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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예술·스포츠·취미/영화/영화의 감상/한국영화의 감독과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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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의 감독과 작품〔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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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映畵-監督-作品〔槪說〕

1919년 10월 27일 서울 단성사(團成社)극장에서 개봉된 김도산(金陶山)의 <의리적 구투(義理的仇鬪)>를 일단 한국영화의 효시(嚆矢)로 기록할 수 있겠으나, 김도산은 영화감독이란 위치에서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연극 공연의 표현 확대를 위해서 연쇄극영화를 만들었던 만큼, '영화감독과 작품'에서는 일단 제외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김도산이 영화감독이라는 것을 의식했건 안했건, 한국인의 손으로 만든 이른바 활동사진의 창시자(創始者)임에는 틀림이 없으므로, 일단 영화인 김도산의 작품과 활동을 평가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엄밀한 의미에서 1923년에 개봉된 윤백남(尹白南)감독의 <월하(月下)의 맹세>부터를 기점(起點)으로 하여 영화 감독과 작품을 논할 수밖에 없게 된다.

윤백남은 일본인 자본에 의해 운영되던 '조선키네마'회사에 그의 제2차 작품 <운영전(雲英傳)>을 감독하면서 안종화(安鍾和)와 나운규(羅雲奎)를 출연시켰는데, 이 두 사람은 뒤에 훌륭한 영화감독이 되어 한국 영화사의 굵직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제 윤백남의 <월하의 맹세>가 개봉된 1923년부터 전창근(全昌根)이 <복지만리(福地萬里)>를 감독한 1940년 사이에 등장한 감독들을 제1대로 보고, 가장 활약을 뚜렷하게 한 영화인 10명과 작품을 본다면 다음과 같다.

윤백남(尹白南)의 <월하(月下)의 맹세>(1923), 이경손(李慶孫)의 <심청전(沈淸傳)>(1925), 이필우(李弼雨)의 <한강 대홍수(漢江大洪水)>(1925), 이구영의 <쌍옥루(雙玉淚)>(1925), 나운규(羅雲奎)의 <아리랑>(1926), 안종화(安鍾和)의 <꽃장사>(1930), 윤봉춘(尹逢春)의 <도적놈>(1930), 이규환(李圭煥)의 <임자없는 나룻배>(1932), 최인규(崔寅奎)의 <수업료>(1939), 전창근(全昌根)의 <복지만리(福地萬里)>(1940).

이들 10명외에 1925년 이규설(李圭卨)은 <농중조(籠中鳥)>로, 1928년 김유영(金幽影)은 <유랑(流浪)>으로, 동년 홍개명(洪開明)은 <재활(再活)>로 등장했고, 1933년 이창근(李昌根)은 <돌아온 영혼>으로, 1935년 이명우(李明雨)는 <홍길동전(洪吉童傳)>으로, 1936년 양주남(梁柱南)은 <미몽(迷夢)>으로 각기 등장했다. 같은 해에 신경균(申敬均)은 <순정해협(純情海峽)>으로, 1937년 안석영(安夕影)은 <심청>으로, 1939년 김화랑(金火浪)은 <바다의 벗>으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제1대에서 특기할 만한 사항은 무엇보다도 위대한 영화인 나운규(羅雲奎)가 짧은 생애였을망정 불꽃처럼 강렬하게 예술적 삶을 살았다는 점일 것이다. 그의 대표작인 <아리랑>을 비롯하여 <풍운아(風雲兒)> <들쥐> <옥녀(玉女)> <사랑을 찾아서> <벙어리 삼룡(三龍)이> 등에서는 때로는 민족적인 저항(抵抗)의 노래를, 때로는 문예물(文藝物) 속에 담긴 소박한 인간상을 스크린 이미지로 형상화시켰다.

또한 그의 '흙'과 '피'를 통한 저항정신은 하나의 리얼리즘으로 응결되었고, 이와 같은 리얼리즘을 이어받은 이규환은 <임자 없는 나룻배>에서 현대문명 속에 소외당하는 인간상을 묘사하기도 했다. 다시 최인규에 이르러서는 한 소학생의 현상작문을 소재로 한 <수업료>에서 보다더 현실에 밀착된 상황 속에서 리얼리티를 찾는 이른바 구체적인 영상(映像)의 세계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안종화, 윤봉춘, 전창근 등은 이 시기의 감독뿐 아니라 연기자로서도 크게 활약했다.

또한 일제 말의 발악적인 통제하에서 대부분의 영화인은 부화(附和) 내지 굴복하였는데도 안종화, 윤봉춘, 이규환 감독은 끝까지 지조를 지켜 굴욕적인 영화현실에서 오히려 도피했음도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

이병일은 이미 광복 전 <반도(半島)의 봄>(1941)으로 등장했으므로, 광복 후 그룹에 넣기가 거북한 점이 없지 않은 관계상, 이병일 감독이 활약한 후반기에 역점을 두어, 광복 후 즉 1945년에서 1956년까지 사이에 등장한 영화감독 10인 속에 포함시켰다. 제2대의 주요감독 10인과 작품을 열거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이병일(李炳逸)의 <반도(半島)의 봄>(1941), 김소동(金蘇東)의 <모란등기(牡丹燈記)>(1946), 한형모(韓瀅模)의 <성벽(城壁)을 뚫고>(1948), 홍성기(洪性麒)의 <여성일기(女性日記)>(1948), 신상옥(申相玉)의 <악야(惡夜)>(1952), 정창화(鄭昌和)의 <최후의 유혹>(1952), 이강천(李康天)의 <아리랑>(1954), 김기영(金綺泳)의 <죽음의 상자(箱子)>(1955), 유현목(兪賢穆)의 <교차로(交叉路)>(1956), 박상호(朴商昊)의 <해정(海情)>(1956). 이 시기에 등장한 감독들의 특색으로는 광복 전후와 6·25전쟁이라는 역사적 체험 속에서 영화활동을 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병일은 1956년 <시집가는 날>을 내놓았고, 김소동은 1958년 <돈>을 발표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등장한 신상옥은 초기의 불운을 용케 극복하여 1961년 <성춘향>에서 흥행에 크게 성공했으며, 이어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상록수> <연산군(燕山君)> <폭군연산>에서도 성공했으며, 1964년의 <빨간 마후라>는 동남아·일본 등지에 수출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

