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음악/서양의 경음악가/파퓰러 악단
화이트먼
[편집]Paul Whiteman(1890-1967) 1920년대에 활약하여 가장 다채로운 경력을 지닌 밴드 리더였다. 1920년 초 그의 바이올린도 곁들인 달콤한 댄스 밴드는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으며, 이후 그의 스타일을 모방한 많은 악단이 탄생하였다. 그는 현(絃)을 더한 대편성의 심포닉 재즈를 목표로 하여 1924년에 <랩소디 인 블루>를 연주 발표하여, 작곡을 맡은 거슈윈과 함께 당시의 악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20년 후기에는 충실한 악단으로 빅스 바이더벡, 도시 형제 등 다수의 우수한 재즈 탤런트를 육성하였다. 그 후 1950년대에 악단을 해산하여 줄곧 방송의 음악 디렉터로 활약하였다. 출연 영화에는 그의 황금시대의 애칭을 딴 <킹 오브 재즈>(1930년 작품) 등이 있다.
피들러
[편집]Arthur Fiedler(1894-1979) 보스턴 태생. 부친은 보스턴 교향악단의 바이올린 연주자였으며, 그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베를린에서 음악을 배워 1914년에 보스턴 교향악단의 비올라 연주자가 되었다. 1930년에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의 창립과 함께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이 악단은 보스턴 교향악단의 선발로 조직되어 팝스 콘서트에서 세미 클래식에서 파퓰러까지 왕성한 심포닉 연주를 하였다.
스톨로프
[편집]Morris Stoloff(1898- ? ) 필라델피아 태생. 16세 때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악계에 나와 로스앤젤레스 교향악단에 들어갔으며, 1930년대부터는 영화음악에도 참여, 스튜디오 오케스트라의 콘서트마스터를 지냈다. 그 후 영화의 음악감독으로서 많은 대작(大作) 영화를 담당하였으며, 대표작으로는 <졸슨 스토리>, <피크닉>, <패니> 등이 있다.
영
[편집]Victor Young(1900-1956) 시카고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은 순회 오페라 멤버의 한 사람이었다. 어릴 때에 부친과 함께 유럽으로 가서, 바르샤바 음악원에서 바이올린을 배운 후 그 곳에서 활약하였다. 1920년에 귀국한 후로는 여러 댄스 밴드에서 일을 하였으며, 극장 오케스트라의 지휘·편곡을 하는 한편, 작곡에도 힘을 기울여 1928년에 작곡한 <스위트 스우>가 크게 히트하였다. 1932년에 레코드회사의 디렉터가 되고, 1935년 빙 크로스비의 초빙으로 영화의 음악담당으로서 할리우드로 들어갔다. 이후 그의 영화 주제가는 계속 호평을 받아 무드 음악의 제1인자가 되었다. 1956년에는 아카데미 음악상을 받았으나 <80일간의 세계일주>를 마지막으로 캘리포니아에서 사망하였다.
암스트롱
[편집]Louis Armstrong(1900-1971) 애칭 '사치모'로 알려져 있는 그는 약 반세기에 걸쳐 항상 재즈 정신이 충만한 연주활동으로 재즈의 역사를 점철해 온 거인이라 하겠다. 뉴올리언스에서 태어났으며, 13세경부터 트럼펫(처음에는 코넷)을 배워, 1922년에는 시카코에서 킹올리버 악단에 참가, 이후 많은 악단에서 연주활동을 해왔다. 1925년에는 <핫 파이브 세븐>의 취입을 하고, 자기 악단도 조직하였다. 1932년에는 다시 유럽으로 가서 영국 국왕의 어전연주를 한 바도 있다. 1940년대에는 소(小)편성의 올스타즈를 만들었으며, 대전 후에도 세계 각지를 순연, 우리 나라에 온 적도 있다. 그는 트럼펫 솔로의 놀라운 표현에 곁들여 소박하고 개성적인 노래도 부르는 독특한 연기력과 기교로 널리 알려져 있다. 레퍼토리도 재즈에서 파퓰러에 이르기까지 폭이 넓으며, 음악영화에도 토키 초기부터 수없이 출연하였다.
히스
[편집]Ted Heath(1900-1969) 런던 태생. 부친은 악단의 리더로, 14세 때부터 트롬본을 배웠다. 1925년에 재크힐튼, 1937년부터는 암브로즈 악단에 참가하였다. 1944년에는 스스로 악단을 조직하여 방송하였다. 1945년부터는 런던 파라디엄의 정기 콘서트에 출연하여 인기를 넓혔으며, 영국 일류의 스윙 악단이 되었다. 1956년에는 미국으로도 연주여행을 떠나 성공을 거두었다. 연주에는 유능한 솔리스트를 많이 기용하여 근대적인 스윙 밴드로 정평을 받았다.
실베스터
[편집]Victor Silvester(1901- ? ) 런던 태생. 영국의 사교댄스 챔피언으로서 활약하고, 1930년대부터 그의 악단을 결성하였다. 이후 영국의 전형적인 댄스 밴드로서 팬의 인기를 모았다. 항상 스트릭트 템포의 표준연주를 실행하여, 방송과 스테이지에서 활약을 계속하고, 유럽에서 미국까지 순회공연도 하였다. 최근엔 현(絃)도 첨가함으로써 편성을 확대하고, 신경향의 편곡 방식도 받아들였다.
킹
[편집]Wayne King(1901- ? ) 미국 일리노이주 태생. 발파라이소 대학 시절에 클라리넷을 배우고, 졸업 후에는 시카고의 극장 오케스트라에서 알토 색소폰 주자가 되었다가 그 후 지휘도 맡게 되었다. 1925년, 자기의 악단을 결성하고 아라곤 볼룸에도 출연하였다. 이후 왈츠의 연주에서 '왈츠 킹'으로서 이름을 날렸다. 2차대전 중에는 종군하여 유럽 파견 장병들을 위문하였으며, 2차대전 후에도 대표적인 왈츠악단으로서 활약하였다.
코스텔라네츠
[편집]Andr Kostelanetz(1901-1980)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태생. 음악원에서부터 그 곳 가극장의 지휘자가 되었다. 1922년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931년 라디오의 음악프로의 지휘를 담당하여 이름을 날렸으며, 1938년에 소프라노 가수 릴리 폰즈와 결혼하였다. 또 자기의 관현악단을 만들어 탁월한 편곡으로 팝스를 연주하여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롬바도
[편집]Guy Lombardo(1902- ? ) 캐나다 태생. 아버지는 이탈리아 이민자였다. 음악을 몹시 좋아하는 집에서 자랐는데, 형제들로 구성된 패밀리 밴드를 바탕으로 19세 때 '로열 캐나디언즈'를 만들었다. 이후 방송과 클럽에서 이름을 날리고, 1927년에 뉴욕으로 진출, 스위트한 댄스 밴드로서 확고부동한 인기를 계속 유지하였으며, 여러 해에 걸쳐서 특징있는 유연(柔軟)한 연주형태를 유지하였다.
