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수양/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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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편집]

구월(임신년) 하순─

꽤 서느러웠다.

왕은 주강(晝講)을 마치고는 곧 내전으로 들었다. 내전에는 매부(妹夫) 영양위 정종(寧陽尉鄭倧)이 대청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왕에게 있어서 가장 가까운 친척은 정 종에게 시집가 있는 누님이었다. 누님의 반연으로 영양위와는 매부처남으로 사귀었고, 연갑(年甲)인 탓으로 정이 깊이 들어서 이 세상에서는 영양위가 유일의 벗이었다. 넓다란 대궐 안에 많은 내관들이며 여관들이 있었지만 친구로 대할 사람은 하나도 없는 고적한 왕─종친들이며 재상들은 늘 대하지만, 알지 못할 까다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듣자고 하고 하는 그들은 왕에게 있어서는 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귀찮은 존재였다. 벗할 만한 소년이라는 것은 대궐 근처에는 물론 있을 까닭이 없다. 이복 동포(異腹同胞)가 하나 있고 아저씨뻘 되는 소년이며, 먼 종실 소년들이 몇 명 있는 모양이다. 그 소년들은 무슨 절차라도 있을 때에 문후하려 입궐하는 이외에는 왕과 벗하여 놀지 못하였다. 수위에서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 영양위만은 재상이나 종친들도 함께 노는 것을 방해하지 않고 떼 내지 않았다. 그래서 왕은 영양위가 오면 대개 내전으로 들어가서 놀았다. 어른 없고, 여인 없는 내전(여관들은 같은 사람이 열에 꼽지 않는다)으로 들어가서 혹은 격구(擊毬)도 하며 혹은 습사(習射)도 하며 소년답게 희희히 노는 것이었다. 두 고귀한 소년의 사이에 맺어진 우애는 매우 컸다. 왕은 매일 틈만 있으면, 의빈부(儀賓府)에 영양위를 부르러 중사를 보내고 당신이 몸소 영양위의 집에까지 거동하는 일도 희귀한 일이 아니었다.

흠 없이 놀았다. 늙은 내관이며 여관들은 왕의 심경을 이해하는지라 이심전심으로 왕도 그것을 알고 이 내관들만 보는 곳에서는 영양위와 팔씨름, 눈깜박이 이런 놀이며 내기(밖엣 사람인 영양위가 심중의 왕께 이런 속된 일을 가르쳤다)까지도 하며 기탄 없이 놀았다. 젊은 궁녀들은 영양위를 보기 위해서 (부르지도 않았는데) 가끔 들여다보고 부러 주의를 끌기 위해서 소리도 내보고 하였지만 놀이에 정신 팔린 두 소년은, 이 짧은 시간(하루에 세 번씩이나 하자는 경연이 사실 귀찮았다)을 할 수 있는껏 길게 즐겼다.

이날 내전에 들어와서도 처음에는 조금 점잖게─그 뒤 점점 흠 없이─이런 과정으로 접근하다가 왕은 문득

『영양, 이봐!』

하고 찾았다.

『네?』

『너 연경(燕京) 구경 하구 싶지 않으냐?』

『욕견미달이로소이다.』

『참 좋다드라. 경궁 요대─오보에 일루(樓)요 십 보에 일각, 호숫가에는 정자가 섰고 정자 아래로는 기화 요초가 만발했고, 못에는 연꽃 피고 잉어 뛰놀아, 고기와 꽃이 희롱하는 양이 선녀 도원에 춤추는 것 같고 옥난간 비취 걸상에는 동자 저를 불고─』

『아이, 춤 넘어갑니다. 좀 그만 둬 주서요.』

『가보고 싶으냐?』

『아이, 싫습니다.』

왕은 웃었다.

『잘 싫겠다.』

『상감. 자꾸 칭찬만 하시면 뭘 합니까? 화중지병이 아닙니까?』

『가 보련? 아아, 나는 가보구 싶어도 국왕은 불가경동이라, 침만 삼킬 뿐이로구나.』

『신도 그러하옵지요. 연경 만리를 어떻게 갑니까?』

왕은 잠깐 생각하였다. 안석에 의지하고 다리를 길게 뻗치고 양손을 뒷덜미에서 결고 절반만큼 누워서 문 틈으로 방싯이 보이는 무한한 창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내 보내 주련? 연경에.』

영양은 한 순간 얼굴이 환하게 되었다. 그러나 즉시 그 표정은 사라졌다. 한숨이 나왔다. 연경은 못 갈 것이다. 월경(越境)은 방색이 엄중하여 실행치 못한다. 잠행이라는 것은 이 고귀한 소년은 그런 방도가 있다는 것도 모른다.