김기영(金綺泳)은 서울 의대를 나온 후 USIS에서 일하면서 <죽음의 상자(箱子)>를 발표했다. 이후 <초설(初雪)> <십대(十代)의반항> <하녀(下女)> 등에서 리얼리즘을 통한 전후사회(戰後社會)의 모순을 고발하더니 <고려장(高麗葬)> <현해탄은 알고 있다> <화녀(火女)> <충녀(蟲女)> 등에서도 인간의 본능인 '생명에의 집착'과 '성(性)의 파탄'을 작품의 주제로 몰고 갔다.

한편 유현목은 초기작품인 <유전(流轉)의 애수> <잃어버린 청춘> <구름은 흘러도>에서 서정적인 리얼리즘의 세계를 거쳐, 1961년에 내놓은 <오발탄(誤發彈)>에서는 영상주의(映像主義)적인 표현을 시도하여 영화비평가들의 절찬을 받은 바 있다. 그 후 <순교자> <막차로 온 손님들>에까지 이와 같은 흐름이 이어 왔고, 1968년 <한(恨)>에서 유현(幽玄)한 한국의 전통미를 추구하였다.

이 시기에 등장한 그 밖의 영화감독을 든다면 1948년 김성민(金聖珉)이 <심판자(審判者)>를 가지고 등장했고, 1949년 노필(盧必)은 <안창남(安昌男)>으로, 1956년 김한일(金漢一)은 <여성의 적(敵)>으로, 같은 해 권영순(權寧純) 감독은 <옥단춘(玉丹春)>으로 각기 등장했다.

다음 1958년부터 1972년 사이에 등장한 중요 감독 10인과 작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김수용(金洙容)의 <공처가>(1958), 이봉래(李奉來)의 <행복의 조건>(1959), 강대진(姜大振)의 <부전자전(父傳子傳)>(1959), 이성구(李星究)의 <젊은 표정>(1960), 이만희(李晩熙)의 <주마등(走馬燈)>(1961), 정진우(鄭鎭宇)의 <외아들>(1963), 정소영(鄭素影)의 <내 몫까지 살아주>(1967), 최하원(崔夏園)의 <나무들 비탈에 서다>(1968), 황혜미(黃惠美)의 <첫경험>(1970), 하길종(河吉鍾)의 <화분(花粉)>(1972).

이 시기에 나온 이 밖의 영화감독으로는 1958년에 유두연(劉斗演)이 <유혹(誘惑)의 강(江)>으로, 김묵(金默)은 <흐르는 별>로 등장했다. 1961년에는 김기덕(金基悳)이 <5인(五人)의 해병(海兵)>으로, 이규웅(李圭雄)은 <내 몸에 손대지 마라>, 장일호(張一湖)는 <의적 일지매(義賊一枝梅)>로 등장하였고, 1962년에는 강범구(康範九)가 <북극성>으로, 임권택(林權澤)은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등장했다. 또한 1966년에는 배우 최무룡(崔戊龍)이 <나운규의 아리랑>으로 데뷔했고, 최인현(崔寅鉉)이 <쌍검무(雙劍舞)>로, 1970년에는 제작자 출신의 주동진(朱東振)이 <사랑하는 마리아>로, 1971년에는 김사겸(金仕謙)이 <그대 가슴에 다시 한번(원제 열대어)>으로, 그 후 조문진(趙汶眞)은 <두아들>로, 이원세(李元世)는 <잃어버린 계절>로, 배우출신의 신성일은 <연애교실>로 각기 등장하였다.

이 시기 즉 제3대에 해당하는 영화작가 중에서는 김수용(金洙容)이 <혈맥(血脈)> <저 하늘에도 슬픔이> <갯마을> 같은 영화를 통하여 새로운 감각의 영상미(映像美)를 구축하였고, <안개> <까치소리> <산불> <만선(滿船)> 등에서는 주로 문예물(文藝物)을 영화화하는 데 장기(長技)를 보였다. 흥행적으로는 <유정(有情)>이 공전(空前)의 히트를 쳤다. 또한 이성구는 <일월(日月)>과 <장군(將軍)의 수염>에서 인간의 내면세계를 깊게 파헤쳐서 좋은 평가를 받았고, 이만희는 <만추(晩秋)> <기적(汽笛)> <귀로(歸路)> 등에서 대사 위주(臺辭爲主)에서 벗어나 영상본위(映像本位)로 표현하는 기법을 써서 비평가들의 주목을 끌었다.