에들하겐
[편집]Kurt Edelhagen(1902- ? ) 베스트팔렌 태생. 전후에 악단을 결성하여 1950년대부터 방송국을 무대로 활약, 독일에서 일류의 스윙 밴드가 되었다. 또한 유럽 각지를 순회공연,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을 다녔으며, 그 연주는 모던한 솔리스트도 곁들여, 항상 진보적인 스윙으로 인기가 높다. 가수 카테리나 발렌테를 발견하여 가수로 육성, 후에 그녀의 남편이 됨으로써 유명해졌다.
웰크
[편집]Lawrence Welk(1903- ) 북다코타주 스트라스버그 태생. 젊은 시절부터 폴카 밴드의 부친에게 아코디언을 배워 로컬 밴드로서 연주를 했으며, 1925년에는 악단을 결성하여 지방 방송국에도 출연하였다. 1928년 댄스 밴드에 폴카 계통의 명랑함을 곁들인 독자적인 연주스타일 '샴페인 뮤직'을 만들어 인기를 확립시켰다. 방송 및 레코드 등에서 다채로운 활약을 하였다.
도시(지미)
[편집]Jimmy Dorsey(1904-1957) 북다코타주 스트라스버그 태생. 동생 토미와 함께 클라리넷, 알토에 뛰어난 기술을 지녔으며, 스윙 시대에 활약한 밴드 리더이다. 어릴 적부터 음악교사인 부친에게서 악기를 배워 17세에 프로가 되었다. 1920년대에 화이트먼 악단 등 많은 악단을 거쳐 1933년에는 토미와 함께 도시 브러더스를 결성하였으나, 1935년에는 형제가 결별하여 각각 따로 악단을 만들었다. 1940년 초기 코머셜한 <아마폴라>, <그린 아이즈>가 히트하였으며, 후기에는 오리지널 도시랜드 악단으로서 딕시한 연주를 하였으나 1953년에 밴드를 해산, 다시 토미 악단에 들어가 활동하던 중 1957년 6월에 사망하였다.
밀러
[편집]Glenn Miller(1905-1944) 아이오와주 출생. 콜로라도 대학에서 배웠으며, 1926년부터 벤 폴라크를 시초로 하여 레드 니콜스, 레이 노블 등 많은 악단에서 트롬본 주자로 활약, 편곡 및 취입 등도 하였다. 1937년에 자신의 악단을 만들었으나 다음 해에 해산, 1939년에 재편성하여 브라스와 색소폰 앙상블에 독특한 편곡을 한 밀러 사운드의 연주를 하여 '문 라이트 세레나데' 등 일련의 히트로 성공을 거두었다. 1942년에 종군을 하기 위하여 악단을 해산했으며, 공군 밴드를 조직하고 유럽 전선에서 위문활동을 하였다. 1944년, 영불해협에서 비행 도중 행방불명이 되었으나 밴드는 젤리 그레이, 레이 마킨리 등이 이어받아 1945년까지 연주를 계속하였다. 2차대전 후 1950년대에 밀러 스타일은 재인식되었으며, 이후 그 아류인 많은 악단이 생겨나 1953년에는 그의 전기영화(傳記映畵)도 만들어졌다.
모건
[편집]Russ Morgan(1904- ? ) 펜실베이니아 태생. 피아노에서 트롬본 주자로 되어 18세에 뉴욕으로 나와 음악이론을 공부하는 한편 프랑스에도 다녀왔다. 귀국 후에는 리얼 재즈의 연주를 시작하여 데뷔, 방송 등 각 방면에 걸쳐 작곡 및 편곡을 제공하여 다채로운 활동을 하였다. 1939년, 약음기를 사용한 트롬본으로 독특한 '모건 매너' 스타일의 스위트한 악단을 만들어 온 미국에 그 명성을 떨쳤다.
도시(토미)
[편집]Tommy Dorsey(1905-1956) 펜실베이니아 태생. 1920년대에는 트롬본과 트럼펫을 취주하여 재즈의 무대에서 활약하였으며, 1930년대에는 트롬본 주자로서 이름을 떨쳐, 형인 지미와 함께 도시 브러더스에 참가, 1935년부터는 자기의 악단을 만들었으며, 스윙 시대에는 굿맨과 함께 인기악단이 되었다. 그의 트롬본 주법은 '센티멘털 젠틀맨'으로서 유명하였으며, 충실한 연주를 많이 남겼다. <나는 센티해졌다>, <도시의 부기우기> 등이 대표작이며 1956년에 급사하였다.
만토바니
[편집]Annunzio Mantovani(1905-1980) 베네치아 태생. 어릴 때에는 피아노 교사, 후에는 음악교사인 부친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웠다. 5세 때 영국으로 이주하여, 18세 때부터 호텔의 살롱 앙상블이나 댄스 밴드에서 연주하였다. 1932년경, 탱고 밴드를 조직하여 활동하는 한편, 방송 및 스테이지 등의 음악을 담당하였다. 제2차대전 후에는 40명 이상이나 되는 대편성의 악단을 결성하여, 현(絃)을 중심으로 한 볼륨있는 음악과 템포가 자유로운 연주의 아름다움으로 무드 음악의 제1인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다. 그 대표작으로는 <샤르멘>, <라모나> 등이 있다.
그레이
[편집]Glen Gray(1906-1963) 일리노이주 태생. 알토 주자로서 프로가 되어, 1929년에 백인 최초의 풀 밴드 '카사 로마 악단'을 만들어 레코딩도 개시하였다. 1930년대 초기에 그 메커닉한 정열적 연주로 젊은 층에서 큰 인기를 획득하였다. 1930년대 중엽에 와서는 스위트한 댄스 밴드를 편성, 1940년대에 해산하고, 1950년대 후반부터 취입함으로써 오케스트라로 보다 많은 레코드를 냈으나 1963년에 사망하였다.
