 칼로는 부에노스아이레스 태생으로 1924년에 탱고계에 반도네온 주자로서 데뷔하였다. 1926년 프레세도 악단에 들어갔으며 1928년에 독립하여 자기 악단을 결성, 유럽 및 북미 등지로 순회공연을 댜녔다. 1940년대의 전반에는 마데르나, 폰티엘, 프란치니, 도밍고, 페데리코, 프그리에세, 스탄포니 등 현재 탱고계의 제1선에서 활약하는 쟁쟁한 멤버를 확보하여 새 감각의 연주로 화제가 되어 각광을 받았다. 그는 원숙하고 새로운 스타일을 개척하여 아르헨티나 탱고의 중심인물이 되었으며 스테이지, 라디오, 레코드 등에서 활약을 계속하였. 뿐만 아니라 작곡 면에서 <그대 없이> 등 신곡을 많이 만들었다.

사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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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rindo Sassone(1912- ? ) 지휘자·바이올린 주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 8세 때부터 바이올린을 익히고 국립음악원에서 편곡학을 전공하였다. 바이올린 주자로서 18세 때 탱고계에 데뷔하였다. 1934년에는 자기 악단을 조직, 탱고 다방인 '엘내셔널'과 라디오 '리바다비아'에 출연하여 명성을 날렸다. 1959년에 그란 오르케스타 티피카를 결성, 프레세도식의 다이내믹한 스타카토와 스트링 섹션의 아름다운 하모니가 특히 클로즈업 되어 일반에게 친근감을 주었을 뿐 아니라 일류악단이 되었다.

데 안젤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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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fredo De Angelis(1912- ? ) 지휘자·피아노 주자·작곡가. 부에노스아이레스 근방인 아도르게시(市)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1930년에 로스 멘도시노스 6중주단 등에서 반도네온 주자로서 활약한 뒤 1940년에 독립, 자기 악단을 조직하였다. 1941년에 코리엔테스가(街)의 유명한 탱고 다방 '마르소토'에 출연하여 인기를 높였다. 그의 연주는 매우 명쾌한 바이라브레로 대중을 장악하였으며 레코드의 수도 많다. 작품에는 <프레고네라>가 유명하다.

바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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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ctor Varela(1914- ? ) 지휘자·반도네온 주자.아베자네이다시(市)에서 태어나 1930년경부터 반도네온 주자로서 활약하였다. 1940년에 환 다리엔소 악단의 제1반도네온 주자로서 참가하여 그 재능을 인정받았다. 1950년 6월에 독립하여 자기 악단을 조직, 산뜻하고 리드미컬한 연주로 호평을 받아 1957년 이후는 인기가 상승, 아르헨티나 탱고의 최고 악단이 되었다. <새벽> 등이 이름난 히트곡이다.

트로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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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ibal Troilo(1914-1975) 지휘자·반도네온 주자·작곡가. 1914년 태생으로 탱고계 최고의 반도네온 주자로서 알려졌으며 '피추코'의 애칭으로 불렸다. 1928년에 반도네온 주자로 탱고계에 데뷔하였다. 후안 마그리오나 훌리오 데 카로 등의 악단을 거쳐 1937년에 독립, 자기 악단을 조직하였다. 1940년대에는 피오렌티노, 에드문드 리베로, 알베르토 마리노 등의 일류가수를 맞아들여 명성을 떨쳤다. 트로일로 자신의 독특한 반도네온 솔로를 중심으로 풍부한 하모니에 새 감각을 곁들인 연주는 당시 탱고의 대표적인 악단으로서 인기를 굳혔으며 크게 활약하였다. 작품에는 <우나 칸시온>, <체 반도네온>, <라 트럼펠라>, <레스폰소> 등의 히트곡이 많이 있다.

페데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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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mingo Serafin Federico(1916- ? ) 반도네온 주자·지휘자·작곡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바이올린을 배우고 후에 반도네온으로 전향하였다. 1930년에 탱고계로 데뷔, 이윽고 거장 미겔 칼로의 악단에 참가하여 실력을 닦았다. 1943년에는 독립하여 자기 악단을 조직, 1957년에는 악단을 해산하였다. 작품으로는 <사르도스>, <알 콤파스 델 코라손> 등이 알려져 있다.