다음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에 등장한 4명의 감독을 살펴본다면, 먼저 정소영이 <미워도 다시 한번> 1, 2, 3편으로 흥행에 크게 성공하여 서울의 필름값을 올리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는데, 이는 사회심리학적인 면에서 볼 때, 그 소재의 통속성이 한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또한 이 시기에 등장한 영화감독의 특색 중 최하원의 <독짓는 늙은이>, 황혜미의 <첫경험>, 하길종의 <화분(花粉)> 등은 한국영화의 새로운 세대(世代)를 대표하는 영화로서, 최하원의 작품에선 토착적인 영화미학을, 황혜미·하길종의 영화에선 각기 프랑스와 미국에서 영화 수업을 하고 돌아온 세계적인 영화감각이 번뜩이고 있어, 한국영화의 미래를 밝게 약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邊 仁 植>

감독과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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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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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陶山(1891∼1922)

본명은 김영근(金永根). 서울 태생으로, 1911년부터 신극 초기에 연극운동에 관계하다가, 그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신극좌(新劇座)에서 연극 공연할 때 이용하려고 연쇄극(連鎖劇), 즉 '키노드라마'(kino­drama)라는 형식의 영화를 촬영하였다. 스스로 감독과 배역을 맡았던 연쇄극 <의리적 구투(義理的九鬪)>는 우리나라 사람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진 최초의 활동사진으로 평가할 수 있다.

김도산은 그 후에도 <경성교외풍경(京城郊外風景)> <형사(刑事)의 고심(苦心)>같은 연쇄극을 만들었으며, 이것이 우리나라 영화의 효시(嚆矢)가 된 셈이다.

윤백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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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白南(1888∼1954)

우리나라 신극(新劇)과 영화 초창기의 공로자로서 소설가로도 활약했다. 충남 공주 태생으로서 본명은 교중(敎重)이다. 1906년 와세다 대학 고등예과를 수업했고, 1910년 도쿄 고등상업학교를 졸업했다.

1923년 조선총독부 체신부에서 제작한 저축장려를 주제로 한 선전영화 <월하(月下)의 맹세>(윤백남 감독)는 본격적인 의미에서 우리나라 극영화의 최초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연쇄극과 같은 형식에서 완전히 탈피했으며, 영화의 기본적인 형식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다만 일본 제국주의 정책에 따른 영화라는 흠은 남는다. 윤백남은 그 밖에 1925년에 만든 <운영전(雲英傳)>과 1930년에 발표한 <정의(正義)는 이긴다>라는 작품 등이 있으며 그가 1925년 창립한 '윤백남 프로덕션'은 우리나라 프로덕션의 최초였다.

나운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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羅雲奎(1904∼1940)

함북 회령 출생. 호는 춘사(春史). 만주 명동(明東)학교 중퇴. 23세때 일본인이 관리하는 '조선키네마'사에 연구생으로 들어가, 윤백남(尹白南) 감독의 영화 <운영전(雲英傳)>에 교군(轎軍)역으로 출연. 그 뒤 제작·각본·감독·주연 등 눈부신 영화활동을 전개하여 초창기 한국영화계의 선구자로서의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가 연출한 작품으로는 1926년 <아리랑>을 필두(筆頭)로, 27년 <풍운아(風雲兒)> <들쥐> <금붕어>, 28년 <옥녀(玉女)> <사랑을 찾아서> (원제 <두만강아 잘 있거라>), 29년 <벙어리 삼룡(三龍)이>, 30년 <아리랑> 후편(後篇)인 <철인도(鐵人都)>, 32년 <개화당(開化黨) 이문(異聞)>, 34년 <칠번통(七番通) 소사건(小事件)>, 35년 <무화과(無花果)> <강(江)건너 마을> <그림자>, 36년 <아리랑 삼편(三篇)> <오몽녀(五夢女)> 등이 있다. 특히 <아리랑>은 춘사 일생일대(一生一代)의 걸작으로, 당시 민족적 저항의식을 작품 저면에 깔아, 전국적인 규모로 갈채를 받았던 명작이었다.

나운규의 <아리랑> 3편과 <풍운아(風雲兒)>에서는 일찍이 윤봉춘(尹逢春)과 더불어 항일운동을 했던 그의 피맺힌 절규가 영상(映像)으로 재현된 작품으로, 이후 한국영화의 사조(思潮)를 리얼리즘 계통으로 이어가는 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경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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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慶孫(1903∼ ? )

경기도 개성 출생. 체신국(遞信局)부설 상선학교를 나온 뒤 도지사(同志社)신학교를 졸업. 1925년 <심청전>으로 데뷔했다. 그 뒤 <장한몽(長恨夢)>(1925), <산채왕(山寨王)>(1925), <개척자>(1925), <봉황의 면류관>(1927), <춘희(春姬)>(1928), <숙영낭자전(淑英娘子傳)>(28년) 등을 발표했다. 특히 <개척자>는 춘원(春園) 이광수 원작으로, 소위 문예영화의 첫 작품이 되었다.

이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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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弼雨(1897∼1978)

16세 소년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大阪)에서 영화수업을 받았고, 1926년 한국 최초의 코미디 영화인 <멍텅구리>를 감독했다. 이 밖에도 <한강대홍수(漢江大洪水)>(1925), <홍련(紅戀) 비련(悲戀)>(1927) 등을 연출했으며, 특히 한국 최초의 촬영 기사로서 발성영사기(發聲映寫機) 제작·동시녹음 설비를 완성하는 등 영화기재 개선에 크게 기여했다. 문화관광부 녹음기사, 안양촬영소 기술부장 등 역임.

이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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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龜永 (1901∼1972)

호는 현철(玄哲). 1925년 한국 최초의 배우양성 기관인 조선배우학교를 설립했다. 1925년 <쌍옥루(雙玉淚)>로 데뷔. 같은 해 <쌍옥루(雙玉淚) 후편>, 1927년 <낙화유수(落花流水)>, 1930년 <승방비곡(僧房悲曲)>, 1931년 <수일(守一)과 순애(順愛)> 등을 발표했다. 작품내용은 권선징악적인 요소가 짙은 멜로드라마가 대부분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평론가이기도 하다.