라이트
[편집]Enoch Light(1907- ? ) 오하이오주 태생. 존 홉킨스 대학 재학중에는 교내 밴드의 지도자로서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도 유학하였으며, 클래식도 배웠다. 한편, 자기의 악단 '라이트 브리게이트'를 결성하고 스테이지와 방송 등에서 활약, 유럽에의 순회공연도 한 바 있다. 1930년대부터는 취입도 하여 성공을 거두었으며, 뉴욕 대학의 음악교수직을 맡아보는 한편 레코드회사를 설립, 코만드의 레벨로 스테레오 녹음에 뛰어난 다수의 레코드를 내었다.
앤더슨
[편집]Leroy Anderson(1908-1975) 매사추세츠주 태생. 1930년, 하버드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헨리 기디온으로부터 오르간, 가스턴 도우플레이느에게서 더블 베이스를 배우고, 그 후 모교의 취주악단을 거쳐서 보스턴 및 뉴욕에서 지휘와 편곡을 하며 활약하였다. 또 작곡도 많이 발표하고, 1953년에는 <블루 탱고>를 히트시켰다. 그 팝스 연주와 특이한 스타일은 <타이프라이터>, <싱코페이티드크로크>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윈터할터
[편집]Hugo Winterhalter(1908- ? ) 펜실베이니아주 태생. 재학시절부터 이미 컬리지 밴드의 리더인 한편 음악공부도 했다. 졸업 후에는 랠리 크린턴 등 수많은 악단에서 색소폰 주자로 일하였다. 1940년경부터는 편곡에도 손을 대어 토미 도시 등의 악단에 곡을 제공함으로써 주목을 끌었고, 레코드 디렉터가 되었다. 그의 장기인 현(絃)의 편곡에서 히트가 많으며, 전문지(誌)상에서도 뛰어난 편곡 및 지휘자로 선출되는 등의 인기를 차지하였다.
페이스
[편집]Percy Faith(1908-1976) 캐나다의 토론토 태생. 음악학교에서 피아노를 배웠으며 콘서트에도 출연하였다. 18세 때 양손에 화상(火傷)을 당했기 때문에 피아니스트를 단념하고 작곡·편곡으로 전향하였다. 후에 캐나다의 방송국에서 악단을 지휘하고, 1940년에 미국으로 갔다. 방송으로 이름을 떨친 이후, 레코드 디렉터로서 많은 작품을 히트시켰다. 그의 편곡은 현을 중심으로 한 대편성 악단에 심포닉한 여러 종류의 악기를 사용하여, 무드 음악의 제1인자로서 이름이 높다.
굿맨
[편집]Benny Goodman(1909-1986) 시카고 태생. 유태계의 가난한 양복점에서 자라, 10세 때부터 클라리넷을 연주했다. 1927년 벤 폴라크 악단을 시발로 많은 악단과 스튜디오 악단에서 일을 하였으며, 취입에도 활동이 많았다. 1934년에 스스로 악단을 결성, 라디오 쇼의 '레츠 댄스'로 큰 반향을 부른 이래, 그의 연주스타일은 전 미국에 알려져 '스윙왕'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그 후 스윙은 재즈사상 큰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한편 그의 충실한 악단은 많은 스타 플레이어를 확보하고, 그 뛰어난 픽업 멤버의 소편성 콤보도 고도한 연주로 호평을 받았다. 그의 비범한 재능은 고전적 분야에도 미쳐, 많은 클라리넷 작품을 연주하였다. 이 밖에 영화에도 많이 출연하였으며, 그의 전기영화(傳記映畵)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1950년대부터의 새로운 재즈의 흐름으로부터는 동떨어지게 되었다.
멜라크리노
[편집]George Melachrino(1909-1965) 런던 태생. 어렸을 적부터 바이올린을 배워, 극장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으며, 후에 트리니티 음악원에서 작곡과 편곡을 배웠다. 1939년에 자기의 악단을 만들어 방송 등에 출연하였으나 해산하였다. 2차대전 중에슨 악단을 편성·지휘하며 군 관계에서 활약을 하였다. 제2차대전 후에는 악단을 재편성, 충실하게 함으로써 뛰어난 작곡·편곡 및 지휘 등으로 인기를 모았다. 영국의 무드 음악의 선구자로서, 그 스트링스의 아름다움은 세계적인 정평이 있었으나 1965년 6월에 사망하였다.
올리버
[편집]Sy Oliver(1910- ? ) 미시간주 태생. 가수였던 부친에게서 트럼펫을 배웠으며, 1933년에는 지미 랜스포드, 1939년부터는 편곡자로서 토미 도시 악단에 들어가, 그 탁월한 편곡으로 이룩된 최고의 스윙 효과로써 두 악단에 기여하였다. 또한 그는 트럼페터·가수로서도 유니크한 뉘앙스를 지니는데, 2차대전 후에는 다시 도시 악단으로 되돌아갔고, 후에는 자기의 악단을 만들어 방송에도 출연하였다. 그리고 레코드 디렉터로서도 많은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캐럴
[편집]David Carrol(1910- ? ) 일리노이주 태생. 8세 때 이미 가족으로 구성되는 밴드에서 드럼을 맡았으며, 고교에서는 클라리넷을 익히고 작곡 및 편곡도 공부하였다. 졸업 후에는 뉴욕으로 나와서 음악을 공부하는 한편, 악단이나 라디오 쇼에도 작곡을 제공하였다. 1951년부터 레코딩 오케스트라의 편곡·지휘를 담당하였으며, 또한 많은 가수의 반주를 맡기도 하였다. 그의 악단은 음의 콘트라스트에 기교를 꾀했으며, 특히 퍼커션(타악기)의 다채로운 녹음은 즐거운 효과를 올렸다.
케이
[편집]Sammy Kay(1910- ? ) 오하이오주 태생. 그의 악단은 50여년을 넘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그 기원은 그가 대학시절에 결성한 것이다. 일관하여 스위트한 연주만을 하였으며, 전 미국을 순회공연하며 일류 호텔이나 클럽에도 출연하였다. '스윙 앤드 스웨이' 스타일로 그 이름이 알려졌으며, 가이 론버트 악단과 함께 소프트한 댄스 밴드로서 정평이 있다.
젠킨스
[편집]Gordon Jenkins(1910- ? ) 미주리주 태생. 밴조나 기타를 치면서 자랐으며, 1930년에는 아이셤 존즈 악단의 편곡자 겸 피아니스트가 되었으며, 1933년에 독립, 스윙 시대에는 굿맨을 비롯한 많은 악단에 뛰어난 작곡 및 편곡을 제공하였다. 1937년부터는 뮤지컬, 방송음악을 담당하고 1940년부터는 레코드 디렉터로 있는 한편, 수많은 유명 가수의 반주를 맡기도 하였다. 또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무드 음악의 취입에도 활약하였다.
