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자를 회함/하
(四)
[편집]조선에 지도 있은 지도 오래고 또 그 발달도 자못 볼만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과학적 방법으로 측량하여 그린 것은 고산자의『대동여지도』로 효시를 삼으니 엄밀한 눈금선(方眼) 속에 정확한 배치를 하되, 온갖 자연․인문적 사항을 가장 인상적으로 실어서 산하의 형세가 마치 부조 같은 느낌으로써 우리의 머리에 박히게 만든 그 수완은 진실로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과학적 조사의 미술적 표현에 지나는 지도식(地圖式)이 다시 없을 것이라 할진데, 우리 고산자의『대동여지도』같은 것은 그 선구인 동시에 일품일 것이다. 그런데 홀로 지금까지 아무도 하지 않은 대업(大業)을 아름답게 완성한 학계의 위인에게 조선과 조선인은 무엇으로 보답했는가. 재주는 있는데 과문하여 공부하지 않는 어리석은 놈이라 함과, 가정을 버려가면서 먹을 것 생기지 아니하는 일에 골몰하는 미친놈이라고 욕함은 그에게 도리에 단 꿀 같은 후대(厚待)였다. 그 재주가 암만해도 서양 사람에게서나 왔을 것이라는 혐의는 필경 국가의 험요(險要)를 외국인에게 알릴 장본이 되겠다는 죄를 씌워 반평생의 심혈과 일가의 희생으로서 고심하여 쌓았던 조선 최고의 보탑(寶塔)인『대동여지도』는 그만 몰이해한 관헌에게 그 판목을 몰수당하고, 너무 뛰어나 시비꺼리가 된 그 제작자는 인간의 가장 비참한 운명으로써 그 뜨거운 마음의 불을 끄지 아니하지 못하게 되었다. 도처에 있는 “골고다”(예수가 사형당한 곳)는 그 독한 어금니로 또 한번 이 의인을 씹어버렸다. 그러나 씹어도 없애지 못한『대동여지도』만은 그 짊어진 값을 흐리는 수업서 마음 있는 사람의 탄성을 받음이 날로 깊었었다. 그 중에도 갑오년 일청전쟁이 시작되며, 지금 같은 육지측량부 제작의 지도를 갖지 못한 일청양군은 다 같이 이 지도로 그 군용(軍用)에 쓰니 이 때문에 그 정밀한 구성과 위대한 가치가 비로소 실제로 나타나게 된 것은 혹시 다행일지 모르거니와, 제작자의 본의가 아니게 외국인의 이용물이 되어 도리어 트집 잡던 당시 관헌의 견해가 옮음을 드러낸 듯함이 이 무슨 “패러독스”일까. 어떻게 상처를 위로해야 옳을지 모를 큰 비극이 이것이다.
(五)
[편집](어떤) 사람이 혹 고산자로서 일본의 이노 다다타카(伊能忠敬)에 비교할는지 모른다. 이노가 근대 일본이 낳은 과학적 한 위인임과 그가 그린 “일본여지전도(日本輿地全圖)”가 근대 일본이 가진 세계적 위업임은 사실이며, 또 그가 오랜 고생을 해가며 십여 년의 공부로 국토의 실측에 종사하여 드디어 자기 국토를 이전에 없을 정도로 정밀하게 그린 지도를 제작한 점은 우리 고산자의 업적에 비슷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건의 좋고 나쁨, 재력의 수준, 설비와 도움의 정도로 말하면 이노의 호사에 비해 우리 고산자의 외롭고 가난함은 진실로 같다고 할 수 없다. 이노가 부유하지 않지만 가족을 기르고 남음이 있었으며, 높지는 않지만 벼슬이 오히려 시중드는 사람을 데리고 다니기에 모자람이 없었으며, 당시에 있던 가장 고명한 사부에게 비호를 받기도 하고, 가장 진보한 기계의 도움을 받기도 하였으며, 또 그 업적은 실상 국가의 명령 아래 국가의 힘으로써 성취한 것으로, 일찍이 목숨의 위태함과 재력의 곤란함을 걱정하지 아니하였으니, 다만 가난하고 고생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박해를 받으며 죽을 고비를 넘기는 평생의 독자적 노력이 그가 믿고 의지한 유일한 자산이었던 고산자를 그에게 견주려한다면 고산자가 원통해 하기 전에 이노 스스로가 질에 겁먹고 겸손하게 물러나지 않지는 못할 것이다. 