안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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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鍾和(1902∼1966)

서울 출생. 1930년 <꽃장사>로 데뷔. 그 후 1930년 <노래하는 시절(時節)>, 1934년 <청춘의 십자로(十字路)>, 1935년 <은하(銀河)에 흐르는 정열(情熱)>, 1936년 <역습(逆襲)> <인생항로>, 1948년 <추우(秋雨)>, 1949년 <나라를 위하여>, 1956년 <천추(千秋)의 한(恨)>, <사도세자(思悼世子)>, 1958년 <춘향전>, 1960년 <견우직녀(牽牛織女)>, 1962년 <애정삼백리> 등을 발표했다.

저서 <한국영화측면비사(韓國映畵側面秘史)>가 있고, 제6회 서울시문화상 수상.

윤봉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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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逢春(1902∼1975)

함북 회령 출생. 연전(延專) 중퇴. 1930년 <도적놈>으로 데뷔. 그 후 1931년에 <큰 무덤>, 1938년 <회생록(回生錄)>, 1939년 <신개지(新開地)>, 1946년 <삼일혁명기(三·一革命記)>, 1947년 <윤봉길(尹奉吉)의사>, 1948년 <유관순> <애국자의 아들>, 1949년 <무너지는 삼팔선>(기록영화), <백범(白凡) 국민장(國民葬) 실기(實記)>(기록영화), 1950년에 <아름다웠던 서울>(기록영화), 1954년 <고향의 노래>, 1956년 <처녀별> <논개(論介)>, 1957년 <다정(多情)도 병이런가>, 1959년 <유관순> 등을 발표했다.

대한민국 예술원상, 제4회 서울시문화상, 문화관광부 장관상 등을 탔다. 예술원 회원, 전국문화단체 총연합회 회장,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역임.

이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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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圭煥(1904∼ 1982 )

경북 대구(大邱) 출생. 일본 신코(新興)키네마에 들어가 연출 수업을 받았다. 1932년 <임자없는 나룻배>, 1935년에 <바다여 말하라> <그 후의 이도령(李道令)> <무지개>, 1937년 <나그네>, 1939년 <새 출발>, 1940년 <창공(蒼空)>, 1946년 <똘똘이의 모험(冒險)>, 1947년 <민족의 절규> <갈매기>, 1948년의 <그들의 행복> <민족의 새벽> <돌아온 어머니>, 1955년 <춘향전>, 1956년 <심청전>, 58년 <애련(愛戀)의 꽃송이> <청춘비가(靑春悲歌)>, 1960년 <낙화암과 삼천궁녀> <천하태평(天下泰平)>, 1962년 <정(情)> 등을 발표.

제5회 서울시 문화상 수상. 예술원 회원. 이규환 감독의 대표작인 <임자없는 나룻배>는 한국적 정서속에 승화(昇華)된 리얼리즘의 극치였고, <춘향전>은 35밀리 영화의 최초작으로 흥행에도 크게 성공했다.

최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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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寅奎(1905∼?)

1939년 <국경>으로 데뷔. 그 후 1939년 <수업료(授業料)>, 1940년 <집없는 천사(天使)>, 1943년 <태양의 아들들>, 1944년 <사랑의 맹세>, 1946년 <자유만세>, 1947년 <죄 없는 죄인>, 1948년 <독립전야(獨立前夜)>, <파시(波市)> 등을 발표하였다.

최인규 감독의 일련의 영화는 한국적인 리얼리즘을 바탕에 깔고 있었고, 그것을 새로운 감각으로 표현하는 일종의 테크니션적인 수법에 의해 창조된 것이었다.

문화영화로서 <희망의 마을>(1948), <국민투표>(1948) 등이 있다. 6·25전쟁시 납북(拉北)되었다.

전창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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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昌根(1907∼1972)

서울 출생. 1925년 윤백남(尹白南)프로덕션의 신인으로 발탁. 1940년 <복지만리(福地萬里)>로 데뷔했다. 그 후 1946년 <해방(解放)된 내 고향> <그 얼굴> <바다의 정열(情熱)>, 1949년 <무기없는 싸움>, 1952년 <낙동강(洛東江)>, 1955년 <불사조(不死鳥)의 언덕>, 1956년 <마의태자(麻衣太子)> <단종애사(端宗哀史)>, 1958년 <이국정원(異國情鴛)> <수정탑(水晶塔)> <고종황제(高宗皇帝)와 안중근(安重根)>, 1959년 <삼일 독립운동(三·一獨立運動)>, 1960년 <아! 백범(白凡) 김구선생(金九先生)> 등을 발표하였다.

전창근 감독은 그 자신 일제시 상하이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직접 가담했던 경력도 있듯이 그의 작품은 애국심이 응결된 지사(志士)풍의 영화작품이었다.

또한 연출·각본·주연을 겸했던 만능의 영화인으로서 제10회 서울시문화상을 받았다.

이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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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炳逸(1910∼1979)

함남 함흥 출생. 함흥 고보(咸興高普)졸업. 일본 닛카쓰촬영소(日活撮影所)에서 수업, 1941년 <반도(半島)의 봄>으로 데뷔. 1956년 <시집가는 날>, 1958년 <자유결혼>, 1959년 <청춘일기>, 1961년 <서울로 가는 길> 등 발표. 특히 제4회 아시아영화제에서는 한국영화 최초로 희극상(喜劇賞)을 탔고, 동아영화사(東亞映畵社)를 설립하여 제작한 영화로 <시집가는 날>외에 <자유결혼>이 제5회 아시아 영화제에서 소년 특별 연기상을, 그리고 <새댁(宅)>으로 제10회 아시아 영화제에서 성격배우상(김희갑)을 획득했다. 이병일 감독은 아시아영화제 집행위원을 역임했다.