쇼
[편집]Artie Shaw(1910- ? ) 뉴욕 태생. 젊어서 프로가 되었으며, 색소폰에서 클라리넷으로 바꿔 1930년 전후부터는 지방악단을 거쳐 스튜디오 밴드에서 연주하였다. 1935년에는 재즈 콘서트에 스트링 칼테트와 공연하였다. 1936년, 현악단 '뉴 뮤직'을 만들었으나 곧 해산하고 1937년에 다시 표준의 스윙 밴드를 조직하였다. <비긴 더 비긴>이 크게 히트하여 굿맨과 함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40년에 대편성의 스트링스를 더하거나 소편성의 '글래머시 파이브'에 하프시코드를 사용하는 등 항상 새로움을 시도하여 화제가 되었다. 1942년에는 해군에 들어가 위문연주 등의 활약을 하였으나, 다시금 악단을 편성하였다. 그러나 모두가 단기간으로 해산하여, 이후 자기의 농장이나 에스파냐 등에서 한적한 생활을 보냈다.
매킨리
[편집]Ray Mckinley(1910- ? ) 텍사스주 태생. 1934년부터 지미 도시 악단에 가입, 1939년에 윌 브래들리와 함께 악단을 만들어 드러머 겸 가수로서 활약하는 한편 취입도 하였다. 1942년에 종군하여 글렌 밀러의 공군 밴드에 참가하고, 밀러가 비행기 사고로 행방불명이 된 뒤에도 줄리 글레이의 밀러 밴드에서 일하였다. 1946년에 독립, 자기의 악단을 만들었으나 밀러 사운드를 계승하여 각지를 순회하였다.
로스(조)
[편집]Joe Loss(1910- ? ) 리버풀 태생. 어릴 적부터 바이올린을 배웠으며, 런던, 트리니티의 양(兩) 음악학교를 졸업한 후 각지의 영화관이나 댄스홀에 출연, 1930년에는 자기의 악단을 창설하였다. 1934년에는 아스트리아 호텔에 출연한 이후, 레코드에서도 활약하였다. 빅터 실베스터와 함께 언제나 댄스용의 표준 템포연주를 하였으며, 2차대전 전후를 통하여 영국 일류의 밴드로서 댄스 팬에게 그 이름이 알려졌다.
로즈(데이비드)
[편집]David Rose(1910- ? ) 런던 태생. 어릴 적에는 시카고에서 자라, 음악학교를 나온 후 테드 피오리트 악단의 피아니스트 겸 편곡자가 되었다. 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방송음악을 담당하였으며, <할리데이 온 스트링스> 등 그 현 섹션의 아름다운 편곡 수법으로 이름을 떨쳤다. 또한 주디 갤런드 등 수많은 영화가수에게 편곡을 제공하였으며, 이후 무드 음악의 제1인자로서 활약하였다.
데볼
[편집]Frank Devol(1911- ? ) 웨스트버지니아의 마운즈빌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 바이올린, 색소폰 등 많은 악기를 습득하여 마이애미 대학을 졸업한 뒤로는 벤버니나 호레스 화이트 악단 등에서 연주자·편곡자·가수로서 일을 하였다. 전후에는 할리우드의 영화음악에 진출하여 아카데미상 후보 <밤은 즐겁게> 등을 포함한 몇몇 음악을 담당하는 한편, 코미디언으로서 영화에도 직접 출연하였다. 한편 반주·편곡이나 무드 음악의 연주에도 폭넓은 음악성을 나타내어 많은 레코드를 내었다.
존스
[편집]Spike Jones(1911- ? ) 드럼스 및 클라리넷 주자로서 작곡·편곡·작사·지휘자 등 다양한 면에서 활약이 컸다. 캘리포니아주 태생으로서 고교시절부터 친구들과 밴드를 조직, 드럼을 담당하였다. 후에 레이 웨스트, 빅터 영 등의 악단에서는 드러머로 있었으며, 1941년에 자기의 노벨티 악단 '시티 스리커즈'를 결성하였다. 연주의 사이사이에 재채기나 클랙션 등 엉뚱한 효과음을 삽입시켜 유머에 넘쳐흐르는 악음을 창작, 인기악단이 되었다.
케이츠
[편집]George Cates(1911- ? ) 뉴욕 태생으로 5세 때 이미 바이올린을 배웠으며, 후에는 클라리넷, 색소폰 등 많은 악기를 마스터하였다. 1930년대부터는 색소폰 주자로서 뮤지컬 쇼에서 활약, 편곡도 하였다. 1940년에는 유명한 댄스 밴드 '라스 모건악단'의 전속 편곡자가 되었으며, 이후 이 악단에서 편곡을 맡았다.
그린
[편집]Philip Green(1911- ? ) 런던 태생.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흥미를 가져, 트리니티 음악원에서 공부했다. 1930년대 초기부터 클래식의 지휘자로서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1940년대부터는 파퓰러 음악으로 전향, 악단을 결성하여 지휘를 맡았다. 영국식의 품격높은 왈츠나 컨티넨털 탱고 등을 취입하여 소프트한 볼륨에 어울리는 연주를 하였다.
웨스턴
[편집]Paul Weston(1912- ? ) 매사추세츠주 태생. 더트머드 컬리지와 컬럼비아 대학에서 배웠으며, 학생시절에 이미 루디 발레 등의 악단에 편곡을 제공하였다. 토미 도시 악단에서 5년간 전속으로 편곡을 맡기도 하였다. 1942년에는 레코드 디렉터가 되었으며, 대편성의 악단을 지휘하여 무드 음악의 걸작을 만드는 한편, 가수의 반주 및 편곡도 하였다. 또한 그는 가수 조 스태포드의 남편이기도 하다.
브라운
[편집]Les Brown(1912- ? ) 펜실베이니아주 태생. 음악학교에서 기초를 배웠으며, 듀크 대학 재학시절부터 밴드를 구성하였다. 졸업 후에도 역시 리더를 맡았다. 밴드가 해산된 뒤로는 레드 니콜스 등의 악단에 편곡을 제공하였다. 1938년에는 '밴드 오브 리나운'을 결성하여 그 적당한 부드러움에 현대적인 음빛깔을 곁들인 연주는 젊은 층에 인기가 있었다. 특히 1944년, <센티멘털 지니>는 공전의 히트로서, 가수 도리스 데이와 함께 크게 클로즈업되어 이후 일류의 풀밴드가 되었다. 음반으로는 <레즈 브라운 빅셰인 2대(二大) 악단의 향연>이 있다.