이노는 할만한 일을 될 만큼 이루었음에 반해 고산자는 못될 일을 억지로 하여 할 수 없는 큰일을 만들어낸 것이다. 관의 힘으로 한 일일망정『일본여지전도』도 물론 불후의 명작이요, 시대를 넘는 뛰어난 일이 아닐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산자의『대동여지도』는 그것 위에 다시 사람의 영혼이 생각하기 어려운 발현임을 겸하였으니 그것이 어떻게 단지 병렬할 수 없는 하나의 작은 공로이겠는가. 그뿐인가. 이노는 생전부터 벗과 이웃의 도움과 보호, 국가의 장려가 있어 물심양면으로 그 노고만큼 보답도 되고, 사후에는 그 업적이 크게 드러나서 우뚝 솟은 동표(銅標)는 그의 큰 공로를 기록하고, 우월한 포상은 그의 영화를 더하고, 찬란한 사적은 국민의 교과서에 실려 길이 후손으로 하여금 감탄하고 사모하는 정성을 이루게 하며, 제국학사원(帝國學士院)이 그를 위해 상세히 전하는 것을 수집․편찬하니, 즐거이 거금을 들여 이것을 간행하여 배포하는 부자도 있는 등 그 명성과 업적이 점차 세계적인 밝은 빛을 띠게 되었으니 위로와 장려의 도리가 이루어졌다 하기도 할 것이거늘, 오호라 그의 몇 배나 되는 실적과 그를 멀리 뛰어넘는 정신적 교훈이 되는 우리 고산자는 어떠한가. 생전에는 비참이 있었을 뿐이오, 사회에도 오히려 적막(寂寞)이 거치지 아니하니 어느 것보다 먼저 동일한 진리의 용사로서 민족적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함에 대하여 탄식을 금하지 못할 것이다. 이 사람이 이렇게 묻히니 하늘의 도리가 옳은가 아닌가.
(六)
[편집]지난 해 조선광문회가 조선의 지도로『대동여지도』가 있음을 알고 고심하여 찾아본 결과, 그 제작자가 김정호임과 김정호의 비참한 사적을 약간 조사하여 얻어내서 그 유업을 거듭 빛나게 하는 의미로 22첩 수백 폭의 도판을 번각 준성하고, 남대문 밖에 약현의 유허에 하나의 기념비를 건립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였으나 아직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있음을 실상 조선인의 민족적 수치로서 말할 일이다. 그러나 국경 없는 학술은 조선인에게 푸대접 받은 고산자와 그의 업적은 차차 세계적으로 알아주게 하는 단서를 지으니 최근 우리에게 보내온 한 외국인 친구의 논저 중에 이것을 논평하여, “22첩으로 이루어진 이 대지도(大地圖)를 대할 때에 참으로 거장의 신공(神功)에 접하는 듯한 감동이 있음은 아마 나 한 사람뿐 아니리라”고 한 것은 오래지 아니하여 세계의 정론일 것일 예상케 하는 말이다. 저 5일의 경성(京城)에 개설된 고지도전람회가 마치『대동여지도』의 한 마리 학을 빛나게 하기 위해 짐짓 여러 마리의 닭을 총집합시켜 놓은 듯한 것을 보고, 아직도 잘 알리지 아니하였지만 마침내 아무개보다도 더 드러나게 될 이 잠룡적(潛龍的) 위인에 대해 사모하고 우러러 보는 것이 새로워짐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노니 조선이 은인(恩人)을 구박한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깊게 책망할 날이 과연 언제나 오려나. 오호라.