김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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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蘇東(1911∼1988)

경북 상주 출생. 1946년 <모란등기(牡丹登記)>로 데뷔. 1956년 <왕자호동(王子好童)과 낙랑공주(樂浪公主)>, 1957년 <아리랑>, 1958년 <돈> <오! 내 고향> 등을 발표했다.

그의 작품세계는 늘 농촌을 무대로 하고 있으며, 도회지의 모순된 상황이나 위선 따위를 풍자(諷刺) 내지 고발하고 있다. 특히 <돈>에서는 이러한 비판의식(批判意識)이 잘 부각되었으며, 제2회 영화평론가협회상을 받았다.

한형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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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瀅模(1917∼ ? )

평북 의주 출생. 1948년 <성벽(城壁)을 뚫고>로 데뷔. 1954년 <운명(運命)의 손>, 1956년에 <자유부인(自由夫人)>, <마인(魔人)>, 1957년 <순애보(殉愛譜)> 등을 발표했다. 카메라맨 출신의 감독으로 <언니는 말괄량이>(1961)로 제1회 대종상(大鍾賞) 편집상을 탔고 제7회 서울시 문화상을 탔다.

홍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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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性麒(1921∼2001)

충북 중원(中原)출생. 최인규(崔寅奎)감독 문하에서 신상옥, 정창화 등과 영화수업을 닦은 후 1948년 <여성일기>로 데뷔. 1954년 <출격명령(出擊命令)>, 1956년 <열애(熱愛)>, 1958년 <별아 내 가슴에> <산(山)넘어 바다 건너>, 1959년 <비극(悲劇)은 없다>, 1961년 <춘향전(春香傳)> 등의 작품이 있다. 주로 멜로드라마를 많이 다루었고, 특히 감각적인 여성묘사에 능했다.

신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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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相玉(1920∼

)

함북 청진 출생. 도쿄 미술학교 졸업. 1952년 <악야(惡夜)>로 데뷔. <젊은 그들> <로맨스 빠빠> <상록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연산군> <열녀문> 등 주로 문예물을 많이 다루었고 사극영화에도 많은 공적을 남겼다.

특히 1961년에 제작·감독한 <성춘향(成春香)>은 한국최초의 컬러시네스코프로, 흥행면에서도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제14회 서울시문화상, 제11회 아시아영화제에서 <빨간 마후라>, 제12회 <쌀>, 제15회 <이조여인 잔혹사>로 3회에 걸쳐 감독상을 획득했다.

그 외에 <천년호(千年狐)>로 제3회 싯체스 환상공포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1978년 영화인 최은희씨와 각각 홍콩에서 납북되어 약 8년 간 북한에 체류·활동하다가 86년 3월 빈에서 탈출, 미국에서 생활하던 중 1989년 5월에 귀국하였다.

정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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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昌和(1921∼

)

충남 진천(鎭川) 출생. 최인규 감독 밑에서 수업한 후 1952년 <최후의 유혹(誘惑)>으로 데뷔. 대표작으로 1950년 <유혹(誘惑)의 거리>, 1960년 <햇빛 쏟아지는 벌판>, <장희빈(張禧嬪)> 등이 있다.

멜로드라마와 액션드라마에서 능력을 발휘했으며, 현재는 방콕에서 살고 있다.

이강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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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康天(1920∼1993)

충남 서천(舒川) 출생. 니혼 미술전문학교 졸업. 1954년 <아리랑>으로 데뷔. 대표작으로 1955년 <피아골>, 1958년 <아름다운 악녀(惡女)>, 1961년 <나그네> 등이 있다.

특히 <피아골>은 지리산 로케를 감행, 파르티잔들의 생태를 리얼리즘 수법으로 처리한 작품으로, 당시 '영화와 반공성' 문제로 지상논쟁이 일어나기까지 한 문제작이었다. 이 영화로 제1회 '금룡상' 감독상을 획득하기도 했다.

특히 1958년에 만든 <생명>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시도한 시네마스코프 흑백영화로, 영화 표현의 폭을 넓힌 작품이었다는 데에 의의를 둘 만한 작품이었다.

김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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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綺泳(1921∼1998)

서울 태생. 서울대 의대졸업. 1953년 <죽음의 상자(箱子)>로 데뷔. 그 뒤 1957년 <초설(初雪)>, 1958년 <십대(十代)의 반항(反抗)>, 1960년 <하녀(下女)>, 1961년 <현해탄(玄海灘)은 알고 있다>, 1963년 <고려장(高麗葬)>, 1964년 <아스팔트>, 1969년 <렌의 애가(哀歌)>, 1970년 <화녀(火女)>, 1972년 <충녀(蟲女)>를 발표하였다. 특이한 소재(素材)를 특이한 개성으로 영상화하는 감독으로, <하녀>(1962년 문화관광부 감독상), <충녀> 등을 통해 인간의 본능적 갈등을 묘사했다. 1960년 <십대의 반항>으로 샌프란시스코 영화제 특별상(아역상) 수상, 제8회 '청룡상' 감독상(<화녀>), 제3회 서울신문 문화대상(<렌의 애가>)을 수상. 싯체스 영화제에서 <화녀>, <충녀>가 각각 입상했다.