굴드
[편집]Morton Gould(1913- ? ) 뉴욕 태생. 어릴 때부터 피아노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뉴욕 대학에서 정식으로 음악이론을 배웠으며, 1934년부터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방송에 활약, 널리 그 이름을 떨쳤다. 그의 레퍼토리는 클래식에서 중간음악의 전체에 걸쳐 있으며, 라틴, 마치, 스피리추얼 등을 망라하여 폭넓은 작곡·편곡을 하였다. 코스텔라네츠와 함께 미국의 팝스 오케스트라를 대표하는 한 사람이다.
카마라타
[편집]Tutti Camarata(1913- ? ) 뉴저지주 태생. 베로나공(公) 학교에서 줄리아드 음악원으로 전학하여 작곡 및 편곡을 전공하였다. 오케스트라에서는 트럼펫도 취주하였으며, 시도 짓는 등의 다양한 재능을 보였다. 1950년대에 이르자 자주 영국으로 가서 미·영 양국에 걸쳐 영화·방송·취입 등 다방면에 걸쳐 그 활약이 크다. 그의 심포닉한 연주는 환상적인 로맨티시즘에 넘쳐 있으며, 아름다운 무드 음악은 정평이 있다.
홀므스
[편집]Leroy Holmes(1913- ? ) 피츠버그 태생. 노스웨스턴 대학과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작곡을 배워, 1934년에 자기 악단을 결성하였으나 얼마 후에 해산하고 빈센트 로페스, 해리 제임스 악단 등에서 편곡자로 활약하였다. 2차대전 후에는 음악영화나 방송에도 진출하였으며, 또한 오케스트라를 지휘, 스트링스를 중심으로 한 무드 음악을 만들었다. 나중에도 새시대의 감각을 곁들인 편곡 등으로 취입을 계속하였다.
푸르셀
[편집]Franck Pourcel(1913- ? ) 마르세유 태생. 어릴 적부터 바이올린을 배워, 음악학교를 졸업한 뒤로는 오페라 극장에서 연주하는 한편 지휘도 담당했다. 1935년경부터는 경음악의 작곡 및 편곡을 비롯하여 8년 동안 가수 뤼시엔 부아이예의 반주자로서 세계를 순회 공연, 또한 2년간 미국에 머무르며 재즈를 연구하기도 하였다. 귀국 후, 1952년에는 자기 악단을 조직, 연주에는 대편성의 현(絃)에 재즈 수법을 가미시켜 멋진 편곡을 하였다.
블랙
[편집]Stanley Black(1913- ? ) 런던 태생. 마세이 음악원에서 작곡을 배워 피아니스트로서 활약하였으나 재즈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930년 안팎으로부터 미국의 재즈맨과 공동연주의 취입을 하였으며, 해리 로이 악단과 함께 라틴 각국으로 순회공연을 하였다. 2차대전 중에는 군 관계의 방송 밴드를 만들어, 1944년부터 BBC 댄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였다. 후에는 취입과 영화음악에도 진출하였다. 자신의 피아노를 곁들인 라틴 무드의 연주는 높은 인기를 확보하였다.
마테리
[편집]Ralph Marterie(1914- ? ) 이탈리아의 나폴리 태생. 14세 때 시카고로 이주하였다. 지방악단이나 라디오 쇼 멤버의 하나로 트럼펫을 불고 화이트먼 등의 악단을 거쳐 1942년에는 해군에 입대, 서비스 밴드에서 연주를 하였다. 후에 스튜디오 밴드를 조직, 방송 및 취입을 비롯하여, 그 후 스윙풍의 댄스 밴드로서 활약하였다.
파라머
[편집]Norrie Paramor(1914- ? ) 런던 태생으로, 어릴 적부터 음악을 즐겼으며, 고교시절에는 밴드에서 연주하였다. 2차대전 시에는 공군에 종군하고, 전후 밴드를 결성하였으나 후에는 편곡에 손을 댔다. 1950년대부터 취입, 오케스트라의 편곡 지휘를 하는 한편 무드 음악에 열중하였다. 또한 유행가수에게 편곡을 제공하여 많은 히트를 냈으며, 빅 벤 밴조 밴드를 만들어 방송에도 출연하였다.
그레이
[편집]Jerry Gray(1915- ? ) 보스턴 태생. 어릴 적부터 바이올린, 아코디언을 배웠으며 1936년에 아티쇼의 관현악단에 바이올리니스트 겸 편곡자로서 참가하였다. 1939년에는 글렌 밀러 악단에 초빙되어, 여기서도 많은 편곡을 남겨 호평을 받았다. 1946년에는 프리랜서로서 활약, 1950년에는 밀러 스타일 부활에 앞서서 자기 악단을 만들어, 교묘하게 현대적인 맛을 곁들임으로써 신선한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초기의 걸작으로는 <비긴 더 비긴>이나 밀러 시대의 <진주 목걸이> 등이 있다.
글리슨
[편집]Jackie Gleason(1916- ? ) 뉴욕 태생으로 지휘자이며 영화배우이다. 소년시절부터 빈곤한 환경에서 자라, 보드빌리언으로서 유흥장이나 클럽에서 일을 하였다. 1940년대에 인정을 받아 영화배우가 되었으며, 1950년대에는 자기의 쇼를 가질 만큼 인기를 획득하였다. 한편, 스튜디오 오케스트라를 지휘함과 동시에 편곡도 하고, 뛰어난 솔로이스트를 배치한 무드 음악의 연주에서 많은 곡을 취입하였다.
코니프
[편집]Ray Conniff(1916- ? ) 매사추세츠주 태생으로, 학생시절부터 트롬본을 익혀 1934년에는 프로가 되었으며, 1937년부터 1940년대까지는 봅 크로스비, 아티 쇼, 해리 제임스 등의 저명한 악단에 참가하여 작곡·편곡을 제공하고 몇 개의 히트를 냈다. 1954년에는 자기의 악단을 결성, 취입도 시작하였으며 합창을 기악적으로 사용한 독특한 사운드는 신선한 감각에 넘치며 현재까지도 인기높은 악단으로서 알려져 있다.