사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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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racio Sarlgan(1916- ? ) 지휘자·피아노 주자·작곡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피아노와 오르간을 배웠다. 1937년에 피아니스트로서 피르포의 악단에 참가하였다. 1944년에 자기 악단을 조직, 활약하기 시작하였다. 작품으로는 <아구스틴 바르디>, <그리지트>, <아 페고 렌토> 등의 뛰어난 작품이 있다.

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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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 Basso(1916- ? ) 지휘자·피아노 주자·작곡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페르가미노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으며 14세 때 4중주단을 조직, 탱고를 연주하여 어른들을 놀라게 하였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1934년에 탱고계에 데뷔하였다. 1944년에 트로일로의 악단에 들어가 두각을 나타냈으며 1947년에 독립하여 자기 악단을 결성하였다. 근대적인 연주가로서 인기가 높았다. 작품에는 <브라소 데 오로>, 자기 아이의 머릿글자를 딴 <페카치> 등이 있다.

프란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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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rique Mario Francini(1916- ? ) 지휘자·바이올린 주자. 프란치니는 1916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교외인 산페르난도시에서 태어나 바이올린 주자로서는 당대 일류라는 칭송을 들었다.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웠으며 1940년에 동료 아르만도 폰티에르와 함께 거장 미겔 칼로의 악단에 참가하여 기술을 연마하고, 1945년에 독립, 프란치니 폰티엘이라는 이름의 악단을 공동으로 결성, 화려한 연주 스타일로 인기가 높았다. 1955년에는 폰티에르와 결별, 자기 악단을 결성하였으나 오래 가지 않아 해산하였다. 그도 직접 솔리스트로서 다방면에 걸쳐 활약하였다. 작품으로는 <테마 오토냐르>, <라 비 시에가르> 등이 있다.

폰티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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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mando Pontier(1917- ? ) 지휘자·반도네온 주자·작곡가. 부에노스아이레스주 사라테시에서 태어났다. 후안 에테루토에게 사사하여 음악을 배웠다. 1940년에 동료 프란치니와 함께 반도네온 주자로서 미겔 칼로의 악단에 참가하였다. 당시 뛰어난 멤버를 확보하고 있던 칼로의 악단에서 실력을 연마한 뒤 1945년에 프란치니 폰티에르 악단을 결성하였다. 1940년대 후반에는 신선하고 화려한 연주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1955년에 프란치니와 결별하여 자기 악단을 조직, 스윙감이 넘치는 명쾌한 연주로 인기를 굳혔다.작품으로는 <나의 벗>, <아 미스 아모레스>와 크게 히트한 <그대 없이는> 등이 있다.

라치아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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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ato Racciatti(1920- ) 지휘자·작곡가·반도네온 주자. 1920년 10월 18일, 이탈리아에서 태어나서 어릴 때에 우루과이로 이주하였다. 1938년에 반도네온 주자로서 데뷔하여 1946년에 자기 악단을 조직하였다.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의 라디오 프로에 출연하여 명성을 떨친 뒤 몬테비데오를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1959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주, 리듬이 뚜렷하고 상쾌한 연주로 초고의 인기를 획득하였다.또한 작품 면에서도 <아스타 시엔프레 아모르>를 작곡하여 크게 히트, 일약 유명해졌다.

피아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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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tor Piazzolla(1921- ) 지휘자·작곡가·편곡자·반도네온 주자. 피아솔라는 피서지 말델프라타에서 태어나 전위파 탱고의 추진자로서 유명하다. 어릴 때에 뉴욕으로 이주하여 그 곳에서 반도네온 및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했다. 귀국 후는 탱고에 몰두, 연주 및 작곡활동을 시작하여 1940년에 아니바르 트로일로의 악단에 참가, 1946년에 독립하였으며 자기 악단을 조직하였다. 1955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8중주단'을 결성, 초현대적인 연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여 화제가 되었다. 그 후에도 5중주단이나 8중주단을 결성, 전위적인 탱고를 연주하여 각광을 받았다. 그리고 이 기간, 즉 1954년에 파리를 비롯하여 미국에서도 가서 활약하였다. 작곡 면에서도 모던 탱고의 대표작을 많이 발표하고 있으며, 특히 <파라 루시르세>, <프레파렌세>, <로 케 벤드라> 등의 유명곡이 많다.