유현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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兪賢穆(1925∼ ) 황해도 사리원 출생. 동국대학교 국문과 졸업. 이규환(李圭煥) 감독 밑에서 감독 수업. 1956년 <교차로(交叉路)>로 데뷔. 1956년 <유전(流轉)의 애수(哀愁)>, 1957년 <잃어버린 청춘(靑春)>, 1958년 <인생차압(人生差押)>, 1959년 <구름은 흘러도>, 1961년 <오발탄(誤發彈)>, 1962년 <아낌없이 주련다>, 1963년 <김약국(金藥局)의 딸들>, 1964년 <잉여인간(剩餘人間)>, 1967년 <막차로 온 손님들>, 1967년 <한(恨)>, 1968년 <카인의 후예(後裔)>, 1969년 <수학여행(修學旅行)> (테헤란 국제영화제 작품 대상), 1971년 <분례기(糞禮記)> 등을 발표.

소외된 인간상을 끈질기게 묘사하는 관념적인 면이 강한 감독으로, <오발탄> <순교자>(1965) 등에서 인간의 단면(斷面)을 영상언어(映賞言語)로 표현했다. 서울시문화상(12회)을 비롯 청룡상(제2·6회), 대종상(제2·5·10회), 서울신문 문화대상(제2회) 등을 수상.

조긍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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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肯夏(1917∼1982)

경북 대구 출생. 1956년 <황진이(黃伊眞)>로 데뷔, 1958년에 <순정(純情)의 문을 열어라>, 1959년 <육체의 길>, 1960년 <철조망>, 1961년 <과부(寡婦)>, 1961년 <인간만세> 등을 내놓았다. 이 중 <육체의 길>이 멜로드라마의 통속성을 짙게 깔면서 흥행에 성공하였고, <철조망>은 현실을 직시하는 리얼리즘 영화로 주목을 끌었다. 1958년 문교부 감독상을 받았다.

박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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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商昊(1931∼ ) 경기도 강화 출생. 연대(延大) 상과(商科)졸업. 1956년 <해정(海情)>으로 데뷔. 1958년 <장미(薔薇)는 슬프다> <낭만열차(浪漫列車)>, 1960년 <모상(母像)>, 1962년 <산(山)색시>, 1963년 <또순이> <선술집 처녀>, 1966년 <비무장지대>, 1971년 <짚세기 신고 왔네> 등을 발표했다. 박상호 감독의 영화적 주제는 늘 소박한 서민층의 애환을 즐겨 다루었는데 <또순이>의 경우 국내에서는 물론, 아시아 영화제에서도 찬사를 받았다 <비무장지대>(제13회 아시아 영화제 작품상 수상)에서는 국토분단의 현실을 냉혹하게 묘사하여 센세이션을 일으킨 바 있다.

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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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薰(1922∼ ) 평남 안주 출생. 평양사범대학 수료. 1958년 <모녀(母女)>로 데뷔했다. 그 후 1959년 <장마루촌의 이발사>, 1960년 <애수에 젖은 토요일>, 1962년 <양귀비(楊貴妃)>, 1967년 <파도(波濤)> <밀어(密語)>, 1970년 <결혼대작전(結婚大作戰)> 등을 발표.

주로 '현대인의 고독'과 '사랑'을 주제로 잡되 어둡게 처리하지 않고, 오히려 밝고 건강하게 다루는 데 장기가 있다. 작품 성격은 대부분 멜로드라마(melo drama)의 취향이었다.

김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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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洙容(1928∼ ) 경기도 안성 출신. 서울사범본과 졸업. 1958년 <공처가(恐妻家)>로 데뷔. 1963년 <굴비> <청춘교실> <혈맥>, 1965년 <저 하늘에도 슬픔이>(제3회 청룡상 감독상), 1966년 <갯마을>(제2회 한국연극영화예술상 감독상), 1967년 <산불>(제5회 청룡상 감독상) <안개>(제6회 대종상 감독상) <까치소리> 등 이른바 문예영화(文藝映畵)를 많이 다루었다.

영화가 갖는 흥행성과 예술성을 잘 요리하는 재치있는 감독으로 1966년 개봉한 <유정(有情)>은 크게 성공했다. 제15회 서울시문화상, 제14회 아시아 영화제 감독상 (안개)을 비롯, 국내 영화제의 많은 상을 탔다. 현 예술원 회원.

박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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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宗鎬(1927∼

)

함남 원산 출생. 서울신문학원 졸업. 1959년 <비오는 날의 오후 3시>로 데뷔. <지상(地上)의 비극(悲劇)>(1960), <골목 안 풍경>(1962) 등이 있다. <벽(壁)속의 여자(女子)>(1960)와 <들개>(1971) 등에서 한국적 에로티시즘을 시도했다. 시적(詩的) 감수성과 감각적인 표현에 능하다.

이봉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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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奉來(1922∼1998)

함북 청진 출신. 부산수산대학 졸업. 1959년 <행복의 조건>으로 데뷔. 1960년 <여인(麗人)>, 1961년 <백주(白晝)의 암흑> <삼등과장> <마이동풍(馬耳東風)>, 1962년 <월급쟁이> 등 주로 사회풍자의 요소가 짙고, 작품 내용상으로는 홈 드라마(home drama)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후반기(後半期)' 동인으로 한때 시작(詩作)과 문학평론을 했고, 영화인협회 이사장직을 역임했다. 예총회장, 펜클럽부회장을 역임.

강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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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大振(1927∼1987)

전남 목포 출생. 1960년 <부전자전(父傳子傳)> <박서방>, 1961년 <마부> <어부들>, 1962년 <사랑과 미움의 세월> <상한 갈대를 꺾지 마라> 등 주로 소박한 서민사회의 애환을 리얼리즘 수법으로 담아 성공하였다. 특히 <마부(馬夫)>는 1961년 베를린 영화제에 출품하여 세계적인 평가를 받기까지 했다. 최근에는 텔레비전 방면에 종사하였다.