메이
[편집]Billy May(1916- ? ) 펜실베이니아주 태생. 처음에는 피아노를 배웠으나 후에 트럼페터로서 1933년부터 독립하였다. 1938년부터 1942년까지 찰리 버네트, 글렌 밀러 등의 악단에서 활약했다. 2차대전 후 할리우드로 옮겨 필 해리스나 그 밖의 많은 쇼에 편곡을 제공하는 한편, 지휘도 하였다. 1951년에 슬러하는 색소폰 무리의 효과를 노린 풀밴드를 결성하여 화제가 되었으나 후에 샘드너휴에게 인계, 독립 후에는 오직 편곡·지휘 등의 분야에서만 활약하였다.
클레바노프
[편집]Herman Clebanoff(1917- ? ) 시카고 태생. 백계(白系) 러시아인의 부친에게서 어려서부터 바이올린을 배웠다. 1937년부터 시카고 교향악단을 시초로 NBC 교향악단 등 몇몇 교향악단에서 연주를 하였다. 1950년대부터는 스트링스를 중심으로 한 22명의 악단을 편성하고, 파퓰러한 연주를 시작하였다. 영화음악 등의 화려한 편곡의 취입에서 호평받고 그 인기가 굳어졌으며, 특히 레코드로는 <라틴의 매혹>이 훌륭하다.
버터필드
[편집]Billy Butterfield(1917- ? ) 오하이오주 태생. 1937년부터 1941년까지 봅 크로스비, 아티 쇼, 베니 굿맨 등의 저명한 악단에서 보비 하케트와 흡사한 맑은 음빛깔의 트럼페터로서 이름을 떨쳤다. 1942년부터 3년간에 걸쳐서 방송에 출연하였으며, 2차대전 후에는 레코딩을 위한 악단을 만들고 후에 뉴욕으로 진출, 방송이나 레코드에서 활약하였다.
엘거트
[편집]Les Elgart(1918- ? ) 코네티컷주 뉴 헤이븐 태생으로 스윙 시대에 바니 벨리건, 할 머킨타이어, 찰리 스피벅 등의 악단에서 트럼페터로 연주하였다. 1940년에 자기의 악단을 만들고, 현대적인 플레이어를 적절하게 기용한 댄스 밴드로서 활약하였다. 한때 동생인 색소폰 연주자 랠리와 콤비가 되어 취입도 하였다. 그 부드럽고 중후한 하모니는 독특한 터치를 지니고 있어 인기가 높았다.
차하리아스
[편집]Helmut Zacharias(1918- ? ) 베를린 태생.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에 선천적 재능이 있어, 베를린 음악원을 나온 후, 1939년에는 한스 벤다 악단의 멤버가 되었다. 1942년에는 악단을 편성, 1943년에는 베르너 뮐러를 참가시켜 각지에서 연주공연을 하였다. 2차대전 후에는 재즈 바이올리니스트로서 활약하고, 뛰어난 기교와 독특한 음빛깔로 '매직 바이올린' 스타일을 만들어 유명해졌다.
마틴
[편집]Ray Martin(1918- ? ) 빈 태생. 그 곳 국립음악미술 아카데미에서 바이올린과 작곡법을 배웠으며, 19세 때 영국으로 갔다. 쇼 등에서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일한 적도 있으며, 전시 중에는 통역이 되어 종군하였다. 2차대전 후, 악단을 조직하여 함부르크의 대영(對英)방송 등에서 활약하였다. 1946년부터는 현(絃)을 중심으로 한 대편성의 악단을 결성하여 무드 음악을 연주하였다. 세미클래식에서 히트곡에 이르기까지 작곡·편곡 등으로 유명해졌으며 방송, 취입, 영화 등에 진출, 다양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1957년에 도미한 후로는 편곡·지휘 등의 분야에서 활약하였다.
본
[편집]Billy Vaughn(1919- ? ) 켄터키 태생. 고교시절에 피아노를 배워, 5년간의 군대생활을 마친 뒤에는 다시 대학에 복귀, 밴드의 피아니스트로서 활약하였다. 학우(學友)들과 보컬 트리오인 '힐 토퍼즈'를 조직해서 성공을 거두었다. 1953년부터는 악단을 지휘하여 부드러운 사운드를 곁들인 감미로운 연주로 수많은 취입을 하였다. <멜로디 오브 러브> 등의 밀리언 셀러를 만들어 일류의 인기악단이 되었다.
플래내건(랄프)
[편집]Ralph Flanagan(1919- ? ) 오하이오주 태생. 지방악단을 거쳐, 1940년에는 서미 케이 악단의 피아니스트 겸 편곡자가 되었다. 전시 중에는 연안 경비대의 서비스 밴드에 중군하였고, 2차대전 후에는 독립하여 찰리 버네트 등 많은 악단에 편곡을 제공하였다.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밀러 스타일에 착안하여, 그 부활기에 <노래하는 바람> 등 많은 히트곡을 낳았다. 1950년, 스스로 악단을 조직하여 활약하였다.
모로
[편집]Buddy Morrow(1919- ? ) 코네티컷주 뉴헤이번 태생. 1934년,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배워 그 해부터 폴 화이트먼, 아티 쇼, 토미 도시 등의 악단을 거쳐 1945년에 자기의 악단을 만들었다. 1946년부터는 방송과 레코딩에서 활약하였다. 1951년에 빅 밴드를 만들어 밀러 스타일로 발족시켰으며, 리듬 앤드 블루스풍의 연주도 하여 오올라운드한 트롬본 주자로서 인기가 높았다.
앨런
[편집]Steve Allen(1921- ) 뉴욕 태생. 피아니스트 및 텔레비전 탤런트이기도 하다. 젊을 때부터 다재다능하여 피아노를 습득,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디스크 자키로서 성공하였다. 1951년에 뉴욕으로 돌아왔으며 얼마 후 텔레비전 코미디언으로 그 이름을 전 미국에 떨쳤다. 피아니스트로서도 유명하며, 그의 텔레비전 쇼나 레코딩엔 저명한 악단과 솔로이스트가 출연하여 그의 피아노와 공연하였다. 1955년의 영화 <베니 굿맨 스토리>에서는 굿맨의 역할을 맡은 주연으로서 활약하기도 하였다.
리들
[편집]Nelson Riddle(1921- ) 뉴저지주 태생. 부친에게서 트롬본을 배우고, 1940년에 프로가 되었으며, 1946년부터 토미 도시, 봅 크로스비 등의 악단에서 연주하며 편곡자도 겸하였다. 그 후 방송악단의 지휘나 편곡을 하는 한편, 레코드계에 진출하여 유명가수의 반주·편곡으로 이름을 떨쳤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노래는 거의 그가 담당하였으며, 영화음악에도 손을 대어 각 분야에 걸쳐 의욕적인 활약을 하였다.