『참 좋대요. 인간의 선경─선경도 그 손색은 부끄러워 할 만하대요. 사람이 세상에 나서 연경유람 한 번은 반드시 해야 한다고─갔다 온 사람은 여출일구로 그러든 걸요.』

『그러기에 너 한번 가보지 않겠냐는 말이야. 싫으냐.』

『벌받을 말씀이지. 싫다뇨. 갈 수가 없어서 못 가는 게옵지 신 평생의 소원이옵니다.』

왕은 절반만큼 누운 채 눈까지 감았다. 사랑하는 친구의 평생 소원이라는 것을, 하나 들어줄까?

이번 당신의 등극에 대하여 명나라에서 고(誥)와 면(冕)을 보냈다. 거기 대한 사례로 사례사를 우리 나라에서도 보내면 어떠할까. 이 답례사는 정사(正使)는 왕자든가 부마(駙馬)든가 정승이라야 된다.

평생 소원이라는 연경 유람을 이런 기회에 한 번 시켜줄까.

왕은 눈을 떴다. 손으로 방바닥을 짚으며 일어나 앉았다.

『내 주선해 주지. 연경 유람을─ 고면(誥冕) 사례사를 불일 보내야 돼. 영양, 그 정사(正使)로 가볼까?』

『아이고, 황송하고 고마워라, 상감 꼭 주선해 주서요.』

『어디 해 보세.』

소년끼리는 소년다운 약속이 성립이 되었다.

영양은 꿈에도 생각 않았던 연경 유람의 기회가 홀연히 눈 앞에 떨어졌는지라 그 황홀한 광채에 취한 듯하였다. 동경에 불붙는 소년다운 정열의 눈을 치뜨고 이야기로 듣던 연경의 풍광에 미혹된 듯 숨소리까지도 가쁜 듯이 들렸다.

『절기가 좋지 못하구나 시월에 떠나서 색북 극한지지를 돌아서 설에 연경에 들게 됐으니─ 너무 추우면 구경이나 변변히 하게 되겠다고? 춘삼월 호시절에 좋은 벗 짝지어 성현의 미친 터를 꽃따며 유람했으면 오죽이나 좋을라구.』

『그건 욕심이 과해요. 연경 배람만 해도 신 같은 인생에게는 과하거늘 그 이상 욕심을 내리까.』

『하하하하!』

『상감 덕택으로 평생 소원이 성취가 됩니다그려.』

『아아. 나도 가보고 싶으이.』

『신이 가서 깨깨 구경해다가 상감께 그대로 일러바치리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영양의 입재간이 당해 내겠느냐, 네 일쯤으로 그 선경 말할 수 있다면 가 볼만한 가치가 있겠으나 도리어 선경 더럽힐라.』

『너무 수모 마세요.』

『하하하하.』

봉명 사신의 길이 아니라 유람의 길이었다.

『재상들이 반대나 안 하리까?』

왕은 이 질문에 한 순간 안색을 변하였다. 말썽꾸러기의 존재를 왕은 깜박 잊었던 것이었다. 일이 국사라기보다는 당신께 내린 고고서와 면류관에 대한 사례의 사신이라, 그러고 또 영양을 기쁘게 해주리라는 희망이 앞서기 때문에─

영양에게서 듣고 보니 과연 물론 가만있지 않을 것이었다.

왕의 십 년이라는 전생애에서 「사물을 이해할 수 있는 소년 시기」 오년간을 통하여 왕의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대체 신하라는 것은 내왕(乃王)이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신하 가운데 몇 사람은 반드시 반대를 하였다. 조부님 세종의 처분이나 분부에 대하여서까지 무슨 반대─하다 못해─의견을 끼지 않고는 못배겨 하는 것이 신하의 버릇이다. 관원 혼자거나 헌부까지 합해서 양사(兩司)거나, 심한 때는 집현전, 승문원, 모두 성세를 합하기까지 하여 내왕의 하는 일에는 딴 의견을 제출한다. 전연 고장 없이 낙착 지은 일은 기억에 잘 나지 않도록 희귀하였다.

사신 파견에 대해서도 물론 무슨 말썽을 부릴 것이었다. 더욱이 사신이 왕의 사사로운 매부요, 아직 소년이 매 더 말썽이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 영양에게 승낙했던 일이라, 그냥 흐지부지해 버릴 수도 없게 된 왕은 이 일을 수양에게 부탁하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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