이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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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星究(1930∼ ) 함남 함흥 출신. 이병일(李炳逸) 감독 밑에서 연출 수업을 닦은 후, 1960년 <젊은 표정>으로 데뷔. 1967년 <일월(日月)> <메밀꽃 필 무렵>, 1968년 <장군(將軍)의 수염>, 1973년 <해벽(海壁)> 등을 발표. 또 한국 최초의 70밀리 영화 <춘향(春香)>을 감독하기도 하였다.

한국적인 리얼리즘을 추구한 데뷔작인 <젊은 표정>에서 <장군의 수염>에 이르기까지 끈질기게 한국적인 상황에 처한 젊음의 고뇌를 스크린 이미지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토착적인 샤머니즘을 횡적(橫的)으로 추적한 황순원 원작 <일월(日月)>은 가장 무게 있는 작품이다.

이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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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晩熙(1931∼1975)

서울 출생. 1961년 <주마등(走馬燈)>으로 데뷔. 1963년 <돌아오지 않는 해병(海兵)>, 1965년 <흑맥(黑麥)>, 1966년 <물레방아> <군번(軍番) 없는 용사(勇士)> <만추(晩秋)>, 1967년 <기적(汽笛)> <귀로(歸路)> <싸리골의 신화(神話)>, 1972년 <0시(時)> 등을 발표했다. 이 중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연출로 제3회 대종상(大鍾賞)과 제1회 청룡상(靑龍賞)을 받았으며, 흥행에도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제3회 한국연극영화예술상에서 감독상을 받은 <만추>는 한국영화의 예술성을 격조있게 표현한 작품으로 절찬을 받은 바 있다.

이 밖에 제4회 청룡상 감독상을 받은 <시장(市場)>과, 한국연극영화예술상을 받은 <싸리골의 신화(神話)>가 있다.

이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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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亨杓(1931∼ ) 황해도 안악 출생. 1961년 <서울의 지붕 밑>으로 데뷔. 1962년 <대심청전(大沈淸傳)>, 1967년 <애하(愛河)> <절벽>, 1970년 <비전(秘殿)> <방(房)의 불을 꺼주오> 등을 발표했다. 이형표 감독은 한때 희극(喜劇)에 주력했으나,

특이한 소재를 즐겨 다루기도 했다. <애하>의 경우가 좋은 예. 또한 영화의 에로티시즘 문제를 <비전(秘殿)> 등에서 다루었다.

임권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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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權澤(1934∼

)

전남 장성 출생. 전남 광주 숭인고등학교 졸업.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데뷔. 그 밖의 작품으로 <전쟁과 노인> <증언> <왕십리> <상록수> 등이 있다. 1974년 아시아 영화제 감독상(<증언>), 1976년도 한국 연극영화예술상 감독상(<왕십리>) 등을 수상했으며 86년 제22회 시카고 국제영화제에서 <길소뜸>으로 게츠 세계평화메달상 수상. 제44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와 제16회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강수연이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정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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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鎭宇(1937∼ ) 경기도 김포 출생. 중앙대학교를 졸업하고 영화의 전반을 수업한 후 1963년 <외아들>로 데뷔. 대표작으로 <배신(背信)> <하숙생> <여(女)> <석화촌(石花村)>(제9회 청룡상 작품대상) <자녀목> 등을 연출했다.

청춘물을 기교주의로 다루는 데 특기가 있다. 제18회 아시아 영화제에서 신인 감독상을 받았다. 1985년에 <자녀목>이 제1회 동경국제영화제에서 세계우수영화로 뽑혔으며 제42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베니스 스페셜' 부문에 선정됐다.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역임.

변장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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卞長鎬(1935∼ ) 경기도 이천 출생. 한양대 공산공학과, 연극영화과 졸업. 1963년 <태양(太陽)은 내 것이다>로 데뷔. 대표작으로 <홍살문> <눈물의 웨딩드레스> <감자> <이브의 건넌방> 등의 작품이 있다.

전반에는 주로 이조 말엽의 반상(班常)제도에 따른 비련(悲戀)을 다루었고, 후반 작품들에서는 대개 현대 사회의 어두운 여성상(女性像)을 다루었다.

1968년 청룡상 신인상, 1973년 아시아 영화제 감독상(<홍살문)>, 1975년 한국연극영화예술상 감독상(<홍살문>) 등을 수상한 바 있다. 또 제33회 아시아·태평양 영화제에서 <감자>가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고, 제23회 한국백상예술대상에서 <이브의 건넌방>이 감독상을 수상했다.

문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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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如松(1933∼ ) 제주 한림 출생. 1935년 도일(渡日), 일본대학 예술학부 졸업. 이와니미(岩波) 영화제작소 근무. 1966년 <간첩작전>으로 데뷔. 그 밖의 작품으로 <진짜 진짜 잊지마> 시리즈(1·2·3편), <정말 꿈이 있다구> <처녀의 성(城)> <아스팔트 위의 여자(女子)>등. 하이틴물(物)에서 문예물(文藝物)로 패턴을 바꾸었고, <어느 국외자(局外者)의 선언(宣言)>이라는 에세이집도 내놓았다. 1977년 '현대영화비평가 그룹상' 특별상(<처녀의 성(城)>)을 수상한 바 있다.