앤터니
[편집]Ray Anthony(1922- ) 펜실베이니아 태생. 고교시절의 밴드에서 트럼펫을 불었으며, 1938년에 프로가 되었다. 1940년에 글렌 밀러, 지미 도시 악단을 거쳐, 1942년에는 해군 입대, 해군 밴드를 조직하여 태평양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46년에 제대, 자기 악단을 만들었으며, 그의 해리 제임스풍 플레이와 신선한 감각에 넘친 어레인지는 댄스 밴드로서 높은 인기를 확보하였다. 이후 취입이나 자기 쇼에 활약하였다. 출연 영화로는 <키다리 아저씨> 등이 있다.
박스터
[편집]Les Baxter(1922- ) 텍사스주 태생. 디트로이트 음악원에서 피아노, 로스앤젤레스의 대학에서 화성 및 작곡을 배웠다. 멜 토메의 합창단에서 노래도 익혀, 1940년 후반부터는 라디오 쇼에 편곡을 제공하였다. 1950년부터는 레코딩, 오케스트라의 지휘, 유명 가수의 반주 등을 맡아, 그 스마트한 편곡과 국제적인 작풍(作風)은 정평이 있으며, 많은 히트곡을 내었다.
헤프티
[편집]Neal Hefti(1922- ) 네브래스카주 태생. 1941년에 트럼페터로서 봅 아스터 악단으로부터 쿠바로 갔다. 또한 찰리 버네트 등의 악단을 거쳐, 1944년에는 우디허먼 악단에도 참가, 그의 뛰어난 밥 감각으로 걸작을 만들었다. 그리고 해리 제임스, 카운트 베이시 등의 유명한 악단에 신선한 편곡을 제공하고, 1952년 가수 프랜시스 웨인을 포함한 자기의 악단도 만들었다. 그는 파퓰러 분야에도 진출하여 가수의 반주나 영화, 텔레비전 등에 비범한 재능을 보이기도 하였다.
켐프페르트
[편집]Bert Kaempfert(1923- ) 함부르크 태생. 어릴 때부터 악기를 능숙하게 다루었으며, 특히 아코디언의 연주에 뛰어났다. 음악학교를 졸업한 후, 한스 부슈 악단에 들어가 아코디언 연주자로서 널리 알려졌다. 2차대전 후, 스튜디오 뮤지션이 되고, 방송을 통하여 지휘자 겸 아코디언 주자로서 활약하였다. 후에 자기의 악단을 결성하여 그 독특한 트럼펫 무드로 유명해졌고, 무드 음악에 새로운 감각을 가미시켰으며 처음으로 비틀스를 발견한 것도 그였다.
번스타인
[편집]Elmer Bernstein(1924- ) 뉴욕 태생.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작곡을 배웠으며, 근대 작곡가인 아론 코플랜드에게 사사하였다. 전시 중에는 미군 방송에서 반주음악의 편곡·지휘를 맡고, 1950년대부터 영화음악에 관여, 할리우드에 진출하였다. 모던 재즈를 교묘하게 삽입한 <황금의 팔>을 비롯하여 <십계(十戒)>, <성공의 달콤한 향기> 등의 걸작을 발표, 뛰어난 재능과 감각으로 영화음악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었다.
맨시니
[편집]Henry Mancini(1924- ) 오하이오주 태생. 어릴 때부터 플루트 주자가 되어 밴드에서 연주하였으며,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작곡을 배웠다. 전후에는 텍스베네키 악단의 편곡자가 되었으며, 1950년대부터 영화음악에 진출하였다. 1960년대에는 많은 아카데미 음악부문에서 상을 획득, 크게 주목받았다. 그 작풍은 모던한 감각에 넘쳐흐르며, 새 경향의 무드 음악으로서 정평이 있다. 대표작으로는 <티파니에서 아침식사를>, <술과 장미의 매일> 등이 있다.
몬테네그로
[편집]Hugo Montenegro(1925- ) 이탈리아계의 뉴욕 태생으로서, 부친은 드럼 연주자였다. 고교에서 드럼과 색소폰을 익혀, 1943년 종군 중에 뉴포트의 해군 쇼 편곡으로 코스텔라네츠에게 그 재능을 인정받았다. 1946년 제대한 뒤로는 맨해튼 음악학교에서 편곡·지휘를 배웠으며, 이후 레코드 취입으로 활약하였다. 폭넓은 레퍼토리로 스트링스, 브라스, 퍼커션의 연주를 하여 그 만능의 재능을 보여주었다.
헤일리
[편집]Bill Hailey(1927- ) 어릴 때부터 기타에 열중하였고, 노래솜씨도 훌륭했다. 성장한 후로는 자기 악단 '새들멘'을 결성하였으며, 1952년에는 그 악단의 이름을 '코메츠'로 바꿔 방송이나 클럽에 출연하였다. 1954년, <로크 알란드 더 크로크>가 크게 히트하여 영화 <폭력 교실>의 주제가가 되기도 하였다. 흥겹고 정력적인 그들의 연주는 당시의 폭발적인 로큰롤 유행의 선구자가 되었다.
르그랑
[편집]Michel Legrand(1932- ) 파리 태생이며, 부친은 밴드 리더. 파리 음악원에서 작곡과 피아노를 배웠으며, 졸업 후에 그 재능이 인정되어 피아니스트로서 유명한 샹송가수 모리스 쉬발리에의 반주를 맡기도 하였다. 1952년에 도미한 후로는 디지 길레스피, 마일스 데이비스에게 현을 더한 편곡을 제공하였다. 또한 재즈음악에도 관심을 가져, 자기 연주의 취입도 하였다. 한편, 대편성의 악단을 지휘하여 무드 음악을 만들고, 후에는 영화음악에도 진출하는 등 각 방면에서 만능적인 재능을 발휘한 문제작이 많다.
라이먼
[편집]Arthur Lyman(1936- ) 하와이 태생. 소년시절부터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마림바, 비브라폰 등을 마스터하여 1956년에 마틴 데니의 악단에서 연주하였다. 1957년 자기의 그룹을 조직하여 여러 악기나 효과음을 더한 '에키조틱 사운드'의 연주를 추진시켜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레코드의 취입도 하여 <타부> 등을 히트시키기도 하였다.