살라만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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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lvio Salamanca(1921- ) 지휘자·피아노 주자. 살라만카는 산타페주(州)의 모리나시(市)에서 태어나 소년시절을 코르도바시(市)에서 보냈으며, 피아니스트로서 코르도바에서 활약하기도 하였다. 1940년 후안 다리엔소로부터 피아니스트 및 편곡자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주, 다리엔소 악단의 스타 플레이어로서의 이름을 떨쳤다. 1957년에 독립하여 자기 악단을 조직, 스트링 섹션을 담당하고 거기에 그의 독특한 스타카토를 곁들여 신선한 플레이로 탱고계의 화제가 되었다. 작품에는 <비엔토 스우르> 등이 있다.

모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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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ano Mores(1922- ) 지휘자·피아노 주자·작곡가. 부에노스아이레스주 남부 바이아블랑카시(市)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1934년에 피아니스트로서 탱고계에 데뷔하였으며 1939년에는 프란시스코 카나로 악단에 입단하였다. 피아니스트 겸 작곡 및 편곡에 솜씨를 발휘하는 카나로의 한 팔로서 활약하였다. 1945년에 카나로와 합작한 <아디오스 팜파 미아>는 공전의 대히트곡이다. 약 10년을 카나로 아래에서 보낸 뒤 독립하여 반도네온을 사용하지 않는 심포닉한 연주 등으로 야심적인 활약을 계속하였다. 후에는 6중주단을 결성하거나 영화·스테이지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였다. 작곡가로서도 당대 일류로서 <아디오스 팜파 미아>를 비롯하여 <탄게라>, <타키토 미리타르>, 히트인 <프렌테 알 마르>, <포르케 라 키세 탄토> 등 유명한 작품이 많다. 그의 작품은 모두가 친근감을 갖기 쉬운 멜로디를 지닌 대중적인 것이라 하겠다.

스탐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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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irio Stampone(1926- ) 지휘자·피아노 주자로 활동. 부에노스아이레스 산크리스토발 지구에서 태어나 10세 때부터 피아노를 공부하였다. 후에 페드로 루비오네에게 사사하여 피아노와 화성학을 연구하였다. 1944년에 탱고계에 데뷔, 페드로 아피아나 아스토르 피아솔라의 악단에서 활약하였다. 1950년에는 음악연구를 위하여 이탈리아에 갔으며, 연구를 하는 한편 비안코의 악단에 참가하여 활약하였다. 1952년에 귀국한 그는 레오폴드 페데리코와 협력하여 조직, 그리고 1955년에는 자기 악단을 결성하였다. 현대 감각에 넘치는 그의 연주는 높이 평가되었다. 그의 작품으로는 1956년의 처녀작 <아피체스>가 유명하다.

페데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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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poldo Federico(1927- ) 지휘자·반도네온 주자·작곡가. 17세에 탱고계에 데뷔하였으며 많은 악단을 거쳐 1952년에 스탐포네와 악단을 조직하였다. 1955년에는 피아솔라의 '8중주단'에 참가하였으며 1959년에 자기 악단을 결성하였다. 1960년에 솔리스트가 된 명가수 프리오 소사의 반주악단에서 지휘를 맡았으며 이 때부터 반도네온 주자로서의 재능이 인정되어 많은 악단에서 객연(客演)을 맡아 보기도 하였다. 그의 현대적인 감각의 연주는 높이 평가되었다.