이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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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元世(1940∼ ) 평안남도 출생. 국학대 국문학과 졸업. 1971년 <잃어버린 계절(季節)>로 데뷔. 이후 특별수사본부 시리즈로 <김수임 사건>, <배태옥 사건(裵泰玉事件)> 등을 연출하였고, 그 밖에 <인간단지(人間團地)>, <빵간에 산다>, <나와 나>, <목마(木馬)와 숙녀(淑女)>, <엄마 없는 하늘 아래>(1·2편), <악어의 공포(恐佈)> 등을 내놓았다.

격조있는 반공영화(反共映畵)를 즐겨 다루다가 최근에는 문예물(文藝物), 아동물(兒童物)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한국과 태국의 합작물인 <악어의 공포(恐佈)> 촬영차 태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한때 영화인 동인그룹인 '영상시대(映像時代)'에 관계한 바도 있다.

정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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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素影(1927∼

)

KBS-TV에서 드라마를 연출하다가 영화로 전업. 1967년 <내 몫까지 살아주>, 1968년 <규방(閨房)>, 1969년 <저 눈밭에 사슴이> <잊혀진 여인>, 1970년 <아빠와 함께 춤을> <필녀(必女)>를 발표하였다. 특히 1968년∼1970년에 내놓은 <미워도 다시 한번> 시리즈 1, 2, 3편은 멜로드라마의 정석으로서 한국 흥행사상 최고의 기록을 세웠다.

최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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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夏園(1936∼ ) 서울 출생. 연세대 국문과 졸업. 이성구 감독 밑에서 영화 수업을 한 후에 1968년 <나무들 비탈에 서다>로 데뷔. 이후 1969년 <독짓는 늙은이>, 1972년 <무녀도(巫女圖)> <새남터의 북소리> 등을 발표. 특히 <독짓는 늙은이>에서는 한국 고유의 미(美)의 하나인 '독의 선(線)'과 '늙은 도공(陶工)의 창조적 집념'을 형상화하는 데 성공, 제7회 청룡상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황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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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惠美(1936∼

)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한 후 파리 소르본 대학을 졸업했다. 1970년 처녀작 <첫경험>을 발표하여 여성적인 세련된 감각미와 소피스트케이트한 멋을 나타내어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 뒤 1971년 <슬픈 꽃잎이 질 때>, 1972년 <관계(關係)>를 발표하여 여류 영화감독이 드문 우리나라 영화계의 유일한 재원(才媛)으로 손꼽히고 있다.

하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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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吉鍾(1940∼1979)

경남 부산 출생. 서울대 불문학과를 졸업한 후 도미하여 캘리포니아 대학 영화학과를 졸업,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곳에서 이른바 '언더그라운드' 영화운동에 참가하여 <병사(兵士)의 제전(祭典)> <환자> 등을 16밀리 필름으로 제작했다.

귀국 후 한때 소형영화(小型映畵)운동에 관계했고, 이효석 원작의 <화분(花粉)>(1972)을 영화화했다. 그의 작품경향은 사회적 모순 속에서 인간의 진실을 추구하는 내면적 영상(映像)의 탐구였다.

홍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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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坡(1942∼ ) 강원도 강릉 출생. 서라벌예대 졸업. 1973년 <몸 전체로 사랑을>로 데뷔. 이후 <묘녀(猫女)>, <숲과 늪>,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 <불> 등의 작품이 있다. 동아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서 시나리오·평론부분 당선, 영화인 동인그룹인 '영상시대(映像時代)' 동인으로 활동. 그의 작품 경향은 언제나 실험정신(實驗精神)에 입각한 현대인의 소외와 대화의 단절을 그리고 있다. 불교와 '탈'에 대한 관심이 매우 강하다. 1977년 현대영화비평가 그룹상에서 시나리오 부문(<야행>) 상을 탔다.

이장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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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長鎬(1945∼ ) 함남 북청 출생. 홍익대 미대 졸업. 1974년 <별들의 고향(故鄕)>으로 데뷔. 이후 <어제 내린 비> <너 또한 별이 되어, <그래 그래 오늘도 안녕>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등을 발표했다.

특히 <별들의 고향>은 당시 방화 흥행의 최고기록인 45만 5천명을 기록했다. 70년대의 작가와 손잡고 젊고 신선한 감성(感性)에 의한 영화를 만들어 새로운 관객층을 확보하기도 했다. 영화동인그룹인 '영상시대(映像時代)'의 멤버로 계간 영화지 <영상시대(映像時代)>의 편집장을 역임했다.

1977년 제13회 대종상 신인상(<별들의 고향>), 현대영화비평가그룹 신인상(<별들의 고향>), 한국연극영화예술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제2회 동경국제영화제에서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가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을 수상했다.

김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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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鎬善(1941∼ ) 함남 북청 출생. 경희대 국문학과 졸업. 1974년 <환녀(幻女)>로 데뷔 그 후 <영자의 전성시대(全盛時代)>, <여자만이 사는 거리>, <겨울 여자(女子)> 등을 연출했다. <영자의 전성시대>, <여자들만이 사는 거리>, <겨울여자> 3편은 3년 간(1975∼1977) 흥행기록을 수립했으며, 특히 <겨울여자>는 24일 간 연속 전회 매진 기록과 60만 5천명이라는 방화·외화 통틀어 최고의 관객 동원 기록을 수립했다.

그의 작품경향은 주로 여성을 주제로 한 소설의 영화로서 디테일한 영상 표현을 통하여 버려진 인생, 또는 방황(彷徨)하는 여심(女心)의 갈등을 묘사하는 데 있다. 영화동인 그룹인 '영상시대(映像時代)'의 멤버이고, 1977년도 '현대영화비평가 그룹상'에서 감독상(<겨울여자>)을 수상했다.

<邊 仁 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