빌크
[편집]Acker Bilk(1929- ) 서머싯에서 태어났다. 클라리넷 주자 겸 밴드 리더로서 영국에서는 크리스 바버, 케니 볼과 함께 트래스 재즈 연주의 스리 비(3B)라고 불린 적도 있었다. 원래의 딕시 연주에서 샹송, 라틴, 영화음악을 교묘하게 딕시화한 폭넓은 레퍼토리로 팬에게 친근감을 주며, 이에 덧붙여 그의 클라리넷 솔로는 맑은 음빛깔의 아름다움으로 정평이 있다.
볼
[편집]Kenny Ball(1931- ) 영국 에식스 태생. 16세 때 트럼펫을 배워 21세 때 지드 필립스 악단을 시초로 많은 딕시 악단에 가입하였다. 1958년 자기의 밴드를 결성하고 방송 및 스테이지에서 활약하였다. 취입에서는 <모스크바의 밤은 깊어>, <전골> 등으로 히트하였다. 전형적인 딕시 스타일이며, 크리스 바버, 아커 빌크와 함께 영국의 트래드 재즈의 대표 악단이 되었으며 해외 연주 공연도 많았다.
뮐러
[편집]Werner M ller(1920- ) 베를린 태생.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 특히 트롬본을 배웠으며, 하노버의 음악원을 나와 클래식 분야에서 극장 오케스트라에 참가하였다. 1943년 헬무트 차하리아스, 1946년엔 쿠르트 위트만 악단을 거쳐, 1948년에 악단을 결성하였다. 방송국의 전속이 되어, 취입에서도 각국의 민요를 교묘하게 편곡한 일련의 홀리디 시리즈로 무드 음악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레거
[편집]Max Greger(생몰연도 불명) 2차대전 후, 독일에 나타난 많은 뮤지션 가운데에서 빅 밴드로서는 대표적인 밴드 리더이며, 콜만 호킨스, 알 보스테크 스타일을 지향하는 테너 색스폰 주자이기도 하다. 1941년에 밴드를 편성하고, 1951년의 뮌헨 방송국의 방송에서 인기를 획득하였다. 스윙 연주에 록 비트나 유행 리듬 등을 가미시켜 모던한 댄스 밴드로서 활약을 계속하였다. 레코드로는 가 있다.
차크스필드
[편집]Franck Chacsfield(생몰연도 불명) 서섹스주 태생으로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워 14세에 헤스티그의 음악제에 출연, 재능을 과시하였다. 대학에서는 법률을 전공하여 변호사가 되었으나, 음악관계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하는 등의 활약을 보였다. 제2차대전 중에 부상하여, 이후 장병 위문의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2차대전 후에는 현을 중심으로 한 악단을 조직, <썰물>이 히트하였다. 영국에서는 제1선의 무드 음악 지휘자로 인기가 높았다.
올드리치
[편집]Ronnie Aldrich(생몰연도 불명) 켄트주의 에리스 태생. 길드홀 음악원을 수료하고 클래식 피아니스트가 되었으며, 후에 파퓰러로 전향하였다. 런던을 중심으로 방송, 레코드, 콘서트 등에서 활약, 인기 높은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2대의 피아노를 구사한 낭만적인 클래식 편곡 등 많은 무드 음악을 만들었으며, 박력있는 뛰어난 녹음효과의 레코드를 내었다.
골드
[편집]Marty Gold(생몰연도 불명) 뉴욕 태생. 소년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으며, 성장한 후로는 벤 버니, 찰리 버네트 악단 등의 어레인저로서 활약하였다. 전후에는 드리 선즈의 편곡을 행하여 크게 공헌하고 유명가수의 반주, 편곡을 다수 취급했다. 또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샤프한 음빛깔의 스테레오 사운드 연주로 많이 취입을 많이 했다.
제이콥스
[편집]Dick Jacobs(생몰연도 불명) 미주리주 태생.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익혔으며, 성장한 뒤로는 색소폰을 배우고, 뉴욕 대학에 들어가서는 음악을 전공하였다. 졸업한 뒤로는 저명한 음악출판사에 편곡을 제공하고, 후에 토미 도시 악단의 전속 편곡자가 되었다. 1947년에 사이 올리버와 팀을 만들어, 유명악단이나 가수의 편곡을 하는 한편, 스튜디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그 교묘한 솜씨의 편곡으로 활약하였다. <공포영화 테마집> 등을 만들었다.
제롬
[편집]Henry Jerome(생몰연도 불명) 코네티컷주 노위치 태생. 밴드 리더로서 활약했으나 1950년대 후기에는 브라스 섹션을 중심으로 한 대편성 악단을 조직하였다. 취입으로는 <브레이즌 브라스>의 일련의 시리즈가 히트하여 이름이 알려졌다. 이후에 색소폰 보컬, 스트링스의 편곡도 하며 박력있는 스테레오 사운드로 인기가 높다.
플리즈
[편집]Jack Pleis(생몰연도 불명) 필라델피아 태생으로, 어려서부터 피아노의 재능이 탁월하였으며 클래시컬한 분야에서 활약, 편곡도 하였다. 1946년부터는 굿맨 악단의 피아노를 2년 동안 맡았으며, 카마라타의 초빙으로 런던에 체재, 레코드 디렉터가 되었다. 귀국 후는 다이나쇼어의 라디오 프로에서 피아노를 담당하였다. 피아니스트를 겸하며 스튜디오 밴드의 편곡이나 지휘를 하였다.
마틴(그래디)
[편집]Grady Martin(생몰연도 불명) 테네시주 태생. 학생 때부터 기타에 열중, 후에 알토 색소폰을 주체로 한 '드루 푸트 파이브'를 결성, 웨스턴을 가미시킨 뉴사운드로 인기를 획득하였다. 한편, 단독으로는 웨스턴 가수의 반주를 함과 동시에 방송의 그랜드 올 오블리 프로에 기타로 출연하였다. 후에는 알토의 댄디 맥밀란이 마틴과 결별하여 같은 이름의 악단에서 재편성을 하고 있다.
마틴(프레디)
[편집]Freddy Martin(생몰연도 불명) 오하이오주 태생. 학생시절에 테너 색소폰을 배웠으며, 처음에는 악기의 판매를 하였다. 1937년에 자기의 악단을 조직, 이후 월드루프, 아스토리아, 앰배서더 등의 이름난 호텔에 출연하였다. 달콤한 댄스 밴드로서의 인기를 굳혔으며, 2차대전 후에는 <험블 부기> 등 일련의 클래시컬한 곡의 편곡을 연주하여 히트를 하였다. 그 후 방송이나 취입에 많은 활약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