도리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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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rique Rodoriguez(생몰연도 불명) 지휘자·피아노 주자·작곡가. 1937년에 자기 악단을 결성하여 데뷔, 처음에는 자신이 직접 바이올린을 연주하였으나 나중에는 지휘를 맡았다. 경쾌하고 산뜻한 연주로 친근감을 주며 매우 화려한 연주 스타일은 정평이 있다. 레퍼토리도 탱고에 한정되지 않고 파소 도블레나 폭스 트로트 등도 다루는 독특한 악단이다.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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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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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lando(1908- ? ) 지휘자·아코디언 주자·작곡가로 활동.말란도의 본명은 알리 마슬란도이며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태어나 소년시절부터 아코디언의 명수로서 알려져 왔다. 아르헨티나의 탱고 악단인 에드아르도 비안코가 유럽을 순회공연하였을 때 박력있는 아르헨티나 탱고에 매혹되어 음악가로서 성공하기를 다짐하였다. 1932년에 잠핑 자릭스의 악단에 참가, 아코디언 주자 겸 편곡을 담당하였다. 1936년에 독립하여 자기의 오르케스타를 조직하였다. 1937년, 콘티넨털 탱고의 스탠더드 넘버 <오레가파>를 작곡하여 일약 명성을 떨쳤고 이 방면의 제1인자가 되었다. 비안코와 친교가 있었기 때문인지 말란도의 연주에는 아르헨티나풍의 리듬이 채택되어 있다. 1975년에 은퇴하였다.

하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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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fed Hause(1921- ) 지휘자·바이올린 주자.하우제는 1921년에 독일의 베스트팔렌에서 태어나 10세 때 바이마르 음악원에 입학하여 정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음악원에 재학하는 동안 경음악을 주체로 한 댄스 밴드에 가입하였다. 1938년, 오토 도브린토 악단을 비롯하여 그 밖의 유명 악단에 참가한 바 있다. 1945년 종전과 동시에 함부르크 오케스트라에 가입, 기술을 연마하고 1948년에는 자기 악단을 결성하였다. <비올레타에게 바친 목숨>이 하우제의 대표적 히트곡으로서 전 세계에 그 이름이 알려져 현대 콘티넨털 탱고계에서 으뜸가는 인기를 얻었다.

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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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rner M ller(생몰연도 불명) 지휘자·피아노 주자. 뮐러는 하노버의 음악원을 졸업하고 1946년에 쿨트 바이만 악단의 트롬본 주자로서 입단, 1948년에 직접 악단을 조직하였다. 초기의 악단 이름을 리카르도 산토스라 불러 독일 탱고계의 스타가 되었다. 후에 워너브러더스 영화음악을 담당, , 등의 영화음악을 다룸으로써 본명 베르너 뮐러의 이름이 전 세계에 알려져 콘티넨털 탱고의 제1인자로 군림(君臨)하였다.

페센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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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 Pecentti(생몰연도 불명) 지휘자·반도네온 주자. 페센티는 코르시카섬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자랐다. 파리에서 박력있는 아르헨티나 탱고를 듣고 탱고에 사로잡혀 반도네온을 습득, 스스로 악단을 조직하여 파리에서 활약하였다. 페센티의 연주는 자기가 직접 반도네온을 사용하며 아르헨티나 스타일을 채용하였다.

마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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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er Marek(생몰연도 불명) 지휘자·바이올린 주자. 마레크는 독일에서 태어나 1920년대 말부터 독일 탱고계에서 활약, <장미의 탱고>를 연주하여 일약 유명해졌다. 일찍이 콘티넨털 탱고계의 톱 아티스트로서 군림한 바도 있다.

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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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rnabas Von Geczy(생몰연도 불명) 폰 게치는 독일 태생이라고도 하고 헝가리 태생이라고도 한다. 부다페스트 음악원에서 바이올린을 배웠으며, 후에 오페라 악단의 지휘를 맡기도 하였다. 1930년에 독일의 경음악을 다루어 뛰어난 음빛깔의 바이올린 주자로서 인기를 획득, 1937년의 연주 <푸른 하늘>로 전 세계에 이름을 떨쳐, 게치의 콘티넨탈 탱고냐, 탱고의 게치냐고 할 정도였으나 1942년경이 인기의 절정이었으며, 전후(戰後)에는 소식이 끊긴 채 그의 생사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